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799
2부 57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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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진년(1604) 3월 초, 이기빈이 탄 천회사 좌선 도척이 콜카타로 들어가는 갠지스강 하구에 닻을 내렸다. 이들이 여기에 들렀다 간 게 작년인 계묘년(1603) 10월이었으니, 약 5개월 만에 다시 돌아온 셈이다.
“반년 뒤에 돌아오겠다 했으니, 날짜는 제대로 맞춘 셈입니다.”
“그러게 말일세. 우리가 좀 기다리는 편이 늦게 왔다고 타박을 당하는 것보다는 낫지.”
이기빈은 고물 쪽 갑판에서 해변을 보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다른 장수들은 군사들 앞에서 이런 ‘점잖지 못한’ 행동을 삼가는 편이지만, 이기빈은 예전부터 그런 데 별로 개의치 않았다. 군사들도 소탈한 상관의 모습에 익숙해서 별 반응들이 없었다.
“그래, 다른 배들은 상태가 어떤가? 물이 많이 새는 배는 없고?”
조윤호 부령은 들고 온 두루마리를 펼쳐 들었다. 그리고 필요한 부분을 찾아 힘주어 읽기 시작했다.
“회회선들은 늘 새는 만큼 물이 샙니다. 다른 배들도 전부 물이 새고 있기는 하나, 위험할 정도로 많이 새는 배는 없습니다.”
양선 도입 초기에 조선 수군이 애를 먹은 문제 중 하나가 선내에 새어 들어오는 물이었다. 판옥선은 판재 끝단을 겹쳐 붙여서 연결하므로 물이 별로 새지 않는다. 하지만 양선은 판재의 단면을 직접 맞대 붙여서 건조하기 때문에 틈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 틈은 밧줄을 역청에 적셔 만든 뱃밥으로 막지만 그래도 물은 샌다. 새들어온 물은 선창 맨 아래쪽 바닥에 고이는데, 고인 물을 주기적으로 퍼내 주지 않으면 당연히 문제가 생긴다. 양선은 덩치가 큰 만큼 고이는 물도 많았다.
그래도 설비한 양수기로 제때 물을 퍼내기만 하면 큰 문제는 없다. 물론 물이 새는 정도가 너무 심하면 배가 싣고 있는 모든 짐을 내리고 건선거나 적당한 해변에 선체를 올려서 파손된 부위를 찾아 수리한다.
“상관을 만들면 배를 정비할 수 있는 시설도 만들어놓아야겠지. 거제도에 있는 것 같은 큰 건선거는 필요 없겠지만.”
본래 수군은 각 진포에서 자체적으로 배를 건조했다. 전통적인 조선 선박을 건조에는 데는 배목수만 있으면 딱히 큰 설비가 필요 없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각 전선의 대략적인 구조와 크기는 비슷해도 세부적으로는 차이가 꽤 크다.
하지만 양선 건조는 다르다. 배가 커지면서 기중기와 건선거 같은 고정 설비가 필요해졌다. 지금 조선 수군이 양선을 건조하는 주력 조선소는 연해주가 1순위, 얼마 전에 새로 지은 원산 조선소가 2순위다. 3번째 조선소도 거제도에서 가동을 준비하고 있다.
양선을 직접 건조하지는 않지만, 각 수영 본영에도 건선거 하나 정도씩은 다 만들어놓았다. 보유하고 있는 전선과 대형 상선을 수리하는 데 쓰기 위해서다. 본토 바깥인 주산진에도, 그 밑에 있는 대남도에도 건선거는 있다. 대형선을 손볼 때마다 본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일단은 해안에 너무 가까이 가지 말고, 정박한 채 저들의 답장을 기다리도록 한다. 주변을 돌면서 털 만한 해적이 또 있는지 탐색하는 것도 좋겠지.”
이기빈이 작년 10월에 벵골을 떠날 때 거느린 배는 도척 1척뿐이었다. 하지만 모카를 떠날 때는 5척이 되었고 아덴에서는 9척이 되었다. 그리고 인도로 돌아와 벵골로 오는 도중에 3척 더 늘어나서 지금은 12척이다.
