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790
2부 568화
– 7 –
빙해에서는 여름인데도 사방에 얼음덩어리가 떠다녔다. 작은 것도 있지만 탐사선과 비슷할 정도로 큰 얼음도 허다해서, 수졸들은 빙해를 완전히 벗어나는 순간까지 얼음덩어리가 부딪혀 배에 구멍이 뚫릴지 모른다는 공포에 떨어야 했다.
정확한 지도를 작성하려면 대미주 연안을 따라 남하해야 했다. 하지만 빙해에 갇히고 싶지 않다는 공포가 이들을 내몰았다. 시간을 지체하지 않으려 상하 혼연일체가 된 선원들이 거의 정남으로 직진해서 겨우 빙해를 벗어나자 줄줄이 늘어선 섬들이 앞을 막았다.
이곳 섬들에는 ‘알루토(?褸土)’라 하는 토인들이 살고 있었기에, 김완은 새로 만난 섬들을 ‘알루토 열도(列島)’라고 명명했다. 낯선 배를 본 토인들이 해변으로 몰려나왔다.
“어허, 저들의 용모가 우리 북방 출신 백성들과 흡사하지 않은가? 연역주, 빙산도 토인들도 그러하더니 이곳 토인들도 이리 닮았을 줄은 몰랐다. 마치 유귀국에 교역하러 온 것 같구나.”
출발 전에 전하께서 미리 언질을 주셨지만, 이곳 토인들은 조선인과 외모에서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본국 출신과는 좀 덜 닮았지만, 부여주나 연해주 북방 출신 야인들과는 정말로 흡사하게 생겼다. 기록관들은 그 용모와 습관, 주변 풍토 등을 열심히 기록했다.
김완으로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연역주 토인들이야 먼 북쪽에서이긴 해도 대아주(大我洲) – 아시아(Asia)의 조선식 표기 – 땅이 이어진 곳에 살고, 빙산도는 대아주 가까운 섬이니 이곳 토인들은 당연히 조선인과 닮았으리라 납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먼 섬 토인들까지?
웅연포와 빙산도에서 매번 그랬듯이 김완은 일단 물품을 나눠주면서 환심을 샀다. 토인들도 자기들과 닮은 조선인들에게 친근감을 느꼈는지 호의를 드러냈다. 이 섬 토인들은 경계하는 기색을 별로 보이지 않아서, 굳이 대포로 위협할 필요는 없었다.
대화를 시도해봤으나 이들이 쓰는 말은 연역주 토인들과도, 빙산도 토인들과도 또 달랐다. 김완이 상륙한 섬에 사는 토인들은 자기네 섬을 ‘운막(雲幕)’이라고 불렀는데, 알아들은 말은 이게 전부였다. 이번에도 빙산도에서 했듯이 손짓과 몸짓으로 의사소통을 해야 했다.
“나리, 몇 놈 잡아다가 본국으로 데려가 우리말을 가르쳐서 통변으로 쓰면 어떻겠습니까? 옛날 무종대왕께서도 아모국 토인을 잡아다가 가르쳐 통변으로 쓰시지 않았습니까.”
“그때 강제로 잡아 온 통변은 아모인이 아니라 왜인이었다. 그게 어찌 같으냐? 그리고 그런 난행을 범했다가 저들이 우리를 가리켜 사람 먹는 귀신이라고 여기게라도 되면 어쩌려느냐?”
납치는 안 된다. 전하께서도 이 원정에 참여할 장수와 관리들을 향해 ‘새 땅에서 토인들을 박대해서는 안 된다’라고 출발 전에 몇 번이나 강조하셨다. 게다가 저들이 알지 못하는 병을 옮기는 일도 막아야 한다며 탐사대원 전원의 건강 여부까지 따졌을 정도였다.
종두를 맞지 않은 자들은 전부 종두를 접종했다. 그리고 혹시 다른 병에 걸리지 않았는지도 꼼꼼히 살피고 나서 배에 태웠다. 심지어 연해주와 함경도에서 선발한 인원들까지도 도성으로 불러 검진하고, 출정식을 거행한 후 한꺼번에 배에 태웠다.
