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769
2부 54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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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군(助明軍) 군사들의 본국 귀환은 7월 말부터였다. 수군과 외수사가 동원한 남만선과 조운선 등 가용한 선박들이 모두 동원되어 열심히 동중국해를 오가며 군사들과 포로, 병기와 전리품을 수송했다.
물론 ‘동중국해’라는 이름이 저 바다에 정식으로 붙은 건 아니다. 내가 속으로 생각할 때나 편의상 구분하는 이름일 뿐, 조선 조야에서는 그냥 ‘남해(南海)’라고 부른다. 한반도 남안에서 대남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바다가 그냥 ‘남해’다.
물론 주변국들이 전부 이 바다를 우리와 같은 이름으로 부르지는 않는다. 명나라는 ‘대명해(大明海)’라고 부르고, 유구에서는 ‘유구해(琉球海)’라고 부른다. 일본은 ‘사쓰마 해(薩摩海)’로 부른다고 들었다.
지금부터 잘해나가면 장래에 이 바다의 국제적인 명칭을 ‘남조선해(南朝鮮海)’ 정도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동해는 당연히 동조선해, 서해는 서조선해로 부르고 말이다. 다만 서해 쪽은 자연적인 환경 문제가 걸리니 국제적으로 ‘황해’ 쪽이 계속 쓰일 수도 있겠다.
명나라가 망하고 중국이 분열되면 당연히 대명해라는 명칭은 허공으로 날아간다. 게다가 그 주변을 둘러싼 대남?유구?규슈가 전부 우리 영향권에 들어가는 만큼, 그 바다를 공식적으로 남조선해라고 박은 지도를 발행하면 그만 아닐까.
“이제 우리 군사 절반이 돌아왔습니다. 전군이 철수를 마치려면 9월까지는 걸릴 듯합니다.”
돌아오는 길에 필요한 배가 갈 때보다 많고 시간도 더 걸리는 건 당연하다. 추리고 추려서 좋은 것만 남겨놨지만 그래도 전리품 양이 상당했고, 데려올 포로 숫자만 따져도 수만 명이나 되기 때문이다. 아직 현지에 남아 있는 포로 숫자만 해도 원정군 병력과 맞먹었다.
“어쩔 수 없지. 일전에 명한 대로 의군(義軍)부터 먼저 데려오고, 의군이 모두 철수한 뒤에 마지막으로 경군을 데려오도록 하라.”
출정할 의무가 없는데도 스스로 자원해서 종군한 이들은 마땅히 먼저 집으로 돌아올 자격이 있다. 직업군인이 당연히 마지막에 남아야지. 그러라고 받는 봉급 아닌가?
이항복 이하 총사령부 인원들도 당연히 이순신의 전례에 따라 최후미로 귀환한다. 전쟁터에 나갈 때는 선봉에 서지 않더라도, 돌아올 때는 맨 뒤에 서는 게 수뇌부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뒤에 남아 온갖 행정사무를 처리하고 뒷정리를 하는 것도 지휘부가 할 일이다.
“왜군의 철수는 어찌 되고 있는가?”
“그쪽은 8월 말까지는 마무리될 것이옵니다.”
왜병들은 조선군과 별도로 일본으로 바로 귀환하는 중이다. 무네시게를 비롯한 몇몇 장수는 한양에 들러서 내게 따로 포상을 받을 예정이지만, 다른 병사와 포로들은 규슈로 직행한다. 우리 배가 부족한 관계로 오공충을 비롯한 중국 상선 다수가 이 사업을 수주했다.
일반적인 사례라면 일본 상선들이 일본군 귀환병력과 포로들을 데려가는 게 맞겠지만, 일본 해운업계 ? 참 현대적인 용어 사용이군 ? 상황이 아직도 엉망진창이라서 그게 안 되고 있다. 5년에 걸쳐서 벌어진 전쟁으로 거의 모든 대형선이 씨가 마른 탓이다.
