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806
2부 58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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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이라고 해도 아직은 견딜 만하다. 내지인 본국에서는 가뭄 탓에 수확이 대폭 줄었지만, 이미 말했듯이 외지인 북방 3주나 구주, 대남도에서는 큰 타격이 없다. 이쪽에서 남는 식량을 본국으로 들여오니 기근 완화에 확실한 도움이 되고 있다.
다만 이것만으로는 역시 좀 부족하다. 그래서 명나라에서 곡식을 수입한다. 주된 무역로는 우리 상선들이 드나드는 전용항구인 상해다. 오공충이 강남에서 매집한 쌀을 상해에 모아두면 우리 상선들이 싣고 오는 형태다. 천진을 오가는 관선들도 어느 정도 곡물을 싣고 온다.
“그런데 요즘 책을 수입하는 자들이 왜 이리 많은가? 지금 전국이 가뭄인데, 마땅히 곡물을 한 톨이라도 더 들여옴이 옳지 않은가?”
전에도 언급했지만, 예로부터 책은 동북아시아를 오가는 주요 교역품 중 하나였다. 그런데 요즘 명나라에서 들어오는 책 중에 비중이 늘어난 게 실용적인 기술서나 역사서가 아닌 유학 서적이다. 그것도 관에서 공식적으로 수입하는 게 아니고 민간에서 들여다 푸는 거다.
서적 교역이 늘어난 것 역시 내가 발전시킨 무역 덕분이니까 뭐라고 할 말은 없다. 게다가 보고 싶은 책을 굳이 힘들여 필사하지 않고 경화(硬貨)인 은을 주고 수입해서 볼 만큼 조선의 경제력이 신장했다는 것도 좋은 일이다. 단지 가뭄이 든 상황이니까 눈에 거슬리는 것뿐이지.
“선비는 굶주린다 해도 성의껏 학문을 닦아야 하는 법입니다. 지금 나라에 가뭄이 닥쳤다고 하나, 다른 비용을 아껴 책을 사는 일에 관해서까지 나무라심은 적절치 않습니다.”
대사헌 정인홍이 침착하게 한마디 했다. 나도 그가 말한 대전제 자체는 부정할 수 없어서 다소 물러섰다.
“선비들을 나무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라 사정이 정말로 좋지 않을 때는 곡식을 들이기 위해 책 수입을 중단해야 할 수도 있으니 그 점을 미리들 알아두라는 말이다.”
“예, 전하.”
말이야 바른 말이지, 경인왜란 급으로 전쟁이 터지거나 사람이 줄줄이 굶어 자빠질 정도로 심한 기근이 터지면 책 수입 따위는 생각도 할 수 없을 거다. 지금도 굶어 죽지는 않을 만큼 여유가 있으니까 책도 사 오는 거지.
“그런데 요즘은 어떤 책들을 이리 사 오는가?”
대외교역은 외수사 전담이다. 고로 책 수입도 외수사가 국내에서 주문을 받아다가 중국에서 산 뒤 수수료를 부가해서 고객에게 넘기는 위탁구매 형식이다. 주된 주문처는 메이저 서점인 한달서관과 각 지방 서원들이다. 향교는 예조에서 책을 공급받으니까.
외수사에서 수입한 서적 목록은 호조가 제출받아 보관하고 있다. 가져오게 해서 훑어봤더니 요 3년 사이 새로이 주문을 받아 들여온 유학 경전은 태반이 육학(陸學), 그러니까 후대에서 말하는 양명학(陽明學) 서적이 차지하고 있었다.
양명학이라는 명칭의 기원이 되는 명나라 학자 왕양명은 본명이 왕수인(王守仁)이고 양명(陽明)은 호다. 조선으로 따지면 퇴계 이황의 뒤를 따르는 이들이 닦는 학문을 ‘퇴계학’이라고 부르는 셈이다. 헌데 알고 보니 여기서는 양명학이 양명학이 아니었다!
