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774
2부 55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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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겨울에 비하면 에도에서 맞이하는 겨울은 겨울도 아니다. 명색이 겨울인데도 얼음이 어는 광경 한번 보기 힘드니, 이게 무슨 겨울인가?
벌써 보지 못한지도 십여 년이 다 되어 가지만, 북한산의 겨울 풍경은 아직도 눈에 선했다. 계곡은 얼어붙어 얼음 폭포가 되고, 눈은 허리까지 쌓인다. 구들장에 불을 때느라 굴뚝으로는 끝없이 연기가 솟는다.
겨우내 할 일이라곤 차차의 방에 찾아갈 때가 아니면 우두커니 방안에 앉아 눈 쌓인 바깥 풍경을 보거나, 책을 읽는 것밖에 없었다. 덕분에 유학 지식과 조선 역사에 관한 지식은 많이 늘었다. 그리고 그 덕에 지금도 이렇게 수시로 불려 다니고 있다.
“오, 숙부님 아니십니까. 에도성에는 어쩐 일이신지요?”
“늘 똑같지. 쇼군께서 부르셔서 왔다.”
이제 서른셋이 된 차차는 한껏 원숙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쇼군의 며느리이자 차기 쇼군의 정실부인이고 차차기 쇼군의 모친으로서, 에도성 안에서 그 위세를 당할 자가 없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었다. 자식은 나가마루 하나뿐이지만 말이다.
자식이 너무 적다는 이에야스의 성화 때문에 히데타다가 최근에 노부나가의 딸 아이히메를 측실로 들이기는 했다. 그리고 아이히메에게서 아들 둘과 딸 둘을 얻었으나 차차는 이제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쇼군의 적장손은 자기 아들 나가마루니까.
“편한 시간 보내다 가세요. 쇼군께서 용무가 끝나시면 제 처소에도 좀 들르시고요.”
인사를 마친 차차가 당당하게 나가마스를 지나쳤다. 그 뒤를 따르던 유키가 살짝 눈인사를 보냈다.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아준 나가마스가 홀로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보니, 함께 조선에 다녀온 사람도 저 아이밖에 남지 않았군.”
지금 차차 주변에 있는 시녀들은 모두 도쿠가와에 들어온 뒤 새로 맞아들인 아랫것들이다. 조선에서 함께 돌아온 시녀들은 언제부터인가 하나씩 보이지 않게 되더니, 어느 순간 유키만 남고 다 사라져 버렸다. 과연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잠시 생각하던 나가마스가 고개를 세게 내저었다. 차마 자기로서도 헤어날 수 없는 어떤 힘 때문에 조카딸의 주변에서 떠나지 못하고는 있지만, 차차와 얽힌 일에 깊이 말려드는 건 절대 사절이었다. 그런 건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규슈에서 소식이 왔다. 타치바나 무네시게가 명나라에서 돌아왔다고 말이야.”
무네시게는 규슈 전역에서 모은 4천 병사를 데리고 조선왕의 소집에 응했다. 그중 1천 명은 돌아오지 못했지만, 나머지 병사들은 명나라에서 얻은 재물과 노예를 데리고 희희낙락하면서 돌아왔다. 녀석들이 귀항한 항구인 하카타와 나가사키가 아주 떠들썩해질 정도였다.
“천하에 평화가 왔으니, 무용(武勇)을 떨칠 기회를 찾는 이들이 보기에는 분명 부럽겠지요. 뭐, 그러고 싶으면 그러라고 내버려 두시면 됩니다.”
혼다 마사노부는 태연하게 설명했다. 전쟁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한 분자들은 그렇게 바깥세상에 나가서 죽어버리는 편이 낫다고 말이다.
“하시바 때문에 벌어진 조선과의 역(役)으로 인해 우리가 입은 피해는 실로 큽니다. 규슈는 저들이 차지했으니 내버려 둔다 치고, 주고쿠와 기나이 일대를 전쟁 이전 수준으로 복구하는 작업도 덜 끝났습니다. 국내에서 전쟁을 벌일 수는 없습니다.”