선단을 재건하려고 해도 산림자원이 모자란다. 물론 일본 전역의 산이 민둥산이 될 정도로 나무가 고갈된 건 아니지만, 일본을 제패하는 패자가 된 이에야스는 외항선 건조 따위에 귀한 목재를 ‘낭비’할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해삼위를 통해 사들여가는 목재도 대부분 건축용으로만 쓰고 배는 짓지 않는다고 하였지? 왜인들이 스스로 배를 만들지 않으니, 우리로서는 반가울 따름이다. 교역에서 나오는 이익이 대부분 우리 손에 떨어지지 않느냐? 게다가 왜구의 위협에 떨 일도 없으니 좋구나.”
현재 일본이 보유한 수군은 이에야스 휘하에 있는 막부 직할 수군이 유일하다. 규모는 대소 함선을 합쳐서 약 200여 척으로, 세키부네 70척가량과 그 2배쯤 되는 고바야로 구성돼 있다. 아다케부네는 한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 숫자를 보유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전란을 치르고 어떻게 용케 살아남은 배들이다. 몇 차례 해전에서 도망쳐서 숨어 있던 각 수군 집단의 배들이 전쟁이 끝난 뒤에 기어 나와 도쿠가와 군 예하에 편입되고, 각지의 항구에 주둔하면서 해적 단속 등 치안 유지에 주로 투입되고 있다.
이에야스는 지난 6년 동안 ‘군선’을 전혀 건조하지 않았다. 아니, 어부들이 생계용으로 모는 소형 어선 외에는 일본 전역에서 중대형선박 신규 건조가 거의 끊겼다. 덕분에 네덜란드 쪽의 지원을 받는 강경상인들과 제휴한 내상이 일본에서 물자 운송으로 짭짤한 재미를 보고 있다.
이에야스가 배를 안 만드는 이유야 뭐 여러 가지다. 조약으로 해군 재건을 금지하면서 우리 수군과 해군력 경쟁을 계속할 필요가 없어진 게 가장 크고, 수군 재건보다 불타버린 도시와 마을을 복구하는 게 더 급한 탓도 있으리라.
배가 없어서 국내 교역도 우리 상선이 없으면 못 할 판이니, 외양으로 나오는 왜구 따위는 꿈도 못 꾼다. 우리 수군이 벌인 해민 소탕으로 살길이 막막해진 일부 바닷가 왜인들은 우리 상단에 들어와 배를 타면서 입에 풀칠하는 지경이다.
이에야스가 언젠가는 상선단을 복구할지, 아니면 이대로 계속 갈지는 나도 모르겠다. 양측 중간지대인 규슈쯤에서 정상회담이라도 한번 하면서 속뜻을 알아봐야 하려나?
솔직히 지금 조선에서 그나마 ‘동등한 외교’를 하는 상대도 이에야스밖에 없다. 유구는 함께 중국에 조공하는 처지라는 데서 동질감이 있고 격도 맞지만, 명나라 조공국이라는 점 때문에 도리어 자유로운 교류에는 제한을 받는다.
이에야스는 ‘정이대장군’ 직위만 가진 상태라서 격으로는 고레미쓰에게 밀린다. 하지만 일본 내에서 실제로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진짜 일본을 다스리는 군주는 혼자 제사나 지내는 왜황도, 책봉을 받았다는 격만 같지 실제로는 내 허수아비인 고레미쓰도 아니다. 이에야스다.
규슈 최강의 세력인 ? 조선령 구주가 본국에서 지원을 받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 시마즈도 고레미쓰가 아닌 이에야스에게 고개를 숙이는 현실을 생각하면, 이에야스를 고레미쓰 밑으로 취급하는 건 바보짓이다. 둘을 동등하게 대하는 편이 현명하다.
