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725
2부 5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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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어버이를 둔 자녀라면 당연히 말과 글도 같아야 할 터이나, 헤어져 산 세월이 수백 년인 탓에 말은 무척 다르게 되었습니다. 달라진 말은 이제 돌이키기 어려우나, 하다 못해서 글이라도 같은 것을 사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과거 금 태조께서 여진문자를 별도로 만드신 바가 있으나, 그때는 본으로 삼을 만한 문자가 없었기에 부득이하게 한자를 모방해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너무 복잡하고 배우기 어려워 오늘 그 글자를 익힌 자가 만에 하나도 없을 지경입니다….』
누르하치가 언급한 ‘금 태조’란 요나라를 물리치고 금나라를 세운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를 말한다. 그건 그거고, 듣다 보니 문득 의문이 솟았다.
“우리 국초에 세종대왕께서 여진문자를 익힌 통사를 계속 유지하라 하신 뒤, 무종대왕께서 계실 때 여진문자로 된 서한이 오가지 않았더냐?”
“아니옵니다. 성종대왕 때 건주 우위에 교지를 내리실 때 여진문자와 몽고문자로 글을 써서 내린 적은 있으나, 그 뒤로는 여진문자를 쓴 적이 없습니다. 저들이 보낸 서한에서도 한문과 몽고문자를 사용하였지, 여진문자는 쓰지 않았습니다.”
그랬던가? 그러고 보니 무종 때 여진어로 교지를 내리는 귀찮은 일은 한 기억이 없다. 지금 생각해 보면 거의 모든 연락은 동청례를 통해서 구두로 전달했고, 제대로 말을 안 들으면 두 번째 서한을 보내는 대신 그냥 군대로 짓밟았던 것 같다. 나도 참 무도한 놈이었군.
“그래, 계속 읽어보아라.”
도승지가 잠시 고개를 숙인 뒤 누르하치의 서한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참, 지금 이 서한은 당연히 한문으로 썼다.
『…몽고문자는 조금 쉬워서 익힌 자가 간혹 있으나, 이는 과거 우리 조상인 금나라를 멸한 원수의 글자인지라 이를 사용함은 우리 조상에게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에 익히기도 쉬우면서 우리말을 그대로 표기할 수 있는 조선문자를 본떠 우리 만주문자를 만들고자 합니다….』
그 뒤로도 한참 더 이런저런 이야기가 이어졌지만 중요한 부분은 여기까지였다. 금나라에서 문자를 만들 때는 본으로 삼을 만한 대상이 한문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조선문자’라는 걸출한 모방 대상이 있으니 어찌 본뜨지 않겠냐면서 말이다.
그리고 거의 끝에 가서 무슨 의도인지 이런 부분이 덧붙었다.
『…조선문자를 사용하기로 한 뒤에도 과연 전하께 학자들을 보내 달라는 청을 올려도 될지, 한참 망설였습니다. 하지만 전하의 보살핌을 받고 있는 소인의 아들 대선이 제게 전언을 보내 조언하기를, 전하께서는 실로 자비로우시며 또 관대하시니 어리석은 우리 만주 백성이 조선의 본을 받아 그 어리석음을 떨치고자 할 때 기꺼이 도와주시리라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지난 20여 년 동안 전하께서 저희 만주 백성을 위해서 베풀어주신 온갖 배려가 떠올랐습니다. 무도한 반적들을 토벌할 때마다 전열에 참가시켜 공을 세우게 하셨고, 바다를 건너온 새 작물을 주어 굶주림을 면하게 하셨습니다. 이 은혜만 해도 저희 만주인들이 자손만대를 내려가며 향을 피우고 감사해도 모자랄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 만주 백성들이 감은 눈을 뜨고 학문을 익혀서 왕화의 은혜를 입을 수 있도록, 쉬운 글을 배울 기회를 주시옵소서. 우리 백성들은 이후 만대를 내려가더라도 문자를 주시어 읽는 법을 알려주신 전하의 성덕을 잊지 않을 것이오니, 전하의 이름은 만주가 존속하는 한 칭송을 받으실 것입니다.….』
누르하치 이놈, 저런 글을 쓰게 하면서 스스로 부끄럽지는 않았을까? 듣고 있는 내가 낯이 뜨거워지려고 하네.
