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793
2부 57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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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카에 입항한 이기빈은 돌궐국 세관 관리들의 방문을 받았다. 작은 노선을 탄 돌궐인들은 처음 보는 깃발을 단 배가 두 척이나 들어오자 무척 조심스러워하면서 접근했다.
“우리는 동방의 조선에서 온 상선입니다! 이곳 모카 항구에 교역하러 왔으니 입항을 허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리카르도는 아랍어도 능숙하게 구사한다. 뱃전에 선 리카르도가 아랍어로 소리치자 배 위에 선 돌궐인들이 잠시 논의하더니 도척을 향해 다가왔다. 고물에 선 이기빈이 도시를 빙 둘러싼 성벽과 항구 한쪽에 솟은 포대, 다가오는 돌궐인들을 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돌궐국이 회회국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는 전하의 말씀이 사실이었군.”
견서사로 유럽에 다녀온 장수들에게도 돌궐국 방면 사정을 제법 듣기는 했다. 그러나 그때 접한 정보는 유럽 방면에 집중되어 있어서, 이쪽 회회국 영역까지 돌궐국이 지배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나중에야 상감께서 포르투갈인들에게 들었다며 알려주셨다.
“리카르도에게 들으니 지복도는 돌궐국 영토가 아니라 하였겠다. 돌아가는 도중에 그놈을 붙잡아서 분을 풀어도 돌궐국 관헌이 개입하지는 않겠구나.”
오면서 들었더니 소코트라섬은 아라비아 남부에 있는 어느 토후국이 보유한 영토라고 했다. 그렇다면 한바탕 난리를 쳐도 쫓아와서까지 보복할 여유 같은 건 없으리라.
“각하! 투르크 관리들이 말하길, 조선 배가 모카에 찾아온 건 처음이니 각하께서 직접 이곳 태수를 방문해서 예물을 바치고 인사를 올리라고 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찾아가도록 하지. 그게 예의니까.”
커피 씨앗은 모카에서도 절대 유출을 금지하는 귀중품이라고 했다. 조선의 인삼 씨와 같은 그런 귀한 물건을 쉽게 얻어내자면 고관들과 친해 두어야 한다. 물론 스스로 씨앗을 내주지야 않겠지만, 뭔가 문제가 생겼을 때 수습이라도 좀 더 부드럽게 해줄 것이 아닌가.
“조선? 그게 어디 있는 나라야?”
이 말이 두툼하고 푹신한 방석 위에 비스듬하게 몸을 누인 돌궐국 태수가 거만한 태도로 입 밖에 낸 첫마디였다.
“내가 인도도 알고 중국도 알지만, 조선이라는 나라는 들은 적이 없군. 그건 어디 숲속에서 오두막을 짓고 사는 야만인들의 나라인가?”
태수는 머리에는 터번을 쓰고, 콧수염과 턱수염을 풍성하게 기른 쉰 살쯤 되어 보이는 중년 사나이였다. 입에는 금과 보석으로 장식한 수연통(水煙筒)을 물고 있는데, 이기빈이 알고 있는 담배 연기와는 다른 독하면서 달착지근한 냄새가 났다.
“말해보라. 저 유럽인들의 배를 사기 위해 그대 종족을 몇 명이나 노예로 팔았는가?”
무례한 어조에 이기빈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하지만 태수는 그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듯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연기만 빨아들일 뿐이었다.
잠시 숨을 크게 들이쉰 이기빈이 이를 악물고 나지막하게 상대의 질문에 대답했다. 대답을 아랍어로 통역하는 리카르도의 목소리가 떨렸다.
“저 배는 사들인 게 아니라 우리가 직접 건조한 겁니다. 그리고 여기, 우리 조선 국왕께서 귀국에 보내신 친서가 있습니다. 부디 우리가 이곳 항구에서 교역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친서라…이건 페르시아어도, 아랍어도 아니잖은가? 한 통은 프랑크인 놈들이 쓰는 말이고, 다른 한 통은 무슨 이해할 수 없는 도안 같군. 이게 편지라고?”
이기빈은 이제껏 살면서 발휘한 적이 없을 정도의 인내심을 발휘해서 참았다. 그러는 사이 태수 옆에 붙은 부하 관리 중 하나가 라틴어로 된 친서 내용을 번역해서 태수에게 전달했다. 한문본 내용에 관해서는 이기빈이 리카르도를 통해서 설명했다.
“두 편지는 모두 같은 내용이며, 정본은 중국 문자로 된 것이지만 서방에서 통용될 수 있는 라틴어로 작성한 부본을 함께 보낸 것입니다.”
친서 내용은 오스만 제국 회왕 – 조선에서는 가톨릭의 교황을 법왕(法王)이라고 부르듯이, 회회교의 ‘칼리프’는 회왕(回王)으로 표기한다 ? 이자 술탄(述歎)인 군주에게 안부를 전함과 동시에 교역을 청하는 내용이었다.
