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737
2부 5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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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의 서재에는 늘 연기가 자욱했다. 롤리는 신대륙에서 배웠다는 담배를 하루 내내 물고 다녔다. 허균과 맞담배를 피우고 있으면 방안이 완전히 너구리굴처럼 변하곤 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이덕형으로서는 고역이었다. 하지만 손님 입장이고 보니 주인이 담배 좀 피우겠다는데 피우지 못하게 할 수도 없었다.
흡연하는 풍속은 조선에서도 조금씩 퍼져나가고 있다. 화재 위험 때문에 궐내와 관청에서는 흡연이 엄격하게 금지되고 있으나, 민간에서는 그런 금지가 없다 보니 간혹 담뱃불이 번지는 바람에 화재가 발생하곤 한다.
그래서 바빠진 기구가 금화사(禁火司)다. 금화사에서는 망루 위에서 도성 전역을 살피다가 화재로 인한 연기를 발견하면 곧바로 금화차(禁火車)를 내보낸다. 말 4필이 끌고 종을 울리며 달리는 금화차가 현장에 도착하면 금화군(禁火軍)이 수동식 양수기로 물을 퍼붓는다.
당연히 물을 뿌리는 게 진화작업의 전부는 아니다. 화재가 번지지 않도록 집을 무너뜨리고 속에 불씨가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지붕을 말끔히 걷어낸다. 집안에 남아있는 사람을 구해내고 가재도구도 최대한 건져내기 위해 불길 속으로도 뛰어든다.
이렇게 중요하고 위험한 역할을 맡은 만큼, 금화군은 도감군 급료병과 같은 수준의 급여를 받는다. 총과 칼은 잡지 않지만, 화재 현장이 곧 이들에게는 전쟁터이기 때문이다.
“그 얘기를 들으니 제가 처음 집에 돌아와서 담배를 피우던 생각이 나는군요. 글쎄, 담배가 뭔지도 모르는 제 하인이 제 몸에 불이 붙은 줄 알고 물벼락을 퍼붓지 않았겠습니까? 주인을 구하겠다고 한 행동이니 야단을 칠 수도 없고….”
롤리가 입가에서 파이프를 떼지 않은 채 껄껄거리며 웃었다. 화재를 막으려면 소방대가 꼭 필요하다고 강조하다가 다시 원래 화제로 돌아갔다.
“조선에 이주할 사람은 300명 정도 모였습니다. 네덜란드와 달리, 잉글랜드에 남은 가톨릭 신자들은 떠나기보다는 여기서 견디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모집하기 힘들었습니다.”
설명하는 틈틈이 파이프가 입으로 들어갔다. 이덕형이 콜록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귀측에서는 이민 계획이 없지 않았소?”
“처음에야 그랬습니다만, 미들턴이 제출한 보고서를 보니 저희도 어느 정도 이주민을 보내 거점을 구축해야 조선과의 교역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지금 조선과의 거래를 주도하는 데 네덜란드가 유리하겠습니까, 저희가 유리하겠습니까?”
“그야 네덜란드겠지요.”
“그러니 저희도 네덜란드인들보다는 규모가 작더라도 이민을 보낼 필요가 있는 겁니다.”
조선에 이주한 뒤에 조선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더라도 상관없다. 최소한 조선에 이주한 영국인들은 네덜란드보다는 영국에 친근감을 가지고 교류할 테니까 그것만 해도 충분하다. 이 목적을 달성하자면 이주민들이 철저한 조선인이 될수록 유리하다.
“혹시나 해서 미리 말씀드리자면, 저는 절대 이주한 영국인들을 시켜 조선 정부를 넘어뜨려 여왕 폐하의 영토로 만든다거나 할 생각이 없습니다. 무역을 통해 서로 이득을 얻고, 공동의 적이 될 스페인을 상대로 동맹을 맺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다만 롤리의 이런 견해가 잉글랜드 조야의 동조를 얻고 있지는 못했다. 스페인과의 전쟁은 언제 끝날지 기약도 없고, 버지니아 식민지도 실패만 거듭하는 상황이다. 이런 판국에 머나먼 동방의 나라인 조선에 이주민을 보낸다는 계획이 호응을 얻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모든 이주자를 공이 개인적으로 비용을 써서 모았다는 말이오? 잉글랜드 정부가 여왕의 이름으로 모집한 게 아니고?”
