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752
2부 530화
– 2 –
원정군이 출발한 지 2달. 7월에 접어들자 현지에서 발송한 첫 승첩 보고가 도착했다.
“수군이 주산군도를 순조롭게 평정했단 말이지.”
입부 이순신 휘하에 있는 수군 파견대는 전력을 3:7로 나눴다. 숫자가 적은 별군은 어영담 지휘하에 육군 전력을 호송해서 중경으로 올라갔고, 입부가 지휘하는 본군은 주산군도에 있는 해적들을 소탕하러 나섰다.
주산군도에 있는 해적 숫자도 수천은 넘고, 해적선도 대소 수효를 합치면 수백 척은 된다. 당연히 파견군 전력의 7할이라고 해도 그 병력만으로는 해적 소탕이 어렵다. 주산군도에 있는 섬 숫자는 유인도와 무인도를 합쳐 1천 개는 족히 되고, 지리에 익숙한 편도 저쪽이다.
그래서 애초 계획한 규모보다 병력이 추가되었다. 판옥선은 더 차출할 병력도 없고 힘들여 보낸들 고생만 하겠기에, 남도수군통제영이 직할하는 남만선 중에서 출동 가능한 전선을 모두 투입했다. 남만선으로 제해권을 확보하고 판옥선이 해안 제압과 상륙을 맡는 작전이다.
배수량이 6백 톤에서 1천 톤에 이르는 대형 갈레온 11척이 판옥선 40여 척과 함께 자태를 드러내자 해적들은 나와서 싸울 엄두도 내지 못했다. 입부가 ? 내 사돈인 그 이순신과 혼동을 피하고자 앞으로 입부라고만 불러야겠다 – 보낸 장계는 그 점을 실감 나게 적고 있었다.
「…우리 수군은 먼저 갈래선들로 하여금 보름에 걸쳐 작은 섬들을 돌게 하면서 도적들이 탄 배가 눈에 띄는 대로 찾아 부수었습니다. 배를 타고 바다로 나와서 저항하려는 도적들도 약간 있었으나, 갈래선이 거포를 쏘자 그대로 부서져 가라앉았습니다.
개중에 크기가 작은 적선(賊船)들은 간혹 포격을 피해 접근하기도 하였으나, 함상에서 우리 군사들이 총과 활을 쏘아 백발백중으로 맞히니 지리멸렬하여 흩어져 도망하거나 배를 버리고 바닷속으로 뛰어들어 도망하는 자가 태반이었습니다….」
당연한 결과다. 여러 파벌로 갈라진 해적들이 눈앞에 닥친 위기를 맞아 하나로 뭉쳤을 리도 없고, 제각기 멋대로 대응했을 게 분명하지 않은가. 연합함대라도 조직해서 결전을 시도하지 않는 이상, 저들에게는 해전에서 이길 가망이 전혀 없다.
물론 결전을 벌인다고 해서 놈들이 이길 가망성이 높아지는 건 아니다. 한 번에 적이 너무 많이 나오면 우리 쪽에서도 사상자가 어느 정도 나올 수 있다는 것뿐이지. 혹시 해적선 수백 척 따위한테 질 우리 수군이었다면, 경인년에 이미 일본 수군에게 졌을 거다.
수전에서 쏘아죽인 적의 수는 다 계산할 수가 없고, 붙잡은 포로만 해도 천여 명에 달한다. 싸움에서 불태운 적선이 17척에 나포한 배가 76척, 해안에서 불태운 배가 4백여 척은 족히 넘는다는 보고를 들으니 정말로 뿌듯했다.
해적소굴에 일반 어선이나 상선이 태평하게 정박하고 있을 리는 없다. 그러니 우리 수군이 쳐부순 배들은 모두 해적선이거나 예비 해적선일 게 분명했다.
“그런데 장계를 읽다 보니 이해가 좀 안 가는 부분이 있다. 우리가 주산에 있는 적도(賊徒)들을 쳐서 토벌하겠다 함은 이미 수개월 전에 천자께 고하고 대국 조정에 알리지 않았느냐? 그럼 분명 그 정보가 도적들에게 새어나갔을 텐데 어찌 이리 붙잡힌 배가 많다는 말이냐?”
해적들이 주요 무역항 코앞에 진을 치고 산다는 건, 명나라 수군 전력이 형편없다는 이유만 가지고는 설명이 안 된다. 명나라 정부에서 해적을 토벌하려는 의지만 있다면 마카오에 가서 남만인을 고용하든, 우리한테 원병을 청하든 해서 대책을 강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명나라 측에서는 이 문제의 해결을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이는 명나라 관헌 중에 일부가 해적들과 결탁하고 그 관계에서 이익을 얻고 있다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았다. 당연히 해적들은 금품을 상납하고, 썩은 관리들은 정보를 제공하며 편의를 보아주었을 것이다.