다만 이 서한에서는 술탄을 조선 국왕과 동격으로 취급하여 예우하기는 하였으되 상급으로 존대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도이칠란트 카이저보다도 낮은, 프랑스나 스페인 왕과 같은 단에 놓았다. 유럽에서도 그렇게 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프랑크인들이 쓰는 말로 쓴 편지는 프랑크 땅에나 가져가라.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이따위 문서를 가져오는 거냐?”
태수는 부하가 내미는 조선 국왕의 친서를 받아들려고도 하지 않았다. 코로 매캐한 연기를 뿜었을 뿐이다.
“너희가 성의만 있었다면 인도에 들렀을 때 아랍어나 페르시아어로 작성한 부본을 덧붙이는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을 텐데. 인도에서는 페르시아어를 구사하는 문사(文士)를 간단히 구할 수 있으니까. 역시 동방의 야만인들이라 그런 주변머리도 없군.”
이기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수 뒤에 병풍처럼 서 있는 터번 차림의 호위병들과 그 허리춤에 달린 언월도를 흘낏 노려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이기빈은 태수의 관저에 들어오면서 무장을 해제당한 상태였고, 통역인 리카르도 외에는 아무도 데려오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돌아가서 다시 서한을 작성해 오라고 하면 그것도 잔인한 일이겠지. 그대들이 프랑크인들의 예에 따라서 이 도시에서 규정한 법과 질서를 성실하게 준수하겠다고 서약하면, 위대하신 파디샤께서 통치하는 이 땅에서 평화로이 교역하도록 허락하겠다.”
‘파디샤(Pad-e ?ah)’는 ‘왕들의 주인’이라는 의미의 페르시아어로, 술탄보다 훨씬 격이 높은 단어다. 사실상 황제와 같은 뜻을 갖는 단어로, 오스만 제국 술탄을 가리키는 정식 호칭 중에 하나다.
“알겠습니다.”
“그럼 가봐.”
태수는 끝까지 방석 위에서 일어나지 않았고 이기빈에게 차 한 잔 대접하지 않았다. 이기빈 역시 나가겠다는 인사로 고개를 살짝 숙였을 뿐 아까 들어와서 처음 인사를 올릴 때처럼 허리 숙여서 절하지 않았다.
이기빈을 따라 나가던 리카르도는 등골이 서늘해져 오는 기분에 무의식적으로 몸을 떨었다. 고아에서 이기빈에게 고용된 지 2개월, 그 뒤로 이 야심만만하고 건방지면서도 소탈한 조선인 귀족 젊은이가 이토록 분노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투르크 태수는 하시시에 취해서 머릿속이 곤죽이 된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기 눈앞에 있는 사람이 화가 나 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하고 싶은 말만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여댈 수 있을까?
그따위로 무능한 인간이니 콘스탄티노플 궁정이나 발칸 반도에서 요직을 맡지 못하고 모카 같은 곳에 처박혀 있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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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가져온 베와 인삼은 꽤 괜찮은 값으로 팔렸다. 인도산 면직물에 익숙한 상인들은 수력 직기를 이용해서 짠 조선산 베도 괜찮은 물건이라고 호평했다. 다만 인도산 최고급품과 비길 만한 물건으로 봐주지는 않았다. 인삼은 어떻게들 소문을 들었는지 순식간에 다 팔렸다.
“그래도 손해는 안 볼 값이로군.”
이기빈은 함께 타고 온 외수사 관원 강연성이 회회국 상인들과 흥정한 결과를 가져오자 쓱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이곳 상인들이 쓰는 숫자를 보니 글꼴은 달라도 조선과 같은 무종수를 쓰고 있는 것이, 무척 흥미로웠다.
“무종대왕께서 만드신 가르침이 이곳까지 전해진 것인가.”
무종수 창제가 백여 년 전 일이니 전해지려면 전해지지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지금 그걸 따지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어떻소. 가배 생두를 팔겠다는 자가 혹시 있었소?”
강연성이 고개를 조아렸다. 명나라와 일본, 남만 일대를 오가며 해외교역으로 잔뼈가 굵은, 쉰 살이 넘은 고참 외수사 관원이다. 높은 이들과 교섭하여 타협을 얻어내고 현안을 조정하는 데 매우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아니요. 중개상 서너 명을 붙들고 은밀히 청해 보았습니다만 하나같이 고개를 저었습니다. 싹을 틔울 수 있는 생두를 유출하는 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로, 이곳 모카에서는 볶거나 찌지 않고서는 어떤 가배 종자도 가져나갈 수 없다고 합니다.”