“네. 잉글랜드뿐만 아니라 웨일스와 스코틀랜드까지 사람을 보내서 조선으로 이주할 의향이 있는 사람들을 모았습니다만, 그래도 300명이 고작이었습니다.”
잉글랜드에서 종교를 놓고 싸움이 시작된 지 벌써 60년이 넘었다. 게다가 가톨릭이 반역자 취급을 받아 본격적으로 탄압받기 시작한 지도 30년이 가깝다. 탄압을 피해 도망칠 사람들은 이미 다 떠난 지 오래고, 아직 남은 가톨릭 신자는 대개 죽어도 고향에 남겠다는 이들이었다.
조선이 신교도 이민을 받아들였다면 사람을 구하기가 조금은 쉬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조선 정부는 가톨릭 이외의 이주자는 절대로 받지 않겠다는 방침이 확고했다. 롤리로서는 어떻게든 가톨릭 신자들과 접촉해서 그중에서 이민 희망자를 확보할 수밖에 없었다.
“적은 수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려면 농부 따위를 보내면 안 되겠지요. 가능하면 상인, 군인, 기술자, 선원 등 조선에서 크게 활약할 수 있는 이들을 모으고 있습니다.”
영국인들이 조선에서 고위 관직을 얻어 출세하고 국왕 옆에 자리를 잡는다면 조선은 확실한 친영국가가 될 것이다. 이를 통해 막대한 상업적 이익과 더불어 스페인을 견제하는 군사동맹 체결이라는 부수적인 이득도 노릴 수 있다.
“이건 귀국에도 분명히 도움이 됩니다. 아무려면 우리가 지구 반대편에 있는 조선에 욕심을 내겠습니까? 우리는 스페인처럼 확장에 목을 맨 나라가 아닙니다.”
“그 이야기야 이미 숱하게 듣고 있소. 하지만 돌아갈 곳이 없는 네덜란드 이주민과 돌아갈 곳이 있는 잉글랜드인이 충성하는 정도가 같을지, 심히 의문이오.”
조선으로 가는 네덜란드인들은 공화국에서는 추방당했고 스페인 국왕 치하에서는 살고 싶지 않은 이들이다. 조선에 이주해서 이교도 군주에게 충성하며 살겠다고 맹세한 이상, 조선에서 최대한 적응하는 수밖에는 길이 없다.
하지만 잉글랜드에서는 공식적으로 가톨릭교도를 추방한 적은 없다. 그런데도 떠나기로 한 이주자들에게 과연 조선 국왕에게 진심으로 충성을 바칠 동기가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조선에 도착한 뒤에 영국 정부를 위한 첩자 노릇만 하려는 건 아닐까?
“황금이죠. 황금은 가장 충실한 기독교도도 이슬람교도로 만들 수 있는 마법입니다. 바치는 충성에 적합한 대가만 받는다면, 제가 모집한 이주민들도 귀국 국왕께 충성을 바칠 겁니다.”
조선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이들에게 조선인과 같은 충성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들을 붙들 수 있는 수단은 단 하나, 황금이다. 하지만 다음 세대, 조선에서 태어난 그들의 후손은 확실한 조선인으로서 충성을 바칠 것이다. 롤리는 그 점을 강조했다.
“부디 저들 중 귀국 국왕 폐하를 위해 일할 자들에게 지급할 몇 푼 안 되는 보수를 아깝다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계약을 맺은 이상, 받은 돈만큼의 의무는 철저히 수행할 겁니다.”
