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771
2부 549화
– 20 –
이항복이 내게 가져온 깜짝 선물은 판다 1마리가 전부가 아니었다. 그 뒤에 늘어선 수레의 포장을 연달아 젖히자 내가 분명히 알고는 있는, 하지만 지난 수십 년 동안 보지 못해서 존재 자체를 까먹고 있던 동물들이 연이어 나타났다.
먼저 나타난 건 황금빛 털을 가진 손오공 원숭이 한 무리였다. 수컷이지 싶은 덩치 큰 놈 하나에 암컷 네 마리. 두꺼운 천을 덮어 가려놨다가 햇빛을 보게 해주니 깩깩거리면서 난리가 났다. 용케 그동안 참고 있었구나 싶다.
세 번째 우리에는 조선 표범과 명확히 다른 외양을 한 구름표범이 1마리 들어앉아 있었다. 조선 표범의 점박이 무늬와는 확실히 다른, 구름 같은 문양이 박힌 털을 가지고 있다. 작년에 대남도에서 바친 놈보다는 확실히 좀 더 큰 듯하다. 본토에 사는 놈이라 그런가?
네 번째는 커다란 껍질만 봐도 알아볼 수 있는 양쯔강대왕자라 1마리, 다섯 번째는 여섯 자 정도 되는 큰 악어 1마리가 연달아 자태를 드러냈다. 이놈들을 실은 수레에는 큰 상자를 얹고 물을 채워 놓았다. 이 녀석들, 기후가 전혀 다른데 과연 조선에서 무사히 키울 수 있을까.
“전하께서 신기한 짐승을 좋아하시기에 사천과 장강에서 눈에 띄는 것 몇 마리를 잡아다가 가져왔습니다. 마음에 드시면 좋겠습니다.”
“고…고맙도다.”
양쯔강에는 대왕자라와 악어 말고 돌고래도 서식할 텐데…. 이항복이 돌고래도 잡아 오지는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다. 아마 악어랑 자라 정도는 물통에 넣고 올 수 있어도 돌고래까지는 무리였던 모양이다.
“그 뒤에는 새도 하나 있습니다.”
이항복이 뒤쪽에 있는 마지막 수레를 가리켰다. 그 안에는 전신에 색색의 아름다운 깃털이 돋은 금계(金鷄) 한 무리가 짹짹거리고 있었다. 저거, 할아버지가 키우시던 그놈들이군.
“저것들은 불을 몰고 날아 화재를 막고 재앙을 쫓아내는 힘이 있다 합니다. 또한, 약재로도 명성이 높다 하니 궁에서 키우게 하다가 전하께서 편하실 때 수라상에 올리라 명하소서.”
“…그대의 정성이 실로 대단하다. 고맙구나.”
정말 세상이 바뀌었구나. 성종 때는 일본에서 선물로 보내준 원숭이나 새도 신하들의 반발 때문에 키우지 못하고 돌려보내야 했는데, 이젠 내 신하가 스스로 신기한 외국 짐승을 잡아다 바칠 지경이 되다니.
물론 이항복은 내 신하라기보다는 친구 쪽에 더 가까운 사람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항복이 내가 아는 전형적인 조선 사대부로서 행동했다면, 저런 ‘쓸모없는 짐승’을 배에 싣기보다는 그 공간에 쌀 한 되라도 더 실어왔을 거다.
“짐승들은 일단 응방으로 옮겨 돌보게 하라. 추후에 처리할 방안을 논하겠다.”
응방(鷹坊)은 내가 사냥에 쓰는 매와 개를 사육하는 기관이다. 연산군 때 이후 규모를 줄인 기간은 있어도 사냥을 완전히 끊은 적은 없었기에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지금 위치는 경복궁 바로 서쪽, 인왕산 수성동 계곡 밑에 있다.
현재 응방에서 사육하는 사냥개는 백 마리, 사냥매는 서른 마리쯤 된다. 요즘 그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녀석은 아들이 돌아온 기념이라면서 최근 누르하치가 헌상한 날개폭이 여섯 자나 되는 커다란 검독수리다. 길도 잘 들어서 정말 최고다.
