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8
1부 00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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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변함없이 빡센 하루가 시작되었다. 벌써 1년이 넘게 시달리고 있는 치통은 그럭저럭 좀 괜찮았지만 일은 여전히 많았다.
회의에 올라온 안건들은 늘 비슷했다. 예법이 어쩌고 하는 골치 아픈 일들은 적당히 신하들에게 결정을 떠넘기고, 오전 회의를 마무리하려는 참이었다. 오늘따라 별 말 없이 조용히 있던 대사간 이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 신이 듣자옵건대 실로 괴이한 일이 일어났사옵니다.”
“괴이한 일?”
나는 이감에 대한 감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이감은 간언을 맡은 사간원의 우두머리인데, 그 밑에 있는 간관들은 내 수세식 화장실 설치를 반대한 주도세력이었다. 물론 그 외에도 수많은 태클을 걸어대며 내 속을 긁었다.
“위를 능멸하는 관습은 매우 좋지 않다! 요즘 간관들은 도를 지나치는도다!”
적어도 열흘에 한 번은 이 소리가 내 입 밖으로 나왔다. 전부 다 이 대간들 때문이었다.
물론 언로를 아예 막아서는 안 된다. 견제 없는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1년 동안 간관들이 나한테 하는 행동은 정도가 지나쳤다. 뭐만 하려고 하면 붙잡고 늘어지는데, 정말 반대를 위한 반대 그 자체로 보였다.
내 시선이 다소 삐딱해 보였는지, 이감은 매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신이 듣자옵건대, 얼마 전 임기를 마치고 한양으로 올라온 전 초계 군수 유인홍의 첩이 유인홍의 딸을 찔러 죽였다 하옵니다. 실로 괴이한 일이기에 감히 아룁니다.”
“뭣이? 첩이 본처 소생 딸을 죽였다고?
깜짝 놀랐다. 허, 장화홍련전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대한민국에서도 계모가 본처 자식을 구박하거나 죽이는 일이 실제로 가끔 있긴 하지만, 대놓고 칼로 찔러 죽인 사건은 처음 접해 본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신하들도 놀라워하는 기색이었다.
“그 사연을 소상히 말해 보라!”
잠시 헛기침을 한 이감이 설명을 시작했다.
“그 첩은 인홍의 종과 간음을 하고 있었습니다. 헌데 인홍의 딸에게 발각이 되었고, 이에 첩이 그 딸을 찔러 죽여 말이 새나가지 못하도록 했다 합니다. 실로 비상한 변괴라 아니할 수 없겠습니다.”
“맞다. 실로 변괴로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아니, 간통을 들키는 건 무섭고 살인을 저지르는 건 안 무섭단 말인가? 죽이고 어디 잘 숨긴 것도 아니고, 금방 들키지 않았는가. 대사간이 알 정도라니, 이 정도면 벌써 한양 도성 안에 파다하게 소문이 퍼졌을 게다.
“전하, 이는 참으로 큰 변괴입니다. 의금부로 하여금 인홍의 첩과 종을 급속히 잡아다 국문하게 하여 도피하지 못하게 하소서.”
옆에서 나선 사람은 우부승지 송질이었다. 조선은 유교국가다. 강상(綱常, 삼강과 오상. 즉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을 어긴 범죄는 대역죄와 같은 부류로 간주하여 의금부가 관할하니 송질의 제안은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좋다! 유인홍의 첩과 첩이 거느린 종들을 모조리 의금부로 압송하라. 이는 정말로 끔찍하고도 괴이한 사건이니 관련자 모두를 추국하여 진상을 밝혀야 한다.”
어쩌면 잘못 퍼진 소문일 수도 있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어느새 잔인한 계모, 표독한 ‘첩년’의 이미지가 형성되고 있었다. 세상에, 자기가 불륜을 저질러 놓고도 자기 잘못은 뉘우칠 줄 모르고 어린아이를 죽이다니! 세상에 이런 나쁜 년이 있나!
게다가 벌을 주어야 할 사람은 첩 하나가 아니다. 아버지인 유인홍에게도 상당히 수상쩍은 구석이 많다.
지금 도성 안에 이 사건에 대한 소문이 퍼져 있는데, 이 정도라면 아버지인 유인홍의 귀에도 들어가지 않았을 리가 없다. 하지만 유인홍이 알고도 아무 조치를 하지 않았으니 이리 소문이 퍼지지 않았겠나? 마땅히 유인홍도 수사해야 한다.
내가 이 조선 땅을 다스리는 동안 저런 잔인한 것들은 뿌리를 뽑을 테다. 세종대왕만한 성군은 못 되겠지만, 적어도 이런 일이라도 잘 처리해서 명군이라도 되어야 하지 않겠나!