한 번쯤 이에야스를 직접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있기는 하다. 북쪽에 있는 누르하치는 이미 무자년에 만났으니까 남쪽에 있는 이에야스도 한 번쯤 만나서 나쁠 건 없겠지. 문제는 그렇게 큰 전쟁을 치르고 나서 회담 따위를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안 지났다는 점이랄까.
일본에 대한 원한은 을미동정으로 갚았지만, 백성들이 품은 분노까지 다 해소됐다고는 말할 수 없다. 백성들이 일본을 그저 평범한 이웃 나라로 보게 되려면 시간이 한참 더 필요하리라. 조일 정상회담 추진은 그게 이루어진 먼 훗날의 일로 일단 미뤄두자.
– 17 –
아직 단풍은 안 들었지만, 향원정 주변 풍광이 무척 아름답다. 얼굴을 스치는 가을바람도 대단히 시원하다. 옆에 앉은 상희가 내 얼굴을 보며 웃었다.
“요즘 많이 바쁜가 봐. 얼굴 보기 힘드네.”
“명나라 지원군 철수시키고, 가뭄대책 마련하느라 좀 바빴어.”
올해는 전국적으로 가뭄이 들었다. 다행히 작년에 모아둔 물이 있어서 농사에 크게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다. 덕분에 나도 상희와 이렇게 편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가뭄대책이라고 해도 식량을 수입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올해 수확으로 비축은 좀 어려워도 한해 버티는 정도는 충분하다. 가뭄이 심했던 그때 4년 동안 공공근로로 수리시설을 확충해둔 덕분에 그 과실을 크게 맛보았다.
명나라 파병군 철수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예정대로 이번 달 말이면 사령부 인원들도, 이항복과 더불어 진안군도 돌아온다. 오늘 상희를 불러낸 건 마음 편히 진안군 이야기를 할 겸 해서이기도 하다.
“요즘 욱이한테 오는 편지 보니까 나름 뭔가 결심을 하긴 한 모양이야.”
어설픈 계획을 편지에 적었다가 혼날까 봐 무서운지, 뭘 하겠다고 대놓고 명시하지 않고 좀 막연하게 썼다. 글을 지어서 후세에 이름을 남기고 싶다…고 적었던데, 이게 명문장가가 되고 싶다는 소리인지 명필이 되고 싶다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둘이 똑같은 건 아니니까.
“우리, 의원이 되겠느냐는 이야기는 돌아오면 해보기로 했지? 학문이건 의원이건, 본인이 하겠다는 일로 시키자.”
“그래야지 뭐. 난 둘 다 한다고 해도 상관없어.”
의원이 된다고 해도 마음껏 글 짓고 서예 하면서 사는 데 아무 지장 없다. 진료시간 끝나고 자기 남는 시간에 하면 되니까. 그리고 진안군이 의원이 된들 어디 그게 진짜 의원이겠는가? 의시 보고 난 다음에 집에서 놀겠지. 개업하겠나, 다른 의원에서 봉급 받고 일하겠나.
상희는 국립의료기관을 하나 설립해서 그 장으로 앉혀달라고 했지만, 그것도 솔직히 많이 어려운 일이다. 정부조직에 새 기구를 추가하려면 신경 쓸 게 많다. 창립에 들어가는 비용은 기본적으로 조달해야 하고, 여기에 관직 정원 조절까지 얽힌 문제다.
“그러고 보니 극장 건물 완성됐던데, 극단 모집은 잘 되고 있어?”
잉글랜드 목수들이 상희의 주문에 따라 지어놓은 극장은 셰익스피어 글로브 극장처럼 생긴 원형이었다. 이렇게 동그란 건물은 도성에 존재한 적이 없으니, 단연 시중의 화제가 되었다.
“저거, 남대문보다 높겠으이.”
새 극장은 땅바닥에서 지붕 꼭대기까지 높이가 거의 4장(40자, 약 12m)에 달했다. 금화군 군사들이 올라가 망을 보는 망루를 빼면 도성 안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다.