응방에서는 개랑 매만 키우는 게 아니다. 견서사에 딸려 보낸 호랑이가 그랬듯이 사냥에서 생포했거나 누르하치의 독수리처럼 선물 받은 갖가지 야생동물도 키운다. 지금 우리에 있는 놈들만 해도 표범, 불곰, 공작새 등 20여 마리쯤 된다. 공작새는 나레쑤언이 보낸 거다.
조선 천지에서 야생동물 사육이라면 가장 풍부한 노하우를 갖춘 곳이 응방이다. 공작새를 키우느라 온돌을 깐 사육실까지 만들어놨으니, 대왕자라나 악어를 키우기에도 좋다. 원숭이나 판다는 원래 산꼭대기에서 사는 놈들이니 겨울이라도 굳이 온돌방에서 키울 것까지는 없겠지.
그나저나 판다를 건사하려면 골 깨지겠구나. 시들지 않게 처리한 죽순과 댓가지를 담양에서 매일 역마차로 실어와야 할 판이니…차라리 그냥 잡아먹고 치울까?
하지만 신하들은 나하고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신하 중 가장 높은 좌의정 이원익부터가 판다를 보고 찬탄을 참지 못했다.
“실로 신기한 짐승들입니다. 곰은 본래 상서로운 동물로, 단군의 모친이 곰이었으며 가락국 왕비 허황옥이 곰을 얻은 꿈을 꾸고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낳았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백색은 서방을 뜻하며 흑색은 북방을 뜻하니, 흑백이 한몸에 있는 곰을 얻었음은 장차 우리 조선이 서쪽과 북쪽을 향해 이름을 떨치리라는 징조가 아닐까 합니다.”
서쪽은 유럽이고 북쪽은 시베리아인가? 그런데 사천의 대나무숲 속에는 판다가 수천 마리는 남아 있을 텐데, 저게 무슨 상서로운 동물이냐? 그냥 희귀한 동물이지. 그나저나 이원익부터 저러고 있으니 잡아먹기는 틀렸구나.
“저 커다란 자라는 구토지설(龜兎之說)에 나오는 용왕의 사자인 듯합니다. 저 정도 크기는 되어야 용궁과 육지를 오가며 토끼를 태워가지 않겠습니까. 실로 상서로운 동물이니 바다에다 다시 풀어줌이 어떠할지요.”
“자라는 뭍에 있는 물에서 사느니라. 바다에 풀어주면 죽을 게다.”
사전청에서 부정(副正)을 맡고 있는 허균은 대왕자라를 보고 뭔가 필이 꽂혔는지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이번에는 누가 악어나 원숭이를 가지고 또 이상한 소리를 할지도 모르니, 자리를 어서 옮겨야겠다. 술이 들어가면 다들…아니, 더한 헛소리가 나오려나?
– 21 –
개선식에 참가한 군사들에게는 성문 밖에 거나한 술자리를 베풀어 공을 치하했다. 의병이나 지방군 중 공이 큰 자들도 따로 불러올려 개선식에 참여하게 했기에, 경군만을 위한 잔치는 아니었다. 아직 9월 말이니까, 남대문 밖 용산벌에 잔칫상을 차려도 무리는 없었다.
장수들은 당연히 군사들과 별개로 자리를 마련했다. 명나라에서 돌아온 대대장급 이상 장수 전원, 그리고 조정 중신들이 모두 경회루에 모였다. 푸짐한 술과 음식이 이들을 맞았다.
“마음껏 들라! 이번 출병은 단순히 도적을 무찌른 것이 아니라, 감히 천자께 반기를 들었던 흉악한 반도들을 토벌한 일이니 천하에 이보다 더 큰 공이 없다. 내, 그대들에게 작은 잔치를 베풀어 그 공을 조금이나마 치하하고자 하니 모두 이날을 축하하도록 하자.”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백여 명에 달하는 참석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내 얼굴에도 미소가 올랐다.
“자, 다들 먹고 마셔라! 오늘은 즐거운 날이니라!”
앉아 있는 이들 앞에 놓인 소반에는 각각 자기 몫의 술과 음식이 놓여 있다. 예전에 궁에서 열렸던 잔치와 다른 점은, 술병과 술잔이 모조리 특별히 준비한 유리제품이라는 점에 있었다. 네덜란드 이주민 중 일부 포함된 유리 장인들이 드디어 제품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덕분이다.
