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74
1부 07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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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희는 망설이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자기처럼 미래에서 왔다는 사실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아 보였다. 어쩔 수 없다. 내가 먼저 내 정체를 밝히기로 했다.
“난…원래 2017년에서 살았어. 대학 다니면서 9급 공무원 시험 준비했고, 그쪽에서는 스물일곱 살이었어. 소원 한번 잘못 빌었다가 여기로 떨어졌어. 여기 온 지 이제 5년이 됐고, 지금은 여기 나이로 스물세 살이야. 자, 너도 말해봐. 넌 언제 살았었어?”
내가 먼저 내 소개를 늘어놓았는데도 상희는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다. 조바심이 난 나머지 내가 더 많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분명 상희는 나 같은 사람이다. 어떻게든 입을 열게 해서 ‘친구’를 만들고 싶었다. 함께 어울리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진짜 친구를 말이다.
“너, 내가 무슨 이름으로 불리는 왕인지 알지? 내 선대 임금은 성종이야. 자, 내 이름은 뭘까? 태정태세문단세, 예성, 성종 다음에 즉위한 열 번째 왕 누구지? 쫓겨난 사람! 그게 바로 나라고! 어서 말해 봐! 알지? 알지?”
상희가 침을 꿀꺽 삼켰다. 목울대가 살짝 움직이는 게 보였다. 얘는 목젖이 작은 편이구나. 숨을 참으며 기다리고 있는데 상희가 모기만한 소리로 대답했다.
“여…연산…연산군.”
순간적으로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연산군이라는 칭호를 안다는 것만 해도 상희가 미래에서 왔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종 다음이라는 차례도 정확하게 안다. 이건 상희가 최소한 중등교육까지 제대로 받은 20세기 이후 대한민국 사람이라는 의미다.
“연산군을 아는 걸 보면, 넌 분명 한국인이야. 외국인이 연산군을 알 리가 없잖아? 넌 의치를 끼우지 않으면 이가 주저앉는다는 것도 알고, 침구나 상처도 꼬박꼬박 알코올로 소독해! 소주가 아니라 굳이 알코올이라고 부른 이유는 알겠지.”
당연하지. 원래 한국에는 알코올이라는 말이 아예 없었으니까! 내가 굳이 외래어를 쓴 건 아직 불안감을 지우지 못한 상희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다. 나도 너처럼 미래에서 왔다고 확인시켜주려고 말이다.
“어때, 이제 믿겠어? 나도 너처럼 미래에서 왔어!”
임금으로서 쓰던 무게 잡는 말투를 버리고 완전히 편하게 이야기하는 건 5년만이다. 처음에는 선뜻 입이 열리지 않았지만 일단 말문이 트이자 거침없이 쏟아졌다. 헌데 내 진짜 나이는 말하지 말걸 하는 후회가 갑자기 들었다. 혹시라도 쟤 원래 나이가 나보다 많으면 어떡하지?
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느라 잠시 입을 다물자 침묵이 방 안에 내려앉았다. 잠시 망설이는 시간이 이어졌다. 그런데 멍하니 나를 보고 있던 상희의 눈에서 갑자기 눈물 두 줄기가 주르륵 흘렀다. 어, 얘 갑자기 왜 울지? 내 연설이 그렇게 감격스러웠나?
울먹이던 상희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아듣기는 힘들었지만 확실히 내가 바라던 그 내용이었다.
“나, 나도 2017년에서 왔어. 나도 한국에 살았고, 스물일곱 살이었어!”
휴우, 다행이다. 동갑이구나. 서로 나이대접 해줘야 할 필요는 없어서 다행이다.
“조사…했으니 알겠지. 내가 이야기하기도 했고. 난 이 시대로 온지 이제 7년 됐어. 여기 나이로는 이제 열일곱 살, 알고 있지?”