부하는 1200여 명이다. 조선에서부터 따라온 조선인 수졸과 등선군이 500여 명, 회회군이 역시 500여 명, 인도 근해에서 붙잡은 인도인과 유럽인 해적 출신 포로가 200여 명이다.
여기는 잡다한 군주국이 산재한 곳이다. 이곳 바다에서 이기빈이 마음대로 활개를 친다고 해서 제재할 세력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기빈이 자기 눈앞에 나타난 배를 닥치는 대로 약탈하지는 않았다.
늘어난 배 3척은 멋모르고 이들을 덮친 해적선이었다. 척후를 겸해 조금 앞서서 가던 이쪽 배를 평범한 상선인 줄로만 알고 덮쳤던 모양인데, 오판을 수정하기도 전에 후속하던 배들이 놈들을 포위했다. 이기빈과 군사들은 역공을 가해 간단하게 2척을 나포했다.
이기빈은 여기서 일을 끝내지 않았다. 생포한 해적들을 심문해서 소굴 위치를 알아낸 다음 선단을 동원해서 그대로 덮쳤다. 그리고 놈들이 모아놓은 재물을 몽땅 털어냈을뿐더러, 포구 안에 머무르고 있던 해적선 1척을 더 빼앗고 붙잡혀 있던 무굴인 300여 명까지 구출해냈다.
‘사또, 어찌하시겠습니까? 모카에서처럼 괜찮은 연놈들은 우리가 골라서 가지고 나머지는 그냥 바다에….’
‘어허, 우리는 수군이지 해적이 아니니라! 너희는 그 점을 잊지 마라. 그리고 저들은 노예가 아니라 납치된 양민이잖느냐.’
굳이 따지자면 아라비아에서 만난 노예들도 납치된 양민이 태반이었다. 하지만 이기빈은 그 노예들을 모조리 구출해서 집에 보내주려고 하지는 않았다. 유럽에 데려갈 수도 없을뿐더러, 다들 하층민이라 갖은 고생을 무릅쓰고 보내주더라도 딱히 생길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기빈은 매번 철저하게 계산을 마친 뒤에만 군사를 움직였다. 모카, 아덴, 소코트라에서도 이기빈은 적당한 명분을 손에 넣기 전에는 칼을 뽑지 않았다. 분명하게 무고한 상대를 고의로 공격하거나 노략질하지도 않았다.
마구잡이로 약탈하면 막대한 재물을 손에 넣을 수 있다. 하지만 욕심에 눈이 멀어 무절제한 약탈을 벌이면 군사들의 욕심이 커지고, 그러다가 완전한 해적으로 탈바꿈하는 건 시간문제가 된다. 해적이 되면 본국과 인연을 끊어야 하고, 영원히 고향에 돌아갈 수도 없다.
포르투갈 같은 놈들이야 다르다. 지금도 인도양과 남만해 ? 말라카 일대 바다를 조선에서 부르는 이름 ? 일대에는 포르투갈 해적이 수없이 많다. 하지만 조선은 포르투갈처럼 해적질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해적이 되어 돌아가다니, 말도 안 된다.
이기빈은 도적 수령 따위로 전락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왕실의 충신이자 명장으로서 청사(靑史)에다 길이 이름을 남기고, 가문의 영광을 드높이는 일이야말로 사대부로서 이루어야 할 필생의 위업이었다. 반역자로 도적열전에 실리다니, 그게 어디 될 말인가?
“그러하기에 군사들이 사또께 충실히 복종하는 것이지요.”
“물론일세.”
홍상훈 정위가 솔직하게 지적했듯이, 임금의 권위가 뒤에 있으니까 휘하의 장졸들이 도적의 졸개가 아니라 조선의 군사로서 이기빈을 따르는 것이다. 이기빈이 도가 지나치게 행동하다가 도적으로 전락한다면, 그동안 그가 쌓아 올린 모든 성취도 함께 사라지고 만다.
그뿐만이 아니다. 목숨도 보장할 수가 없다. 임금에 대한 충성을 견지하는 군관 중 하나가 반역자가 된 이기빈의 목을 베어 조정에 바칠지도 모른다. 아니면 도적 두목으로서의 자리를 노리는 누군가가 등을 찌를 수도 있다. 어느 쪽이건 바람직한 결말은 아니라고 하겠다.
