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815
2부 593화
– 20 –
건주위에 보낼 밀사를 누구로 정하냐는 문제에서는 사실상 이견이 없었다. 최적의 후보자가 모두의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노을가적과 이미 안면이 있으며, 본인이 여진어를 자유롭게 구사하여 통변을 따로 대동할 필요가 없고, 이 일이 얼마나 중대한지 잘 알고 있으므로 헛되이 기밀을 누설할 염려가 없는 데다, 문무에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 있어 어떤 위기에 처해도 빠져나올 수 있다.”
“그러하옵니다. 익문사 총관 정여립이야말로 이런 일에 꼭 맞는 인재라 하겠습니다.”
밀사 파견에 있어서 최악의 위험성은 누르하치가 밀사를 붙잡아 인질로 삼고, 이를 빌미로 내게 압력을 가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걸 거다. 하지만 정여립은 반 죽여놓지 않는 한 인질로 잡아놓는 게 아예 불가능한 사람이다. 그런 면에서도 확실히 안심할 수 있다.
“그대들은 어찌 생각하는가. 이여송을 버린 장본인이 서이합제이긴 하다만, 정여립을 통해 노을가적에게 아우인 서이합제(슈르하치)를 천자 앞에 보내 이여송을 버린 죄를 스스로 빌게 하라 권해도 가적이 듣지 않겠지?”
슈르하치는 을미동정에 종군한 보상이라는 명분으로 나중에 내가 붙여준 조선인 첩이 병에 걸려 죽은 뒤로 잡아놓을 끈이 끊어졌다. 그 첩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슈르하치를 잘 구워삶아 가며 상당한 첩보를 얻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재미를 본 시간은 길지 않았다.
물론 슈르하치에게는 누르하치의 독주를 견제하는 존재로서의 가치가 있다. 하지만 이제는 세대가 바뀔 때가 됐고, 누르하치의 동생인 슈르하치보다는 아들인 다이샨 쪽이 장기말로 더 유용하다. 슈르하치를 만력제에게 희생제물로 내던져도 내게는 별 손해가 아니라는 뜻이다.
“듣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노을가적이 오랑캐라 해도 형제간에 천륜이 있거늘, 어찌 감히 피를 나눈 친아우를 팔아 자신의 안위를 누리려 하겠습니까.”
그 둘이 어머니까지 같은 친형제이긴 하지만, 과연 그 집안에 유영경이 말한 것처럼 두터운 형제애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부족의 주도권을 놓고 둘이 서로 경쟁하는 사이 아니었던가. 실제 역사에서, 누르하치는 다툼 끝에 결국 슈르하치를 죽이기까지 했고.
나름 팽팽하던 힘의 균형은 형인 누르하치가 통치권을 확고히 하면서 확실하게 기울어졌다. 그걸 만회해 보겠다고 나간 을미동정은 슈르하치 파의 전력을 괴멸 상태로 몰아넣었다. 그때 운 좋게 대장장이 몇을 주워오지 않았다면 슈르하치는 그대로 쫓겨나도 할 말이 없었으리라.
단순히 도구를 수선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철을 제련할 수 있는 대장장이, 그리고 조총을 만들 수 있는 기술자 몇을 우연히 손에 넣어 데려온 일이 슈르하치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그 공으로 발언권도 그전보다 확실히 올라갔고, 이인자로서의 위치도 확고하다.
지금 건주위가 자체생산하는 조총은 왜조총으로만 1년에 2백 정쯤 된다. 현재 보유한 조총 수량은 우리가 팔아먹은 분량에 일본에서 노획한 것, 자체생산한 분량까지 해서 대략 5천 정. 본래는 그보다 더 있었지만, 이래저래 손망실한 분량도 꽤 있어서 지금처럼 줄어든 모양이다.