내강 상단에서는 처음 생산한 병과 잔 200벌을 내게 진상했다. 말 그대로 금보다 귀한 이 물건이 처음으로 대중 앞에 선을 보인 날이 바로 오늘이다.
“전하, 이 병은 무엇이옵니까?”
“유리병과 유리잔이다. 부안에서 내달인들이 만들어 진상하였느니라.”
당연히 현대 유리병만큼 매끈하지는 못하다. 하지만 잔치에 참여한 신하들을 놀라게 하는 정도 가치는 충분했다. 아무튼, 도자기처럼 단단하면서도 속이 비치는 유리병이라는 건 다들 처음 보는 물건이니까 말이다.
“우리 옛 그릇과 마찬가지로 떨어트리면 깨지니, 주의하여 쓰도록 하라. 파편이 날카로우니 혹시 깨지거든 직접 치우려 하지 말고 손을 들어 사람을 불러라.”
술과 음식을 나르고 빈 그릇을 치우는 궁녀와 내관들에게는 깨진 유리 치우는 법을 사전에 가르쳐두었다. 처음에는 괜찮을지 몰라도, 잔뜩 취하면 분명히 병이나 잔을 떨어트려 깨트릴 사람이 나올 테니까 말이다.
“자, 토적사는 내 앞으로 나오라. 내 어주를 한 잔 가득 따라주리라. 다른 조명군 장수들도 모두 나와 줄을 서라. 내 한 잔 술로 그대들의 노고에 보답하고자 하노라.”
이항복을 선두로 장수들이 내 앞에 줄을 섰다. 큰 놋쇠 주전자를 들고 맨 먼저 이항복에게 한 잔 가득 따라주었다.
“대군을 거느리고 원지에 나가 참으로 고생이 많았다. 그런 한편으로 천자께 그대의 공적을 인정받아 도독 벼슬도 받았으니, 내 진심으로 축하하는 바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이번 반란 진압에서 우리 군사들이 분전한 데 대해 봉급 외의 보상금은 주지 않았다. 이미 언급했듯, 포로와 전리품의 획득을 허락했을 뿐이다. 재정이 나빠진 탓임을 알고 있으니 딱히 서운하거나 원망하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미 받은 게 많기도 하고.
그런데 명나라 조정 중신들도 아예 입을 씻고 넘기기는 미안했는지, 만력제를 설득해 우리 지휘부에 명나라 벼슬을 내렸다. 그것도 예상을 뛰어넘는 고위직이었다!
도원수, 즉 총사령관으로 출전한 이항복은 도독 벼슬을 받았다. 그리고 부원수인 김응서와 김시민, 참모장 곽재우, 수군장 입부는 총병이 되었고 이회와 정준석은 유격 벼슬을 받았다. 여기에다 입부는 ‘주산방어사’까지 제수받아 주산진을 지켜야 하게 되었다.
“우리 조정에 이제 명나라 도독이 2명이나 되는구나. 참으로 대단한 일이로다!”
도독이면 명나라 품계로는 나와 같은 정1품 벼슬이라지만, 별로 걱정은 안 된다. 이항복도 이순신과 마찬가지로 충성심을 의심할 필요가 없는 사람인데 뭐하러 걱정을 하나? 봐라, 지금 내가 별생각 없이 던진 말에도 이렇게 대답하잖아.
“명나라 벼슬은 그저 저쪽에서 굳이 주겠다고 하니까 거절하지 않고 받는 허울일 뿐입니다. 신은 어디까지나 전하를 모시는 신하이니, 그깟 다른 나라 벼슬이 무어 소중하겠습니까?”
“핫핫핫! 좋다. 내 술 한 잔 더 받으라.”
흥이 올라 조명군 장수들에게 한 잔씩 더 돌렸다. 그리고 다른 신하들에게도 모두 술잔에다 넘치도록 술을 붓게 한 후 일어서서 건배를 외쳤다.
“천지신명이 돌보시니, 이 강토에 무궁한 번영이 있으리라!”
“주상전하 천세!”