탐사선단은 처음부터 연해주를 거쳐 아모국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러니 이들은 도성까지 갈 필요 없이 해삼위에 모여서 승선했으면 훨씬 편했을 것이고 비용도 줄일 수 있었다. 그런데도 주상께서는 굳이 도성으로 불러들여 확실히 검진을 받고 배에 오르게 하신 거다.
“주상께서 그저 탐사단을 불러놓고 사열하고 싶으셨던 건 아닐지요?”
“영명하신 상감께서 그리 실속 없는 짓을 하실 것 같으냐, 이놈!”
천리 밖 사정도 훤히 아는 주상이시다. 김완은 투덜거리는 수하 군관들을 윽박지른 다음, 토인들에게 물건을 주어 구슬리게 했다. 토인들이 구슬과 옷?철물 등 갖가지 일용품을 받고 기뻐하자 배를 타고 함께 가면 더 많은 물건을 주겠다는 유혹이 몸짓을 통해 전해졌다.
“나리, 이건 어떻습니까? 저들에게는 술이 없는 듯하니 술을 주어 실컷 취하게 하시지요. 그리고 인사불성이 되었을 때 슬쩍 들어다 배에 태우면 간단하지 않겠습니까?”
“그랬다가 술이 깨면 배 위에서 날뛸 텐데, 그게 납치와 뭐가 다른가? 술을 처음 먹어보는 놈들이 얼마나 마셔야 인사불성이 될지는 어찌 알고? 게다가 한두 명만 취해서는 소용이 없을 테니 부락 전체가 취하도록 해야 할 텐데, 그럴 만큼 우리가 가진 술이 넉넉하지 않네.”
부하들은 말도 안 통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힘겨운 설득 대신에 확실하고 빠른 해결책을 제안했다. 하지만 김완은 완강하게 온건책을 고집했다. 토인들에게 절대 해를 끼치지 말라는 어명을 어겼다가는 주상께서 내리시는 불벼락이 떨어질 테니,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꽤 많은 선물을 뿌렸지만, 선뜻 배에 타려 나서는 토인은 당연하게도 없었다. 김완은 이럴 줄 알았다며 툴툴거리는 부하들의 불만을 무마하며 설득을 계속했다. 겨우 여드레 만에 젊은 토인 사내 두 명이 함께 가고 싶다는 의향을 표했다.
욕심 때문인지, 모험심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가겠다는 이들이 나오자 김완은 옳다구나 하고 두 사람을 배에 태운 다음 당장에 닻을 올렸다. 머뭇거리다가 혹시 저들이 마음을 바꾸기라도 하면 큰일 아닌가.
물론 정계비는 세운 다음이다. 토인들에게는 이 비석의 의미는 ‘조선인들이 또 배를 타고 이 섬에 올 것이며, 그때도 이번처럼 좋은 물건들을 줄 거’라고 약속하는 표지라고 설명했다. 손짓과 몸짓으로 그 이상의 의미를 전달하기도 어려웠고, 완전한 거짓말도 아니지 않은가.
운막 섬 남쪽 해안으로 나간 김완의 선단은 알루토 열도 남쪽 연안을 따라서 계속 동쪽으로 전진했다. 아모 열도를 지날 때 그랬듯이 규모 있는 섬마다 상륙해서 정계비를 하나씩 세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낯선 배를 본 토인들이 해변으로 몰려나와 창과 활을 겨누는 섬도 있었지만, 커다란 범선이 두려웠는지 바다로 나와서까지 적의를 표현하지는 않았다. 그런 토인들과 조우한 경우에 김완은 간단하게 대처했다.
“한 방 쏴라.”
운막 섬에서처럼 우호적으로 반응하는 토인들에게는 굳이 대포까지는 쏘지 않았다. 하지만 적대적으로 나오거나 뭉그적거리는 토인들에게는 곧바로 천둥 치는 포성으로 혼비백산하도록 만들었다. 물론 사람이 다치도록 겨누어 쏘지는 않았다.
포성을 들은 토인들은 꽁무니가 빠지게 도망치기 일쑤였다. 단정을 타고 상륙한 조선인들은 정계비를 세우고, 통변으로 데려온 운막 섬 토인에게 알루토 말로 ‘모두 숨지 말고 해변으로 나와 엎드리라’라고 외치게 했다.