총이란 게, 의외로 수명이 길지가 않았다. 애초에 우리가 넘겨준 조총도 죄다 중고품이었고 일본에서 노획한 총도 다 중고품이었으니, 금방 수명이 다 돼서 쓸 수 없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게다가 화약은 아직 자급하지 못하고, 우리한테 수렵용이라는 명분으로 받고 있다.
“우애 때문이 아닐 겁니다. 지금 서이합제는 노을가적이 전쟁을 막는다는 명분을 내세워서 내던지기에는 너무 강합니다. 천자 앞에 죄를 청하러 나가라는 건 죽으라는 거나 마찬가지니, 절대 가만히 따르지 않을 겁니다. 필시 내분이 벌어지겠지요.”
이항복이 태연히 짚었다. 사실 나도 이 점에서는 같은 생각이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어 확인차 물어봤을 뿐이다.
“노을가적이 혹시 전하께서 내리신 밀지를 받고 천자께 죄를 청할 마음을 먹더라도, 사자로 서이합제를 보내지는 않을 겁니다. 큰 기대는 품지 마시고, 일단 사자를 보내 싸움을 막도록 노력해 보는 데 의의를 두도록 하소서.”
“알겠다.”
아무래도 이항복이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사실 지금 내 희망은 누르하치가 만력제 앞에 무릎을 꿇는 게 아니라 명군을 ‘적당히’ 부숴놓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슈르하치가 출두하지 않는 한은 원정을 멈출 방법이 없다. 하지만 슈르하치는 절대 죽으러 가지 않을 테고, 결국 시기는 늦어질지 몰라도 싸움은 일어나고 말 가능성이 크다. 이때 우리 쪽에서 바랄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결말이 그거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번에 만력제가 준비한 원정군이 깨진다고 해도 당장 명나라가 망하지는 않는다. 산해관과 만리장성 수비군까지 죄다 거덜 나는 건 아니니까 본토 방어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다만, 방어가 가능하다고 해 봐야 말 그대로 간신히 국경만 지키는 거다. 양응룡의 난 같은 게 또 일어나면 또 조선군을 부를 수밖에 없을 거다. 우리에 대한 압박은 약해지면서, 의존은 더 커지게 되는 거다.
물론 건주위는 엄청난 세력 신장을 이루게 된다. 승세를 이어 명군을 몰아내고 남은 요동부 영역까지 차지하면 영토는 2배로, 인구는 1.5배로 늘어난다. 군사력과 생산력 모두 급증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그래 봐야 우리한테는 턱도 없다만.’
건주위의 영토 확장은 놈들에게도 양날의 칼이다. 지금은 육지에서만 우리와 국경을 접하는 사이지만, 요동 전체를 장악하면 해안도 지켜야 한다. 유사시에 우리 수군이 요동반도와 요하 일대를 강습하면 말 그대로 사방에서 포위공격을 받게 되니까.
삼군부에서는 현재 수군이 보유한 전선 규모를 고려할 때, 일거에 보기 2만과 화포 50문을 요동에 상륙시킬 수 있으리라는 예상을 내놓은 바 있다. 명목상으로는 요동을 지키는 명군을 지원하기 위한 원병을 파견할 때를 대비한 계획이지만, 뭐 실질적으로는 다른 거지.
아이고, 그러고 보니 어째 올 연말에는 대사건이 연달아 터지는구나 싶다. 탐동사가 돌아온 거야 기쁜 일이지만 만력제의 건주위 토벌 계획은 말 그대로 날벼락이다. 어떻게 잘 해결해야 할 텐데 말이다.
몇 가지 논제가 더 오갔지만, 정여립을 밀사로 하는 안 외에 크게 중요한 건 없었다. 일단 회의를 끝내기로 하고 신하들을 내보냈다. 다만 두 사람은 남겼다.
“영상과 우상은 남으라. 따로 논할 이야기가 있다.”
“예, 전하.”