“이제까지 대국 조정이 본격적으로 토벌에 나선 적이 없으니, 설마 그런 일이 있을까 싶어 해적들도 믿지 않은 것이 아닐까 사료됩니다. 전례가 있었다면야 저들도 분명 경계했겠지만. 이제껏 한 번도 대국이 제대로 토벌에 나선 적이 없으니 방심하였을 것입니다.”
내 의문에 신임 우의정 이산해가 차분히 답했다. 이항복이 명나라로 떠나자 그 자리를 맡아 정승으로 복귀한 상황이다.
“대국 관헌 중에도 부도덕한 자가 많으니, 그 폐해가 실로 심각합니다. 적굴(賊窟)을 토벌한 연후에는 그 안에서 찾아낸 모든 증거를 천자께 직보하여, 조정의 녹을 먹는 관리로서 도적과 결탁한 죄가 있는 자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찾아내어 벌주시도록 간하소서.”
“당연한 일이다.”
그 외에 해적들의 소굴에서 찾아낸 재물과 사람은 다 우리 몫이다. 물론 해적들이 납치해온 양민은 구분해서 풀어줘야겠지만, 해적 일당과 그 일가붙이들은 모두 우리 전리품이라고 해도 좋다. 만력제가 굳이 이런 데까지 욕심을 내진 않을 거다. 더 큰 꿀단지가 있거든.
“해적과 결탁한 자들의 명단을 천자께 넘기면, 그 뒤의 처분은 천자께서 하시리라. 우상이 말했듯이, 우리가 할 일은 죄인을 밝혀낼 수 있는 근거를 올리는 것으로 족하다.”
해적과 연루된 자들이 처할 말로는 빤하다. 해적과 결탁해 모은 부정한 재산을 환수한다는 명목으로 전 재산을 빼앗기고 처형되리라. 그 재산을 국고에 넣을지, 만력제가 자기 주머니에 챙겨 넣을지는 나도 모르겠다. 인간이 양심이 있으면 과연 지가 처먹을까 싶기는 한데.
“그럼 조명수군장이 보낸 장계를 계속 읽어보아라.”
조명수군장(助明水軍將)은 입부 이순신을 가리킨다. 수군 파견대 책임자지만, 이번 출병에서 수군의 비중이 그다지 높지 않은 탓에 부원수 직위는 받지 못했다.
「…주산군도 일대를 횡행하는 적선을 진멸한 이후에는 주요 섬에 군사를 상륙시켜서 육지에 남은 잔당들을 소탕하였습니다. 자들은 우리 군의 힘찬 위용을 보고 차마 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하여, 바로 무릎을 꿇고 구명을 청하거나 숨겨둔 배를 꺼내 도주하려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일부 저항하는 자들이 있었으나, 용서 없이 총탄과 화살을 날려 쏘아 죽이니 그 모습을 본 잔적(殘賊)들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였습니다. 배를 몰아서 도주하려던 자들도 섬을 둘러싼 우리 수군에게 붙잡혀 모두 투항하였습니다.
이처럼 다른 섬에 있는 도적들을 신속하게 정리한 후에 비로소 군도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섬인 주산도(舟山島)를 공략하였습니다. 우리 수군이 봉쇄를 완벽히 하지 못하여 일부 도적이 탈출하였음에도 수천 명이나 되는 적도가 있었고, 다른 섬보다 치열한 싸움을 치렀습니다….」
보고에 따르면 주산도에서만 우리 군사 300여 명이 전사했다. 다른 섬을 소탕하면서 발생한 전사자 수를 다 합쳐도 100여 명에 불과했음을 생각하면 우리 쪽에는 상당한 피해다.
“주산에서 가장 큰 섬이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하지만 실로 안타깝구나.”
그래도 성과는 만만찮게 얻었다. 전함으로 섬을 포위하고 소탕전을 벌인 결과 남은 해적과 주민 대부분이 도망가지 못하고 우리 그물에 걸렸다. 사살한 자의 숫자는 세어볼 것도 없고, 이 섬에서 포로로 잡은 자들만 합해도 남녀노소를 합쳐 5천여 명에 달했다.
“개중에 일부는 도적에게 잡혀 온 일반 백성들일 것이다. 옥석을 잘 선별해서 풀어줄 자는 육지로 데려다 풀어주어라. 아직 남은 도적들도 많이 있다고 하였으니, 무고한 자를 풀어주는 모습을 보이면 남은 적을 토벌하기도 더 쉬울 것이다.”