토인들이 나타나면 단정에 싣고 온 선물을 나눠주고, 앞으로 계속 선물을 받고 싶으면 여기 세워둔 비석에 매일 제물을 바치고 절을 하면서 주인으로 받들어 모시라고 했다. 그러면 지금 보는 것과 같은 깃발을 단 배를 탄 조선인들이 다시 돌아와서 선물을 나눠줄 거라고 말이다.
만약 공들여 제사를 지내지 않거나 돌아온 조선인들에게 불손하게 군다면 벼락과 천둥이 온 섬을 쓸어버리리라는 협박에 토인들은 바닥에 엎드려 벌벌 떨었다. 맹세한다는 표시로 정계비 앞에 엎드려 절을 올리게 한 뒤에 대원들이 복귀하면 김완은 다시 출발 명령을 내렸다.
7월에 빙산도를 출발한 김완 일행은 점점 추워져 가는 날씨를 의식하면서 계속 움직였다. 새로이 나타난 커다란 땅이 끝도 없이 북동쪽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보니 이게 섬이 맞는지, 혹시 대미주 본토가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북으로 갈수록 추워질 건 분명한데, 더 가야 할까?
“사또! 동쪽에 큰 섬이 보입니다! 주변에 작은 섬 여럿이 붙어 있습니다.”
“잘 되었다. 방향을 틀어라! 여기서 동쪽으로 방향을 돌리면 바다가 얼기 전에 빠져나갈 수 있을 거다.”
벌써 10월이 끝나간다. 언제 사방이 얼어붙어 버릴지 모르는 북쪽 바다로 가기 싫은 마음은 누구나 똑같았다. 여기서 동쪽으로 방향을 돌려 저 군도(群島)를 탐사한 뒤 곧바로 동쪽으로 빠지면 북쪽으로 더 가지 않을 수 있다.
초조해진 선원들이 배를 급하게 몰았다. 그리고 그 조급함이 사고를 불러왔다.
“사또, 포구 안으로 들어갔던 기독(其獨)이 여울에 올라앉아 바닥이 상하고 말았습니다!”
항구로 사용할 수 있을지 확인하기 위해 들어간 섬 남쪽 큰 포구에서, 소형 갈레온 한 척이 좌초하고 말았다. 도저히 끌어내서 물에 띄울 수 없는 큰 피해였다.
“어쩔 수 없다. 나머지 두 척도 포구 안에 정박할 자리를 찾고, 토막(土幕)을 지어서 겨울을 날 준비를 시작하라. 이번 겨울은 여기서 머물러야겠다.”
나무를 새로 베기에 시간이 촉박하여, 좌초한 배를 해체하여 그 선재로 집과 성채를 짓도록 했다. 성 이름은 해체한 배 이름을 따서 기독성(其獨城)이라고 지었다.
“말이 씨가 된다더니, 배 이름처럼 이 머나먼 북방 땅에 홀로 남는 신세가 되고 말았구나. 그런데 대체 이 섬 이름은 무엇이라 하더냐?”
가까스로 붙잡은 토인에게 이 섬 이름을 물으니 귀궤탁(貴櫃琢)이라고 하였다. 알루토 말과 전혀 다른 말을 사용하고 있어 도무지 대화가 되지 않았기에 그 이상의 정보는 도저히 알아낼 수 없었다. 말이 안 통한다는 보고를 들은 김완이 혀를 찼다.
“도대체 통변이 몇 명이나 있어야 이 북방 땅을 원활하게 다스릴 수 있을지 도무지 짐작이 안 가는구나! 내년에는 개척사 대감을 만날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양식은 아직 넉넉하다. 싣고 온 식량 외에 사냥과 낚시로 얻은 고기를 계속 보충하고 있다. 다만 유일한 위안거리인 술이 이제 많이 줄어들었다. 사내 수백 명이 움직이면서 여자를 전혀 접하지 못하는 문제도 불평이 나오는 사안 중 하나였다. 어느 문제건 해결책은 없었다.
“이제부터라도 술에 물을 탈까….”
– 8 –
잉글인들이 해변에서 주워온 물건은 정문부와 안위, 한명련 등 미주 탐사대 수뇌부를 깜짝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물건이었다. 이곳에 잉글인들이 먼저 와서 자기들 영토로 선포했다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잉글인들을 다 베어버리고 입을 막을까요?”