여기 있는 7명 중 이항복과 이덕형만 바깥세상을 직접 다녀왔다. 다른 이들도 중국과 일본 정도는 다들 한 번 이상 다녀왔지만, 그쪽은 조선과 같은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대남도 이남, 정말 다른 세상에 다녀온 정승은 이들 둘 뿐이다. 이들과 나눌 이야기가 있다.
– 21 –
내가 내민 장계를 읽은 두 사람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자신들이 생각하기에도 이 장계에 적힌 바를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탓이다.
“어떠한가? 그대들이 보기에도 역시 의심스러운가?”
눈앞에 놓인 장계는 천회사 이기빈이 지난 4월에 보낸 것이다. 지금 인도 콜카타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포르투갈 배를 통해서 보낸 건 좋은데, 그 내용이 심히 맹랑했다. 그대로 믿기에 너무 허황한 내용이라 선뜻 신뢰가 가지 않았다.
“이기빈이 주장하기를, 자신이 아라비아에서 3개나 되는 항구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며 배 10여 척을 얻었고 귀순자 500명과 미녀 12명을 얻었다 하였다. 그리고 배마다 선창에 염초와 보화를 가득 싣고 돌아오겠다고 하니, 이를 과연 믿을 수 있겠느냐?”
장계가 승정원에 들어오면, 별거 아닌 일은 승정원에서 바로 처리하거나 해당 업무를 맡은 관청으로 보내 처리하게 한다. 하지만 중요한 사안일 때는 조정에서 공표하고 중신들이 모두 참여해서 논의하는 게 원칙이다.
그런데 이기빈이 보낸 이 장계는 거의 열흘 전에 들어왔음에도 아직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보기에도 워낙 내용이 황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며칠 간의 고심 끝에 이들 둘과 논의하기로 한 참이었다.
“과인이 이기빈에게 내린 밀지는 아라비아에서 가배 종자를 구하고, 오는 길에 천축에 들러 염초 산지인 벵골에 우리 상관을 설치하라는 두 가지였다. 그 두 가지 목표를 모두 이뤘다는 보고는 참으로 기쁘다만, 다른 것들은 도대체 뭐란 말이냐?”
분명 내가 이기빈에게 커피 종자를 꼭 구해오라고 명령하기는 했다. 무슨 수를 써도 좋다고 말하기도 했다만, 내 말의 의미는 관리에게 뇌물을 주거나 농장 담을 넘어 훔쳐 와도 좋다는 정도지 무력으로 뺏어오라는 뜻은 아니었다. 그게 무슨 끔찍한 짓인가?
내 불편한 심기를 읽은 이덕형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면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 장계를 어찌 생각하느냐고 내가 한 번 더 묻자 조심스럽게 답했다.
“다소 과장된 부분이 있지 않나 싶사옵니다. 해적선을 잡아 재물을 얻었다는 말을 부풀려서 올린 게 아닐는지요.”
“우상이 보기에도 역시 그러한가.”
이기빈은 본국에 있을 때도 해적들을 상대로 약탈을 즐겼다. 게다가 아라비아해는 원래부터 해적 소굴이니, 상당한 부가소득이 있었을 것은 분명하다.
“천회사는 출발할 때부터 정원보다 군사를 더 태우는 등 해적을 대비한 만반의 대책을 세워 준비하였습니다. 해적선 수 척을 상대로 싸워도 밀리지 않을 힘을 갖추었으니, 해적 토벌에서 거둔 성과를 과장하였음이 틀림없습니다.”
어떻게 달랑 배 한 척을 가지고 항구를 몇 개씩 터냐는 게 이덕형의 발언 요지였다. 인도양 항해 경험이라면 이덕형은 다른 조정 중신들 누구보다 많았다. 오스만령인 아라비아에는 가본 적이 없지만, 모카?아덴?소코트라 모두 번성하는 큰 항구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아라비아에 있는 항구들은 모두 요새와 포대로 단단하게 수비하고 있습니다. 과거 포도아 함대가 함락했다가 돌궐이 되찾은 이후 그 방비를 강화했기 때문에, 경계도 무척 철저합니다. 대함대도 아니고 겨우 전선 1척으로 공격해서 간단히 함락할 만한 항구들이 아닙니다.”