아직 우리 손에 들어오지 않은 섬도 많다. 주산군도에서도 면적이 넓고 거주자가 많은 섬을 골라 먼저 공격했기 때문이다. 우리 수군이 아무리 강하다지만, 1천 개가 넘는 섬을 한꺼번에 제압할 수 있으리라고는 나부터도 기대하지 않았다.
“수군장이 올린 장계에서도 우리 감시를 뚫고 남쪽으로 도망친 자들도 있다 하였습니다.”
“영상의 말이 옳다. 주산도를 함락했다 하나, 토벌하지 못한 적이 아직 많으니 갈래선들은 당분간 귀환하지 말라. 현지에 좀 더 머무르면서 적도들을 제압하고 우리 통치를 안정화하는 일을 돕도록 하라.”
주산도가 함락되고 우리 함대가 눈앞을 오가는 꼴을 보면, 분명 남은 해적들도 동요하리라. 끝까지 저항하다가 목이 매달린 놈들을 보면 더더욱. 그러면 전투 없이 항복하는 놈들도 많을 거다. 되도록 그런 놈들이 많기를 바란다. 모가지보다는 포로가 훨씬 가치가 있지 않은가?
장계 본문과는 별개로 따라온 공적 기록서를 보니 상을 내릴 이들이 참 많다. 용감히 싸워 모범이 된 자, 적을 많이 벤 자, 해적의 큰 무리를 설득하여 투항시킨 자 등등. 병조에 명해서 적절한 상을 정하여 올리라고 명했다. 내가 그런 것까지 다 직접 처리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와 별개로 이항복이 올린 장계를 보니 육군도 순조롭게 중경에 집결하는 중이라고 한다. 명나라 파견군 쪽 일이 잘되어가는 모습을 보니 당분간 마음 놓고 내정에 몰두해도 되겠다. 마침 올해는 작년까지와는 사정이 달라져서 말이다.
– 3 –
천지의 이치는 음양이 화합하는 데 있다. 음이 한 차례 성하면 언젠가, 어디선가는 양이 한 차례 성하여 균형을 맞추게 되어있다. 그게 바로 하늘의 조화다.
왜 이런 소리를 하느냐고? 간단하다. 지난 4년 동안 가뭄을 겪은 이 조선에, 올해는 넉넉한 비가 내렸기 때문이다.
“충청도에는 비가 다소 과도하게 내려서 홍수가 날 뻔하였으나, 그동안 다져둔 보와 제방이 잘 버텨주어 재난을 피할 수 있었다 합니다.”
“장한 일이다. 제방을 잘 관리한 고을에는 적절한 상을 내려서 관장과 이속, 백성들이 모두 기쁨을 나눌 수 있도록 하라.”
5년째 가뭄이 왔으면 정말 큰일 났을 뻔했다. 필요한 국가사업은 아예 멈추지도 못하는데, 구휼 때문에 곡식을 풀다 보니 전국에 있는 비축해둔 곡식도 4백만 석으로 감소한 참이었다. 수입하는 물량으로 조선 백성들이 다 먹기에는 양이 모자랐다.
“비가 넉넉히 내린 덕분에 간척지에서 소금기를 빨리 빼게 되었고, 바닥이 드러난 저수지와 보도 다시 채웠습니다. 혹시 내년에 또 가뭄이 오더라도 넉넉히 버틸 수 있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새어서 버리는 일이 없도록, 보수를 든든히 하여 물이 새지 않도록 하라.”
“예, 전하.”
아아, 정말 마음이 풍요롭다. 경인년부터 을미년까지도 풍년이긴 했지만, 그때는 을미동정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던 탓에 풍년을 순수하게 즐길 수가 없었다. 군량을 비축하고 병력을 조달하며 화약과 구리를 때늦지 않게 들여와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전쟁 준비에 공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 평시 전력으로 유지만 하면서 평화를 즐길 수 있다. 적어도 당분간은.
추석이 지나면서 각지에서 올해 작황이 얼마나 풍요로운지 알리는 장계가 잇달아 올라왔다. 그 장계들을 읽고 있으려니, 지난 5년 동안 가뭄에 시달리면서도 상비군 15만을 유지하느라고 애써야 했던 인고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쳤다. 내색은 안 했지만 정말 괴로웠다.
‘전하, 이제 동정도 마쳤사온데 그만 군사들을 좀 줄여도 되지 않겠사옵니까?’
‘흉년이라 군사들에게 지급하는 녹미(祿米)가 재정에 너무 큰 부담을 주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상비군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도 전란을 잘 치렀사옵니다. 이제 우리 조선을 범할 외세는 어디에도 없사오니, 이제는 부디 군세를 줄이심이 어떨까 하옵니다.’