“벵골 태수에게 우리가 도착했다는 연락을 보내라. 그리고 그 김에 해적 소굴에서 구출해온 무굴인 300명도 함께 보내주도록 하라.”
마침 일이 잘 풀리려고 그랬는지, 해적 소굴에서 구출해낸 인질들은 벵골에서 성지인 회도 ‘마카’를 순례하러 가던 회교도 귀족과 상인들이었다. 이들을 돌려주면 상관을 개설하는 데 꽤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기빈이 괜히 이들을 잘 대우하다가 송환하는 게 아니었다.
“회답이 올 때까지 주변 해역에서 해적이나 찾아보도록 하자. 나쁜 답은 오지 않을 테니.”
“예, 사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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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의 조선이라, 가톨릭 선교사들에게 들어는 본 나라로군.”
이기빈과 비슷한 연배인 무굴 왕자는 껄껄 웃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그대들도 칭기즈칸의 후예라 하였소? 우리도 그 후예요. 우리 정식 국호인 ‘구르카니’도 옛 조상인 티무르 대제께서 칭기즈칸 일족의 부마(구르칸)가 되신 데서 유래한 것이니까. 사자와 태양을 그린 표장도 그 이전 차가타이한국 때부터 써오던 것이고.”
무굴 제국의 시조 바부르는 티무르의 셋째 아들 미란 샤의 자손이면서 모계로는 칭기즈칸의 둘째 아들 차가타이의 혈통을 이어받았다. 티무르도 모계로 칭기즈칸의 피를 받았고, 자신은 물론 아들과 손자들도 칭기즈칸 혈통의 아내를 얻었다. 이를 근거로 해서 ‘부마’를 자칭했다.
“그러니 우리는 같은 피를 나누었다 할 수 있겠군. 먼 곳에서 찾아온 형제를 만나 반갑소.”
이기빈은 ‘미르자 살림’이라는 이 왕자에게 조선의 전신인 고려도 몽골의 부마국이었다고 설명했다. 그것도 5대 대칸이었던 쿠빌라이 칸의 사위였다고 말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조선은 그 후예가 아니지만, 선양을 받았다고 적당히 주워섬겼다.
“수백 년 전의 인연이 이렇게 이어지다니, 이것도 운명이오. 자, 이 페르시아산 포도주 맛이 무척 좋으니 한 잔 더 드시구려.”
미르자 살림은 마침 지방을 순시하러 나온 참이라고 했다. 본래 주로 머무르는 장소인 자기 영지는 여기보다 한참 서쪽에 있는 ‘알라하바드’라는 고장이라면서 말이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마마께서는 술을 금하는 회교도가 아니십니까?”
“예언자께서 금지하신 건 폭음한 뒤에 취해 추태를 벌이지 말라는 것이지, 적당히 마시면서 즐거운 기분만 유지한다면 문제 될 일이 없소. 이 정도는 평범한 양이오.”
미르자 살림은 ‘바드샤’라고 하는 무굴 제국 군주의 셋째 아들로, 두 형이 어려서 죽은 탓에 사실상 장남이 되었다고 했다. 지금 군주인 부왕 악바르가 사망하면 살림이 보위를 물려받게 된다.
“돌궐국 군주의 호칭이 ‘파디샤’라고 하던데 귀국과 비슷하군요.”
“그놈들이나 우리나 다 페르시아어를 쓰니까. 본래 페르시아어로 ‘파디샤’라고 하던 것이, 이곳 힌두인들의 땅에 들어와서 발음이 조금 변했을 뿐이오. 천한 것들이 페르시아어를 원래 그대로 말하지 못하는 탓이지.”
두 사람이 지금 나누는 대화는 포르투갈어로 진행되는 중이다. 미르자 살림은 포르투갈어를 구사하는 통역을 데려왔고, 이기빈 역시 리카르도를 데려와 통역을 맡겼다. 통역으로 데려온 불승들은 알고 보니 조선식 범어가 천축에서 쓰는 범어와 전혀 달라서 별 소용이 없었다.
“다른 것보다 300명이나 되는 우리 순례자들을 구원해 주었으니 그 점에 관해 귀공과 귀국 국왕에게 감사를 표하오.”