“내 생각에도 우상이 하는 말이 옳은 듯하다.”
상식적으로 이덕형이 한 말이 옳을 수밖에 없다. 아라비아 남부 지방 항구들은 상업적으로 중요할 뿐만 아니라, 성지 메카로 가는 발판이기도 하다. 그런 곳을 오스만 정부가 그따위로 허술하게 관리할 리가 없지 않은가.
이기빈이 항구를 어떻게 함락했는지 그 전개 양상을 상세하게 적었다면 혹시 또 모르겠다. 하지만 장계에 적은 바를 보면 ‘쳐서 빼앗았다’라고 간단히만 적어 놓았다. 노획한 배와 재물, 사람의 숫자는 실로 철저하게 적었으면서 싸우게 된 배경과 싸운 과정은 적지 않다니?
“그게 뭐 놀라운 일이겠습니까? 누구든지 자기가 중요하게 여기는 내용부터 상세하게 적기 마련입니다. 천회사에게는 노획물 쪽이 훨씬 중요했을 겁니다. 이번 출정은 애초에 그 목적이 상거래를 위하여 나간 것이지 싸우고자 나간 것도 아니었으니 더더욱 그랬겠지요.”
이항복도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도 이덕형만큼은 아니었다.
“다만, 신이 보기에는 아마 항구를 털었다는 보고 자체는 사실일 겁니다. 해적들이 소굴로 쓰는 작은 포구를 몇 개 토벌한 뒤에 그 성과를 크게 부풀린 게 진상이 아닐까 합니다. 설마 진짜로 아덴이나 모카를 함락하고 재물을 노략질했을 리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항복도 이덕형과 비슷한 견해를 보였다. 그러나 역시 그답게 비뚤어진 예측 한 가지를 더 추가했다.
“어쩌면 해적 소굴만 턴 게 아니고, 천회사 자신이 직접 해적으로 나서서 인도양을 오가는 상선들을 신나게 털었을지도 모릅니다. 모두 한몫 거하게 나눠주기로 했다면 수하에 거느리고 간 군사들이나 기록관들도 입을 다물지 않겠습니까?”
“설마 그렇게까지야 했겠느냐?”
이기빈도 일단은 조선의 사대부다. 인도양이 아무리 본국에서 멀다지만, 설마 대놓고 해적 영업에 나설 수 있을까? 전쟁 중인 적국 소속도 아니고, 완전히 무고한 배들을 상대로?
만약 이기빈이 정말로 그런 짓을 했다면, 어떤 보상을 약속해도 기밀 유지 같은 게 될 리가 없다. 귀항한 승무원 중 누군가는 분명히 항해 중에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 입을 놀릴 테니까 말이다. 그놈은 모르고 있겠지만, 기록관 외에 금위사 요원도 타고 있지 않은가.
“그러시다면 귀항하기를 기다렸다가 천회사에게 직접 캐물을 수밖에 없겠습니다. 천축에서 장계를 올린 시기가 4월이라 하였으니, 곧 돌아오겠지요.”
서쪽으로 가는 도중에 이수광이 보낸 장계에 따르면 고아에 도착하는 데 7개월쯤 걸렸다고 했다. 지금이 12월이니, 이 장계를 보낸 직후에 이기빈이 벵골에서 출발했다고 하면 벽란도에 도착할 때가 되었다. 이항복의 말대로 자세한 사연은 직접 들어볼 수밖에 없겠다.
“혹시 이 장계 내용은 모두 거짓이고 천회사 혼자 빈 배로 도착한 다음, 도중에 그만 거센 폭풍을 만나 다른 배를 모두 잃었다고 둘러대는 건 아니겠지?”