– 3 –
“그래, 의금부에서 사건을 수사한 결과는 나왔느냐?”
말해 놓고 아차 싶었다. 어제 수사 지시를 내렸는데 벌써 결과가 나왔을 리가 없지 않은가. 대한민국이라면 전화와 인터넷으로 곧바로 수사 지시가 전달되고 용의자가 검거되겠지만 여기는 조선이다. 합천에서 있는 피의자가 잡혀 올라오려면 보름은 걸리겠지. 내가 성급했다.
“소신이 들은 바를 아뢰겠나이다.”
엥? 소식이 있어? 절로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어떻게 벌써 수사에 진전이 있지? 금부도사 중에 신행태보 대종이라도 있단 말인가?
“벌써 진전이 있었느냐? 말해 보아라.”
입을 연 도승지 권경우를 재촉했다. 형조는 우부승지인 송질 담당이지만 도승지가 나선 게 이상해 보이지는 않았다. 어차피 의금부는 형조판서가 아니라 임금 직속이고, 송질이 보고를 받았다고 해도 청와대 비서실장 격인 도승지가 취합해서 보고하는 게 당연하기 때문이다.
여기 오기 전에는 몰랐는데, 승정원 내에서 서열관계는 정말 무서웠다. 도승지가 먼저 발언하기 전에 다른 승지가 입을 잘못 놀리면 불호령이 떨어진다고 한다. 성종 때는 막내인 동부승지(공조 담당이라고)가 도승지보다 먼저 입을 놀렸다가 어전에서 두들겨 맞을 뻔 했었다나.
아무튼 내 재촉을 받은 도승지가 보고를 시작했다.
“의금부 도사 김광후가 신에게 말하기를, 어제 유인홍이 의금부 문밖에 와서 말하기를….”
“잠깐! 지금 유인홍이 의금부에 직접 찾아왔다 하였느냐?”
“그러하옵니다.”
“허, 실로 수상하다. 과인이 대사간에게 사건 이야기를 듣고 의금부에 조사를 명한 게 어제인데, 어제 유인홍 본인이 의금부에 나타났다고?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
이건 뭔가 매우 많이 부자연스럽다. 도승지 스스로도 그 점은 알 수 없는 듯,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 연유에 대해서는 소신도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유인홍이 말하기를, 자기 딸은 자살했다고 하였다 합니다.”
“자살이라고?”
뭔가 어처구니없는 기분이 들었다. 자살한 애를 가지고 그런 헛소문이 돌 수도 있는 일이긴 하니까. 어쨌든 유인홍의 해명은 들어봐야겠기에 도승지에게 어서 말해보라고 시켰다. 유인홍의 주장을 좀 읽기 편하게 쓰자면 이렇게 되겠다.
“예전에 초계에 부임했을 때 딸과 저 사이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장사꾼이 면포를 팔러 왔는데, 그만 이 생각 없는 것이 집안 노비들에게 봉급으로 줄 쌀을 가지고 면포를 사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크게 나무랐습니다.
헌데 이것이 자기가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뉘우칠 줄을 모르는 겁니다. 뉘우치기는커녕 야단을 친 아비에게 원망을 품고 밥을 굶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게 무슨 짓이냐고 또 꾸짖었더니 이것이 앙심을 굳게 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다른 고을에 시관(시험관)으로 나갈 일이 있어서 출타했다가 돌아오니 글쎄 이것이 자진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딸이 혼기가 다 찼기에 새 사위에게 선물할 손칼을 사 둔 것이 있었는데, 자기 방 상자에 보관해 둔 그 칼로 스스로 목을 찔렀습니다.
딸이 자진한 일이 자랑할 것도 아니라 조용히 묻어두었는데, 지금 나라에서 내 첩이 딸을 죽였다고 생각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대로는 죄 없이 의금부에 끌려가 국문을 당할 판이 되었으니, 너무도 원통하고 민망합니다.”
유인홍의 변명을 전한 도승지는 이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다. 주위 사람들이 경청하는 가운데 곧바로 자기 견해를 밝혔다.
“단연코 신은 유인홍이 거짓을 고했다고 판단합니다. 딸의 혼인에 쓸 손칼이 어찌 아비의 손이 아닌 딸의 상자에 들어 있었겠으며, 또 비록 대장부일지라도 분격한 일이 있지 않으면 본디 스스로 목숨을 끊기는 어려운데, 하물며 연약한 여자로서 능히 할 수 있겠습니까.”
음, 혼기가 다 찼다고 한 걸 보니 어린애는 아니었구나. 그건 내가 잘못 생각했네.
어쨌든 내가 듣기에 유인홍의 해명이 전혀 말이 안 되지는 않았다. 내가 자라며 본 수많은 뉴스에서도 한때의 욱함이나 분노 때문에 생각 없이 자살하는 애들은 많았다. 정말 별 같잖은 이유를 가지고도 말이다. 물론 칼로 자기 목을 찌를 정도로 독한 케이스는 많지 않았지만.
