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735
2부 5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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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협을 건너는 나룻배 ? 말은 나룻배라지만, 사실은 대전선만큼 선체가 큰 범선이다 – 가 천천히 잉글랜드를 향해 다가갔다. 겨울이기는 해도 날씨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아서, 견서사 일동은 짧은 항해를 무사히 끝냈다.
“참으로 장관이로고!”
잉글랜드 해안에는 눈처럼 하얀 절벽이 수십 리에 걸쳐 이어져 있었다. 견서사 일행 중에서 잉글랜드까지 와본 이는 하나도 없었기에 이 장관은 모두가 처음 보는 절경이었다. 몇몇은 그 순백색 절벽을 보며 즉석에서 시를 읊기도 했다.
“아…저는 두어 번쯤 본 적이 있습니다. 저 하얀 절벽 때문에 잉글랜드를 하얀 땅, ‘알비온(Albion)’이라고도 부른다고 합니다.”
“정 부위, 자네는 예외 아닌가. 다른 이들과 똑같이 치면 어떡하나?”
이덕형은 정충신에게 종6품 부위 벼슬을 내린다는 교서를 가져왔다. 정충신이 배우고 익힌 바만 따지자면 그보다는 훨씬 높은 벼슬을 받아도 좋겠지만, 최근의 몇 차례 전쟁에서 전공을 세우지도 못하고 강무관을 나오지도 않은 정충신에게 당장 고위직을 내릴 수는 없었다.
“자네 벼슬 문제는 귀국하면 바로 해결될 걸세. 전하께서 적당한 구실을 붙여 최대한 빨리 승진하게 하시리라 약속하셨다네.”
“소관은 딱히 서둘러 진급하지 않아도 괜찮사옵니다. 머나먼 유럽까지 와서 놀랍고 신기한 경험을 많이 했으니, 그걸로 충분합니다. 이제 채비를 해서 돌아갈 생각을 하니 그것만으로도 기쁩니다.”
지금 정충신은 혼자 이 배에 타고 있다. 아내 에바는 네덜란드에 두고 왔다. 3개월 후에는 조선으로 떠날 테니까, 그동안 주변을 정리하라는 배려였다. 원한다면 친정 부모를 조선으로 데려가도 좋다고도 말해두었다.
“자, 곧 도버항입니다! 하선 준비를 하십시오!”
갑판 저쪽에서 네덜란드인 선원이 고함을 쳤다. 절벽을 보며 찬탄하던 견서사 일행은 다들 갑판과 선실에서 주섬주섬 자기 짐을 챙겼다.
100리 남짓한 짧은 뱃길인 탓도 있지만, 소지한 짐은 다들 개인 소지품 정도였다. 잉글랜드 여왕에게 바칠 선물이라든가 잉글랜드에 선보일 조선 상품 같은 큰 짐들은 미들턴이 이미 1년 전에 먼저 가지고 갔기 때문이다.
애초에 조선에서 출발할 때부터 영국에 갈 짐은 미들턴이 모는 영국 배에다 따로 실었다. 스페인과 잉글랜드 사이의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을 공산이 크고, 그럼 조선에 갈 때 받은 펠리페 2세의 통행증이 있다고 해도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던 탓이다.
도착해 보니, 역시나 예상대로 전쟁은 아직 계속되고 있었다. 심지어 월터 롤리가 지휘하는 잉글랜드 함대가 겨우 몇 달 전에 아조레스를 공격, 대대적으로 약탈을 벌인 탓으로 스페인이 온통 분노에 불타고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미들턴은 마데이라에도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물만 보급한 다음 곧바로 잉글랜드로 향했다. 화물과 함께 무사히 런던에 도착했다는 연락은 로마에서 받았다.
견서사 일행이 스페인, 로마, 프랑스, 네덜란드 등을 경유하는 동안 1년 가까이 흘렀으니, 지금은 미들턴을 파견한 후원자 월터 롤리가 잘 보관하고 있을 터였다. 잉글랜드 여왕과 주요 귀족들에게 선물하고, 이로써 조선에 대한 호의적인 여론을 조성하는 데 활용할 수단이다.
“잉글랜드 쪽에서 보기에, 우리는 스페인과 가까우면서 가톨릭에도 호의적인 국가이니 믿고 교류할 만한 상대가 아닐 수도 있지. 부디 선물이 저들의 마음을 좀 돌려놓을 수 있기를.”
잉글랜드 내에서는 종교 문제가 첨예한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스페인처럼 선교에 열을 올린다는 이야기는 아직 없었다. 이덕형은 부디 잉글랜드인들이 조선이 가톨릭 신자만 받아들이는 문제를 붙들고 늘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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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버에서 배를 내려 마차를 타고 런던에 도착한 견서사 일행은 숙소로 정해둔 월터 롤리의 저택으로 갔다. 미리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던 롤리는 일행을 환영했고, 피로를 풀 수 있게 푸짐한 식사와 술, 그리고 침대를 내놓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견서사 정사 이덕형입니다.”