술잔 백여 개가 일제히 기울여지고 부어둔 술이 목구멍으로 사라졌다. 백여 쌍의 젓가락이 일제히 접시 위의 안주를 집었다.
양념을 발라 통째로 구운, 기름이 반지르르한 새끼 통돼지를 한 점 먹고 나자 문득 병사들 생각이 났다. 고개를 돌려 방금 들이켠 독한 술 때문에 얼굴이 빨개진 김명원을 불렀다.
“병판, 군사들에게도 충분한 상을 차려주었는가?”
내 질문을 받은 김명원이 잠시 기침을 하더니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벌써 일흔을 바라볼 나이라 그런지, 어느새 머리가 새하얗게 백발이 되었다.
“예, 전하. 소 쉰 마리와 돼지 2백 마리를 잡아 고기를 삶게 하였고 술 3만 근을 준비하게 하였습니다. 그만하면 충분할 것입니다.”
“알겠다. 잘 준비하였구나.”
그러고 보니 김명원도 이제 쉬게 해 줘야지. 원정군이 복귀한 김에 대대적으로 개각이 있을 예정이니, 이참에 병조판서도 그만 교체해야겠다. 이 나이가 되도록 내가 시키는 대로 군무를 관리하느라 고생한 김명원은 이제 벼슬을 놓고 은퇴하게 해주고 말이다.
“예판은 들으라. 오늘 그러했듯이, 앞으로는 잔치가 있을 때 되도록 소보다 돼지를 쓰도록 하라. 제사를 지낼 때는 옛 관례를 따르려면 쇠고기를 써야겠지만, 소는 농사와 교통에 매우 중요한 짐승이니 그냥 먹는 고기는 돼지고기를 씀이 실로 가하다.”
“예, 전하.”
돼지는 정말로 가죽과 고기를 얻는 용도를 빼면 별로 쓸모가 없다. 밭을 갈겠는가, 수레를 끌겠는가, 젖을 짜겠는가? 그나마 돼지털이 조금은 쓸모가 있지만, 양털처럼 두고두고 깎아서 사용할 만한 건 또 아니다. 클 만큼 크면 바로 잡아서 고기를 먹는 게 최고다.
이젠 키우기 적당한 종자도 있다. 펠리페 2세가 보내준 유럽산 돼지와 따로 수입한 중국산 돼지를 교잡한, 덩치 크고 살 잘 찌는 개량종 돼지가 이제 조선 팔도, 아니 13도 거의 전역에 보급이 완료됐다. 시장을 통한 보급은 무섭게 빨랐다.
돼지를 키우는 데 사육비가 많이 들지도 않는다. 무종 때 심어놓은 광대한 참나무숲 덕분에 도토리가 남아도니까 말이다. 가뭄 탓으로 식량이 모자랐을 때는 사람들이 도토리를 주워다 먹는 바람에 돼지고기 생산도 줄었지만, 가뭄이 다 끝나자 다시 회복됐다.
“어떤가, 모두 맛이 좋은가?”
오늘 잔칫상에 오른 고기 요리도 대부분 돼지고기다. 내 기억 속에 있는 현대식 돼지고기 요리 레시피를 총동원하고, 스페인인?중국인?태국인 숙수들에게도 할 수 있는 모든 솜씨를 부려 보라고 명령해서 만든 작품들이다.
“매콤하고 기름진 것이 무척 좋사옵니다.”
“술이 저절로 들어가는 맛이옵니다.”
신하들이 음식을 즐기는 모습을 보니 나도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래, 기분 좋으면 당연히 술을 더 마셔야지.
“내관들은 접시가 비었으면 안주를 더 담고, 술병이 비었으면 즉시 술이 가득한 새 병으로 바꾸어 주어라! 술을 더 마시고 싶은데 술이 없어 못 마신다면 어찌 비극이 아니겠느냐?”
유리병을 술병으로 쓰니까 병이 빈 놈 파악하기 좋구나. 지금은 딱히 그럴 생각이 없다만, 나중에 신하들 술 먹이고 싶어질 때 어느 놈이 술을 안 마시고 버티는지 파악하기도 좋겠다.
“전하, 이 돼지발 요리는 실로 맛이 절묘하옵니다. 어찌 만드신 것이옵니까?”