“설마 그렇기야 하겠사옵니까. 적어도 염초를 실은 배 2척 정도는 끌고 오겠지요.”
이항복이 빙그레 웃더니 농담을 던졌다.
“그나저나 천자께서 사천병(四川兵)까지 동원하신다니 큰일입니다.”
“대국이 동원할 수 있는 마지막 정병이라는 뜻인가?”
“아닙니다. 정 총관이 언급한 사천 장창병이란 ‘백간병(白杆兵)’을 말하는데, 이들은 선무사 마천승(馬千乘)이 거느린 마씨 일족의 가정입니다. 마천승은 복파장군 마원의 후손답게 실로 그 기강을 엄정하게 하여, 지난날 양응룡이 일으킨 난을 진압할 때도 공이 컸습니다.”
그런데 뭐가 큰일이라는 건지 이해가 전혀 가지 않았다.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이항복이 씩 웃었다.
“마천승의 부장이 바로 그 처인데, 진량옥(秦良玉)이라는 서른한 살 먹은 묘녀(苗女)입니다. 신이 출정했을 때 직접 만났었는데, 재색을 겸비하였으니 실로 칭찬할 만합니다. 그런 재녀가 거친 야인들의 손에 떨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어찌 큰일이 아니겠습니까?”
“예끼, 이 사람아.”
심각한 이야기를 하다가 말고 뜬금없이 여자 이야기라니. 나도 그만 웃어버렸다. 그래, 괜히 고민하지 말자. 그런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니, 이기빈이 귀항하기나 기다리면 되겠지. 다른 고민거리도 이미 많으니까.
– 22 –
13척이나 되는 대선단이 벽란도를 향해 천천히 접근했다. 선두에는 거대한 갈레온 한 척이 앞서서 항로를 선도하고, 그 뒤에는 제각기 외양이 다르게 생긴 배 12척이 조심스럽게 뒤를 따랐다. 안전한 길을 벗어날까 봐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움직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모두 이 도척의 뒤만 잘 따라오면 걱정할 게 없다! 긴장할 것 없어!”
고물에 선 이기빈이 호탕하게 웃었다. 작년 4월에 여기를 떠났으니, 1년하고도 8개월 만에 다시 돌아온 셈이다. 그도, 수하 군사들도 이제껏 이렇게 오래 본국을 떠나본 적이 없었다.
“여기가 나리의 조국, 조선인가요?”
“그래. 여기가 조선이지.”
뱃전을 짚은 셀린이 조심스럽게 이기빈 옆에 와서 섰다. 본명은 말라니야고 셀린은 돌궐에 잡혀서 노예로 팔린 뒤에 새로 붙은 이름이라고 했는데, 이기빈은 말라니야보다 셀린 쪽이 더 마음에 들고 부르기도 편해서 계속 셀린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제 고향처럼 푸른 산이 아름답네요. 모카에서 보는 황량한 땅은 너무 싫었어요.”
그동안 긴 항해 때문에 다소 지쳤지만, 그 긴 항해도 이제 끝날 때가 됐다고 하니까 셀린도 기운이 난 모양이었다. 일부러 선실에서 나와 여기 갑판까지 올라온 걸 보면 말이다.
“벽란도에서 배를 내리면 도성인 한양으로 간다. 주상 전하께 이번 항해에서 거둔 성과를 보고하고 나면 한동안 쉴 수 있을 테니, 그동안 내 본가로 가자꾸나.”
이기빈은 셀린을 정식으로 첩으로 들일 생각이었다. 이제까지 조정에서 양첩을 들인 사람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자기가 이번에 세운 공적도 있으니 첩 하나쯤이야 문제가 안 될 것이다.
이번 항해에서 얻은 배는 12척이다. 이 배들을 움직이는 선인 숫자만 3백여 명에, 임금을 위해 싸우겠다고 맹세한 흑인과 백인 군사들은 4백 명이다. 무굴에서 얻은 염초가 2백만 근이 넘고, 코끼리가 3마리에 싣고 온 보석?향료?금은 등 재물만 은으로 180만 냥은 족히 된다.
