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729
2부 5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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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반대편에서 그대들을 파견한 조선 국왕에게 감사를 표하는 바요. 신의 은총을 받은 프랑스 국왕으로서, 나 앙리 4세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호의를 담아 그대들을 환영하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프랑스 궁정과 귀족들은 조선인을 처음 본다. 하지만 이미 스페인과 교황청을 통해서 어느 정도는 조선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동방의 나라 조선은 가톨릭 선교에 무척 호의적이며, 기후도 꽤 온난한 편이다. 프랑스처럼 연중 따뜻하지는 않고 여름에는 엄청난 더위가, 겨울에는 엄청난 추위가 온다. 하지만 프랑스 역시 추울 때는 춥고 더울 때는 덥지 않은가.
그리고 조선에서는 빵이 아니라 쌀밥 ? 쌀 자체는 프랑스에도 있다 – 을 주식으로 먹는다. 하층민들은 유럽과 마찬가지로 죽을 주로 먹지만 밀이나 보리보다는 이름도 잘 모르는 잡다한 곡식을 많이 섭취한다. 고기는 소와 돼지를 많이 먹으며, 고래나 생선도 즐겨 먹는다.
동방의 땅이지만 향신료는 나지 않는다. 대신 ‘인삼’이라고 하는 만드라고라가 산출되는데, 이게 또 묘하다. 유럽의 만드라고라가 미약(媚藥)이나 독약으로 쓰이는 것과는 달리, 조선에서 나는 인삼은 중병을 앓아 죽어가던 이도 벌떡 일으킬 만큼 활력과 정력이 솟아나게 만든다.
짐승이 많이 살아서 표범과 호랑이, 담비 모피가 많이 난다. 표범은 북아프리카에 서식하는 것보다도 더 크며, 담비는 러시아산과 그 질이 동등하다. 조선왕이 펠리페 2세에게 선물했던 살아있는 호랑이는 프랑스에서도 명성이 자자하다.
사람이나 가축, 바람이나 흐르는 물의 힘을 이용하지 않고 시커먼 연기를 뿜으면서 바퀴를 움직여 일하는 기계도 있다고 듣기는 했다. 하지만 이것만은 사람이 만들어낸 일이라고 믿기 힘들었다. 정말 조선인들이 동방의 악마를 부릴 수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조선에는 정말 그런 기계가 있소?”
사절단이 선물로 바친 담비가죽 코트와 해달피, 호피, 꿀에 절인 홍삼, 비단, 차 등을 보며 흐뭇해하던 앙리 4세가 호기심에 찬 얼굴로 물었다. 이덕형은 정중하면서도 차분한 태도로 그 질문에 답했다.
“연기를 뿜으며 돌아가는, 조잡하고 별 효용도 없는 아이들 장난감 같은 물건입니다. 굳이 국왕께서 관심을 기울이실 만큼 쓸모가 있는 물건이 못 됩니다.”
증기기관의 구조 및 성능에 관한 사항은 최고 등급 기밀이다. 세스페데스 때문에 조선에서 증기기관을 사용한다는 사실 자체는 이미 유럽에도 알려졌지만, 그 실제 성능에 관한 질문이 들어오면 최대한 낮게 묘사하라는 은밀한 지시가 조선을 떠나기 전부터 내려져 있었다.
파리에서만이 아니다. 마드리드에서도, 로마에서도 증기기관에 관한 질문은 ‘실용적으로는 도저히 써먹지 못할 물건’으로 일관해서 답하고 있다.
이제는 조선에 있는 예수회 선교사들도 증기기관을 거의 접하지 못한다. 증기기관이 설치된 광산이나 병기창, 염전 등에 모두 일반인의 접근을 차단한 까닭이다.
“그보다는 지난번 일본과의 전쟁에서 분전했던 프랑스 기사들의 활약을 칭송하고 싶습니다. 4년 전에 저희 일행이 고용해서 조선으로 데려간 프랑스 기사들이 지난번 일본과의 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습니다. 실로 프랑스인의 용맹함을 입증해 보였습니다.”