회교도에게 있어서 일생에 1번 행하는 메카 순례는 엄청나게 중요한 행사다. 게다가 평범한 일반 백성도 아니고 벵골과 아라칸 지방을 통치하는 왕족과 귀족, 거상 가문 사람들을 잔뜩 구해주었으니 미르자 살림이 고마워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게다가 귀공은 내게 풍부한 선물까지 주었소. 어지간한 답례로는 그 성의에 보답하지 못할 것 같은데, 어떻게 답례하면 좋을지 떠오르지 않는구려.”
벵골 태수가 보내는 회답을 기다리던 이기빈에게, 벵골 태수가 아니라 무굴 왕세자가 그를 만나리라는 통보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희소식이었다. 훨씬 높은 실권자가 아닌가.
게다가 지금 보위에 있는 부왕은 환갑을 넘긴 데다 건강도 좋지 못하여, 조만간 왕세자가 자리를 물려받을 거라고 했다. 이기빈으로서는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기회였다.
주도(州都)인 이곳 판두아에서 왕세자를 알현하게 되었다는 통보를 받은 이기빈은 작심하고 선물을 골랐다. 아라비아에서 획득한 보석과 향료, 융단, 여기에 조선에서 가져온 꿀에 절인 홍삼 20근과 각종 독주 50근이 추가되었다. 왕자가 술을 좋아한다는 풍문을 들은 덕이다.
홍삼 먹고 솟은 기운을 활용할 수 있도록 미녀도 2명 바쳤다. 임금에게 바친다고 모카에서 데려온 백인 여자 노예 14명 중에서 2명을 골라 미르자 살림에게 내준 것이다. 나중에 주상이 아신다고 해도 질책을 받을 일은 없다. 어차피 이기빈 자신이 잡은 노획물 아닌가.
혹시 누군가 다리를 걸고 나선다고 해도 변명할 말은 있다. 그 두 명이 몇 달이나 배를 더 타지 못할 만큼 몸이 약해서, 다 죽을 것 같았다고 둘러대면 그만이다. 죽게 놔두는 것보다야 다른 나라에 넘기면서 유용하게 써먹는 편이 더 좋지 않겠는가?
“음, 사실 소망이 있습니다만 그리 큰 것은 아닙니다. 여기, 저희가 조선에서 가져온 술부터 한 잔 드시고 들으시지요. 사내들 몸에 아주 좋은 약주입니다.”
이기빈이 불이 붙을 만큼 독한 소주로 담근 인삼주를 따라 내밀자 미르자 살림은 거침없이 다섯 잔을 들이켰다. 폭음을 금하고 즐거울 만큼 조금만 마신다더니, 이런 독한 술을 어떻게 저렇게 잘 마시는지 신기했다. 어째 멈출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호, 이거 괜찮군. 여봐라, 악기만 연주하지 말고 무희들을 불러 춤도 좀 추게 하여라.”
독한 인삼주를 마시고 술기운이 올랐는지, 미르자 살림이 크게 소리를 쳤다. 곧바로 얼굴에 면사포를 쓰고 얇은 천을 온몸에 둘러 맨살이 비쳐 보이는 무희 십여 명이 나오더니 악사들이 연주하는 천축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조선 무희들의 춤과는 무척 다른, 팔다리를 묘하게 꼬는 이상한 춤이었지만 반라(半裸)인 무희들의 자태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무굴국이 큰 나라임은 유럽인들에게 들어 이미 알고 있었으나, 역시 직접 와서 보는 것만 못 합니다. 이렇게 흥겨운 유희를 즐기는 나라라는 말은 누구도 전하지 않더군요. 실로 이를 보기만 해도 무척 만족스럽습니다.”
“흠, 그럼 유럽 미인에 대한 답례로 우리 여인들을 좀 드릴까? 저기 있는 무희 중에 대여섯 명쯤 골라 보시오. 그대들이 돌아가는 길에 바로 동반해서 보내주도록 하지.”
이기빈은 이런 제안을 받고 대답을 망설일 얼간이가 아니었다. 서슴없이 대답을 내놓았다.
