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809
2부 58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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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에서 이런 행진이 열리는 건 을미동정에서 승전한 뒤 거행한 개선식 이후에 처음이다. 대동양 너머 먼 땅을 탐사하러 갔던 탐동사(探東使) 일행과 이들이 귀환하면서 가져온 물품을 잔뜩 실은 수레가 숭례문에서 광화문까지 이어지는 육조대로에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견서사가 유럽을 다녀온 것만도 세 번이나 되지만, 견서사가 돌아왔을 때도 도성에서 이런 행진을 선보인 적은 없다. 이번에는 정말 특별히 이뤄지는 귀환 행사였다.
행진에 참여한 사람 숫자는 500명 남짓 되는 소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확실히 이런 행사가 오랜만이긴 했고, 30만 도성 백성 중 절반이 추운 날씨 따위는 괘념치 않고 행진을 구경하러 거리에 나왔다.
질서 유지를 위해 동원된 한성부 포졸들은 군중이 대로 한복판까지 나오지 못하게 하느라고 애를 먹었다. 구경꾼들은 포졸들의 벽에 막히자 민가나 점포 지붕, 담장 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리고 환호성을 지르며 행렬을 이룬 사람과 여러 신기한 물품들을 구경했다.
“가는 데 1년이 꼬박 걸리는 큰 바다를 건너갔다 왔다며?”
“바다가 끝이 있긴 한가 봐!”
백성들 대부분은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동쪽 바다 건너에 섬나라 왜국이 있다는 건 알지만, 왜국 땅덩이가 어떤 형상인지는 알지 못한다. 왜국 너머에는 어떤 세상이 펼쳐져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예 없다고 봐도 좋았다.
그런 이들에게, 1년이나 걸려 바다를 건너가고 또 1년이나 걸려 돌아왔다는 탐동사의 길고 험난한 여정은 정말로 놀라운 화제일 수밖에 없다. 이미 조보가 간략하게 보도한 탐동사의 긴 여정은 소문의 파도를 타고 마구 부풀려지며 번지고 있었다.
“저 하얀 털가죽은 뭐지? 형상만 보면 곰 가죽 같은데…세상에 하얀 곰이 있나?”
“그것도 저렇게 커!”
조선인 대다수는 곰은 검은색이라고 알고 있다. 함경도 이북에서는 갈색 털빛을 한 큰곰이 살고 있고, 그 모피는 도성에 흘러들어오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 행렬에는 그 큰곰보다 더 큰 흰곰 모피가 가로대를 십자로 묶은 장대 위에 걸쳐져 있었다. 그것도 수십 장이나.
그 뒤에는 까만 모피를 가득 실은 수레가 따라왔다. 일반 백성들은 그게 무슨 가죽인지 잘 모르니 별 반응이 없었지만, 군중 사이에 섞여 있던 상인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얼핏 봐도 광택이 흐르는 그 까만 모피는 해달피가 분명했다. 수달피나 초피보다 훨씬 비싼 모피다.
수레로 운반할 정도로 많은 해달피도 놀랍지만, 그 뒤를 따라오는 수레도 보는 이들의 눈이 번쩍 떠지게 만드는 건 똑같았다. 남만에서만 난다고 알고 있던 상아가 수레 위에 하나 가득 실려 있었다.
“바다 동쪽 땅에도 코끼리가 사나 봐!”
도성 백성들은 코끼리에 익숙하다. 주상께서 바깥에 행차하실 때, 가끔 사복시에서 기르는 코끼리를 타고 나가기 때문이다. 보통은 평범하게 임금이 타는 가마인 연(輦)이나 말을 타고서 궁을 나서지만, 무종대왕의 능인 무릉을 참배할 때는 꼭 코끼리를 이용하신다.
그뿐만 아니라 사복시에 있는 코끼리들은 도성 안에서 소나 말처럼 노역도 한다. 사람들이 들기 어려운 기둥감 재목을 들어서 옮기거나, 대들보를 얹는 일도 쉽게 할 수 있는 코끼리는 도성에서 아주 평이 좋다.
여기까지만 해도 도성 백성들은 한껏 웅성거리며 마음껏 떠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다음번 수레가 나타나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수레 위에 수북하게 쌓인 금덩어리가 대로를 채운 모든 소음을 빨아들였다.
“저…거, 다 금…이야? 아…니겠…지? 구…리겠지?”
“그, 그래. 세상에 그, 금이 저리 마, 많을 리가….”
수천 근은 될 듯한 막대한 금이 수레 위에 쌓인 것을 본 백성들은 입을 딱 벌린 채로 할 말을 잊었다. 금이 얼마나 많은지, 수레 한 대로 모자라서 세 대에 나눠 싣고 있을 정도였다.