조선에서는 왕양명의 학문이 송나라 때 유학자인 육구연(陸九淵)의 사상을 이어받았다 해서 ‘육학’이라고 지칭하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왕학(王學)’이라고도 말하는 모양인데, 전 왕조의 성이기도 한 ‘왕(王)’이라는 글자의 의미 때문인지 조선에서는 왕학이라고는 안 부른다.
아마 양명학이라는 이름은 의외로 근대에 와서 붙었던 모양이다. 나야 현대에서도 유학사 같은 데는 별 관심이 없었고, 교과서에서는 아예 양명학이라는 말밖에 안 나왔었으니 잘 모를 수밖에. 그래서 처음엔 육학이 양명학과 아예 다른 학문인 줄 알았다.
“이 나라의 근본은 성리학이 아닌가? 육학은 성균관이나 집현전에서 가르치는 것도 아닌데 누가 이리 책을 들여다가 보는 것인가?”
양명학 연구자가 조선에도 아예 없진 않았다. 옛날에 영의정 자리에 있었던 노수신도 조금 양명학을 했었다. 하지만 퇴계 이황이 아주 격렬하게 비판하는 등 이단 취급을 받아서 노수신 이후로는 거의 맥이 끊겼다고 알고 있었다. 나도 별 관심이 없었고.
“지방 서원들이 주로 주문하고 있습니다.”
“지방 서원?”
주문자 목록을 보니 정말 양명학 서적은 지방 서원에서 주문한 경우가 많았다. 개인적으로 주문한 고객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것도 대부분 지방 양반들이었다.
“근래 조정이 성균관과 집현전을 거치면서 기량을 쌓은 관학파를 중심으로 운영되다 보니, 요직에서 소외된 지방 사대부들이 성리학이 아닌 다른 길을 찾는 경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 탓으로 양학을 하는 이도 있사옵고, 육학에 관심을 돌리는 이들도 생겨난 듯합니다.”
“그러한가….”
사림의 적통 후계자로, 황이와 환이 시기에 절치부심하던 지방 사대부들은 경성군 시절에는 마침내 다시 세력을 잡고 출세 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내가 각성하면서 짧았던 사림의 부활은 그대로 끝나버렸다.
나는 경성군이 찬밥을 먹였었던 집현전 출신의 관학파 엘리트들을 주로 기용해서 총애했다. 그 대표 격인 인물들이 4총이라 불리는 4명이고, 이건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라 변명할 생각도 없다. 그런데 그 반작용으로 일부 지방 사림들이 양명학으로 전환한다고?
옛날에 배운 것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조선 후기에 양명학을 연구한 학자들의 공통점이 떠올랐다. 공리공론을 일삼는 성리학 비판, 실천과 현실을 강조. 고로 정권과는 그다지 인연이 없는 재야 학자들의 학문…이라고 배운 것만 기억한다. 난 유학사 별 관심 없었다니까.
그렇다면 정권에서 소외된 이쪽 세계 사림 일부가 관학파의 아성이라고 할 성리학에서 손을 떼고 양명학으로 좀 일찍 돌아서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비록 퇴계 이황이 과거 극렬하게 양명학을 비난한 과거가 있긴 하지만, 사림 중에는 비 퇴계 계열도 많으니까.
“영상, 육학이 주자의 가르침을 거부한다고 하여 불충을 권장하거나 사람으로서 마땅히 할 도리를 행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렇사옵니다. 육학에서 말하길, 심즉리(心卽理), 치양지(致良知), 지행합일(知行合一) 등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외에 삼강오륜을 부정한다거나 하지는 않사옵니다.”
됐네, 그럼. 반기를 들고 나서는 황건적도 아니고 유교 내에서의 분파일 뿐이잖아. 심각하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내가 사림을 싫어한 두 가지 이유 중 하나가 대책 없는 명분론이었으니, 양명학을 받아들이면 그 불치병이 좀 나아질지도 모르지.