한명련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한명련은 본래 평민 출신이나 오위에 들어가서 전공을 세워 출세한 젊은 장수다. 무자년에 졸병으로 군에 들어갔지만, 워낙에 용맹하게 싸운지라 지금은 종3품 정령까지 올라왔다. 과묵하지만 한번 입 밖에 낸 말은 반드시 실천하기로 이름이 높다.
“입을 놀릴 사람이 없으면 문제도 없는 법입니다. 잉글인들을 베어버리고 놋쇠판은 녹여서 없애버리면 아무 일도 없던 게 됩니다. 죽은 자가 어찌 입이 있어서 감히 영토를 내놓으라고 따지겠습니까?”
“그것이 가장 간단한 해결책이기는 하겠으나….”
정문부 이하, 지휘부 전체에서 잉글인들이 먼저 왔다고 순순히 인정하자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처음부터 알고 왔다면 혹시 모르겠으나, 빈 땅이라고 알고 와서 막 표지를 세우려는 참에 갑자기 통보를 받았으니 어찌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우리가 여기 오기 위해 들인 노력을 생각하면 선뜻 물러날 수는 없소. 하지만 일단 우리도 따르기로 한 유럽식 규범에 따르면 저들의 선취권을 아예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순수한 무관인 한명련과 달리, 정문부는 본래 문관이다. 게다가 북방에서 야인들을 다스린 경험이 있고 경인년 이후로는 왜인들을 상대한 외교 경험도 있다. 국제적인 약속을 일선에서 임의로 깨트렸다가는 나중에 곤란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잉글인들이 떠들어댄 탓에 조선인, 내달인, 서반아인까지 우리 탐사단 430명 전원이 이미 그 놋쇠판에 대해 알고 있소. 잉글인들이야 베어버린다고 하더라도 남은 입만 400개인데 어찌 그 입을 모두 막겠소? 만약 새어나가면 우리 조선이 어찌 신의를 지키는 나라가 되겠소?”
정문부의 거북한 표정을 본 안위는 뭐 그런 걸 가지고 걱정하냐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대감. 유럽 제국(諸國)도 서로 땅을 뺏으려고 전쟁을 합니다. 이긴 쪽이 군대를 진주시키고 합병 선언을 하면 다른 나라들도 받아들이지요. 우리도 똑같이 하면 됩니다. 잉글인 우두머리 헌팅턴을 불러서 이 땅을 놓고 한 판 붙자고 하시지요.”
안위는 간단히 설명했다. 헌팅턴이 항복하건 안 하건 이곳 미주 땅은 전리품으로 획득할 수 있고, 귀국한 다음에 잉글국 대사에게 그리 통보하면 그만이라고 말이다.
“그래도 소관은 그자가 항복하기를 바랍니다. 별대와 합류한 뒤에 대동양을 건너 본국으로 돌아가는 뱃길 안내를 받아야 하니까요.”
고문관으로서 동석한 로드리고와 세바스티안은 별 의견을 내지 않았다. 잉글랜드가 이곳에 견고한 거점을 구축한다면 스페인과 조선 두 나라 모두 별로 좋은 결과를 얻지는 못하리라는 암울한 예상을 내놓았을 뿐이다.
서반아인인 로드리고에게는 정말 가볍게 넘기기 어려운 문제였다. 적국 잉글랜드가 누에바 에스파냐 북방에다 견고한 거점을 둔다면 스페인으로서는 엄청난 골칫거리가 되니까 말이다. 이건 펠리페 3세 주변을 둘러싼 간신들에 대한 그의 혐오와는 별개다.
“알겠소. 어쨌건 헌팅턴을 불러다 얘기는 들어봅시다. 과연 무슨 요구를 내세우려고 일부러 해변에 가서 그 놋쇠판을 찾아온 것인지.”
정문부는 휘하 사관을 시켜 헌팅턴을 데려오게 했다. 그리고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
“전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여기는 겨울도 따뜻하군.”
11월, 서양인들이 쓰는 달력으로는 12월인데도 얼음이 얼지 않는다. 봄처럼 따뜻한 기운이 가득해서 두꺼운 솜옷이나 털가죽 덧옷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였다. 덕진성에서도 겨울에는 꽤 추워서 분명 겨울옷을 입어야 했는데 말이다.