전간기 ? 경인년과 을미년 사이 시기 ? 풍년 때는 보복전을 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 보복전도 이제 다 끝난 데다 흉년까지 왔으니, 병력을 좀 줄여도 되지 않겠느냐는 주장이 조정 안팎에서 제기되는 건 당연했다.
사실 대규모 전쟁을 치러 승리하고 나면 군비축소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다. 더구나 4년에 걸친 흉년, 현대식으로는 심한 불경기가 끝나지 않는다면 더더욱 군축은 피하기 어렵다. 이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나타난 현상이다. 하지만 이 안에 관한 내 의견은 당연히 ‘거부’였다.
‘우리가 진즉에 충분한 군사를 기르고, 이를 안팎에 드러냈더라면 어찌 다섯 차례에 이르는 변란이 있었겠는가? 지금 우리가 군대를 줄이기 시작한다면 과거에 그랬듯 또 계속 약해지는 길을 걸을 것이고, 주변에서 만만하게 보고 침노하는 일이 반복될 것이다.’
물론 15만 상비군을 농업이나 광공업 같은 생산적인 산업에 전부 투입할 수 있다면 좋기는 하겠지. 내가 땀 흘려 얻은 산물들을 털어먹으러 오는 도둑놈들이 하나도 없다는 전제하에.
내 F4, ‘1유 3이’는 내가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조정 내에서 내게 동조하는 분위기를 잡고, 군축론자들을 설득하는 등 열심히 노력했다. 물론 이들보다 더 강경하게 군축 반대론을 내세운 집단도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세력을 떨칠 기회를 잡은 무관들이다.
상비군의 대규모 팽창은 무관들에게 어마어마한 자리를 보장해주었다. 다섯 차례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위신도 올랐다. 조선 역사 200년 중에, 지금처럼 무관들의 위상이 높아졌던 시절이 없을 정도였다. 당연히 문관들은 불만을 표했다.
‘전하, 나라를 이끄는 길은 문과 무가 균형을 이루되 문이 주가 되어야 하옵니다. 전하께서 지난 10년 동안 지나치게 무에 편중된 모습만 보이셨사오니, 부디 통촉하시고 보위에 오르신 초기처럼 문사와 학자를 소중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제 전쟁도 끝나지 않았사옵니까.’
‘전란이 길고 혹독하였으니 어찌 무를 중요시하지 않겠느냐? 물론 이제 평화가 왔으니 문도 중요하게 여길 것이다. 작금에는 국혼을 맺을 때도 문반 가문의 자녀 중에서 배필을 고르고 있지 않으냐.’
지금이야 문반 가문과 주로 혼사를 맺는다지만, 초창기에는 순전히 무반 가문하고만 혼인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전체 자녀 중 둘째인 정신옹주부터 다섯째인 영창대군까지, 4명이나 무반 가문 자녀와 혼인시켰다. 조선에서 이런 임금도 유례가 없을 거다.
2번째부터 5번째까지 내 사돈들은 순서대로 왜인 출신 무장인 사마유, 말이 필요하지 않은 이순신, 출신은 분명 문관이나 지금 맡은 역할은 무관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권율, 역시 말이 필요 없지만 이미 전사한 신립이다.
성리학에 기반을 두고 나라를 이끌어온 양반 사대부들로서는 이런 변화에 위기감을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다음 차례인 숙정옹주부터는 모두 문반 가문과 혼인했다 해도, 내가 조선을 일본처럼 무사가 지배하는 나라로 만들려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 정도는 가질 수 있다.
이 문제는 앞으로 내가 직접 보여주면서 안심시키는 수밖에 없겠지. 무를 중시하기는 하되 군사정권을 수립하지는 않을 거라고 말이다. 무신정권은 나로서도 부담이 크다.
“그래도 강병을 키워두어서 좋은 점도 있지 않은가? 천자께서 곤란해지시니 우리가 군사를 보내 도울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번 명나라 파병의 특색은 삼사의 반대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황제가 직접 칙사를 보내 청병한 덕분인지, 그 말 많은 간관들이 거의 반대하지 않았다. 가뭄 탓으로 민심이 흉흉하니 많은 군사를 나라 밖으로 내보내기 걱정된다는 정도가 이들이 낸 반대론의 사실상 전부였다.
“어쨌든 올해는 풍년이니, 백성들이 다소 흥청거리면서 보내더라도 눈감아주어라. 고생하며 보낸 지난 10여 년을 위로받아야 하지 않겠느냐?”
내년에 또 가뭄이 올지도 모르지만 그건 내년 일이다. 일단 올해는 다들 풍요로운 가을을 보내면서 쉬도록 하자. 미뤄둔 집안의 큰일도 여유 되는 대로 해결하고 말이다.
진안군도 보냈으니, 이제 다음 차례로 딸내미 둘을 보낼 차례다. 날도 다 잡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