재야에 있는 사림, 즉 산림(山林)들이 무종 시기에 내 발목을 얼마나 붙잡았었는지 생각하면 지금도 속이 뒤집힐 것 같다. 놈들이 싫은 두 번째 이유가 바로 이거다. 지금 그놈들이 그때 그놈들은 아니지만, 학통을 계승하면서 그놈들을 잇고 있지 않은가.
관학파야 무종 시절부터 현실, 현실 하고 노래를 불러댄 덕에 똑같은 성리학자라도 애초에 사고방식이 유연하다. 이론은 이론, 현실은 현실이라는 관점이 주류다. 혹시 이게 양명학 쪽이 내세우는 지행합일과는 도리어 안 맞고 서로 충돌할 수도 있으려나.
“대사헌이 말하였듯, 공부는 선비의 본분이다. 또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하여 다양한 방안을 탐구할 필요도 있다. 그러니 내용이 심히 불온한 것들만 아니라면 선비들이 보는 책을 가지고 일일이 따지지 마라.”
“예, 전하.”
– 5 –
책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조선 양반들이 직접 쓴 문집 같은 건 아직 서관 서가에 오른 게 거의 없다. 본래 가문에서 자체적으로 간행해서 주변에만 배포하는 용도였던 문집을 ‘돈 받고 판다’는데 극심한 거부감을 느낀 가문들이 많았던 탓이다.
그렇다 보니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가 남긴 저서조차 서점에서 정식으로 팔리는 인쇄본이 없다. 누군가가 소장하고 있던 중고본이 돌고 돌다가 흘러들어오는 경우가 가끔 있을 뿐이다. 이 답답한 상황도 바꿀 때가 됐다.
“퇴계가 죽은 지 올해로 33년이 되었으니, 후손의 동의가 없더라도 문집을 간행할 수 있다. 안동부(安東府)에서 바친 퇴계문집 1부를 양식 인쇄로 개판하여 간행하도록 하라.”
저작권법을 정비하면서 사후저작권은 30년으로 규정했다. 조선에서는 통상적으로 한 세대를 30년으로 잡으니, 그 정도 기간이면 적당하지 않겠는가. 책 하나만 잘 쓰면 아들까지는 득을 볼 수 있다. 손자는 일 없다. 손자야 당연히 그놈 애비가 책임져야지.
이황의 후손과 제자들이 이황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간행한 퇴계문집이 발간된 때가 벌써 12년 전이다. 도산서원이 있는 안동부가 경인왜란으로 피해를 본 고을이 아니라 큰 지장 없이 문집을 발간할 수 있었다. 문제라면 역시 겨우 50부를 찍어서 주변에만 돌렸다는 거다.
문제의 근원은 역시 비용부담이다. 목판을 파는 인건비와 재료비에다, 수십 권씩 되는 많은 분량을 찍으려면 상당한 종이가 필요하다. 게다가 사대부들은 비싼 한지만 쓰지 싼 양지(洋紙) 따위는 안 쓰는 데다가, 돈을 받고 책을 팔지도 않으니 소량만 찍어서 배부할 수밖에 없다.
“퇴계의 문하 제자들과 후손들이 혹 반발하지 않겠습니까?”
“나라에서 일부러 돈을 들여 퇴계의 글을 찍어내어 세상에 퍼뜨리는 것이건만, 어찌 불만을 품는단 말이냐? 예조판서는 그런 걱정은 하지 말고, 도산서원에 글을 보내 혹시 기존에 찍은 판본에 누락된 원고가 혹시 없는지 확인하여 있으면 도성으로 보내라고 이르라.”
당장 유성룡부터가 이황의 수제자였다. 자기 스승 문집을 내가 찍어주겠다고 하면 버선발로 뛰어나가서라도 스승의 유고를 마지막 한 장까지 모아올 거다. 그리고 박문국에 넘기겠지.
박문국은 갈수록 규모를 키워가는 중이다. 베네치아 측과 제휴한 데다 경쟁상대도 없으니,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지금은 궁궐 밖, 동대문 쪽에 인쇄공장을 크게 짓고 인쇄기 서른 대를 가동하고 있다. 가장 큰 몫은 조보 인쇄지만, 일반 서적도 상당한 양을 찍는다.