내가 먼저 말을 튼 덕분인지 상희도 편하게 말을 놓았다. 적어도 지금 여기서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조선에서의 지위 같은 건 의미가 없어졌다. 나도 상희가 마치 친구처럼 내게 말을 놓는데도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래…같은 나이에, 같은 시대에서 왔는데도 같은 조건이 주어지진 않았구나.”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상희는 내 대답을 듣자마자 두 눈을 날카롭게 떴다.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던 그 표정이 순간적으로 바뀌었다.
“같은 조건? 농담해? 넌 왕이잖아! 그것도 연산군이라고! 뭐든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폭군! 그런데, 그런데 어떻게 그런 네 처지를 나와 비교할 수 있어?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밖에 있는 두 사람이 듣지 못하도록 목소리는 낮았다. 하지만 그 낮은 목소리 속에서도 상희가 울분에 차 있음은 알 수 있었다. 미처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 상희가 분노를 쏟아냈다.
“넌, 아무것도 몰라. 이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가난한 백성들이 어떻게 사는지, 내가 어떻게 그 속을 헤치면서 살아왔는지! 2017년에서 우리가 입에 달고 살았던 헬조선은 애들 장난이었어. 이 조선, 15세기 조선에 비하면 대한민국은 천국이었다고!”
흥분해서 열을 내는 상희를 보니 내가 알던 그 밝은 성격의 미소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나는 우물쭈물 변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모, 모르진 않아. 나도 역사 공부는 할 만큼 했다고. 진짜 연산군처럼 백성들 삶에 무관심하지도 않고, 조금이라도 덜 힘들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이 추운 겨울에 수천 명이나 되는 백성들에게 도로공사를 하게 만들면서 순행을 가? 도로공사에 부역하러 나갔다가 몸을 다친 도성 인근 백성들이 혜민서에 얼마나 많이 몰려왔는지 알아?”
이런 비난을 받는 건 뭔가 억울했다. 나도 얼굴을 붉히며 반론했다.
“내가 순행을 간 건, 도로를 정비하기 위해서였어! 이놈의 조선 사회에서는 임금이 행차라도 나가지 않으면 도로공사를 벌일 명분이 없단 말이야. 너 기억 안 나? 나한테 도로망이 확충되면 상업이 번창하고 관광산업이 시작될 거라고 부추긴 사람이 누구였지?”
상희가 당황했다. 자기가 한 말이니 얼른 변명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내게 반론했다.
“그, 그건 원론적인 이야기였어! 내가 생각한 도로 확장은 말이야, 날씨가 좋을 때, 일꾼들에게 정당한 품삯을 지급하면서 차근차근히 작업을 진행하는 상황을 전제로 한 거였어. 이 추운 겨울에 보수도 없이 부역을 시키라는 게 아니었다고!”
그래, 상희는 분명히 ‘지금 당장 임금이 순행을 갈 필요가 있다’고 구체적으로 말하진 않았다. ‘도로를 확충하면 여러모로 좋다’고만 했지. 그 말을 듣고 ‘도로를 확충하기 위해 당장 순행을 나가야 겠다’는 결론을 내린 장본인은 물론 나였다.
“그래, 알았다. 알았어. 하지만 난 나름대로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이 지금 그렇게 해서라도 도로를 만들어야겠다는 거였어. 일부러 백성들을 괴롭히려고 겨울에 도로공사를 하게 만든 건 아냐. 그런 변태가 어디 있어? 남들 괴로워하는 거 보고 즐거워하게?”
원망은 받아도 좋다. 하지만 오해는 사고 싶지 않았다. 잠시 망설이다가 변명을 시작했다.
“너도 알잖아? 난 연산군이야. 내가 하려고 들면 굳이 남들을 고생시키지 않아도 ‘즐거운’ 일이라면 뭐든지, 실컷 할 수 있어.”
이런 어조로 해명을 해도 괜찮을지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입 밖으로 나간 말을 어떻게 할 수는 없다.
“그래, 하려고만 하면 진짜 연산군처럼 놀 수도 있었어. 하지만 안 했다고. 전국에서 미녀를 뽑아 흥청을 조직하지도 않았고, 비단이나 산호 같은 사치품도 안 사. 말만 딱 한 마리 샀어. 유흥이라고 할 만한 거라면 매달 보름에 장녹수 불러다 신하들이랑 함께 즐기는 것뿐이야.”