을미년 원정에서 맹서군은 딱 한 번 돌격했을 뿐이다. 체찰사로 전장에 동행하기까지 했던 이덕형이 이를 모를 리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건 상세한 전황을 전달하는 게 아니고 2차에 걸친 조선과 일본의 전쟁이 얼마나 크고 치열했는지, 그 규모를 드러내는 일이다.
“프랑스 기사들은 장창과 화승총으로 무장한 정예 일본군 수천 명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정면으로 돌격했습니다. 거침없이 맹진하는 기사들 앞에 일본군 대열은 그대로 무너져내렸고, 뒤따라 달려든 우리 기병들이 적을 궤멸시켜 전투를 마무리했습니다.”
“현장에서 관전했다면 참으로 장관이었겠군.”
이덕형의 설명을 들은 국왕이 아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앙리 4세는 그 자신이 신교도군 기병대를 이끌고 가톨릭 동맹군과 스페인군을 연파했던 맹장이었다. 수천, 수만이나 되는 적 대군을 호쾌하게 쳐부순 결전 이야기에 흥미가 동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겨우 20기, 그것도 골라서 파견한 정예도 아니고 어쩌다 마주친 용병기사 20기가 그만한 공적을 세우다니 놀라운 일이오. 일본군 보병들이 우리 기병을 보고 겁을 먹는 바람에 제대로 싸우지 못한 건 아니오?”
“전신에 은빛 갑주를 입은 기병이 낯설기는 했겠지요. 하지만 일본군은 그런 낯선 적이라 해도 도망치지 않고 대장의 명령에 따라 싸울 수 있는 정예들입니다. 그만큼 프랑스 기사들이 뛰어난 무용을 선보였다는 이야기로 보시면 됩니다.”
이덕형은 적당히 부풀린 맹서군의 위업을 앙리 4세 앞에서 풀어놓았다. 덧붙여서 몇 번에 걸쳐 벌어진 양군 사이의 결전에 대해서도 전했다. 그 자신이 군인인 앙리 4세는 조선과 일본 두 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투 이야기를 무척 관심 있게 들었다.
“한 차례 회전에 양쪽에서 동원한 병력이 15만에서 20만에 이르다니, 그대는 정말 놀라운 나라에서 왔구려. 여기 유럽에서는 한번 싸움은커녕, 한 나라에서 동원한 군대 전체가 그만한 숫자에 이르기도 어려운데 말이오.”
36년 전, 내란의 막을 열었던 드뢰(Dreux) 전투에서 신교도군은 기병 4천, 보병 7천에 대포 7문을 투입했다. 가톨릭 동맹군 측 병력은 기병 2500에 보명 1만, 대포 22문이었다.
작년 5월부터 9월까지 걸쳐서 벌어진 이번 전쟁의 마지막 결전, 아미앵(Amiens) 포위전만 해도 프랑스군 기병 3천에 보병 1만 2천 명을 상대로 스페인군이 투입한 병력은 기병 3천, 보병 2만 9천에 불과했다. 더구나 사상자는 양측을 모두 합쳐서 3천 명도 되지 않았다.
두 전투 모두 제법 큰 싸움이었지만 경인년, 을미년에 조선군이 치른 대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규모였다. 사상자 숫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동방의 전쟁은 우리보다 훨씬 치열하게 싸우는 듯하오. 30만 대군을 편성하고, 그중에서 10만을 한 번 전투에 투입하며, 사상자도 몇 배씩 나는 걸 보니 말이오.”
“30만 정도는 약과입니다. 과거 천여 년 전에 중국은 우리 조선의 전신 중 하나인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113만 명이나 되는 대군을 편성한 전례도 있습니다. 물론 승리한 쪽은 그보다 훨씬 적은 병력을 동원한 고구려였습니다만.”
이덕형은 고구려가, 고려가, 그리고 조선이 강대한 적의 침략을 받고 얼마나 열심히 싸워서 물리쳤는지 간단하게 설명했다. 앙리 4세는 이 이야기도 흥미 있게 들었다.
“음,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는 듯하니 이 불편한 알현실보다는 편안한 바깥에서 뒷이야기를 이어가는 편이 더 좋겠소. 일단은 나도 처리할 일이 조금 있으니, 오늘은 이만하고 며칠 뒤에 함께 사냥이라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면 어떻겠소?”