“저리 높은 곳에 올라가 사방을 내려다보다니, 궁궐도 발밑에 두고 내려다보는 게 아닌가? 저런 불경한 건물을 그대로 내버려 두어도 되겠는가?”
커피잔을 앞에 두고 벌어진 열변은 도를 더해 갔다. 옆방에 내가 변복하고 앉아 있는 줄도 모르고 토론에 빠진 몇몇 성균관 원생들이 한층 더 격렬하게 언성을 높였다. 역시 이항복이 추천한 이 방은 옆방에서 떠드는 소리가 아주 잘 들렸다.
“그래, 그 큰 집은 대관절 무엇을 하는 곳인가? 그 둥근 모양도 특이하지만, 외벽에 창문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면 사람 사는 집으로 만든 건 아닌 모양인데.”
바로 그 ‘궁궐을 내려다보는’ 문제 때문에 원래 설계에 포함되어 있던 창문을 안 만든 거다, 이 녀석들아. 혹시 거기에 저격수라도 올라가 있다가 날 겨누면 곤란해지거든.
반촌다점과 그 옆에다 신축한 반촌극장 모두 현대의 대학로 위치에 있다. 창덕궁 담장에서 동쪽으로 300m 정도밖에 안 떨어져 있다. 그만하면 자객이 숨어서 궁궐 방면으로 총을 겨눌 수도 있는 거리다. 위험은 마땅히 최대한 줄이는 게 옳지 않은가.
물론 자객이 지붕 위에 올라가지 말라는 법도 없지만, 지붕 위는 바깥에서 감시하기에 건물 안쪽보다 훨씬 낫다. 지붕 위에 망루를 설치하고 금화군을 상주하게 해서 화재감시 겸 지붕에 누가 올라오지 못하게 감시하라고 하면 그만이다.
“금화군이 올라갈 새 망루가 아닌가?”
“높이야 그렇다 치고, 건물이 너무 크네. 군사 2개 중대는 거처하고도 남을 듯한 큰 건물을 순전히 망루로 쓰고자 만든다는 게 말이 되는가?”
성균관 관생이 인원수를 비교하는 기준이 군대 편제라니, 알게 모르게 조선에 군사문화가 퍼지고 있긴 한가 보다. 다 군대를 갔다 와서 그렇다.
을미동정 이후, 성균관 관생들은 전쟁터에 안 가도 된다. 향도 제도도 순조롭게 정착해서, 이제 모든 정규군에는 대대당 향도 1명씩은 아예 정규 보직으로 다 들어가 있다. 굳이 성균관 관생들을 옛날처럼 편제에 없는 서기관 보직을 만들어 집어넣지 않아도 편지 읽어줄 수 있다.
하지만 성균관 관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군복무 제도 자체는 없어지지 않았다. 일단 성균관 합격자 상당수가 군복무 경험이 없고 ? 의무병역(?)은 겨우 지금 18세가 되는 애들부터니까 ? 속오군 훈련만 적당히 받은 경우가 태반이다. 그럼 ‘학사장교’ 노릇이라도 제대로 해야지.
경인년?을미년에 향도로 정식 출진하지 않았거나 속오군으로 싸워 공을 세운 기록이 없고, 40세가 안 되는 성균관 원생들은 1년 동안 오군영 예하 부대에서 향도 보조원 노릇을 해야 한다. 뒤늦게 합격한 자들도 마찬가지다.
의무병역이 된 1년 군복무를 마친 자들은 아직 성균관에 합격한 사례가 없다. 앞으로 그런 원생이 들어오면 이 제도는 아마 사라지게 되리라. 애초에 설립 의도부터가 절반은 세상을 잘 모르는 ‘도련님’들이 군복무를 통해 일반 백성들과 얽히게 하려는 데 있었으니까 말이다.