승마랑 사냥은 언급하지 않았다. 승마는 운동이고, 사냥은 군사훈련이니까. 둘 다 즐거움보다는 의무감에서 하는 거다. 그런데 갑자기 상희의 얼굴에 혐오감이 어렸다.
“장녹수? 장녹수를 불러서 신하들이랑 함께 즐긴다고? 더러워…!”
아차. 장녹수와 연산군에 대해 현대인이 가진 고정관념이 작용했구나. 상희가 이 문제를 더 크게 오해하기 전에 급히 해명했다.
“응? 그런 게 아니야. 걔가 노래를 정말 잘해서 목소리만 들어! 한 달에 한 번 궁에서 공연을 시키고 그걸 보는 거야. 나도 장녹수가 어떤 여잔지 뻔히 아는데, 그걸 궁에 들이겠어?”
“하긴 그건 그렇겠네.”
상희가 아직까지 바닥에 꿇고 있는 자신의 두 무릎을 내려다보며 기운 없이 대답했다. 그리고 두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맥 풀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분명히 연산군이 했을 일들을 안 하는 게 수상쩍어 보이긴 했어. 전국에서 미녀를 뽑지도 않고, 세금도 그전보다 많이 걷지 않고, 개나 말을 모으지도 않고. 갑자기 난데없이 전쟁을 하는가 하면 조선시대 내내 어느 임금도 하지 않았던 남방 순행 따위를 한다고 하고….”
나였어도 상희 입장이면 상황을 의심했을 거다. 그렇기에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상희가 생각하는 바를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난 내가 떨어진 이 세상이 우리가 아는 그 조선이 아니고, 어딘가 다른 차원에 있는 조선 비슷한 다른 나라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이 세계에 사는 연산군은 내가 아는 역사 속 연산군과 전혀 다른 사람이라 하는 짓이 다른 줄만 알았지. 헌데 나처럼 미래에서 왔을 줄이야.”
상희가 한숨을 쉬었다. 나도 그 심정이 이해가 갔다. 나라고 해도, 상희처럼 임금이 내가 아는 역사적 기록과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으면 놀랄 거다. 내가 떨어진 세상이 내가 아는 세계와 다른 곳이라고 생각하지 그 임금도 나 같은 차원여행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잠시 생각에 잠겨 있으려니 이번에는 상희가 질문을 시작했다. 헌데 첫 발언부터 어조가 완연하게 비난조였다.
“넌 아직 나한테 이름 안 가르쳐줬으니까 그냥 연산이라고 부를게.”
기분이 좀 나빠졌다. 물론 내가 이름을 안 가르쳐주긴 했는데 그렇다고 그냥 대놓고 왕의 칭호를 막 불러? 나한테 이름 가르쳐달라고 하는 게 먼저 아냐? 이런 게 기분 나쁜 걸 보니, 아무래도 지난 5년간 갑중갑으로 산 탓에 남들에게 존대를 받는데 너무 익숙해진 모양이다.
“근데 연산, 너 같은 현대인이 왕이 됐는데 왜 이 나라는 달라진 게 별로 없어? 제도도 그대로고, 그 쇠막대기 같은 조총 말고는 기관총이나 폭탄 같은 신무기를 개발한 것도 아니고,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왜 이래? 왜 이렇게 계속 후진국 같은 상태야?”
“그게…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어. 내가 혼자 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야.”
내가 쩔쩔매는 모습을 본 상희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넌 왕이잖아. 왕이 마음만 먹으면 인력 동원해서 이것도, 저것도 다 할 수 있는 거 아냐? 네가 어떤 발명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만 제시하면 전국에서 모인 장인들이 다함께 만들 테고, 네가 바꾸려고 마음만 먹으면 사회제도 같은 건 바로바로 바꿔나갈 수 있잖아.”