금이 워낙 눈길을 끄는 바람에, 행렬 맨 뒤를 따라가는 이방인들에게는 거의 관심이 쏠리지 않았다. 이들은 가죽옷을 입고 가죽신을 신었으며, 대개 짐승의 이빨과 발톱, 조개껍질 등으로 만든 장신구를 착용하고 있었다.
용모도 조선인과는 완전히 판이하였다. 검은 머리를 길게 기르고, 피부는 검붉은 편이었다. 화려한 깃털 관을 쓴 이도 있으나 맨머리에 관을 쓰지 않고 깃털만 꽂은 이도 많았다.
30명가량 되는 이 이방인들은 조선인들이 행렬을 신기하게 여기는 이상으로 한양 시가지와 그 길을 가득 메운 조선인들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자기들 말로 대화를 교환하면서도 연신 감탄사를 발했다. 그 표정만 보아도 이들이 정녕 매우 놀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황금을 가득 실은 수레를 보고 넋이 나간 도성 백성들은 조금 간격을 두고 그 뒤를 따르는 이방인들에게는 거의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그래도 호기심이 강한 몇몇 백성들은 그 낯선 행색을 보고 왜인과도, 야인과도, 남만인이나 서양인과도 다른 그 모습에 놀라워했다.
“불미한 신하들이 전하께 절을 올리옵니다.”
정문부와 김완 등을 비롯한 탐동사 지휘관들이 거느리고 온 군사들, 선인들과 함께 일제히 내 앞에 엎드렸다. 그들 모두 얼굴이 눈물로 잔뜩 얼룩져 있었다. 이들과 함께 돌아온 영국인, 네덜란드인 선원들은 한쪽 무릎만 꿇었다. 유럽인 대원들은 당연히 눈물 따위 흘리지 않았다.
뭐, 유럽인들이 침착한 이유야 간단할 거다. 저들은 몇 년씩 걸리는 장거리 항해가 일상일 테니까 말이다. 게다가 아직 내가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재회를 반가워할 상대도 아닐 거고.
하지만 우리 백성들에게는 그게 당연한 게 아니다. 나 역시 그렇다 보니 탐사를 마치고 온 신하들을 마주하자마자 두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이를 악물고서 간신히 그들의 노고에 대해 치하를 건넸다.
“잘 돌아왔다. 정말 수고가 많았느니라.”
이 조선에서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 일이다. 그런데도 내가 세운 계획에 따라, 내 명에 따라 군말 없이 세상 반대편으로 무모한 항해를 해낸 이들이다. 수많은 난관을 겪었을 텐데 이렇게 무사히 돌아와 주었으니, 정말 수고했다는 말밖에는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내 치하를 받은 장수들이 왈칵 울음을 터트리면서 광화문 앞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속에서 치솟는 격한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는지, 무릎을 꿇고 엎드린 정문부는 폭포수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 뒤에 엎드린 다른 장졸들도 마찬가지였다.
“다시는 보지 못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전하의 용안을 뵈옵고, 두고 갔던 이 강산을 다시 보니 너무나도 기쁘옵니다. 멈출 수 없는 눈물이 앞을 가려 전하께 올려야 할 글월조차 쓸 수 없으니 스스로 통탄할 따름이옵니다….”
탐동사가 출발한 때가 임인년(1602) 7월이었다. 지금이 갑진년(1604) 10월 초니까 대략 2년 3개월 걸려서 조국에 돌아온 셈이다.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큰 바다를 건너서 세상 반대편에 다녀온 거다.
물론 유럽에 다녀온 견서사도 다른 쪽으로 세상 반대편에 다녀왔다. 하지만 견서사가 오간 경로는 여정 대부분이 육지 가까운 바다고 이미 숱한 배들이 왕래하는 항로다. 다른 배들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고 도움도 받을 수 있다. 물론 해적을 만날 수도 있다만.
이에 반해서 북태평양 횡단은 1년에 1번 지나가는 마닐라 갈레온 외에는 어떤 배도 다니지 않는 길이다. 몇 달에 걸쳐 섬 하나 보지 못하고 움직여야 하는 항로를 큰 손실도 내지 않고 왕복하는 데 성공했으니, 이들이 더 큰 위업을 세웠다고 볼 수 있다.
“아니다. 그대들이 세운 공이 실로 너무나 크기에 그 노고를 어찌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 그대들을 위하여 조촐하게나마 잔치를 준비하였으니, 뜨겁게 데운 술과 음식으로 피로를 풀면서 동방에서 새롭게 보고 들은 바를 내게 전하라.”