“감사합니다.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이덕형은 정중하게 초대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오늘 저녁에 궁전에서 열리는 만찬 초대도 기꺼이 수락했다. 이런 자리가 다 중요한 행사임을 충분히 이해했기 때문이다.
– 4 –
만찬을 간단히 끝내고 일찍 잠자리에 든 일행은 다음날 일찍 루브르를 나섰다. 줄을 지어서 출발한 마차들은 동쪽으로 센강을 따라서 달리다가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시테섬 쪽으로 놓인 돌다리를 건넜다. 동에서 서로 흐르는 센강 가운데 위치한 섬이다.
“본래 파리는 이 작은 섬에서 시작했습니다. 방어에 유리했기 때문이지요. 역대 국왕들께서 만족(蠻族)들을 격퇴하고 외적의 침입을 막아내서 파리의 안전을 확보한 이후에 비로소 좌우 양 기슭으로 도시를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프랑스인 신부가 안내역으로 함께 탔다. 그는 파리의 역사와 창문을 통해 보이는 여러 건물의 이름 및 대략적인 역사에 관해서도 설명해주었다. 프랑스 왕들의 첫 왕궁이었다는 콩시에르주리(Conciergerie) 역시 시테섬 안에 있었다.
“240년 전에 왕궁이 루브르로 옮긴 이후, 지금은 재판소와 감옥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나라에서 가장 지엄하면서 은밀한 장소인 왕궁이 감옥이 되다니, 조선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명나라 정통제처럼 폐위된 군주를 유폐하는 용도라면 혹 몰라도, 일반 잡범까지 수용하는 장소가 되다니 말이다.
정통제는 토목보의 변에서 오이라트에게 패해 붙잡히자마자 폐위되었다. 한 해 만에 풀려나 북경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이후 7년 동안 남궁(南宮)에 유폐되었다가 탈문의 변(奪門之變)으로 다시 복위했다. 이 정도가 동양에서 궁궐이 감옥으로 바뀐 최근의 사례다.
일행이 놀라워하는 사이 다리 하나를 더 건넌 마차 행렬이 센강 좌안(左岸)으로 건너갔다. 시장을 비롯한 시민들의 생활에 필요한 시설이 주로 들어선 우안(右岸)과 달리, 좌안인 남쪽은 파리 대학을 비롯한 여러 학교가 들어서 있었다.
“파리 대학은 개교한 지 벌써 398년이나 되었습니다. 그 뒤로 여러 대학이 뒤따라 들어섰고 파리 좌안은 대학도시가 되었습니다. 유럽 어디를 가더라도 이처럼 학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수도는 찾아볼 수 없을 겁니다.”
물론 저 많은 건물이 학교 단 하나에 속해 있지는 않았다. 올리비에라고 하는 안내 신부는 창문 밖을 지나치는 건물 하나하나를 가리키면서 저기는 의학교, 저기는 신학교 하는 식으로 가르쳐주었다. 이덕형과 권익경을 비롯해서 같은 마차에 탄 일행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우리 성균관보다 훨씬 더 커 보이지 않소?”
“도성 절반을 거의 학교가 차지하고 있으니, 면적에서 성균관과는 비교가 안 되는군요.”
“게다가 이곳 건물들은 층수도 높으니, 그만큼 수용할 수 있는 학생 숫자가….”
“서반아나 이탈리아 대학들보다도 훨씬 광대합니다.”
분명히 역사로는 성균관이 압도적이다. 성균관은 고려 성종 7년(987년)에 설립된 태학이 이름을 바꾼 것이므로, 올해로 개교한 지 611년이 되었기 때문이다. 거의 2배에 가깝다.
하지만 각 학교가 가르치는 학문의 다양함, 그리고 센강 좌안에 즐비하게 들어선 건물들이 주는 위압감은 컸다. 물론 그중에는 학교 건물이 아니라 교회나 병원 등 실은 다른 기관에서 사용하는 건물들도 여럿 있었지만, 지금 조선인들에게는 그것도 다 학교로 보였다.
“저것들이 모두 성균관 역할을 하는 학교는 아니오. 이를테면 서원 같은 학교가 더 많다고 하오. 왕후(王侯)가 후원해서 세운 학교도 있고, 교회가 세운 학교도 있다는군. 그보다는 우리 조선에서는 각 관청에서 관원들에게만 가르치는 잡학도 대학에서 가르친다니 놀랍소.”