상희의 초보적인 현실 인식에 나는 방바닥이 꺼져라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얘가 너무 조선 사회 밑바닥만 경험해서 상층부에서 벌어지는 이념적인 충돌이 얼마나 첨예한지 피부에 와 닿게 인식을 못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상희야. 다 사정이 있어. 발명품만 해도 그래. 내가 미래인으로서 잡다한 것들을 알고는 있지만 난 과학자도, 공학자도 아니란 말이야. 내가 대충 하는 설명만 가지고 어떻게 기술자들이 제작을 해? 너 스스로를 한번 돌아봐. 너도 치료에 필요한 마취약 만들 수 없잖아.”
상희는 아픈 곳을 찔린 탓인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곧 다시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그래, 기술적인 한계점은 그렇다고 하자. 그런데 왜 쉽게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않아? 작년에 한강변에서 집단으로 사형집행 했을 때 생각해 봐. 그거 분명 네가 지시한 거지?”
상희가 지적하는 사형집행 대상은 무오사화로 잡힌 이들이 아니면 배목인 패거리겠지. 양쪽 다 내게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다수가 거열형에 처해졌고 나머지는 참수형이었다.
“그래.”
“난 사형반대론자는 아니야. 그 사회의 기준에 따라 사형을 집행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게 필요 이상으로 잔인할 필요는 없잖아? 듣기만 해도 끔찍해서 차마 직접 보진 못했지만, 사형수들의 사지를 소에 묶어서 찢어 죽이게 했다는 말은 들었어.”
맞는 말이다. 거열형은 끔찍했다. 집행을 명령한 나조차도 표정을 흐트러트리지 않기 위해 전력으로 딴생각을 해야 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내게는 그 형벌이 필요한 이유가 있었다.
“여기는 왕조사회야. 반역이야말로 큰 죄라고. 누구도 옥좌를 넘보지 못하게 하려면 다소 잔인하더라도 시범케이스로 대가를 보여주어야 해.”
“그게 도가 지나쳤다니까? 야만적인 이 시대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사람을 찢어 죽일 수 있겠지. 하지만 넌 현대인이잖아. 인권을 아는 현대인이잖아! 그런데 꼭 그렇게 잔혹하게 사람을 산산조각내서 죽여야 했어? 꼭 죽여야 한다면 그냥 사약을 내리든가 목만 잘라도 되잖아.”
뭐라고 해명해야 하는지 망설여졌다. 우물쭈물하다가 겨우 대답했다.
“그게 다 사정이 있어. 이해해 주면 좋겠어. 여기서 네가 묻는 사항들이 전부 말로 하면 참 쉬운 것 같지만, 거기에는 정치적 한계-기술적 한계-사회적 한계가 다 걸려 있다고.”
나도 하고 싶지만 여건상 못 하는 것들을 가지고 ‘왜 아직도 안 하고 있느냐’고 까대면 버틸 수가 없다. 아니, 상희 스스로도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학 지식을 활용해서 눈앞에 있는 환자를 치료하는 외에 뭔가 새로운 변화를 불러일으킨 게 어디 있을까? 글쎄, 이 뽑는 거?
그러고 보니 상희는 예전 세계에서 무슨 일을 하다 왔는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얘는 어떻게 과거로 넘어오게 되었을까?
“근데 너 한의학은 어떻게 그렇게 잘 알지? 혹시 저쪽에서부터 한의사였어? 아, 이 뽑는 게 아주 능숙하던데 원래 치과의사야?”
내 질문을 받은 상희가 잠시 머뭇거렸다.
“아…나 한의대 나왔어. 학부 졸업하고, 모교 부속병원에서 레지던트 하다가 여기 온 거야. 이는 그냥 이쪽 세상에 와서 처음 뽑아본 건데, 뽑다 보니 늘었어.”
윽, 야매 치과의사였나. 나도 모르게 손이 지난번에 이를 뽑은 자리를 문질렀다. 잠시 씁쓸한 표정을 짓던 상희가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