“저는 리스모어 영주, 하원의원 월터 롤리 경입니다. 각하의 방문을 환영하는 바입니다.”
롤리 역시 마우리츠와 마찬가지로 이항복의 안부를 물었다. 이덕형은 이항복이 잘 지내고 있으며, 잉글랜드에 가거든 꼭 롤리의 안부를 확인해 달라고 청했다고 답했다.
“스페인이 발칵 뒤집힐 정도로 대공을 세우셨더군요. 그쪽에서는 공의 목에 현상금을 걸고 잡으려고 할 정도입니다.”
“어제오늘 일도 아니니 그런 데 굳이 연연하지 않습니다. 만약 제게 현상금이 걸렸다면 그 액수가 높을수록 영광이라 할 수 있겠군요.”
현재까지 유럽에서 조선과 가장 우호가 두터운 나라가 스페인이다. 롤리는 그 점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스페인을 공격해서 어떤 전과를 거뒀는지, 스페인이 지금 군사적으로 얼마나 취약한지를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스페인은 분명히 여러 대륙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만큼 병력이 널리 분산되어 방어가 취약합니다. 육군이야 아직 스페인이 유럽에서 최강일지 모르나, 바다에서는 우리 여왕 폐하의 함대가 스페인을 능가합니다.”
“허면?”
“귀국에서도 그만 스페인과는 관계를 끊고 우리 잉글랜드, 네덜란드와 손을 잡는 편이 훨씬 실속이 있으시리라는 이야깁니다. 조만간 동양과의 무역도 포르투갈이 아니라 우리 두 나라가 주도권을 잡을 겁니다.”
롤리는 이덕형이 여왕을 알현하기 전에 최대한 잉글랜드에 호의적인 감정을 품게 하려는지, 갖은 말로 장래 유럽의 패권은 분명 잉글랜드가 쥐게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유럽대륙에 있는 스페인이나 프랑스는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바다를 통해 세계로 나갈 수 없습니다. 스페인인들은 아메리카에서 이미 정복한 땅만 관리하기에도 벅찹니다. 오직 우리만 대륙의 전쟁에서 떨어져 세계와 교류할 수 있습니다.”
롤리는 지금 버지니아에 새롭게 만들고 있는 정착지가 그 증거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비어 있는 북아메리카에 잉글랜드 이주민들을 보내 광대한 영토를 확보할 거고, 이로써 탈유럽을 이룩할 생각이라고 말이다.
“미들턴이 보고하기를, 귀국에서도 영토를 넓히고 인구를 늘리기 위해 나라 북방에 펼쳐진 황무지에 많은 백성을 이주시키고 있다지요?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그 장소가 바다 건너편에 있는 새 육지일 뿐입니다.”
롤리는 잉글랜드가 장차 얼마나 더 위대한 나라가 될 것인지에 대해 끝없이 열변을 토했다. 사흘 뒤에 엘리자베스 여왕을 알현할 때 잉글랜드와 동맹할 의사를 밝혀달라는 의사를 얼마나 노골적으로 드러내는지, 견서사 일행이 앉아서 계속 듣기에 거북할 정도였다.
“꼭 누군가한테 쫓기는 사람 같군. 역모 혐의로 금위사에 쫓기는 유생 같구먼.”
허균이 상대가 알아듣지 못하는 조선말로 투덜거렸다. 허균은 정여립이 금위사장으로 있던 시절에 잠시 의금부 관원으로 재직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금위사에 쫓겨 다니다가 붙잡혀온 죄인들을 여럿 보았는데, 지금 롤리의 태도가 그와 비슷했다.
대역죄를 지은 죄인들을 관찰하면 늘 보이는 태도가 있다. 자기는 절대 역모를 꾸미지 않은 충신이며, 억울하게 혐의를 썼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자신이 한 모든 행동은 나라가 번영하게 만들려는 충정에서 비롯되었다는 변명을 한다.
지금 롤리는 전형적인 대역죄 용의자와 비슷한 태도를 보였다. 의심스러워하던 허균이 문득 떠오른 질문을 롤리에게 던졌다.
“공에게 여쭐 게 있는데, 우리 화물은 잘 보관되어 있습니까?”
거침없이 이어지던 롤리의 연설이 뚝 그쳤다. 그리고 몹시 난처한 표정이 롤리의 얼굴 위에 나타났다.
“아, 저 그게…뵙자마자 그 문제부터 먼저 사과드려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그건 무슨 소리요?”