나도 눈물 때문에 눈이 흐려져 있다 보니 늘어서 있는 탐사대원들과 수레는 흐릿하게 비쳐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대열 후미에서 번쩍이며 광채를 내는 금괴 무더기만은 똑똑하게 볼 수 있었다. 내가 지시한 대로, 최대한 많아 보이도록 잘 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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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부와 김완을 비롯한 탐동사 일단이 벽란도에 귀환한 건 나흘 전이다. 배에 실린 짐과 사람을 내려 도성까지 움직일 이동 준비를 마치는 데 사흘이 걸렸고, 실제로 도성에 들어오는 데도 꼬박 하루가 걸렸다.
여정에 관한 간략한 보고는 이미 도착 첫날 파발로 받았다. 하지만 정문부와 김완이 작성한 탐사보고서 원본은 오늘 받았다. 눈물을 함지박으로 쏟던 정문부가 문서를 산 같이 쌓은 작은 탁자를 들어 내밀었고, 도승지가 옆에서 받았다.
이 보고서가 먼저 들어갈 곳은 승정원이다. 승정원에서 내용을 정리, 분석할 사본을 만든 다음 원본을 내게 올린다. 그러면 나도 꼭 꼼꼼하게 읽어봐야지. 과연 지금 캄차카, 알래스카, 오레곤, 캘리포니아가 어떤 상황인지.
보고서를 받은 뒤에는 천지신명과 역대 선왕들에게 제사를 지내 귀환 보고를 올렸다. 이를 다 마치고 나니 동방에 다녀온 탐동사를 위한 귀환식은 완전히 끝났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뿌듯함이 밀려왔다.
동방에서 가져온 갖가지 재물은 내게 바치는 선물 일부만 제외하고 호조 창고에다 보관하게 했다. 그리고 귀환식을 마친 인원들은 모두 광화문 안으로 들어섰다. 광화문 바로 안, 홍례문(弘禮門 : 홍례문은 흥례문의 본래 이름(고종 시기에 바뀌었음))앞은 아무 건물도 없는 공터다. 그 자리에 장막을 치고 잔치 준비를 해두었다.
본래 외부에서 사람을 초대해서 잔치를 여는 외진연(外進宴) 때는 내 침전인 강녕전 앞에서 여는 게 상례다. 하지만 500명 가까운 인원을 모조리 앉히기에는 그 공간이 넉넉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기 공터에 임시 주방을 설치하고 군사들을 위한 상을 차리게 했다.
“모두 자리에 앉아 즐기라. 다만 여기 없는 이들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도록 하라. 그들이 대신 희생해 주었기에 너희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느니라.”
“예, 전하.”
군사들이 자리에 앉자 곧바로 무수리들이 술과 음식을 날랐다. 장악원에서 나온 악공들과 무희들은 음악과 춤으로 분위기를 흥겹게 달구었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내관들이 주변에 서서 술에 취한 군사들이 혹시 무수리나 무희들에게 엉뚱한 짓을 하지 못하게 감시했다.
“그대들은 나와 함께 가자. 안쪽에 따로 상을 차리게 하였느니라.”
귀환식에 참석했던 조정 중신들과 정문부를 비롯한 탐동사 지휘부, 로드리고와 세바스티안, 그리고 정문부가 데려온 인디언 다섯 부족의 대표 한 명씩을 따로 불렀다. 여기처럼 주변이 너무 시끄러워서야 나도 이들과 대화가 힘들다.
“예, 전하.”
군사들이 편하게 놀기 위해서라도 내가 없는 편이 낫겠지. 혹시 누가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내 앞이 아니라면 벌이 좀 감해질 테고 말이다. 나는 군사들은 실컷 먹고 마시라고 놓아두고 지위 높은 신하들과 함께 홍례문 안으로 발을 옮겼다.
“주상전하 천세! 천천세!”
내가 가마를 타고 계단을 올라가는데 갑자기 뒤에서 고함이 들렸다. 누가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러자 500명 가까운 군사와 선인들 전원이 일제히 일어나 폭풍 같은 함성을 질렀다. 한쪽 구석에 모여 있던 서양인들까지도.
“그대들의 노고를 다시 한번 치하하노라! 실컷 즐기도록 하라.”
날씨가 조금만 덜 추웠으면 경회루에서 잔치를 베풀었을 텐데. 홍례문 앞쪽 공터는 그래도 사방에 둘러친 담장이 바람을 막아주지만, 경회루 위는 바람막이가 전혀 없다. 음력으로 하면 지금이 10월 초지만, 양력으로는 이미 11월 말이다. 겨울바람을 그대로 맞고 있을 수는 없다.