롤리는 조선까지 움직일 배와 선원도 자신이 직접 마련하겠다고 했다. 이덕형은 이 제안을 과연 받아들여도 괜찮을지 잠시 고민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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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의 정부에서 가장 큰 실권을 쥔 신하는 최고 고문?국무장관?재무장관을 모두 겸하고 있던 벌리 남작 윌리엄 세실이었다. 여왕이 아직 엘리자베스 공주이던 시절부터 여왕의 옆을 지키는 측근이었고, 40년 동안 신뢰받으며 자리를 지킨 권신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왕의 신뢰도, 권력도 노쇠를 막을 수는 없었다. 늙어서 쇠약해진 그는 올해 4월에 심장마비를 일으켜 급사했다. 그래도 향년 78세였으니 그만하면 장수는 충분히 한 셈이었고, 주변에서도 큰 동요는 없었다.
남작이 가지고 있던 작위와 지위는 무사히 장성한 유일한 아들, 로버트 세실이 물려받았다. 올해 35세로 이덕형보다 2살 어린 로버트 세실은 여왕과 오랫동안 여왕 옆에 있던 총신들이 물러날 시기가 되었음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존재인 셈이었다.
더불어서 ‘여왕의 새 애인’으로 불리는 33세의 에식스 백작 로버트 데버루 역시 이 새로운 세대라고 볼 수 있다. 늙어서 여자로서의 매력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여왕 옆에 악착같이 달라붙어 있는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권력을 잡기 위해서였다.
“제임스 폐하께 좋은 대우를 받기 위해서라도 좋은 카드를 확보해놓고 볼 일이니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국무장관 각하?”
“옳은 말이오, 백작.”
여왕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늙었고, 뒤를 이을 후계자도 없다. 계승권을 가진 가장 가까운 친척은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다. 제임스는 여왕의 고종사촌인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5세의 외손자로, 여왕에게는 6촌 손자에 해당한다.
좀 더 가까운 친척으로는 제임스의 모친인 메리 스튜어트가 있었지만, 스코틀랜드 내에서 벌어진 정쟁에 패해 잉글랜드로 망명해 왔다가 11년 전에 반역죄로 처형당했다. 국내에 아직 남아있는 가톨릭 신자들과 협력해 잉글랜드 왕위를 노렸다는 죄목이었다.
메리 스튜어트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가톨릭 신자들은 별 위협이 되지 않았다. 국교회 예배에 출석하지 않는 대신 한 달에 1실링씩 벌금을 내고 집에서 가톨릭 미사를 보는 정도가 고작이었고, 내버려 둬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가톨릭 신자면서 잉글랜드 왕위계승권을 가진 메리 스튜어트의 출현이었다. 교황이 부왕 헨리 8세의 이혼과 재혼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톨릭 신자들은 헨리 왕의 두 번째 왕비인 앤 불린 소생인 엘리자베스 여왕을 왕의 적녀(嫡女)가 아닌 사생아로 간주했다.
사생아는 합법적인 계승권을 가질 수 없다. 고로 잉글랜드의 왕좌에 앉을 적법한 계승자는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라는 게 국내에 남은 대다수 가톨릭 신자들의 생각이었다.
그 결과, 여왕을 타도하려는 가톨릭 신자들의 모의가 폭증했다. 내부적으로 반란과 음모가 연달아 적발되었을 뿐 아니라, 외국 가톨릭 세력과 연계하려는 자들도 줄을 이었다. 스페인이 바로 그 틈을 노렸고, 프랑스도 내란만 아니었다면 어떻게 나왔을지 모르는 일이다.
여왕은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사이인 메리에게 별 애정은 없었다. 그래도 자기 조카인 데다 명색이 여왕인 메리를 처형하고 싶지 않았지만, 여왕을 둘러싸고 있는 신하들 모두가 메리를 죽이자고 했다. 심지어 스코틀랜드에 있는 제임스 6세도 모친인 메리를 구하려 들지 않았다.