“금화군이 안에 주둔할 거였으면 차라리 창문이 있었겠지. 사방 벽이 전부 매끈하게 회칠이 되어있으니 도저히 사람이 사는 건물은 아닐세. 혹시 창고가 아닐까?”
“그것도 아닐세. 내가 저기 공사에서 일했다는 목수와 친하게 어울린 동무가 있는 우리 집 하인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복잡도 하다. 뭐, 잉글랜드인 ? 길어서 귀찮다. 그냥 영국인이라고 불러야겠다. – 목수들만 가지고 공사를 전부 끝내긴 어려워서 건설 과정에 조선인 목수들도 많이 참여시켰기 때문에 그중에 가볍게 입을 놀린 자가 있기는 하리라. 과연 뭐라고 지껄였을까.
“사당패가 재주 넘는 모습을 보일 거라 하네. 그리고 창극도….”
“망측한 일이로고!”
혀를 차며 개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한참 더 비판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굳이 여기 버티고 앉아서 더 들을 필요는 없었다.
“돌아가자.”
“예, 나리.”
한주동도 이제 내 암행을 따라다니는 게 매우 익숙해졌다. 날 부를 때도 실수하지 않는다. 전장에 두 번이나 다녀오면서 담대해진 데다 무예도 능숙해져서, 이제 전혀 애송이가 아니다. 꼭 예전 다지랑 다닐 때만큼 든든하다.
딱 한 가지 유감이라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건장한 사내라서 다지 때처럼 상대방이 이쪽 실력을 얕보고 방심하게 만들 수 없다는 정도랄까. 한주동이 주먹을 쥐고 나서면 상대편이 몇 명이든 일단 쪼는 게 눈에 보일 정도니까 말이다. 실제로 싸울 일은 거의 없다.
“벌써 소문 꽤 퍼졌더라고. 공사 진행한 목수들이 까발린 것 같아. 사당패들이 도대체 무슨 공연을 하는지, 그건 다들 모르지만.”
셰익스피어 때문에 지은 극장이지만 첫 공연은 셰익스피어가 아니다. 허균에게 작품 번안을 의뢰했더니 자기 작품도 아닌 남의 작품을 번안하기는 싫다고 대놓고 거절하는 게 아닌가.
‘이 몸이 비록 재주가 뛰어나지는 않으나, 명색이 선비입니다. 그런 제가 어찌 다른 이가 쓴 글을 고치는 일로 이름을 높이겠습니까?’
‘좋다. 그럼 네가 쓴 글로 셰익스피어 같은 작품을 만들어 보아라.’
그래서 반촌극장에서 막을 올릴 첫 상연작은 최근에 조보 연재를 마무리한 홍희동전 1부가 되었다. 허균의 자존심 덕분에 조선에서 상연되는 첫 연극이 번안작이 아니라 순수한 창작극 공연이 되었으니, 역사적인 의미로는 더 좋은 결과인 셈이다.
“대본은 단원들한테 넘겼고, 연습 시작했어. 동짓날쯤에는 공연하는 게 목표야.”
“동지면 두 달 반 남았네.”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날이니까 나름대로 의미 있긴 하네. 공연하게 되면 나도 변복하고 보러 갈까 보다. 상희랑 동반으로는 어려우려나? 중전도 한번 데려가도 좋을 것 같은데.
“그런데, 전에 이야기하던 그 다른 사업은 또 뭐야? 다점이랑 극장 자리 옆에 건물 하나 더 준비하고 있는 거 봤어. 혹시 다점 2호점이라도 내는 거야?”
그동안 바빠서 상희 침소를 꽤 오래 못 갔다. 상희뿐만이 아니라 다른 후궁전에도 한 달쯤 발길을 끊었었다. 그러다 보니 물어본다는 게 그만 깜박 잊고 있었다.
“응, 다점 2호점은 아냐. 주점 열려고.”
“주점?”
술집? 분위기 망할까 봐 일부러 다점에서 술도 안 팔더니, 술집을 별도로 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