내가 따로 선별한 이 인원들은 본래 외진연 장소인 강녕전 앞으로 왔다. 여기에는 바깥보다 작은 규모로 천막을 치고 그 안에 연회 준비를 해놓았다. 여기 온 인원들 정도는 충분히 함께 들어갈 수 있었다.
다른 이들은 궁궐 안을 걸으면서도 딱히 어색해하는 모습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인디언 대표 다섯 사람은 거대한 대문과 전각을 잇달아 지나면서 휘둥그레진 두 눈을 감추지 못했다. 개성에서 본 것보다 더 거대하고 화려한 건물에 넋이 나간 듯했다.
선뜻 천막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강녕전과 옆에 붙어 있는 연생전(延生殿), 경성전(慶成殿) 등 부속 건물들을 바라보며 넋이 빠져 있는 모습을 보자 문득 저들에게 한 가지 제안해보고 싶어졌다. 받아들인다면, 조선 문화를 인디언들에게 전하는 한 가지 쐐기가 될 터였다.
“원한다면, 바다 건너에 목수를 보내 그대들 부족의 땅에도 이런 집을 지어주겠다.”
건축에 필요한 자재 중에서 목재나 흙은 현지에서 조달하면 되고, 여기서 보내야 할 물건은 기와랑 도료, 종이 정도면 되니까 어려운 일은 아니다. 노동력은 현지에 있는 우리 인원들의 감독 아래에 인디언들이 일하도록 하면 되고.
“아니다. 이런 집, 한양의 임금님만 살 수 있다. 우리 이런 집 못 산다.”
바다를 건너오면서 배웠는지, 추장 한 사람이 더듬거리는 조선말로 직접 답했다. 정문부를 돌아보자 정문부가 다시 설명했다. 이제는 격했던 흥분도 다 가라앉았는지 목소리도 아까보다 평온해졌고, 눈물이 흘러내린 흔적도 내관이 가져다준 수건으로 다 닦았다.
“우리 궁궐의 위용이 놀랍기는 하나, 자기들이 본래 살던 집 형태와 달라서 직접 살기에는 부담스럽다는 모양입니다.”
“그렇기는 하겠지.”
뭐 상관없다. 저들도 조선에 한동안 더 머물러야 할 테니, 그동안 생각이 바뀔 수도 있겠지. 나중에라도 부탁한다면 그때 사람을 뽑아 보내면 그만이다.
일단 오늘은 탐동사의 귀환을 축하하며 편안하게 잔치를 즐기는 날이다. 인디언 추장들과의 정식 회견은 나중 일이니 지금 고민하지 말자. 저들에게 호감을 얻고 나를 따르겠다는 맹세를 받아내는 건 그때 가서 하면 된다.
천막 안에는 화로가 따뜻한 온기를 내고 있었다. 강녕전 바로 옆에 소주방이 있으니, 상에 놓은 모든 음식도 막 만들어서 가장 맛있는 상태다. 다만 올해 가뭄이 든 탓에 지출을 아끼는 모범을 보이느라, 잔칫상은 평소보다 많이 소박하다.
상에 올라온 음식은 바깥에 있는 군사들이 받은 상과 같다. 세 가지 떡과 삶고 구운 고기가 두 접시, 얼큰한 고깃국 한 그릇, 술 한 병이다. 예전에 형편이 좋을 때 잔치를 열면서 차렸던 음식상과는 비교가 안 된다.
사실 인디언 추장들을 데려왔다는 정문부의 보고를 뒤늦게 받고 잠시 고민했다. 처음 도착 보고를 받았을 때 계획한 대로 간소한 잔치를 열 것인가, 아니면 정말 화려하게 상을 차려서 내 위광을 빛낼 것인가?
‘성대한 잔치를 통해서 저 추장들에게 내 부유함과 관대함을 한껏 드러내 보일 수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평소 같았으면 숙수들이 온갖 솜씨를 부려 조리한 다양한 궁중요리가 나왔을 거다. 바다를 건너 찾아온 이들에게 ‘바다 서편의 대추장은 쩨쩨한 사람이더라’하는 소리를 듣는 것도 조금 곤란하지 않겠는가?
문제는, 두 해나 연달아서 가뭄이 이어졌으니 임금으로서 모범을 보일 필요가 있다는 거다. 정작 공을 세운 군사들에게는 부러 초라한 밥상을 주면서 내가 있는 이쪽 상에만 손님 접대를 핑계로 산해진미를 차릴 수도 없지 않은가.
바다 건너에서 찾아온 새 손님을 잘 대접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내 원래 신하와 백성들에게 임금의 도리를 펼치는 모습을 보이는 게 더 중요하다. 인디언들한테는 나중에 따로 한 상 잘 차려서 대접하기로 하자. 밥 한번 먹고 바로 돌아갈 것도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