“율곡이 죽은 지는 올해로 딱 20년이구나. 율곡의 문집은 아직 나오지도 않았으니, 예조가 아예 처음부터 나서서 원고를 수집하여 내도록 하라. 하지만 아직 율곡이 죽은 지 30년이 안 되었으니, 율곡의 아들 경림에게 동의는 얻도록 하라.”
조정에 있는 율곡의 제자로는 이항복과 조헌이 있다. 이쪽도 협력을 아끼지 않으리라.
“예, 전하.”
퇴계와 율곡의 문집을 예조에서 내는 건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책 팔아서 돈 벌자는 거야 아주 부수적인 이득에 불과하다. 뭣하면 딱 종잇값만 받고 팔아도 상관없다. 가장 중요한 건 산림 세력에 대한 화해 제스처다.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는 모두 사림의 거두다. 두 사람 다 성균관은 마쳤지만, 집현전에는 들지 않았다. 경성군 때는 집현전 경력이 없어도 출세에 아무 지장이 없었고, 일찍 죽은 이황 말고 이이는 내가 각성할 때 병조판서 자리에 있을 정도였다.
그런 이들이 남긴 글을 모아 문집을 내준다면, 충분히 사림 세력에게 내가 화해의 손길을 내민다는 상징이 될 수 있다. 퇴계와 율곡 모두 ‘동방의 성현’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아닌가. 사림들도 기본적으로 내게 충성은 하니까, 이들의 문집을 내주는 걸 보면 내 뜻을 알겠지.
뭐,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지금 그놈들은 옛날 무종 시절 내 속을 뒤집어놓던 바로 그놈들은 아니긴 하다. 개중에 꼴통이 나타나서 날뛰면 쇠몽둥이로 골통을 후려쳐야겠지만, 사람이라는 집단 자체를 뭉뚱그려서 혐오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당장 이이만 해도 그렇다. 늘 사리를 따져 의견을 냈지 무조건 ‘아니 되옵니다’만 반복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나도 이이는 딱히 싫어하지 않았었고, 도리어 겨우 47세로 요절하는 바람에 심히 유감일 정도였다.
“좋은 글은 널리 알려야 한다. 예조는 각지에 좋은 책을 쓴 선비가 있으면 사람을 보내 그 원고를 검토하고 간행하도록 하라. 지금 서관에서 파는 책은 태반이 양서와 대국에서 사들인 책이니, 좋은 원고를 많이 발굴하여 어서 우리 책을 내야 하지 않겠느냐?”
번역한 양서는 아직 사전청에서만 독점적으로 낼 수밖에 없다. 번역할 양서를 구할 수 있는 곳이 사전청 뿐이니까. 민간 출판산업이 성장하려면 우리 책이 필요하다. 이미 시보와 소설을 내는 소규모 업체들은 나오고 있고, 내가 물꼬를 트면 이들이 문집도 손을 대기 시작할 거다.
“권수가 많아 서관에서도 진열하기 힘들 것이니, 퇴계와 율곡의 문집도 양서처럼 우편으로 판매함이 좋겠습니다.”
“좌상의 말이 옳다. 그리하라.”
아직 조선의 도서 유통 사정은 전국에 책을 뿌릴 만큼이 안 된다. 서점이 만드는 유통망이 없으니까 말이다. 가장 큰 서점인 한달서관이 낸 지점 숫자조차 아직 5개에 불과하거늘 어찌 전국에 책을 공급하겠는가? 그래서 나온 방안이 방금 이항복이 말한 것과 같은 통신판매다.
사전청에 책 주문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조보에 실린 광고를 보고 주문할 책을 고른 뒤, 역(驛)에 가서 사전청에 보낼 주문서를 접수하고 저화로 우편요금과 책값을 낸다. 그러면 역에서 우편환으로 교환한 뒤 봉투에 주문서와 함께 봉해서 우표를 붙이고 역마 편으로 발송한다.