게다가 자기 혼자만 미인을 차지하는 것도 아니다. 전하께도 12명이나 바치지 않는가.
“그년들이 지금 상태가 별로 안 좋아서 문제지만.”
상감께 바칠 계집들의 상태를 생각한 이기빈이 혀를 찼다. 항해가 조금 길었던 데다, 다들 자의로 따라나선 게 아니다 보니 몰골들이 영 말이 아니었다. 밥을 제대로 먹지 않아서 모두 몸은 비쩍 마르고 안색은 파리한 것이, 영 미색이라고 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너는 이리 건강하고 활기찬데 말이다. 그것들은 갑판에 나오지도 않고….”
모카에서 배에 태울 때만 해도 그 계집들도 셀린 못지않은 미색이었다. 땅을 밟고, 제대로 밥을 먹이며 쉬게 하면 그것들도 처음 대면했을 때의 미모를 되찾으리라. 전하께서 그때까지 기다려 주실 때의 이야기지만.
“그야, 나리께서 저를 아끼시니까요.”
이기빈이 1년 동안 마주 앉아 가르친 덕에 셀린의 조선말은 제법 능숙했다. 흐뭇하게 웃던 이기빈의 미간에 문득 한 가닥 수심이 스쳤다.
“네가 너무 예쁘니, 혹시 주상께서 저 열두 명 대신 너를 택하시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된다. 그런 일은 없어야 할 것인데 말이다.”
셀린이 뭐라고 답하기 전에 돛대 위에 있던 파수꾼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사또! 교동도 위에 뜬 열기구가 보입니다! 지금 발연통을 마구 밑으로 던져대는 것이, 뭔가 일이 터진 모양입니다!”
교동도 상공에는 비승군이 늘 열기구를 띄워놓고 있다. 교역항인 벽란도는 물론, 도성으로 들어가는 주요 수로인 한강 하구를 지키기 위해서다.
발연통은 발화통에서 파편을 내는 쇳가루를 빼고 색이 나는 연기가 나게 만들어 신호용으로 쓰는 것이다. 열기구에서는 화재 위험 때문에 신기전으로 신호를 할 수 없어 발연통을 쓴다.
“사또, 어찌할까요? 수졸들에게 전투준비를 시킬까요?”
혹시 적이 침입해서 교동도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 수하 군관들이 급히 이기빈에게 달려왔다. 이기빈이 폭소를 터트렸다.
“이놈들아! 저 소란은 우리 때문이다. 사전에 연락도 없이 이 계절에 이런 대선단이 왔으니 어찌 경기수영이 발칵 뒤집히지 않겠느냐? 쓸데없는 걱정은 말고, 이대로 벽란도로 가자.”
계절 자체가 배가 안 오는 계절이다. 남만에서 오는 교역선은 여름에 계절풍을 타고 왔다가 겨울이 닥치기 전에 남으로 다시 떠난다. 명나라를 오가는 배들도 겨울에는 운항을 중단한다. 그런데 이런 대선단이 한겨울에 몰려왔으니 어떻게 교동도에서 난리가 안 나겠는가.
이기빈은 열기구를 보면서 다시 항로를 가늠했다. 선단이 싣고 있는 재물과 사람의 수량을 생각하면 한강을 타고 곧바로 도성으로 가고 싶다. 하지만 갈레온을 몰고 한강을 올라가 본 타공이 없으니, 그건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
어쨌건 이 항해의 결과를 보시면 전하께서는 크게 기뻐하시리라. 물론 어느 정도는 질책을 받겠지만 큰 문제는 없으리라고 확신했다. 가배 종자를 가져왔잖은가.
*작가의 말: 지인분이 그려주신 셀린입니다. 출신은 우크라이나로 설정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