견서사 일행은 화물 문제에 대한 롤리의 설명을 듣고 당황했다. 여왕에게 직접 바칠 선물 약간만 빼고, 나머지 짐은 이미 다 처분해버린 지 오래라는 게 아닌가.
“본래는 분명히 여러분께 승인을 받은 뒤에 처분하기로 했습니다만, 동방에서 귀환하자마자 몰려든 호사가들에게 아무것도 내놓지 않기는 도저히 불가능했습니다. 여왕 폐하께 아무것도 바치지 않을 수도 없었고요. 부디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잉글랜드는 작년, 재작년 2년에 걸쳐 흉작을 겪었다. 게다가 끝날 줄을 모르는 스페인과의 전쟁 때문에 무역에서도 타격을 입었다. 롤리 같은 이들이 털어오는 스페인의 보물 정도로는 그 부족이 해소되지 않았다.
이런 판국에 조선에서 갖가지 진기한 선물들이 도착했으니, 드러내고 분배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늙고 지친 엘리자베스 여왕을 위로하면서 신하들에게는 환심을 살 수 있는 하사품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롤리는 조선 사절단이 일정 때문에 선물부터 먼저 보낸 것으로 꾸몄다.
그런데 여왕은 ‘조선 국왕이 보낸’ 이 물건들을 신하들의 환심을 사는 데 쓰지 않았다. 대신 경매에 부쳐 왕실의 금고를 채웠다. 영약이라고 유럽 전역에 소문이 자자하게 퍼진 인삼부터 시작해서 장신구, 가구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팔아치웠다.
그래서 조선에서 온 화물 대부분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남은 건 장신구 일부뿐이다.
“사자를 파견할 수 없어, 스페인에 계시는 여러분에게 연락을 넣어 허락을 구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정도로 제 불찰에 대한 용서를 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처분한 물품 대금은 제 사재를 털어서라도 변상하겠습니다.”
그나마 다행으로 조선 상품을 접한 잉글랜드 사회의 반응은 무척 좋다고 했다. 애초에 그럴 목적으로 사용하려 가져온 물건들이었으니 엄청난 손해는 아니었다. 문제라면, 완전히 엉뚱한 사람 ? 엘리자베스 여왕 – 이 주머니에 돈을 챙겨 넣었다는 것 정도다.
“귀공의 뜻이 나쁜 데 있지 않았고, 대가도 치르겠다 하니 우리도 일단은 불문에 부치겠소. 그래도 우리 본국에 전후 사정을 보고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 그 점은 알고 계시기 바라오.”
“그야 물론입니다. 저도 마땅히 서한으로라도 조선 국왕 폐하께 용서를 구해야겠지요.”
자칫 곤란해질 뻔했던 상황은 이덕형이 한 발 뒤로 물러서서 롤리의 해명을 받아들이면서 끝났다. 정사인 이덕형이 받아들이자 다른 이들도 롤리에 대한 힐난을 그쳤다. 단지 한 사람, 허균만 제외하고 말이다.
허균은 내심 잉글랜드에서도 네덜란드에서처럼 물품 처분과 연계해서 뭔가 향응을 제공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던 참이었다. 그 기회가 깡그리 날아가 버렸으니 투덜거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만하게, 허 부사. 롤리 공을 힐난한다고 해서 이미 처분한 여러 물품이 다시 되돌아오는 것도 아니지 않나.”
허균의 입을 다물게 한 이덕형은 미안해하는 롤리에게 이제 됐으니 괜찮다고 도리어 위로를 건넸다. 그리고 이제 시간이 늦었으니까 각자 방으로 돌아가 쉬자고 했다. 여왕 알현은 아직 사흘이나 남았지만, 편안히 쉬어 둬야 생기 있는 모습으로 만날 게 아닌가.
– 17 –
여왕은 많이 노쇠해 보였다. 나이가 올해 66세라고 들었는데, 언뜻 보기에도 실제 나이보다 한참 더 늙어 보이는 인상이었다. 두 눈은 퀭하고, 분칠을 두껍게 한 얼굴에는 갈라질 듯한 주름이 드러나 보였다. 붉게 칠한 입술 밑으로는 뭔가를 두툼하게 채워 넣은 기색이 보였다.
두껍게 화장을 하고 보석이 달린 화려한 옷을 입었지만, 견서사 일행의 눈에는 여왕이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조선인들 대부분은 여왕을 보고 다 늙어서 추해진 주제에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아직도 저러고 자리에 앉아있느냐고 속으로들 생각했다.
애초에 여왕이라는 존재 자체가 대부분 조선인에게는 좋게 받아들여질 수가 없었다.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기 어려운 아들을 보좌하는 수렴청정이라면 모를까, 여자가 직접 권좌에 올라서 나라를 다스리다니 그게 될 말인가?
