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76
1부 076화
– 1 –
“세 번째 승마라 그런가? 이젠 좀 능숙해졌네?”
“능숙해지긴, 뭘? 이 꼬라지가?”
“말에서 떨어지는 게 능숙해졌잖아. 다치지도 않고.”
상희는 뒤따라온 내 웃음소리를 들으며 풀밭에 일어나 앉았다. 상희를 내팽개친 밤색 말은 50m쯤 떨어진 큼직한 버드나무 옆에 서서 이제 막 돋는 새순을 뜯어먹고 있었다.
“저 말이 저래 뵈도 사복시에서 가장 온순한 말이야. 그런데도 널 내팽개치다니, 엔간히 너랑 안 맞나 보다. 몸집이 작아서 만만하게 보나본데, 모래주머니라도 실으라고 할까?”
“아니, 괜찮아. 그런데 말을 몬다는 게 쉽진 않네.”
내가 말에 탄 채 다가가자 상희가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잠시 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나도 익숙해지는데 서너 달 걸렸어. 매일 한 시간씩 타도 그쯤 걸리더라. 너도 가능하면 자주 나와. 평소에도 타게 아예 말을 한 마리 줄까? 말이 부담스러우면 나귀라도.”
상희가 팔을 뻗어 내 손을 마주잡았다. 등자에 살짝 발을 걸고는 제법 능숙하게 내 뒤에 올라타며 대답했다. 사당패 시절 얻어 탄 경험 덕인지 올라타는 솜씨는 괜찮았다.
“말 돌볼 능력 없어. 우리 집에는 마구간도 없는 거 알잖아.”
상희는 결국 입궁하지도, 내의원으로 옮기지도 않았다. 내의원에 의녀가 아니라 의원으로 들어와도 되고, 그러면 꼭 궁궐에서 살 필요 없이 지금처럼 궐 밖에서 출퇴근해도 된다고 설득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난 지금처럼 일반 백성들을 진료하면서 살고 싶어. 미안해.”
결국 이전처럼 가끔 놀러 와서 만나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다가 떠올린 수가 적당한 명분을 붙여서 왕명으로 상희를 불러들이는 것이었다.
“혜민서에 매우 총명한 소년 의관이 있다 들었다. 지난번 출병에도 종군하여 공을 세웠다 하던데, 과인이 한번 만나보고 싶으니 궁으로 들이라!”
왕명에 따라 상희가 입궁하자 불문곡직하고 그대로 준비시켜놓은 말 위에 올렸다. 그리고 성 밖으로 승마를 나갔다. 겸사복 기병은 평소보다 좀 적은 20명만 동원됐고, 수행하는 신하들도 박원종이나 유자광이 아니라 정호찬과 장호석이었다. 그게 첫 드라이브였다.
“그땐 네가 날 납치라도 하려는 줄 알았었지.”
“어이, 내가 진짜 연산군이냐? 여자나 납치하게.”
여기는 도성 성벽에서 좀 떨어진 풀밭이다. 평소에는 기병들이 훈련하는 연무장(鍊武場)이지만 오늘은 사용 일정이 없이 비어 있었다. 그래서 이쪽으로 승마를 나왔다. 나와 상희가 말을 타는 동안, 호위병들은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 간격을 두고 주변에 흩어져 있었다.
“어때, 내 말 좋지? 5년 동안 용돈 모아서 지른 거야. 정말 마음먹고 외제차 하나 질렀다.”
황금빛 털을 자랑하는 내 한혈마는 뒤에 상희를 더 태운 정도로는 까딱도 하지 않았다. 역시 명마다. 상희가 원체 가벼워서 엉덩이에 타도 무거운 티도 안 나기도 하겠지만.
명마를 타고, 뒤에 여자애까지 태우고 있으니 으쓱거리고 싶어졌다. 실없는 농담이 나갔다.
“너도 아바타 봤지? 거기서 주인공이 이룬 업적 보고 다들 얻은 교훈이 뭔지 알아?”
“뭔데?”
“역시 남자의 생명은 탈것이다!”
“뭐야, 그게.”
상희가 깔깔거리며 내 등을 두드렸다. 물론 저만치 떨어져 있는 겸사복들에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살짝.