태수가 면전에서 가하는 그 엄청난 모욕을 참은 이유는 순전히 가배 종자 하나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걸 구할 수 없다니, 하늘이 뒤집히고 간과 쓸개가 입으로 도로 튀어나올 상황이다.
“가배 무게 열 배 어치의 금을 주어도 안 되겠다고 하오?”
“무슨 조건을 걸어도 안 된답니다. 만약에 들키면 자기네 일족 전원이 투옥되어서 사내들은 거세당해 환관이 되고 여인들은 어딘가의 후궁에 노예로 끌려갈 거라고 합니다. 가배 종자를 유출한 죄는 그 정도로 중하다 하였습니다.”
이기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선실 안을 맴돌았다. 한참 동안 혼자 걷더니 강연성을 향해 휙 돌아서서는 일갈했다.
“안 돼, 안 돼. 방향이 틀렸어. 잃을 것이 많은 대상인 나부랭이 따위한테 연통을 넣으니까 그런 답이 나오지. 이건 배부른 놈들과 교섭해서 될 일이 아니오. 천한 노비들, 우리가 원하는 걸 구해주면 자기 팔자를 고칠 수 있다고 확신할 놈들을 찾으시오.”
강연성은 고관들과 허허거리고 웃으며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익숙한 사람이다. 그런 식의 문제 해결은 실행 과정에서 생기는 갈등을 해결하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어도, 상대가 가진 원칙 자체를 꺾고 우리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알겠습니다, 천회사 나리.”
강연성이 고개를 조아리며 밖으로 나갔다. 과연 생두를 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구하기만 한다면 곧바로 닻을 올릴 테다. 태수 관저 방향으로 18근 포 포탄을 10발쯤 한꺼번에 퍼부어 주고 말이다. 한 방 갈기고 바로 도망치면 쫓아올 수 있을 게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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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두는 아예 항구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며칠 뒤에 강연성이 정보를 캐 왔다. 이곳에서 사들인 커피와 향료, 수은 같은 상품을 배에 싣는 아랍인 짐꾼들을 구슬려서 얻어낸 결과다. 작업을 감독하는 모카 상인들 몰래 뒤로 빼낸 다음 황금을 손에 쥐여주자 입을 열었다고 했다.
“모카 항구 가까이에는 가배 농장이 없습니다. 가배를 재배하는 농장은 내륙으로 수백 리를 들어간 산악지대에 있고, 여기서 열매를 수확한 다음 햇빛에 바짝 말리고 맷돌에 갈아 껍질과 살을 벗긴다고 합니다. 그리고 살짝 볶아서 항구로 실어내는 거지요.”
“그럼 생두를 구하려면 내륙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건가.”
그렇다면 항구에서 노비들을 매수해 봐야 소용이 없다. 생두가 항구에 들어와야 빼돌릴 수 있는데, 항구에서 일하는 노비들은 생두를 아예 접할 일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예, 지금 내륙으로 들어가면 생두를 구할 수 있습니다. 가배를 수확하는 시기가 6월…우리 달력으로 5월부터 11월까지라고 하니, 딱 지금이 올해 수확 끝물입니다. 농장에 가면 신선한 가배를 구할 수 있는 마지막 시기입니다.”
“그럼 방법은 하나뿐이군. 어떻게든 수소문해서 가배 농장까지 가는 길을 찾아보시오. 태수 몰래 농장으로 직접 가는 거요. 가서 농장에서 건조하고 있는 생두를 훔치거나, 아직 나무에 달린 생 열매라도 따와야겠소.”
“그, 그래도 되, 되겠습니까…? 법과 질서를 지키겠다고 태수에게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명백한 절도다. 장사꾼이지 도둑은 아닌 강연성이 새파랗게 질려서 말을 더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이기빈은 태연했다.
“그런 약속을 하긴 했지. 하지만 나는 모카 항구에서 법과 질서를 지키겠다고 했지, 모카를 벗어난 땅에서까지 아무 짓도 하지 않겠다고는 말하지 않았소.”
“나리, 그래도 그건 너무 위험합니다. 차라리 태수에게 생두를 나눠달라고 진심으로 간절히 청하시면 어떻겠습니까?”
강연성은 잘못하면 회회국과 다시는 교역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도 있다며, 주상과 조정에서 이 교역을 성공시키는데 얼마나 기대를 걸고 계시는지 아시지 않느냐며 애걸했다. 그가 명을 들어야 할 상대가 이기빈이 아니었다면 통했을지도 모르지만, 불행하게도 이기빈이었다.
“전하께서는 내게 가배 씨앗을 꼭 구해오라는 어명을 내리셨소. 이를 수행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각오가 되어있소.”
게다가 모카 태수는 접견 첫날부터 이기빈에게 정말 개 같은 인상을 남기지 않았던가. 감히 전하께서 보내신 친서를 휴지 취급하고, 요상한 연초(煙草)에 취해서 거만한 태도로 일관했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 꼭 엿을 먹여주어야 했다.