게다가 동방에는 여자가 직접 권좌에 앉는 일을 꺼리게 만든 아주 안 좋은 선례가 있었다. 본래 황후 자리에 있다가, 마땅히 그 자리에 올라가야 할 자기 아들들까지도 죽이거나 내쫓고 직접 제위에 올랐던 당나라의 측천무후다.
신라에서 있었던 세 여왕도 별로 바람직한 선례가 아니다. 남자 계승자가 없어 억지로 오른 여왕은 권위도 약했고, 신하들의 협력 없이는 제대로 왕좌를 지키지도 못했다.
그런 전례에, 여자가 사회적으로 활동하는 모습조차도 바람직하지 않게 여기는 조선인들이 혼인도 하지 않고 70을 바라보도록 보위를 움켜쥐고 있는 노파를 보았으니 좋게 여길 리가 없다. 계승자가 없어 왕위를 받았더라도, 최소한 후손이라도 서둘러 만들었어야 할 게 아닌가.
처음 유럽에 온 이들이 대부분 이런 비하적인 시선을 품었다. 이번 견서사가 처음이 아닌 이덕형이나 허균은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들은 잉글랜드 여왕이 전 유럽에서 받는 평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유럽에 왔을 때면 늘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였다.
잉글랜드 여왕이 얼마나 당당하고 영민하며 능란하게 신민들에게 존경을 받아내는가? 이는 전 유럽이 알고 있다. 적국인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조차도 잉글랜드 여왕이 나라를 훌륭히 다스리고 있음을 인정하고 감탄할 정도였다.
후사를 만들지 않은 거야 당연히 칭찬받지 못할 일이다. 하지만 지난 40년 동안 어떤 남자 국왕들에게도 뒤지지 않게 나라를 다스린 여왕이다. 나이가 들어 기력이 쇠하고 외모가 다소 추해졌다 해서 어찌 깎아내릴 수 있겠는가.
“미들턴을 통해서 먼저 보낸 그대들의 선물은 잘 받았소. 조선 국왕께 감사를 전해주시오.”
“선물보다 1년이나 늦게 찾아뵙게 되어 송구할 뿐입니다.”
격식을 갖춘 인사를 주고받은 뒤에 조금 편한 인사말이 오갔다. 원래 예정대로라면 여기서 선물을 바쳤겠지만, 이미 1년 전에 롤리가 다 바쳐버렸으니 말로만 주고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덕형은 여기서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영어를 익히지 못한 탓이라고는 하지만, 스페인어 통역을 통해 계속 회견을 진행하기는 곤란하다는 판단이 섰다.
“폐하의 위명에 대해서는 처음 유럽에 왔을 때부터 익히 들었습니다. 저희 임금께서도 귀국 함대가 1588년에 거둔 대승리에 대해 익히 알고 계시며 그 위업을 칭찬하셨습니다.”
이덕형은 이제까지 사용하던 스페인어 대신 라틴어를 쓰기 시작했다. 늘어서 있던 잉글랜드 신하들이 당황했지만, 뜻밖에도 여왕의 얼굴에는 미소가 흘렀다. 그리고 곧 여왕의 입에서도 아주 자연스러운 라틴어가 흘러나왔다.
“머나먼 동방에서 축하를 받으니 기쁘기 그지없소. 그대들이 펠리페 왕과 우호 관계를 계속 이어왔다고는 하나, 진실로 스페인을 편들지는 않고 공정한 입장에서 우리를 살피고 있었음을 알 수 있소.”
여왕은 본래 스페인어도 라틴어도 모두 할 줄 알았다. 이덕형은 롤리에게 들어서 이를 알고 있었지만, 가톨릭을 배척하는 잉글랜드에서 교회 언어인 라틴어로 알현을 진행해도 괜찮을지 확신이 없었다. 그에 반하면 스페인어는 그저 외국어일 뿐이니까 훨씬 제약이 덜했다.
하지만 스페인어 사용은 조선이 스페인에 종속되어 있다는 일부 유럽인들의 잘못된 인식을 심화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망설였던 것인데, 끝내 이덕형이 내린 결론은 영국인들이 가톨릭 진영에 대해 품은 반감을 고려하더라도 주체성을 과시하는 편이 낫다는 거였다.
“특사의 라틴어가 매우 훌륭하시오. 어디서 배우셨소?”
“조선에 온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배웠습니다.”
“예수회원들이 학식은 분명 뛰어나지.”
여왕은 뜻밖에도 예수회를 호평했다. 두 사람이 통역 없이 대화를 나누면서 분위기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여왕은 조선에 대해, 스페인과의 관계에 대해 수많은 질문을 던졌고 이덕형은 차분하면서도 상세하게 답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