어쨌든 이렇게 낭독이 끝났다. 함께 들은 신하들에게 의견을 말하라고 해보았다.
“들어줘도 무방할 듯하옵니다. 집현전과 성균관에 있는 학사 중 가기를 원하는 자들을 골라 파견하도록 하시옵소서.”
우의정 이항복은 곧바로 만주문자 개발 지원을 찬성했다. 딱히 수고나 비용을 들일 필요도 없는 일이고, 이를 통해서 건주위에게 은혜를 베풀어두면 훗날 도움이 될 거라는 논지였다.
“저들이 문자를 만든다고 함은 앞으로 힘을 더 키우고자 하는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옛 전례를 보면 유사한 경우로 거란문자와 여진문자, 몽고문자가 있었습니다. 셋 다 요, 금, 원이 세력을 키워 일어선 뒤에 만들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지금 건주위, 아니 만주는 차지할 수 있는 모든 땅과 인구를 차지했다. 요동변장(遼東邊牆) 안쪽의 명나라 영토와 목단강-송화강 이동의 조선 영토 사이에 낀 영역 전체가 누르하치가 다스리는 영토가 되었다. 또한, 여진족 대부분이 누르하치 밑으로 통합되었다.
다만 누르하치의 영토는 실제 역사보다 훨씬 좁다. 그래서 실제 역사에서처럼 인삼과 모피 등을 교역해서 얻는 수입은 많지 않다. 북방에서 생산하는 인삼과 모피, 진주는 대부분 송상 손으로 들어와서 외수사를 거쳐 명나라에 팔려나가고 있으니 말이다.
대신 누르하치는 일찌감치 개간에 집중해서 농업을 크게 장려하고 이를 통해 국세를 크게 일으키고 있다. 놈이 쓴 편지에서 스스로 말했듯, 우리가 준 감자와 옥수수 덕분이다. 농사로 거둔 수확이 많아서 교역이 적어도 잘 버티고 있다.
“아마 노을가적은 익히기 쉬운 문자를 만들어 자기 백성을 하나로 통합할 심산인 듯합니다. 이후에는 달단을 쳐서 세력을 확장할 의도로 보입니다. 사실, 지금 노을가적이 노릴 수 있는 상대도 달단밖에 없기는 합니다.”
이번 편지에서도 몽골을 ‘조상인 금나라를 무너뜨린 원수’로 지칭하고 있다. 그 문구를 보면 실제로 원한을 품었는가 하는 여부와는 무관하게 누르하치가 몽골을 적으로 간주하고 있음은 확실하다.
“노을가적이 거느린 백성들을 하나로 모은다고 함은 우리에게 위협일 수도 있습니다. 허나 이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여진인들이 문자를 익히면, 우리가 내보내는 글을 읽고 왕화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좌의정 이원익이 정확하게 짚었다. 문자를 익히려면 교재가 필요하고, 읽는 법을 배운 이가 배운 바를 잊지 않으려면 읽을거리가 필요하다. 여기에 우리가 만든 책을 집어넣자. 여진어라 해도 활자를 따로 만들지 않아도 되니 비용이 크게 들지 않는다.
여진족들이 문자를 습득하면서, 그리고 그 뒤에도 우리가 만든 책을 꾸준히 읽게 되면 나올 결과는 빤하지 않은가? 자연스럽게 친조선 성향을 품게 될 것이? 그것도 문자를 익힐 여유가 되는, 여진족 중 나름 상류층부터.
“신 영의정 유성룡 아뢰오. 앞서 나온 의견은 모두 좋은 의견이옵니다. 허나 한 가지 신이 보충하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 학자들을 건주에 보내지 마시고, 노을가적으로 하여금 글을 익힐 자들을 도성으로 보내라 하소서.”