이덕형이 설명 내용을 전했다. 율학(律學, 법학)이나 산학(算學, 수학), 외국어 같은 학과는 조선에서는 일반적인 교육 과목이 아니다. 율학은 율학청에서, 산학은 관상감에서, 외국어는 사역원에서 가르칠 뿐이다. 의학은 아예 부친이나 스승에게 도제처럼 배우고 학교도 없다.
“전하께서 산학은 성균관 관생들도 익히게 하겠다 언명하지 않으셨습니까?”
“그야 장래의 일이지. 아직 과거시험에 산학이 들어가지도 않는데 어찌 성균관에서 산학을 수학하라 하겠소?”
지나간 두 차례 견서사 파견 때도 여러 대학을 방문하기는 했다. 마드리드에도 대학이 있고 로마를 비롯한 이탈리아 여러 도시와 빈에도 대학이 있었다. 심지어 프라하에도 이미 대학이 있었다. 허나 그중 어느 도시도 파리처럼 도시의 절반이 대학으로 채워져 있지는 않았다.
게다가 지나간 두 차례 견서사는 왕명으로 정치와 군사에 집중해서 교류를 나눈지라, 대학 같은 것을 꼼꼼하게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첫 견서사는 유럽 왕실에 인사부터 터야 했고, 두 번째 견서사는 일본 원정을 위해 당장 필요한 인력과 물자를 조달하느라 바빴다.
전쟁이 다 끝나고 파견된 이번 세 번째 견서사에서야 비로소 여유를 가지고 유럽의 문물을 살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남쪽에서 방문했던 여러 다른 대학들도 사절단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지만, 여기 파리는 도시의 절반이 대학이라는 점에서 확실히 특출났다.
유럽 대학 제도를 어떻게 참고하면 좋을 것인가에 관한 토의는 마차가 나바르 대학을 지나 파리 남쪽 성문인 보르델 문을 벗어나고도 그치지 않았다. 목적지인 퐁텐블로에 도착하려면 오늘 저녁은 되어야 할 테니, 논의할 시간은 충분하고도 남았다.
– 5 –
역대 프랑스 국왕들이 애용하는 사냥터인 퐁텐블로 별궁은 파리 남쪽, 광대한 숲속에 있다. 여기 있는 별궁은 400년 전에 루이 7세가 처음 묵기 시작한 거처로, 앙리 4세도 여러 궁전 중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곳이었다.
“전하께서 이 궁전에 대해 아시게 되면 프랑스식 별궁을 짓고 싶어 하실지도 모르겠군.”
주변을 둘러본 이덕형이 자기도 모르게 혼자 중얼거릴 만큼 궁전은 화려했다. 파리에 있는 왕의 본궁인 루브르궁에 전혀 뒤떨어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금상은 군비 확충에는 그렇게 진력하면서 일상에서의 사치나 궁궐 증축과 같은 소비적인 비용은 별로 쓰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는 재위 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부분이 없다.
하지만 드레스나 악기, 커피 같은 서양 취미를 드러내놓고 즐기는 소의 이씨라면 임금에게 서양식 전각 한 채 정도는 지어달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소의 이씨라면 껌벅 죽는 주상은 또 그 청을 들어주려고 할지 모른다. 총애가 과도해지지 않도록 옆에서 지켜야 할 일이다.
“이곳이 무척 마음에 들기는 하지만, 아직 손볼 곳이 많소. 몇 년 뒤에 오면 보다 볼만해진 모습으로 되어있을 거요.”
옆으로 다가온 앙리 4세는 이 별궁을 어떻게 손봐서 자기 취향대로 만들 것인지 신이 나서 설명했다. 조선인들로서는 지금도 이미 충분할 만큼 화려해 보이는데, 프랑스 국왕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벌써 저녁이 되었으니, 사냥은 내일 합시다. 오늘 저녁은 앙리 2세 때 건축한 무도의 방 (Salle de Bal)에서 함께 들도록 하면 어떨까 하는데, 괜찮겠소?”
“저희는 괜찮습니다.”