“왕자께서 베푸신 호의에는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저희는 중국과도 버금가는 대국인 귀국과 영속적인 교류를 해나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동안 교류하지 않고 지낸 세월이 아까우니, 상관을 설치하여 교역하면서 앞으로 더욱 가깝게 지내기를 바랍니다.”
영토 면적과 인구, 소유한 부의 크기로만 따진다면 무굴은 분명 명나라에 맞먹는 대국이다. 다만 명나라를 상국으로 받드는 한은 그 호칭 등에 있어서는 다소 골치 아픈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도이치 군주를 ‘카이저’라고 부르듯, 이쪽도 ‘바드샤’라고 적당히 부르면 되지 않을까.
“겨우 그거요? 겨우? 그 정도야 그런 선물을 바치지 않았어도 허락해줬을 텐데.”
미르자 살림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쉽게 상관 개설을 허락했다. 전용으로 항구를 지어서 운영하고, 항구 보호를 위해 요새를 짓는 것도 용인했다. 지난번 방문 때 관리들이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얼마나 답변을 질질 끌었는지 생각하면, 충격적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이 인도 땅에는 수천 년 전부터 사방에서 상인과 여행자가 몰려들었소. 이 땅이 풍요로운 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그대들도 그 부를 얻고자 원하는 게 아니오?”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이곳 무굴 땅에서 생산되는 물자 중 저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사서 가져가고, 저희가 가진 물건 중 귀국에서 가치를 인정할 만한 것들을 가져와 팔고자 합니다. 모자라는 만큼은 금이나 은을 써야겠지요. 서로에게 이득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대들이 편한 대로. 우리는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하는 일에 익숙하오. 장사꾼들 역시도 외국인들을 상대하는 데 이골이 나 있지. 그들과 흥정해서 얼마나 좋은 조건으로 거래할 수 있을지는 순전히 그대들 조선인들의 역량이오.”
“알겠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무희들의 춤을 감상하면서 또 거나하게 술잔이 돌았다. 약간 알딸딸하게 술기운이 오르자, 분위기도 훨씬 흥겨워졌다. 어느새 둘은 호형호제를 시작했는데, 실제 나이는 이기빈이 보다 연상이었지만 왕자인 상대에 대한 예우로 서슴없이 형님이라고 불렀다.
술기운이 오른 두 사람은 온갖 무용담을 서로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기빈이 전쟁 때 왜군과 싸운 이야기를 하자, 미르자 살림이 눈을 번쩍 뜨더니 자기가 거느린 왜병을 불렀다.
“이놈들이 그대들이 잡아 팔아치운 거였군? 무척 용맹하고 충성스러워 내 경호원으로 아주 잘 쓰고 있네. 말 가르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네만.”
왜병은 조선옷을 입은 이기빈을 보고 눈에 핏발을 세웠다. 하지만 입을 열어 뭐라 떠들지는 않았고, 그 자리에 조용히 서 있기만 하다가 허락을 받고 물러갔다. 떠나는 왜병의 뒷모습을 보며 조금 생각에 빠졌던 이기빈이 질문을 하나 던졌다.
“헌데 형님께서는 아직 왕세자 신분이 아니십니까? 이런 사안을 형님께서 임의로 결정하실 수 있습니까? 부왕께서 판단을 뒤집지 않으실지요?”
질문을 받은 미르자 살림이 폭소를 터트렸다. 아무리 호형호제를 허락했다고 해도 무례하게 보일 수 있는 질문이었지만, 술기운 탓인지 본성이 원래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미르자 살림은 이기빈의 태도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걱정해 줘서 고맙네. 하지만 나는 곧 옥좌에 앉아 바드샤, 왕 중의 왕이 될 사람이야. 한때 좀 일찍 왕위를 물려주십사 했다가 혼이 나긴 했지만, 얼마 후에 화해했고 부왕께서도 나를 후계자로 공인하셨지. 그러니 내 결정이 뒤집힐까 걱정할 필요는 없네.”
미르자 살림은 자기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부왕에게 진압당했던 이야기를 신나게 떠들었다. 그 뒤로도 부어라 마셔라 하는 잔치가 신나게 이어지면서 이국적인 술과 음식과 여자가 끝도 없이 나왔다. 배에 남겨두고 온 사관들에게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