“이런 좋은 땅이니 저 잉글인들이 선뜻 포기를 안 하고 미련을 갖는 게 아니겠소?”
“그렇겠지요. 누에바 에스파냐보다도 훨씬 좋은 환경입니다.”
안위는 기함인 명덕의 갑판 위에서 고문인 세바스티안과 스페인어로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북방 출신인 정문부나 오위 출신인 한명련은 스페인어를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윗전의 눈치를 안 보고 대화하기에는 스페인어가 편했다. 따로 세바스티안을 불러낼 일은 드물지만 말이다.
“본국에 돌아가서 자기네 대사와 예조판서가 결판을 짓게 하는 게 도리이니, 이런 증거품이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만 확실히 해달라니…그게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단 말이오.”
헌팅턴은 조선 측의 탐사활동에 어떤 방해도 하지 않겠으며 자신이 이 지역에 관해서 알고 있는 모든 정보도 넘겨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대가로 요구한 유일한 조건이 놋쇠판이 이곳에 있었음을 숨기지 말아 달라는 요청이었다.
“저들도 지킬 수 없다는 건 아는 겁니다.”
세바스티안이 평온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각하께서 주장하셨듯, 조선은 이곳 지선성(至善城)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본국에 주재하는 잉글랜드 대사에게 ‘이른바 뉴 알비온(New Albion)이라 하는 영토를 조선령으로 병합한다’고 선포하면 그만입니다. 잉글랜드가 이를 막을 수 있는 수단은 전혀 없습니다.”
펠리페 2세와 스페인 왕실에 대한 충성심을 아직 간직한 로드리고는 북아메리카에 잉글랜드 세력이 들어서는 상황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 하지만 유대인 혈통이라는 이유만으로 본국에서 추방당한 세바스티안은 전혀 시각이 달랐다.
그로서는 스페인의 이익 같은 건 별 관심이 없었다. 어떻게 대응할 때 조선이 더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는지 그 여부가 훨씬 중요한 문제였다. 지금의 조국, 지금의 주군이 다스리고 그와 가족이 살아가는 나라는 스페인이 아니라 조선이니까.
“고로 지금 잉글랜드인들은 이곳의 소유권을 조선에 양도하고 대신 뭔가 다른 이득을 얻는 거래를 할 생각임이 분명합니다. 다만 저들이 요구하는 바가 무엇일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확실히 그럴 법하겠소.”
약속대로 잉글인들은 자신들이 아는 바를 모두 털어놓았다. 막상 들어보니 별로 신통한 건 없었지만 말이다. 애초에 15년 전 저들이 여기 왔을 때도 겨우 이레 남짓 머물렀을 뿐이라서, 딱히 상세하게 조사를 한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시간이 넉넉하여 다행이오. 별대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주변 지역을 살펴볼 시간은 충분하니.”
큰 배를 보고 잉글인들이 돌아온 줄만 알았던 토인들은 전혀 다르게 생긴 조선인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정문부는 이들을 배로 데려다 대화를 시도한 끝에 협력을 얻어냈고, 배를 보내 이곳 주변을 조사하겠다는 뜻을 전할 수 있었다.
“저기 조사선이 한 척 돌아오는 듯합니다.”
주변을 살피니 이 거대한 만으로 들어오는 강이 하나 있었다. 이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탐사하기 위해 정문부가 단정 몇 척을 올려보냈는데, 그중 한 척이 돌아오고 있었다.
“저놈들이 왜 저리 급하게 내려오지? 돛을 올리고 노까지 저으면서 오는 걸 보니까 뭔지는 몰라도 아주 급한 용건이 있나 본데.”
안위가 천리경을 들어 다가오는 조사선에 초점을 맞췄다. 뭔가 큰 글자를 쓴 깃발을 흔들고 있는데, 출발할 때는 분명히 걸지 않았던 깃발이었다.
“뭐라고 쓴 거야? 딱 한 글자인데, 깃발이 자꾸 휘날리니 알아보기가…어? 어? 금(金)? 금? 금이라고?!”
철재를 확보하기 위해 사철(沙鐵)을 찾으러 나갔던 조사선이 금을 찾았다고? 안위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옆에 서 있던 세바스티안 역시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