중도에 말을 교체해 가면서 종일 걸려 온 길이다. 녹초가 된 이들이 적잖았지만, 이덕형을 비롯한 주역들은 아무리 피로해도 빠질 수 없었다. 국왕이 초청하는 연회인데 어찌 사양할 수 있겠나 말이다.
“조선 군사들은 단순히 개인의 이득을 위해서 전장에 나가지 않고, 주상전하를 위한 충심의 일환으로 전장에 나갑니다. 그래서 용감합니다. 게다가 일본은 천여 년 전부터 우리를 수시로 침범한 원수의 나라입니다. 그만큼 원한이 맺혀 있으니 맹렬히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안위는 서투른 스페인어로 조선군이 용전하는 이유를 설명하느라 곤욕을 치렀다. 그 주변을 둘러싼 프랑스 군인들은 연달아 빠른 말로 질문을 던졌고, 통역에게 질문 내용을 들은 안위가 죽을힘을 다해 대답하면 상대는 이해가 안 된다며 추가로 질문하기 일쑤였다.
무관 대표라는 이유로 질문을 떠맡은 안위가 안쓰러웠지만, 이덕형이 도와줄 수도 없었다. 그 역시 사절단 대표로서 앙리 4세와 함께 앉아 대화를 나누어야 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어가 유창한 이항복이 여기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우리 중기병들이 귀국에서 활약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좋더군. 그대들이 원한다면 한 300기쯤 더 파견해줄 용의도 있는데, 어떠시오?”
“감사한 분부십니다만, 부디 거두어 주십시오. 저희 본국인 조선에서는 당분간 큰 전쟁이 없을 전망이라, 일부러 병사를 데려갈 필요가 없습니다. 용맹한 프랑스 기사들은 이곳에 남아 폐하의 곁을 지키는 편이 훨씬 보람 있는 복무가 될 겁니다.”
이덕형은 일본군이 보유한 무기 중에 소형 총통에 버금가는 크기의 대조총이 있음을 종전 후에 알았다. 장다르메가 착용한 갑주라고 해도 그 탄환에 맞으면 여지없이 부서질 터, 이젠 확실히 일선에 내보낼 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런가. 그러고 보니 공의 아내는 스페인 귀족이라던데 정식으로 혼인한 상대요?”
왕실 여인들, 귀족 부인들과 웃으며 대화하는 롤리타를 바라보는 앙리 4세의 두 눈에 잠시 광채가 스쳤다. 왕이 호색한이라는 소문을 이미 듣고 있던 이덕형이 무의식적으로 긴장했다.
“그렇습니다. 다만 제가 아직 가톨릭에 귀의하지 않은 터라, 정식으로 혼배성사를 드리지는 못하고 서로에게 서약만 했습니다. 게다가 제게는 본처가 이미 있는 터라….”
“흐음, 그럼 터키의 하렘 비슷한 관습이 조선에도 있는 모양이군.”
본처 이외에 첩을 두고, 본처가 낳았건 첩이 낳았건 모든 자식을 친자로 인정하고 계승권을 준다. 그런 관습을 가진 무슬림들이 유럽 코앞에 살고 있어서 다행히 이덕형이 조선의 처첩제 관습에 대해 프랑스 궁정에서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공의 스페인 처가 그 관습을 다 알면서도 조선으로 따라갔다니 참으로 대단하오. 다른 건 몰라도 어느 여자에게서건 자식만 얻으면 지위를 물려줄 수 있는 게 부럽군.”
앙리 4세에게는 수많은 정부와 사생아들이 있었지만, 왕위를 물려줄 수 있는 적통 후계자가 아직 없었다. 왕비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는 앙리와 결혼한 지 26년이나 되었지만, 후계자를 단 한 명도 낳지 못했다. 내란 때문에 오래 떨어져 있기도 했고, 애초에 서로 사이도 나빴다.
“이번에 저희가 가져온 인삼을 천천히 장복하시면 효험이 있을 겁니다. 사내의 힘을 기르는 데는 참 좋은 약입니다.”
“고맙소. 가브리엘이 기뻐하겠군.”
말문이 막힌 이덕형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아니, 아직도 정부(情夫) 이름 타령이나 하고 있을 때인가. 후계자가 없어 고민이라면 얼른 후계자부터 만들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