하시바란 당연히 히데요시를 말한다. 조적(朝敵)으로 선포되면서 도요토미 성은 사용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 본래의 하시바 성으로 돌려서 부르는 게 당연하다.
주고쿠, 기나이 일대는 조선군에게 완전히 쑥대밭이 되었다. 북방에서 온 도이군 기병대가 살육과 학살을 일삼은 데다 조선 수군은 해안가를 휩쓸었다. 그리고 주전장이었던 오사카에서 아즈치까지 구역은 말 그대로 기둥뿌리까지 타 버렸다.
그나마 간토 지방은 조선 수군도, 육군도 손을 대지 않아서 일본을 재건할 기반이 되었다. 더불어 이에야스가 일본 전체를 제패하는 발걸음도 훨씬 빨라졌다.
다만 전란에서 그다지 피해를 보지 않은 건 도호쿠 지방 역시 마찬가지였다. 멀쩡히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도호쿠 영주들은 만만찮은 걸림돌이었지만, 이에야스로서는 그들을 전부 쳐낼 전력은 둘째 치고 명분이 없었다.
“그자들이 하시바 세력에 붙어 싸웠다면 조적(朝敵)의 일당이라는 명분으로 쳐서 토벌하고 영지를 몰수하거나 전봉시킬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이미 지나간 일이다. 그리고 그때는 놈들을 그러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니었느냐?”
조선군을 상대하려면 이쪽 세력을 키워야 했다. 그래야 저들이 이에야스를 얕보고 공격하는 사태를 막을 수 있었다. 사전에 어떤 교섭이 있었건, 이에야스 쪽 전력이 열세라고 판단하면 조선군이 태도를 바꿔 공격해올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도호쿠 영주들은 조선군이 이에야스를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도록 하는 뒷배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 주었다. 하지만 이제는 경계를 게을리할 수 없는 잠재적인 위협요소일 뿐이다. 규모가 예전보다는 줄었어도 여전히 무역으로 큰돈을 버는 다테 마사무네처럼 말이다.
“하시바가 숨겨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놈이 전투 도중에 아즈치를 빠져나가 도망쳤고, 지금은 우에스기에게 보호받고 있다는 소문이라도 퍼뜨릴까요?”
“되었다. 그런 억지를 쓸 필요는 없다.”
히데요시가 고자라서 자식을 얻을 수 없었다는 사실은 천하가 알고 있다. 그런데 인제 와서 그런 소문을 퍼뜨려 봐야 누가 믿기나 하겠는가.
“대놓고 공격할 명분이 없는 이상, 당분간은 내버려 두고 상황을 살피는 수밖에 없다. 이미 천하에 평화가 왔다고 선포했으니, 놈들을 제거할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린다.”
전쟁이 없으면 대영주들로서도 곤란해진다. 신하들에게 포상을 줄 방법이 없는 건 물론이고 영지를 상속할 때도 문제가 생긴다. 그전에야 싸워서 얻은 새 영지를 나눠준다거나 전쟁에서 세운 전공에 따라 계승을 결정하는 방법이 있었지만, 그런 방법은 쓸 수 없게 되었다.
“분명히 당주 지위를 놓고 가문 내에서 분쟁이 일어나는 놈들이 나올 거다. 그때 개입해서 놈들의 세력을 나누고, 순순히 따르지 않는 자들은 쇼군에게 거역하는 반역자로 간주해서 그 죄에 걸맞은 벌을 내린다. 하나씩 진행해 나가면 어렵지 않다.”
최근에 다테 마사무네가 그랬듯, 가문 내에서 계승 문제로 분란이 일어나는 경우는 흔하다. 그 심판을 내릴 권한을 막부가 가지면 여러 다이묘의 세력을 얼마든지 마음대로 쪼개 놓을 수 있다.