“음, 좋은 생각이로다. 어디, 경들은 어찌 생각하는가?”
그래, 우리 학자들을 보내면 여정이 힘들뿐더러 자칫하면 인질이 될 수도 있다. 누르하치가 딱히 못된 짓을 꾸미지는 않더라도, 우리 관리들이 건주위에 잠깐 다녀오는 것도 아니고 아예 눌러앉아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시간을 보낸다면 명나라가 알게 될 가능성이 크다.
“영상의 말이 옳습니다. 글을 만들게 도와달라는 노을가적의 청을 들어주되, 우리 학자들이 가는 대신 저들이 글을 배우러 도성으로 오게 하소서.”
“신들의 생각도 그러합니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우리가 건주위를 감시하리라고 믿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이유에서 보냈건 간에 조선 관원을 건주위 핵심에 눌러앉아 있게 한다면 명나라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그리고 당연히 우리가 저놈들이랑 결탁하지 않나 하는 의심의 눈길이 쏟아질 거다.
하지만 누르하치 쪽 연구진이 이쪽으로 온다면 그런 걱정은 필요 없다. 도성에 와서 머무는 여진인은 한둘이 아니니 묻어버리기도 좋고, 명나라에서 칙사가 오지 않게 된 지도 한참이다. 집현전에서 누구의 눈길도 신경 쓰지 않고 만주문자를 만들 수 있다.
아마 그 사실이 명나라 조정에 들어갈 때쯤이면 프로젝트 다 끝나고 만주 쪽 팀원들은 전부 철수한 다음일 거다. 우리가 오리발 내밀기도 좋은 거지.
“예조판서는 노을가적에게 답신을 보내라. 우리 학자들은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어 건주에 보내기 힘드니, 문자 만드는 일을 담당할 이들을 뽑아 도성으로 보내라고 말이다.”
“예, 전하.”
이 문제는 이걸로 됐다. 누르하치가 우리 제안대로 사람을 보내거들랑 집현전에 넣어주어서 원하는 대로 만주문자를 만들게 도와주고, 안 보내거든 그냥 아무 일도 안 하면 된다. 우리야 아쉬울 게 없으니까.
지시를 마저 내리고 나서 생각해 보니, 누르하치의 편지가 여러 대목에서 은근히 다이샨을 띄워주고 있음을 깨달았다. 얼마나 현명하고 사리가 밝은지, 조선을 얼마나 아끼는지, 조선의 글과 문물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등등.
선입견을 품고 읽으면 꼭 사돈댁에 자기 아들을 소개하는 편지 같다. 만약 무턱대고 아들을 호평했으면 무척 구차하고 비굴해 보였을 텐데, 다른 안건에다 얽어서 교묘하게 집어넣으니까 전혀 그런 티가 안 난다. 그러면서도 무의식적으로 다이샨에게 호감을 품도록 해놓았다.
이거, 누르하치도 내 의사를 알아채고 화답하는 게 맞는 듯하다. 누르하치도 나와 결혼으로 동맹을 맺는 데 별 불만이 없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누르하치가 자기 백성들을 하나로 뭉치겠다면서 만주문자를 만들겠다고 계획하는 걸 보니, 나도 어서 전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보통교육을 시행해야겠다는 초조감이 든다. 실제 역사에서는 해방 이후에야 가능했지만, 이쪽 세상에서는 더 당길 수 있겠지?
많은 욕심을 부리고 싶지는 않다. 교육과정은 전체 2년 정도로 잡고 국문으로 읽고 쓰기, 사칙연산으로 셈하기, 국사, 지리, 명심보감, 삼강오륜 정도만 가르쳐도 되지 않을까. 물론 이 두 가지 유학 교육도 한문이 아니라 국문으로 된 교재를 써서 말이다.
당연하겠지만 이 정도 학습 내용을 가지고 과거를 본다거나 학자가 될 수는 없다. 보통교육 시행의 목적은 제대로 사람 구실을 할 정도는 지식을 갖추게 하자는 데 있지, 백성들을 전부 학자로 만들겠다는 게 아니다. 정말 공부를 하고 싶다면 향교나 서원에 들어가면 된다.