“그래서 너도 포르쉐 타는 거야? 나한테는 똥차 주고.”
내 한혈마는 결국 폴쇄(乶鎖)라고 이름을 지었다. 문서와 지도를 뒤졌더니 회령 인근에 볼하진(乶下鎭)이라는 첨사진이 있었는데, 이 ‘볼’자를 ‘폴’로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볼하진을 막아 지킨다’고 ‘폴쇄’라고 지었다. 당연히 이런 이름이 붙은 까닭을 아무도 몰랐다. 상희 빼고.
“이제 그만 내려줘. 내 말 잡아야지.”
상희가 내렸다. 아아, 50m는 짧기만 하구나. 등과 허리에 닿던 감촉이 여전히 살아있는데.
“그만 궁으로 돌아가 봐야 하지 않아? 해가 질 것 같은데.”
어느새 자기 말에 오른 상희가 속삭였다. 나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가야지. 휴우. 그런데 정말 궁에 안 들어올래? 남자로 꾸미고 사는 것도 어려울 텐데.”
“7년을 살았더니 습관이 되서 할 만해. 여차하면 사직서 내고 잠적하지 뭐.”
혹시나 하고 던져본 제안은 역시 거절로 돌아왔다. 역시나 궁에 갇히기 싫은 건가.
궁으로 돌아가는 발길이 무거웠다. 요즘 들어오는 스트레스가 워낙 심하다 보니 머리가 아팠다. 그나마 가끔 이렇게 상희라도 만나면서 위안을 얻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을 지경이다.
– 2 –
“분명히 작년 가을에는 전라도에 풍년이 들었다 하지 않았는가!”
호통 소리가 대전을 메웠다. 내 분노에 직면한 신하들은 아무 말 하지 못했다.
“과인이 순행을 준비할 때, 그리고 길을 나섰을 때 모두 어느 고을에서도 흉년이 들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전라감사가 장계를 올려 ‘본도에 흉년이 들어 곤란하다’니, 이 무슨 망발인가!”
“전하. 이는 전임 감사 안침이 이미 표를 올려 보고한 바 있사옵니다. 작년 9월에 축성을 감해 주십사 하는 표문에서 ‘농사가 부실하니 축성을 감해 줄 것’을 청하였던 바, 축성사 제조 성준이 이를 무시하고 성을 쌓게 하시라 간하였으니 성준을 벌주소서.”
대간들의 지적은 옳았다. 작년 가을에 이미 전라도에서는 SOS 신호가 올라왔다. 하지만 서둘러 군선을 확충하고 도로를 확장할 욕심에 내가 믿지 않았고, 징징대는 감사를 교체한 다음 순행까지 행했던 것이다. 명백한 실책이라고 할 수 있었다.
대간들은 성준을 실책을 저지르게 만든 원흉으로 지목했다. 하지만 그야 나를 직접 공격할 수 없으니 대리로 골랐을 뿐이다. 결정을 내린 건 나고, 임금은 불가침이니까.
“어찌 순행 중에는 흉년에 대한 불평이 없었던 것이냐? 그리고 전라감사는 어이하여 착임한지 석 달이 넘게 지난 이제야 식량 부족 사태에 대한 정식 보고를 올린 것이냐?”
“순행로 공사가 그럭저럭 이루어졌던 이유는 흉년이 전라도 동부에서 주로 영향을 미쳤고, 전하께서 순행을 가신 경로는 거의 전라도 서부로 치우쳤기 때문이옵니다. 이쪽은 흉년도 덜했던 데다가 조창에 비축한 곡식이 있어 순행 준비 및 접대에 사용할 수 있었사옵니다.”
“끄응, 과인이 전라도 백성들에게 고역을 더해주었구나.”
전라도 전체 사정이 저런 줄 확실히 알았으면 순행을 안 갔지. 젠장, 지금 보니 전임 감사 안침이 보낸 경고를 내가 왜 묵살했을까 싶다. 도로를 넓히고 싶다는 욕심에 눈과 귀가 막혔던 모양이다. 할 말을 제대로 한 억울한 안침에게 다른 높은 벼슬을 내려 중용해야겠다.