계승권에서 뒤지는 둘째, 셋째들로서는 영지를 아예 못 갖기보다는 일부라도 가지고 싶어 할 거다. 이들의 이의 제기로 영주직 승계 문제에 막부가 개입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가문 내에서 어떻게든 먼저 합의를 보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게 하더라도 가문의 힘이 조금씩 약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동안 일본 바깥의 일은 조선이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둔다. 우리는 우리 일만 처리하기도 벅차니까.”
이에야스는 노부나가 때도, 히데요시 때도 단 한 번도 조선과 명나라를 공격한다는 계획에 동조한 적이 없었다. 그런 정신 나간 일을 벌이느니 산에 들어가 도나 닦는 게 나을 테니까.
지금 일본은 전쟁의 상처를 씻고 평화를 누려야 한다. 그런 이에야스의 방침이 마음에 들지 않고 가만히 있기 좀이 쑤시는 자들은 무네시게를 따라 바다 밖에서 용병 노릇이나 하면 되는 거다. 그러다 죽어서 안 돌아오면 더 좋은 일이고.
“주군! 나가마스 공이 들어왔습니다.”
“오! 들어오라고 해라.”
도중에 차차에게 붙들리는 바람에 잠시 시간을 허비한 나가마스가 조심스럽게 이에야스가 있는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이에야스에게 엎드려 인사를 올리자 인사를 받은 이에야스가 용건을 꺼냈다.
“오늘 그대를 부른 건 다른 의도에서가 아니고, 사신 노릇을 해줬으면 해서다. 조선왕에게 가서 이번 명나라 출병에서 거둔 승리를 축하하고, 조선 도성의 정세를 한번 살피고 오라.”
“하, 한양의 정세를 말씀이십니까?”
늘 그렇듯이 조선에 대해서 몇 마디 묻고 말겠거니 생각하던 나가마스의 입이 떡 벌어졌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래. 지난 6년간 우리 사신이 조선 국왕을 만난 적이 없으니, 한 번쯤 가서 대면한 뒤에 상황을 살피고 올 때가 되었다. 당장 해결할 현안이 있는 건 아니지만, 주기적으로 만나보는 관계는 유지해야 하지 않겠나.”
그동안 조선과 일본, 아니 에도 막부 사이의 외교는 오사카에 있는 조선관을 통해서 편지만 오가는 형태로 진행됐다. 이 정도만 해도 딱히 불편한 건 없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앞으로 조선과 더욱 단단한 유대관계를 만들어나갈 심산이었다. 그래야 조선이 각 지방 영주들을 부추겨서 반란을 일으키게 만들지 않을 테고, 만약 반란이 일어났을 때도 막부가 원활히 반란을 진압할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까.
일본과 조선은 인방(隣邦)으로서 서로를 인정하며 원활하게 지낼 수 있으리라고 이에야스는 확신하고 있었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그게 서로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쇼군, 그런데 왜 하필 저입니까…? 오랜 기간 쇼군께 충성을 바치며 모신 신하들이 한둘이 아닌데 왜 하필 저를 사자로 고르셨는지요….”
“내 가신들은 충성스럽기는 하나 조선을 모른다. 조선을, 조선왕을 그대보다 잘 아는 이가 일본에 어디 있는가?”
나가마스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에야스는 무심한 듯이 차갑게 지시를 내렸다.
“이제 10월이니, 아직 조선에 건너갈 배가 있을 것이다. 국서와 예물을 준비하는데 시간이 조금은 필요하니, 사흘 뒤에 오사카로 가라.”
“알겠습니다, 쇼군.”
북한산의 겨울이 떠오른 나가마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옆에서 마사노부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 27 –
사냥꾼들이 분주하게 마을 안팎을 오갔다. 곰들이 모두 겨울잠에 들기 전에 잡아야 겨울을 날 양식과 모피를 보탤 수 있기 때문이다.
“잘 다녀오게. 화약 아껴 쓰고.”
“예, 아푸카스카무이 님.”