보통교육이 시작되더라도 서당을 폐지할 생각은 없다. 나서서 폐지한다고 없어지지도 않을 것이고, 서당은 이대로 기초적인 한학(漢學) 교육기관으로 존속하도록 놓아두면 된다. 장래에 국가에서 운영하는 학교가 자리를 잡고 서당의 가치가 사라지면 자연스럽게 없어질 거다.
교사 충원 문제도 중요하니 교원양성소부터 먼저 세워야겠고, 그 뒤에 경기도에서부터 학교 설치를 순차적으로 시작해야겠다. 현실적인 사정상 남자아이들밖에 가르칠 수 없겠지만, 여자 상대로 하는 교육도 필요하다는 의식개혁 작업도 해나가야겠지.
출석률을 높이기 위해서 점심 급식을 하는 방법도 괜찮겠다고 생각하다 보니 갑자기 한숨이 나온다. 과연 나 이번 생에 이런 거 다 할 수 있을까?
– 9 –
올해 초에 시작한 군대 계급 개편은 전군을 뒤흔들어놓았다. 아무래도 수백 년 동안 익숙히 사용하던 체계를 통째로 뒤엎었으니, 몸살을 앓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장도 아직 이 참장이라는 계급이 낯서나이다.”
“곧 익숙해질 것이니라.”
한때는 소 잡는 백정이었던 임꺽정이 지금은 당당한 참장(參將), 정3품 당상관 자리에 올라 영감 소리를 듣는 신분이 되었다. 벼슬은 내금위장, 내 옆을 지키는 든든한 검이자 방패이다.
“그대와 함께 미행을 나가지 못함이 유감이다. 안심하고 어디든 갈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어명만 내리신다면 언제든 수행하겠나이다.”
“내금위장, 그대가 따라나서고 안 나서고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도성 주민이라면 그대를 못 알아보는 자가 거의 없는데, 내가 그대를 거느리고 밖에 나가면 내가 누군지 보는 이마다 단박에 알아챌 게 아닌가?”
“소…송구하옵니다.”
임꺽정은 워낙 체구가 크고 힘이 좋다 보니, 오래전 내금위에 군사로 있을 때부터 장안에서 명성이 자자한 장사였다. 게다가 두 차례 전쟁에 모두 출전하여 워낙 많은 전공까지 세웠으니 밤길에 소동을 일으킬 만한 부류의 인간들은 모두 임꺽정을 잘 알았다.
게다가 지금 임꺽정은 내금위장까지 올랐다. 그런 임꺽정이 경호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그건 나, 바로 임금일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내금위 내에서는 새 계급에 대한 반응이 어떤가?”
“상하를 곧바로 알기 쉬운 건 좋다고들 합니다. 다만 예전부터 쓰던 벼슬 이름이 없어진 건 다들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경국대전 병전(兵典)은 이번 조치로 또 한 번 대대적으로 개정됐다. 두 차례 전쟁과 그동안 진행한 군제개혁 조치가 반영되어 손댄 부분이 많은 까닭이다.
바뀐 부분은 많다. 무관들의 직급과 편제 조정 외에 선발 및 진급에 관한 규정, 군기(軍器) 관리에 관한 규정, 군법을 어긴 자에 대한 처벌 규정 등 많은 부분을 바꿨다. 올해 내내 그런 작업이 이어졌지만, 아직 개정이 다 완료되지는 않았다.
덜 바뀐 부분 중 하나가 유극량과 이일이 제출한 개병제(皆兵制) 개혁안이다. 매년 1달씩 모여서 유지훈련을 받는다는 데는 아무도 이의가 없었다. 문제가 된 부분은 기본훈련을 받는 1차 입영 기간으로 3개월은 너무 짧다는 지적이 나온 데 있었다.