허균이 호기심을 표했다. 허균 이놈, 그러고 보니 깨나 미식가였지? 좋다, 조리법을 걸고서 우리 거래를 해보도록 하자. 나도 술기운이 오른 참이라 장난기가 돌았다.
“허 부정, 그대가 내 명에 따라 극본을 하나 완성할 때마다 내가 생각해낸 요리법 하나씩을 알려주겠노라. 이 돼지발 조림을 어찌 만들었는지 알고 싶으면, 극본을 하나 써 오라. 그러면 내 조리법을 알려주리라.”
돼지고기 공급이 늘었다고 하지만, 당연하게도 조선 백성 대부분은 돼지고기를 그저 삶아서 수육으로 먹는 법밖에 모른다. 하지만 궁궐 부엌에서는 다양한 돼지고기 요리를 만들고 있다. 삼겹살도 구워 먹고 간장과 설탕으로 양념한 돼지갈비나 고추장으로 맵게 만든 불고기, 지금 허균이 궁금해하는 족발도 만든다. 납육, 햄, 소시지는 군대에서 보급할 정도니 기본이다.
물론 이건 전부 내 주문에 따른 요리다. 전쟁이 마무리된 데다가 4년 가뭄이 끝나 마음에도 좀 여유가 생겼고, 나이도 들다 보니 맛있는 음식이 점점 먹고 싶어져서 작년부터 주방에다 이것저것 주문을 넣기 시작했다. 충분한 여유가 있는데 삼가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고추가 들어왔으니 매운 양념이 가능해졌고, 태국과 교류가 되면서 동남아 양념과 조리법이 들어왔다. 그보다 먼저 궁중에 들어온 스페인 요리, 이번에 들어온 사천식 요리까지 더하니 식탁이 말할 수 없이 풍성해졌다. 다양한 종류의 면과 밥, 고기 요리가 수라상에 오른다.
물론 그런 이국적이고 거창한 요리‘만’ 수라상에 올리는 건 당연히 아니다. 전통적인 조선식 밥상이나 내가 추가한 현대적인 메뉴도 먹는다. 어쨌건 잘 먹고 있다. 돈도 있고, 음식 재료도 있고, 조리법도 있는데 잘 먹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아직은 이런 변화된 궁중요리가 시중으로 흘러나가진 않고 있다. 하지만 오늘처럼 궐내에서 열리는 잔치나 가끔 하사되는 음식을 통해 새로운 맛을 본 사람들은 늘어나고 있다. 낯설어 멀리하는 사람도 있지만, 신기하다고 느끼면서 따라 해보려는 이들도 있다.
“알…겠사옵니다. 어떤 주제로 쓰면 좋을지 하명하여 주소서.”
“그대도 새 돼지고기 조리법이 궁금하긴 한 모양이구나.”
당연한 일이지. 비계 하나 없는 뻑뻑한 고기는 다이어트에 환장한 현대인들이나 먹는 거다. 기름진 고기가 인류 역사 내내 훨씬 인기가 좋았다. 기름지고 맛있는 돼지고기를 실컷 맛보게 되면, 허균 아니라 그 어떤 조선인이라도 쇠고기만 고집하지 않게 되리라.
“좋다. 다만 그 주제는 내 생각을 좀 해보겠다. 술이 깬 뒤에 일러주도록 하마.”
이건 중전한테 의견을 구해 볼까. 상희의 극장 개원 계획을 듣고 중전도 꽤 흥미를 보였다. 무척이나 유용할 것 같다면서 말이다.
‘백성들에게 충효를 가르치는 좋은 수단이 될 듯하옵니다.’
라고 했었지. 연극도 신문이나 방송 못지않은 프로파간다가 될 수 있으니까, 중전의 분석도 일리가 있다. 과연 중전은 그 예리한 정치적 감각으로 어떤 작품을 구상해서 무대에 올릴까? 궁금하다. 중전의 성격을 보면 이런 제안을 그냥 거부할 사람은 아니니까 말이다.
일단은 다른 대본이 없으니 홍희동전부터 먼저 올리자. 그 뒤에 중전이 고른 주제의 극본과 상희의 셰익스피어 번안극을 번갈아 올리면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