우표 제도는 내가 각성한 지 얼마 안 된 갑신년(1584)에 도입 논의를 시작해서 북방전쟁을 끝낸 뒤인 기축년(1589)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됐다. 지금은 거의 완전히 정착됐다.
기본적인 의도는 어차피 유지할 통신망을 그대로 놀리느니 수익사업을 하자는 데 있었다. 그 직후에 전쟁이 잇달아 터지면서 우편 수요가 폭증, 그에 따라서 국고 수입도 급상승했다. 국가적으로는 재난이었지만, 우편 사업이 돈이 된다는 사실은 확실하게 입증할 수 있었다.
다만 처음에는 우표만 만들었고 우편환까지는 없었다. 조선에서는 큰돈을 보낼 일이 있다면 그냥 사람이 직접 가고 마는 게 아직 일반적이니 말이다. 민간의 거상들은 어음을 꽤 쓰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민간에서 발행한 물건이지 국가에서 가치를 보증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2년 전부터 새로 도입한 우편환은 다르다. 저화를 직접 보내는 대신 우편환을 사서 보내면 큰 액수여도 안전하게 보낼 수 있다. 혹시 중도에 사고로 분실하더라도 발송한 기록이 있으니 보상도 받을 수 있다. 그렇다 보니 아예 우편환을 수표처럼 쓰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서적 공급원이 바로 중국이다. 명나라에서 들어오는 책 수입량은 의외로 많아서, 도성에서 가장 큰 서점 ? 사실 그동안 다른 서점이 여럿 생겼다 – 인 한달서관에서도 진열대에 오른 책 중에 절반 이상을 명나라에서 수입한 외서가 채우고 있을 정도다.
애초에 외수사에 서적 주문을 가장 많이 넣는 고객이 서관들이다. 이번에 서원들이 양명학 책을 많이 주문해서 눈에 띄었지만, 일반 성리학 서적이나 사서, 기술서 등은 서관이 대부분 사들인다. 다만 관에서 필요한 책은 사행길에 직접 사 오므로, 외수사에 주문하지 않는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웬만하면 책 수입을 끊고 싶지는 않다. 다만 지금 가뭄이 들어 형편이 별로 안 좋으니 짜증이 좀 나는 거지. 게다가 책 수출처인 명나라 쪽도 사정이 그다지 좋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라, 이래저래 좀 심란하다.
“전하, 북경에서 급한 장계가 왔사옵니다. 성절사 조덕기가 천자의 칙서를 받았는데, 내용이 심상치 않은 듯하다 하옵니다.”
만력제 생일은 9월 4일, 오늘은 10월 20일이니까 슬슬 성절사가 귀국할 때가 됐다. 바다가 거칠어지기 전에 귀국해야 하니까 말이지. 그때 칙서를 직접 들고 오면 될 텐데 뭐 그 며칠 차이를 가지고 장계씩이나 올렸을까.
“칙서 내용이 심상치 않다고? 어떻기에 그러느냐?”
칙서 한두 번 받아 봐? 별로 놀랍지도 않다. 부여주나 속말주를 내놓으라는 내용이라면 혹 모르겠다만, 그럴 리는 없잖은가.
물론 칙서를 받았다고 우리 사신이 그 자리에서 바로 뜯어볼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용도 모르는 칙서를 들고 온 적은 없다. 북경 쪽 분위기가 어떻건, 사신에게 대략적인 내용 정도는 알려주게 마련이다. 그래야 이쪽에서도 적당히 응대할 수 있으니까 말이지.
하지만 도승지 홍인걸은 얼굴빛이 새파래져 있었다. 뭐야, 정말 큰 소식인가?
“천자께서 건주위를 치고자 하는 뜻을 비치신다고 합니다! 대국 조정에서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하였으나, 우리에게도 분명 명이 있을 듯하다는 전갈입니다.”
뭐? 그 돼지 새끼가 또 전쟁을 벌이겠다고? 그것도 이번엔 건주위랑?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눈이 튀어 나갈 것 같다. 으아아, 이 돼지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