메리가 처형된 이후로도 정식으로 후계자가 발표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제임스 6세 외에는 그 자리를 이을 만한 사람이 없고, 당연히 의회와 정부에 있는 유력자 중 상당수가 일찌감치 스코틀랜드에 있는 제임스 쪽에 줄을 대고 있다.
“그래, 요즘은 놈들에게 큰 움직임이 없소?”
“스페인은 펠리페 왕이 사망하는 바람에 다른 일을 벌일 상태가 아닙니다. 프랑스는 내란이 이제 막 끝난 참인 데다, 스페인과 애초에 갈등이 심하다 보니 우리 일에 굳이 끼어들 의사가 없습니다. 메리 스튜어트가 없어졌으니 끼어들 이유도 없고요.”
메리 스튜어트는 모계가 프랑스인이다. 내란에서 가톨릭 동맹군을 이끌었던 기즈 가문 출신 마리 드 기즈(Marie de Guise)가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5세와 결혼해서 낳은 여러 자녀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장성한 자식이 메리였다.
만약 골수 가톨릭인 기즈 가가 내란에서 승리했다면 같은 가톨릭이자 혈족인 메리의 복수를 한다는 명분으로 잉글랜드 침공에 나섰을지도 모른다. 허수아비 후보를 내세워서 말이다.
“하지만 승리자인 앙리 4세는 본래 위그노, 다음 왕이 되실 분인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 역시 신교도요. 우리한테는 매우 바람직하면서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절망적인 결과지.”
사람은 진짜로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 빠지면 도리어 희망적인 상황만 눈에 들어오곤 한다. 지금 가톨릭 신자 일부가 그렇다.
“죽은 메리가 가톨릭이었다는 이유로 제임스 왕께서 가톨릭에 동정적이리라 믿는 얼간이가 아직도 그렇게 많다니 놀라울 뿐이오.”
로버트 세실은 에식스 백작이 제출한 보고서를 읽으며 혀를 찼다. 에식스 백작은 8년 전에 사망한 프랜시스 월싱엄 경이 생전에 구축한 첩보조직을 물려받아 관리하고 있었다. 잉글랜드 전역은 물론이고 유럽 전체에서 수집한 정보가 그 앞에 모였다.
“그리고 그 얼간이들을 한 해 내내 분주하게 찾아다니는 자가 있습니다. 바로 과거에 한때 폐하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던 월터 롤리 경입니다.”
여왕은 롤리를 총애했지만, 그가 자신에게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자기 시녀와 몰래 결혼한 일 때문에 크게 진노했었다. 롤리는 런던탑에 투옥되기까지 했다가 겨우 풀려났고, 조선에서 가져온 선물과 아조레스에서 약탈한 스페인의 보물을 바쳐 간신히 총애를 회복했다.
하지만 그래도 예전만은 못한 상황이다. 여왕의 총애는 그새 에식스 백작에게 옮겨가 버린 상태였고, 롤리에게도 뭔가 큰 사건이 필요했다. 지위를 완전히 회복하기 위해서 말이다.
“롤리 경이 가톨릭 신자들을 찾아다니는 행동은 충분히 의심할 만합니다. 직접 다니지 않을 때는 하인들을 시켜 가톨릭 지도자들과 편지를 주고받는데, 뭔가 몰래 꾸미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두 달 전에 조선 사절단이 오고 나서 더 활발해졌습니다.”
“백작, 롤리 경은 대스페인 관계에서는 가장 강경한 사람 중 하나요. 스페인인들이 죽이고 말겠다고 이를 가는 사람 중 하나지. 그런 사람이 설마 스페인 편에 붙어 반역을 꾸미겠소?”
“스페인과 내통해야만 반역이겠습니까?”
에식스 백작이 냉소적으로 지적했다.