그보다 내가 의심스러운 부분은 다른 데 있었다. 유인홍은 의금부가 수사에 들어가리라고 예상이라도 했단 말인가? 어떻게 그렇게 때맞춰 의금부에 출두할 수 있었을까? 정말 자살로 알고 있고, 자신이 결백하다면 그냥 집에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내가 고심하는 동안 도승지는 다른 방향에서 수사 방안을 제시하고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증인은 인홍이 거느린 종들입니다. 하지만 지금 가장인 인홍이 딸이 자진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그 종들이 어찌 바로 사실을 말하겠습니까. 진상을 알아내기가 실로 어려울 것 같습니다.”
“으음, 사실이로다.”
조선은 효를 중시하는 유교 국가다. 아내가 남편을 고발하거나 자식이 아버지를 고발하는 행위, 종이 주인을 고발하는 행위는 고발한 자가 도리어 벌을 받는다. 설사 대역죄라고 해도 말이다. 그러니 고작 살인 따위(?)에서 주인을 고발하는 종이 나올 리가 없었다.
“인홍이 또한 말하기를, ‘성주(星州)에 사는 유생이 군적낭청(軍籍郞廳) 박항에게 편지를 보내 이 사건에 대해 알렸고, 박항이 그 편지를 여러 사람에게 보여서 이로 말미암아 일이 발각되었다.’하였습니다.”
“박항은 지금 군적청에 있는가?”
“그러할 것이옵니다. 그러니 신의 생각으로는 박항을 불러서 이 사건에 대해 물어보고 이어서 그 편지를 직접 보면 이 소란이 벌어진 연유를 알 수 있으리라고 여깁니다.”
“좋다. 당장 박항을 불러오도록 하라.”
군적청은 20년 전 성종 때에 군적을 정리하느라 만든 임시 관청이‘었’다. 이제 그만 폐지하자는 이들도 많았지만 나는 이를 계속 유지했다. 아예 상설기구화해서 전국의 군적을 실시간으로 가능한 정확하게 관리할 생각이었다.
그 군적청의 낭청이라면 종3품 당하관이다. 알지도 못하는 일에 함부로 입을 놀려 분란을 일으키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신은 성주에 사는 유생에게 그런 서신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곧 어전에 나타난 박항은 또 유인홍과 다른 진술을 했다. 계속 다른 말이 귀에 들어오니 머리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경기 감사 이육이 신에게 말하기를, ‘허씨 성을 한 어떤 유생에게 들었는데, 전 초계 군수의 첩이 주인 몰래 자기 종과 간통하다가 적실 딸에게 발각되자 찔러 죽여서 입을 다물게 했다 들었다’고 했습니다. 신은 이육의 말을 듣고 대사간 이감에게 전하였습니다.”
이건 무슨 카더라 통신 파헤치기도 아니고…한숨이 났다. 하지만 기왕 시작한 일이었다. 다음 고구마를 캘 차래다.
“그럼 이육을 불러라!”
“그 이야기는 제가 군적낭청 박항에게 전한 것이 맞습니다.”
경기감영은 경기도 권역이 아니라 서울 도성 안에 있다. 정확한 주소는 모르겠는데, 현대 서울로 따지면 종로 어디다. 궁궐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데는 아니라도 머리카락 정도 닿을 거리밖에 안 된다. 나도 처음에는 수원 어디쯤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어서 놀랐었다.
“그대는 누구에게 들었는가?”
“신의 처가 쪽 일가로, 성주에 사는 유생 허성이라는 자가 있습니다. 그자가 신의 집에 찾아와 그 일을 말하였는데, 하도 놀라운 일이라 전하께 아뢰려 하였으나 직접 본 일이 아니고 전해들은 일이므로 혹 와전되지 않았을까 염려하다가 미처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나도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 이육을 부를 때까지만 해도 약간 짜증이 났는데, 이젠 짜증도 나지 않았다.
“그럼 허성을 데려와 이야기의 출처를 묻도록 하라.”
잠시 머뭇거리던 도승지가 제안했다.
“전하, 성주까지 내려가 허성을 불러와 묻는다 해도 또 누군가에게 들었다 대답할 것입니다. 그 뒤에 또 말한 이를 찾아 데려오는 일도 여간 힘들지 않을 것이니, 사건이 일어난 경상도 관찰사에게 사건의 전말을 조사하여 보고하게 하시면 어떠하시겠습니까.”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맞았다. 고개를 끄덕여 승낙했다.
“좋다. 당장 관찰사에게 파발을 보내 이 사건의 상세한 전말을 파악해 고하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