석탈왜는 요즘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이곳 아이누 모시리, 즉 에조치를 넘보던 샤모, 즉 일본인들은 조선군이 벌인 일본 원정에서 참패하면서 모두 쫓겨났다. 이제 이곳은 아이누들의 땅이 되었고, 아이누 모시리 전역을 통틀어도 일본인은 3백여 명에 불과했다.
그나마 그 3백여 명도 세 군데 있는 교역소에 백 명씩 머무르는 인원들뿐이다. 섬 전체에는 아이누 4만 명이 있으니, 충돌이 일어나면 상대도 안 된다.
분명 제대로 군대를 동원해서 싸운다면 일본인들이 강하다. 하지만 조선 국왕은 일본인들이 이곳 땅에 군대를 보내지 못하도록 단단히 약속을 받았다. 그리고 그 뒤에 아이누들에게 더 많은 무기를 주어서 스스로 지킬 수 있게 했다.
이제 아이누는 일본인들에게 간섭을 받지 않고 조선에서 대놓고 칼, 화살촉, 총, 화약, 탄환 등을 얻고 있다. 명목상으로는 수렵용으로 들여오는 것이지만, 필요하면 언제든 사람을 향해 휘둘러질 수 있는 무기들이다.
이 무기들로 가장 강력하게 무장한 집단은 석탈왜의 고향인 카무이코탄이었다. 여기는 그가 발휘한 지도력에 탄복한 많은 사람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인구가 천여 명, 싸울 수 있는 남자 숫자만 3백여 명에 달하는 큰 마을이 되었다.
“우리 아이누 모시리도 조선처럼 하나의 강력한 나라가 되어야 하련만….”
자유는 얻었다. 하지만 아직 큰 아쉬움이 하나 남았다. 외적이 사라지고 나니 여러 아이누 부족들이 다시 갈라져 제멋대로 살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누들은 일본인들과 싸우면서 서로 힘을 합치는 경험을 쌓았다. 하지만 본래 정치적으로 통합되어있지 않던 아이누들은 위기가 지나가자 다시 응집력을 잃어버렸다. 맞서 싸울 침략자 일본인들이 사라지자 뭉쳐야 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그나마 남부 지방 마을들은 함께 싸웠다는 동지의식도 있고, 모가미 군이 벌인 만행에 대한 원한도 잊지 않아서 최소한의 단결이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중부나 북부에 거주하는 아이누 상당수는 일본인들과 싸운 적이 없고, 이들은 힘을 합치는 일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혹시라도 무력으로 다른 부락이 공을 따르게 할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아모국 전체로서는 크나큰 손실이 되고, 왜인들이 파고들 틈을 주게 됩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소.”
조선인 고문관의 조언을 받은 석탈왜가 한숨을 쉬었다. 독립성이 강한 아이누들은 석탈왜가 통합을 강제하면 순순히 따르는 대신 역시 무력으로 응수할 가능성이 컸다. 일본과 싸우면서 전투경험도 잔뜩 쌓았으니, 더더욱 곱게 따르지 않을 터였다.
그런 상황이 초래되면 모가미 요시아키는 당장에 석탈왜의 반대파를 지원하러 무기를 보낼 게 분명하다. 을미년 조약은 일본 측이 군대를 보내지 못하게 하면서도 교역은 허락했으므로, 요시아키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무기를 ‘교역’해서 아이누 세력을 분열시킬 수 있었다.
“그런 틈을 내주지 않으려면 모든 아모국 백성의 민의를 모으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공께서 민회를 주도하여 모든 추장이 모이도록 하고, 그 자리에서 공을 대추장으로 추대하도록 일을 꾸미시는 게 나을 겁니다.”
새 고문관은 이제까지 석탈왜를 보좌하던 고문관들과는 달랐다. 전에 왔던 두 무관은 그가 직접 거느린 장정들을 군대로 조련하여 반항하는 부락은 무찌르고 힘으로 제압하라고 권했다. 하지만 올가을에 새로 온 이이첨이라는 이 문관은 무력은 의미가 없다고 했다.