“여왕께서 총애를 거두신 뒤로, 롤리 경은 권력도 잃고 지지자도 잃었습니다. 그럼 새로운 지지기반을 찾아 동분서주할 만도 하지요. 가톨릭 세력을 자기 기반으로 삼는다면, 롤리 경은 반란을 시도하거나 다음 국왕이 되실 제임스 폐하 앞에서 자기 몸값을 높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듣기로는 이야기가 좀 다르오. 롤리 경이 가톨릭교도들과 연락하는 건 조선에 보낼 이주자를 모집하기 위해서라던데.”
로버트 세실은 이 보고를 들으면서도 전혀 흥분하지 않았다. 그가 차분하게 지적한 부분에 대해 에식스 백작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 핑계는 저도 들었습니다. 조선과 교역을 하겠다? 좋지요. 이번에 조선에서 보낸 선물을 팔아 얻은 국고 수입이 3만 파운드였지요? 물론 우리가 직접 배를 움직이면 이윤이 그보다 줄기는 하겠습니다만, 할 가치는 충분히 있는 교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에식스 백작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정적을 해치울 기회를 포착한 눈, 마치 먹이를 노리는 독사와 같이 빛을 발하는 눈이었다.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폐하의 신하들을 조선에 보낼 필요가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성실한 잉글랜드 국교회 신자를 보내야지, 왜 충성심도 의심스러운 가톨릭교도를 골라 보낸단 말입니까? 이민은 핑계고, 실은 가톨릭과 손을 잡고 음모를 꾸미는 게 분명합니다.”
지금까지 가톨릭교도들이 엘리자베스를 타도하기 위해 꾸며온 숱한 음모를 생각하면 무리한 추론도 아니다. 다만 납득할 수 없는 문제는 이미 말했듯이 롤리가 가장 강경한 반스페인파 중신 중 하나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조선은 유럽에서 스페인과 가장 가깝습니다. 조선 사절은 유럽에 올 때마다 스페인 궁정부터 들르며, 떠날 때도 마지막에 스페인에 들릅니다. 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스페인에 종속되지는 않았을 수도 있으나, 가장 우호적인 나라가 스페인임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조선에서 미들턴이 돌아온 뒤로 롤리가 갑자기 가톨릭교도들과 연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선인들은 이번에도 스페인 궁정부터 방문했다. 그럼 잉글랜드 내부에서 뭔가 일으키기 위해 롤리에게 전달할 연락문을 받아왔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반역을 꾸미고 있다는 확증은 아직 잡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롤리 경이 지금 하는 행동은 지극히 위험합니다. 권력에 대한 욕심으로 미친 사람은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다는 증거가 되겠지요. 이건 폐하께도 알려야 합니다.”
“난 아직 확신이 안 서지만, 백작이 정 원한다면 백작의 이름으로 폐하께 보고서를 올리는 게 좋겠소.”
“알겠습니다, 각하.”
에식스 백작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국무장관의 집무실을 나갔다. 로버트 세실은 그 당당한 뒷모습을 보면서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심각한 재정적자와 신통치 않은 전황, 고집불통이 되어가는 여왕의 태도 때문에 나라 꼴이 엉망진창인데 정적을 쓰러트릴 궁리나 하고 있다니.
지금 나라에는 돈이 없어서 병사들 봉급도 제때 못 준다. 이런 판에 여왕은 네덜란드에서 귀환하는 병사들을 가리켜 ‘돈만 처먹는 밥벌레들’이라고 욕설을 퍼붓기까지 했다. 그 사건을 수습하느라 애먹은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머리가 아팠다.
나라 상황이 엉망이 되니 의회도 여왕을 향해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정부 기밀이 스페인 측으로 줄줄이 새어나가고 있는데 아직 첩자의 정체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에식스 백작은 롤리를 자빠트릴 궁리를 하기보다는 이런 문제부터 해결함이 마땅했다.
“조선에도 국왕을 위해 정보를 수집하는 비밀 첩보기구가 있다고 했지. 아주 탁월한 실력을 갖추고 있다던데, 차라리 저 작자도 거기에 들어가서 일이나 제대로 배웠으면.”
혀 차는 소리가 조용히 집무실 안을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