문관들인 조정 대신들은 처음 그 계획을 듣고 3개월이면 넉넉하지 않나 했었다. 하지만 이 방안을 검토하게 된 훈련원 등 일선에서 근무하는 무관들은 입을 모아 반대했다. 훈련을 전혀 받지 않은 장정을 군사로 만드는데 3개월은 너무 짧다는 거였다.
‘군사들에게 줄지어 걷고 대열을 맞출 수 있도록 가르치는 데만도 2개월은 족히 걸립니다. 그 뒤에 겨우 1달 동안 무기 쓰는 법을 가르쳐서는 제대로 된 군사를 얻기 어렵습니다.’
물론 이일과 유극량이 훈련 기간으로 3개월을 잡은 데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군사들이 대부분 농군이다 보니 농사에서 오래 손을 뗄 수가 없고, 농한기인 겨울철에 입영하여 훈련을 집중해서 받으면 충분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더불어 사대부, 중인 계층 출신 장정들에게도 호응을 받을 조치였다. 한창 공부에 집중해서 성과를 올려야 할 나이인 16세에 군영에 들어가 시간을 ‘허비’하라는 새 법이 이들에게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조금이라도 기간을 줄이고 싶을 것이다.
처음엔 여기까진 몰랐지만 알고 보니 조금 괘씸했다. 혹시 이놈들이 이일한테 돈 먹였나? 이일 원래 돈 좋아하잖아. 뇌물 먹고 사대부들한테 유리한 쪽으로 병역제도를 설계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다른 장수들에게 의견을 구하니 권율은 6개월을 제안했다. 다른 무관들도 의견이 분분했고, 고민 끝에 나도 결단을 내렸다.
‘도리는 아니나, 상중인 이순신에게 의견을 구하여라.’
3년 상을 치르고 있는 사람에게 나랏일로 의견을 묻는 건 예의가 아니다. 그래도 내게는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이순신의 의견이 필요했다. 그리고 답이 왔다.
‘신이 판단하기에, 군사를 제대로 양성하자면 적어도 1년은 조련해야 하옵니다.’
나도 동의했다. 확실히 아무리 머릿수를 채우기 위한 징집병이라도 1년은 복무해야 자기가 담당한 역할에 제대로 익숙해지기는 하겠다. 겨우 3개월 정도로는 군대 맛만 보고 그치겠지.
다만 이 조치를 실제로 실행해서 그해 병역 대상이 된 젊은이들을 의무적으로 입영시키는 건 내후년, 기해년(1599년)부터 하기로 했다. 법규를 마저 정비하고 군사들을 맞아들일 준비를 하는 데도 시간이 필요해서 말이다.
“글과 산술을 모르는 군사들에게는 공부도 시키리라 하셨지요. 글도 가르쳐주고 옷과 밥과 잠자리에 녹료(祿料)까지 제공하니, 초모되는 군사들은 모두 기꺼워할 것입니다.”
“나라에서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느냐?”
징병된 군사들에게도 봉급은 나가지만, 직업군인으로 지원한 군사들보다 적다. ⅓ 수준이다. 정규 급료병은 매달 저화 1섬, 징병된 군사들은 3개월에 1섬을 지급한다.
“군정이 되어 상투를 작게 튼 자들에게는 그만큼 보상이 있어야 하는 법이니라. 내금위장, 그대도 아무 보상 없이 일선 군사로 구르기만 했다면, 지금까지처럼 용감히 싸웠겠는가?”
‘상투를 작게 틀었다’라는 말이 군사를 의미하는 건 지난 전쟁 때부터다. 각 군영에서 출정 전에 머리를 자른 게 계기였다. 싸움에서 죽어 돌아오지 못하게 되면 시신 대신에 묻기 위해 머리카락을 잘라서 집에 보내게 했고, 남은 머리로 상투를 트니 당연히 상투가 작아졌다.
그 뒤로도 군사들은 상투를 작게 유지하는 게 관습이 됐다. 위생관리에도 더 유리하니 계속 이어가도 좋을 듯하다. 사실 박박 밀어버리고 싶은 생각도 들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