“기왕 벌어진 일은 할 수 없다. 후회한들, 이미 다녀온 순행을 취소할 수도 없지 않느냐? 일전에 했듯이 백성들에게 삯곡식을 내어주고, 대신 도로 정비와 저수지 축조 같은 사역을 진행하도록 하라. 전년도에 충청도에서 그리했듯이 말이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시킬지는 전라감사가 예하 관장들과 의논해 정하면 된다. 중앙정부에서 그런 것까지 다 지시해야 한다면 사또가 뭣 하러 있나? 떼먹지만 말고 성실히 일해라.
“전하, 경기감사가 보낸 장계이옵니다.”
“뭐라고 적혀 있느냐?”
젠장, 흉년 때문에 고생하는 지역이 전라도만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잠시 잊었다.
“새해 농사를 지으려면 소를 부려 밭을 갈아야 하는데, 작년 농사가 흉작이었던 탓에 소에게 먹일 콩이 없으니 경창에 있는 콩 2만석을 경기도 각 고을에 풀어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해주십사 하고 있사옵니다.”
깊은 한숨밖에는 안 나왔다. 그래, 그래도 경기도에 흉년 들어서 힘든 건 알고 있었지.
“호조에 일러 경기감사가 청한 대로 콩을 내주게 하라. 경기도는 도성 인근이니, 경기도의 농사가 잘 되어야 도성 민심이 안정되지 않겠느냐. 다만, 행여라도 이속들이 나라에서 내린 콩을 횡령하는 행위가 적발되면 그자들을 모두 닭모이로 만들리라.”
백성들보다는 경기도에 땅을 가진 조정 관료들의 인심 쪽이 문제지만. 아무튼 지주가 누구든 농사가 잘 되어야 직접 농사를 짓는 백성들도 몫이 늘어난다.
“전하, 편전으로 납실 때가 되었사옵니다.”
“벌써 말이냐?”
승지들의 보고를 받으며 일처리를 지시하다 보니 또 회의 시간이 되었다. 대간들, 대신들을 앞에 놓고 끝없는 잔소리를 들어야 한다. 스트레스로 무거워진 몸을 가까스로 일으켰다. 또 한바탕 논전을 벌여야 할 테니, 발걸음이 무겁다.
– 3 –
“전하. 평안도 절도사 박원종에게 ‘어미가 늙었으니 직책을 내놓고 부임하지 않아도 좋도록 허락한다’고 하셨는데, 이는 심히 잘못된 처사이시옵니다!”
“노모를 봉양하겠다고 하직하는 사례가 허다한데 어이 그리 잘못되었단 말이냐?”
내 측근 무장 중 하나인 박원종은 조정 중신들의 압도적인 추천으로 평안도 절도사로 뽑혔다. 그랬더니 겨우 이틀 만에 노모를 모시고 싶다는 장계를 올려 사직을 청했다. 이에 대해 사헌부 장령 및 지평들이 반발하여 이의를 제기하고 있었다.
“평안도 절도사란, 야인을 막아내면서 대국과의 관계에도 신경을 써야 하는 중요한 직책입니다. 박원종은 애초에 그 품계를 더하여 주면서까지 그 자리에 올렸는데, 어찌 멋대로 그만두게 하십니까? 더구나 박원종의 모는 실제 나이가 많지도 않다고 들었습니다.”
아 좀 적당히 해! 박원종은 내 옆에 두고 굴려야 한단 말이다. 올 가을쯤에 펼칠 토벌전을 준비하면서 내 옆에 놓고 부릴 사냥개를 함부로 외지에 내보낼 수는 없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지금 대간들에게 털어놓을 수는 없지만 말이다.
“박원종의 어미는 나이가 많지 않을지는 모르나, 지금 병중이라 몸이 좋지 않다고 들었다. 아들이 어머니를 모시겠다는데, 그리 심하게 따질 필요는 없지 않느냐?”
“무신은 젊고 용력이 강할 때 그 힘을 쓰도록 해야 합니다. 지금 직책을 수행하게 하지 않는다면 후에 그 어미는 더 늙을 것이고 원종 본인도 늙을 것이니 어찌 그 힘을 나라에서 쓰겠습니까? 청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박원종의 청을 받아들이지 마시옵소서.”