“민회를 열어 뜻을 모으라고 했소?”
“아모국은 땅은 넓으나 거주하는 사람은 적어서 일일이 찾으러 다니기도 어려운데 무력으로 지배하기가 어찌 쉽겠습니까. 덕을 베풀어 스스로 따르게 하셔야 합니다.”
조선 국왕에게 도움을 청해 무기와 병력을 지원받는다면, 다른 부락을 모두 쳐서 깨트리고 아모국 국왕으로 등극하기도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수백 개나 되는 마을이 불타고 수많은 아이누가 죽어서 피를 흘릴 것이다.
“내가 원하는 건 우리 아이누 겨레가 하나가 되어 번영하는 거요. 번영하기 위해 동포들을 죽여 피를 흘리다니, 그게 무슨 모순이오?”
“그러니 민회를 통하시라는 겁니다. 공께서는 왜국과의 전쟁을 주도한 용사로서 아모국에서 명성이 높으십니다. 공을 지배자로서 받들기 망설이는 자들도 존중하고 따르는 데는 망설이지 않을 겁니다. 그런 이들을 회유하셔야 합니다.”
이이첨은 유럽 국가들이 제후들의 호선을 통해 군주를 선출하는 사례가 있음을 알려주었다. 옛날 로마가 그랬고, 지금 도이치의 카이저가 그렇다. 그 이웃에 있는 폴란드 왕국 역시 왕을 선거로 뽑고 있다.
“물론 그렇게 뽑힌 군주는 보위를 자손에게 물려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덕망과 실력을 쌓아 다른 이들의 존경을 얻는다면 다음 선거에서 뽑힐 수가 있지요. 그렇게 하신다면 아모국 백성들은 대대로 명군을 맞아 번영할 수 있을 겁니다.”
왕위를 세습할 경우 폭군이나 암군이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하지만 민회가 투표를 통해 왕을 선출한다면 적어도 능력이 바닥을 맴도는 이가 등극할 리는 없다.
“지금 석 공께서는 동포들에게 충성을 요구할 힘은 없으시되, 우두머리로 추대받을 정도의 존중은 받고 계십니다. 내년 봄에 민회를 열어 아모국 대추장으로 추대를 받으시고, 복속하는 이들을 모아 연맹을 맺고 차츰 영향력을 넓히시옵소서.”
중요한 건 연맹에 가입하면 이익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데 있다. 조선에서 오는 물자를 연맹에 가입한 마을에만 분배하고, 교역품을 사들이는 데 있어서 가격에 차등을 두는 등의 몇 가지 수단이 있을 것이다.
“이번에 본관이 가져온 담저 종자를 분배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담저를 보면 모두 눈이 휘둥그레질 것이고, 기꺼이 공을 대추장으로 받들겠지요.”
교역품으로는 당연히 쌀이 인기가 있다. 귀한 모피를 주고 감자 같은 괴상한 뿌리를 사려는 아이누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직접 재배할 수 있는 물건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이누들이 농사짓는 작물로는 보리?밀?콩 등이 이미 있다. 하지만 감자는 농업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는 존재가 될 터였다.
“앞으로 조선 배가 더 많이 들어올 겁니다. 조선 교역선에 식량을 공급하면서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사실도 알려지면 한층 더 공에 대한 지지가 오를 겁니다.”
이이첨은 석탈왜가 포기하지 않도록 설득을 계속했다. 아모국은 일본을 북쪽에서 견제하는 우방이면서 장차 조선 선박들이 대동양으로 진출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기항지가 될 터였기 때문이다.
그러니만큼 아모국이 계속 부족들이 흩어져 사는 야인들의 나라로 남아 있어서는 곤란하다. 조선으로서는 같이 일했고 성격을 알고 있는 석탈왜가 아모국의 권좌에 오르도록 도울 필요가 있었다. 이이첨은 어명을 충실하게 따를 작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