“알겠습니다. 해보지요.”
강연성이 한숨을 쉬면서 선실을 나갔다. 잠시 생각하던 이기빈은 바로 홍상훈을 불러 배에 타고 있는 수졸들에게 그동안 순번을 정해 가며 허용하던 상륙을 중단하고, 오늘부터는 모든 수졸과 사관들을 배에만 머물게 하라고 했다.
“어떤 연유로 금지한다고 공지할까요?”
“모카에 양매창이 돈다는 이야기를 내가 들었기에, 혹시나 우리 수졸들에게 퍼지지 않을까 해서 상륙을 금지하고 추세를 보려 함이라 이르게. 그리고 선의로 하여금 모든 사관과 수졸을 검진하게 하여 내 지시가 그럴듯해 보이게 하고.”
양매창(楊梅瘡)만큼 선인들이 무서워하는 병도 없다. 외국에 나갔다가 귀항하는 선원이 만약 양매창에 걸린 채 귀국하면 고환을 절제하도록 하고 있는데, 그러면 가문의 대를 잇지 못하게 되어 그대로 집안이 단절되기 때문이다.
고환을 절제하는 건 그게 치료법이라서가 아니다. 양매창은 남녀 간의 정교(情交)로 전염이 이루어지므로, 병을 더 퍼뜨리지 못하게 하고자 고환을 잘라 고자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여자가 병에 걸렸을 때 ? 양매창에 걸리는 여자는 대개 벽란도 색주가 기녀들이다 – 에는 잘라낼 것이 없으니 그 대신 아랫배에 매화 문신을 새긴다. 정을 통하려 하다가 배에 새겨진 문신을 보고 정신을 차리라는 뜻이다.
치료법이 있다면 딱 하나, 양의들의 처방에 따라 수은 연고를 바르거나 수은 증기를 국부에 쐬는 것뿐이지만 수은이 엄청나게 비싼 약재다 보니 이것도 쉬운 처치는 아니다. 그러니 지금 항구에 양매창이 퍼졌다는 한마디에 선원들이 죄다 상륙할 생각을 접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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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빈은 수졸들을 배에 잡아놓으면서 며칠을 기다렸다. 리카르도와 함께 상륙한 강연성이 소식을 가져오기만 하면 바로 날랜 군사들을 토인으로 변장시킨 다음 가배가 자라는 농장까지 침입하게 해서 생두를 가져오게 할 참이었다. 그런데 며칠째 영 소식이 없었다.
“조선 사신은 즉시 태수님의 관저로 오시오!”
불안감이 들기 시작할 무렵 돌궐인들이 배를 타고 찾아왔다. 돌궐인 통역이 포르투갈어로 외치자 이기빈은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일단 그들의 배에 올라탔다. 등선군 네 명이 이기빈을 경호하느라 함께 타고 성벽으로 둘러싸인 항구를 향했다.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내, 그대에게 법과 질서를 지키는 한 교역을 허락한다고 했을 것이다.”
모카 태수는 여전히 두꺼운 방석 위에 누워 수연통을 물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흐린 눈빛에 분노가 어려 있었다.
“커피 씨앗은 절대로 유출할 수 없는 귀한 물건이다. 법도대로 하자면 너희 모두 처형하고 화물을 몰수해야 하지만, 미수범인 데다 너희는 예의도 법도 전혀 모르는 야만인이니 자비를 베풀어 살려서 보내주겠다. 내일 해가 뜰 때 바로 모카를 떠나라.”
태수가 손짓하자 잔뜩 채찍질을 당해 피투성이가 된 리카르도와 강연성이 끌려와 이기빈의 눈앞에 내동댕이쳐졌다. 두 사람 모두 수염까지 싹 밀린 상태였다.
그 참상을 본 이기빈의 눈이 뒤집히려는 순간 은쟁반을 든 하인 하나가 앞에 나타나 쟁반을 태수 앞에 내려놓았다. 한 달 전에 봉정한 임금의 친서가 그 위에 놓여 있었다.
“이것도 가지고 꺼져라. 위대하신 파디샤의 은혜도 모르는 동방에서 온 야만인 추장의 친서 따위 휴지나 마찬가지다.”
태수는 쟁반을 가지고 온 흑인 노예를 시켜 친서를 조각조각 찢게 했다. 그리고 그 조각을 쓰러진 두 사람의 몸 위에 뿌렸다.
“자, 꺼져라. 살아서 돌아가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라.”
이기빈은 아무 대답 없이 허리만 깊게 숙여 절했다. 그 모습을 본 태수를 비롯한 돌궐인들은 다들 생각했다. 이기빈이 공포에 질려 입도 열지 못한다고 말이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두 눈동자를 볼 수 없었으니, 당연한 오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