평소라면 부모를 모시러, 상을 치르러 관직을 버리겠다는 신하를 임금이 말리는 수순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었겠지. 하지만 지금 일은 대놓고 내가 뒤에서 꾸민 일이다 보니 관계가 역으로 성립되었다. 내가 효를 핑계로 사직하는 신하를 옹호하고 있다니, 젠장.
“어미의 병 때문에 장수가 임무에 몰두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상황이겠느냐? 원종의 어미가 그리 나이가 많지는 않다고 하나, 지금 병을 앓고 있음은 분명하다. 병든 어미를 모시겠다는데 안 된다고 할 수는 없으니, 간언은 가납할 수 없다.”
박원종의 사표를 수리하는 데 대한 항의는 며칠을 두고 이어졌다. 여기에 더해서 박원종의 후임자를 놓고도 논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하, 평안도 절도사를 전임(田霖)으로 하여 박원종의 후임으로 삼으심은 안 될 말입니다. 전임은 그 성격이 잔혹하여 선왕 때 부하를 때려죽여 면직된 바가 있사옵니다. 어찌 그러한 이를 또 절도사로 올린단 말입니까?”
내가 고른 전임은 훌륭한 무장으로 알고 있다. 용맹하고 군사를 움직이는 솜씨도 좋을뿐더러, 노사신이 생전에 극히 칭찬한 장수이기도 했다.
“일전에 노사신이 전임에 대해 평한 바 있다. 청렴하고 위엄이 있어 야인들이 두려워한다고 말이다. 또한 형벌이 가혹할지언정 공평하다. 과인은 선왕께서 승하하셨을 때 전임이 아들을 때려 손톱이 빠졌을 때도 중신들이 옹호하여 아무 일 없이 넘어갔음을 기억하고 있다.”
죽은 노사신, 그리고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윤필상이 그때 전임을 변호한 당사자였다.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보니 윤필상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좋다. 전임이 아니 된다면, 정승들이 나서서 다른 장수를 추천해 보라.”
잠시 서로 시선을 교환하던 노대신들이 하나씩 후보를 내놓기 시작했다. 윤필상은 맨 먼저 자신은 빠지겠다는 뜻을 표했다.
“신이 평안도 도원수를 맡았을 때 거느렸던 장수들은 이미 다 죽었거나 늙어 쓸모가 없습니다. 청컨대 다른 이들이 중의를 모으도록 하소서.”
전 영의정이자 거창부원군 신승선은 충청수사 우현손을 추천했다.
“우현손은 쓸 만한 인물이니 가자하여 절도사로 임명하면 감복하여 충성할 것입니다.”
탈락. 이번 순행에서 확실히 봤는데, 그 양반은 수군에서 써야겠어.
“신은 최근 회령부사에서 돌아온 김윤제를 추천하나이다. 변방의 사정에 능통할 뿐 아니라 기상과 체격이 웅장하고 커서 변방을 맡기는 장수로 쓸 만하옵니다.”
영중추부사 정문형의 추천은 나쁘지 않았다. 다만 그를 보니 다른 의미로 빡이 쳤다. 지금 어리버리한 일처리로 내 화를 돋운 전라감사 정숙지가 바로 정문형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순전히 아버지 빽으로 감사까지 출세한 놈 같으니.
우의정 성준과 영의정 한치형은 지금 평안도 절도사를 맡고 있는 이조양을 유임시키자고 청했다. 무난한 선택이지 싶긴 하지만, 이조양은 군사기밀을 여러 차례 흘려버리는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교체 여론이 나온 것이기도 하니, 역시 탈락이다.
“김윤제를 평안도 절도사로 임명하겠으니 즉시 부임토록 하라. 올해 평안도에도 흉년이 들어 상황이 좋지 않다 하니, 군사를 과연 예정대로 낼 수 있을지 철저히 살피게 하라.”
“예, 전하.”
여건만 되면 소규모라도 나가서 꼭 치고 올 테다. 압록강 방면이 흉년 때문에 정 곤란하면 두만강 쪽이라도 한번 군사를 내야겠다. 그쪽은 명나라도 경계를 덜 하니, 지속적으로 공세를 펼쳐 거기 사는 놈들이 알아서 기면서 공물을 바치게 만들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