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840
2부 61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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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돈과 사람이 모이는 곳이 한양이다. 개성이 아무리 상업으로 번영한다고 해도 나라 전체의 세금과 지세가 모이는 도성을 능가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게 모여든 돈이 가장 빛을 발하는 곳이 과거에는 종로의 시전 상가였다. 하지만 지금은 반촌이 가장 빛을 발하는 곳이 되었다. 풍년에 힘입어 말 그대로 환한 빛으로 밤을 비춘다.
“상빈께서는 재미를 톡톡히 보고 계시겠습니다. 이 주점 하나에서 벌어들이는 수입만으로도 상등전(上等田) 십여 결 정도는 족히 되지 않을지요?”
“꽤 번다고는 했지만, 정확히는 나도 모른다.”
반촌주점은 안팎에 모두 환하게 고래기름 등불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수많은 술꾼이 불빛 아래에서 맥주를 들이켜고 있다. 싱거운 맥주로는 도무지 취하지를 않는다고 투덜거리면서도, 탄산이 주는 시원한 자극이 좋은지 다들 많이도 마셔댄다. 그러다가 결국 취하고.
“종종 인정(人定, 22:30)을 넘겨서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자들도 많습니다. 개중에는 제 발로 일어나지 못해 아예 술청에서 일하는 중노미들이 질질 끌어내는 사례도 있지요.”
인사불성이 된 주정뱅이들만 그렇게 끌려나가는 건 아니다. 다른 경우도 흔하다.
“급사를 들병이(술을 병에 담아 들고 다니며 파는 뜨내기 술장수)대하듯 희롱하거나 논다니(술집에서 일하는 싸구려 창기)처럼 옆에 앉히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이 네가 그러다 끌려나가 본 것은 아닐 테지?”
“설마 그렇겠습니까, 하하.”
그렇겠지. 이놈은 외증조부 이장곤을 닮았는지 독주를 항아리째 퍼마시고도 태연한 놈이니 말이다. 음, 이장곤 정말 상남자였지.
“그동안 나를 대신해서 국정을 돌보느라 고생이 많았다. 자, 이 아비가 내리는 술이니 편히 한 잔 받거라. 이런, 술이 떨어졌군.”
끈을 당겨 종을 울리자 체코식 드레스를 입은 종업원이 개인실 문가에 나타났다. 다만 이 아가씨는 체코인이 아니고 조선인이었다. 문을 막고 있던 한주동이 잠깐 옆으로 비켜섰다.
“맥주 석 되, 고기순대 한 근 추가.”
“예, 나리.”
주문을 받은 종업원, 급사(給使)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몸을 돌려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성이가 씩 웃었다.
“저 급사들 발목을 구경하러 오는 한량들이 수레로 실어낼 만큼 들어참을 아시는지요?”
“장안에 소문이 자자하고 눈앞에 저렇게 널려 있는데 어찌 모르겠느냐? 도성 아녀자들이 저 복색을 모방하려는 움직임은 아직 없다 하지만, 얼마나 버틸지 모르겠다.”
반촌주점 급사들이 입은 체코식 드레스는 장딴지 중간까지 올라간다. 그 밑에는 긴 양말과 서양식 구두를 신었다. 드러난 여자 다리를 볼 수 있으니, 당연히 구경꾼이 몰려들 수밖에.
“숙부인 희씨 ? 롤리타에게 결국 희(喜)씨 성을 내렸다 – 가 데려온 서반아 시녀들이 입고 다니거나 만들어 퍼뜨린 서양 옷은 우리 것만큼이나 치맛자락이 길어서 사내들은 별 관심이 없었지. 하지만 저리 발목이 드러나면서 고운 옷은 처음이니 어찌 눈길을 끌지 못하겠느냐?”
사실 짧은 옷 자체는 조선에도 있다. 옷을 지을 포목을 구하지 못하는, 말 그대로 ‘헐벗은’ 빈민이나 노비들의 옷 말고 정말 짧은 옷 말이다.
긴 치마는 일할 필요가 없는 상류층의 상징물이다. 상민이나 천민 여자들은 일할 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몽당치마나 두루치라고 부르는 짧은 치마를 입는다. 급사들이 입은 치마도 같은 이유로 원래 것보다 단을 올려 몽당치마로 만들었다.
“치마가 짧다고 다 좋은 건 아니지 않습니까. 꾀죄죄한 아낙네가 허름한 누더기를 걸쳤다면 볼 필요도 없지만, 색동옷으로 곱게 단장한 미희(美姬)라면 다르지요.”
더구나 주점 급사들은 보통 서민들처럼 펄렁한 속바지가 아니라 종아리에 딱 붙는 양버선(양말)을 신었다. 그 말인즉슨 종아리 라인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뜻이다.
‘이는 풍기를 문란케 하는 일이옵니다! 금하소서!’
‘속살을 드러낸 것도 아닌데 그게 뭐 어떤가. 아낙네의 맨다리야 길바닥에서도 흔하게 보는 게 아닌가.’
조정에서 잠깐 논란이 되긴 했지만 묵살해 버렸다. 허벅지가 드러나는 미니스커트도 아니고 겨우 발목 가지고 무슨 호들갑을 떨 계제나 되나 말이다.
“주문하신 주안상이옵니다.”
문을 막고 있던 한주동이 비키자 아까 그 급사가 큼직한 나무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맥주를 단지에 담았으니 꽤 무거울 텐데 용케도 안주와 함께 들고 왔다. 보기보다 힘이 좋구나.
“고맙다. 가보거라.”
급사가 빈 단지를 가지고 나갔다. 태도를 보면, 아마 우리를 호위를 데리고 다닐 만큼 팔자 좋은 한량 부자(父子) 정도로 여기는 듯하다.
“소자가 어릴 때는 이런 세상이 오리라고 생각도 못 했사옵니다.”
맥주잔을 들어 한 모금 넘긴 성이가 경탄하는 눈빛으로 아래층 대청을 내려다보았다. 이곳 2층 개인실에서는 바깥 거리와 아래층 대청을 모두 구경할 수 있었다.
“백룡군과 흑룡군이 궁궐에서 숙위를 서고, 밤이면 서양식 주점에 와서 우리 본래 백성들과 어울려 서양 술을 마십니다. 항구에 들어오는 양선은 온갖 방물(方物)을 가져오니, 이게 어찌 별천지(別天地)가 아니겠습니까.”
백룡군(白龍軍)과 흑룡군(黑龍軍)은 이기빈이 모카에서 데려온 흑인, 백인 병사들이다. 정식 부대명을 뭘로 정할까 고심하다가 가장 단순하면서 직설적인 이름으로 붙였다. 스코틀랜드인 용병대장 맥클로스키가 이들을 지휘하는 총대장이다.
이들은 낮에는 내금위 소속으로 궁궐을 숙위하고 도성 내부를 순찰하는 등 규정대로 근무를 서지만, 야간에는 근무하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이들을 보고 귀신이나 밤도깨비로 착각하고 혼절하는 사람이 속출한 탓이다.
그러다 보니 이들은 매일 저녁 퇴근만 하면 도성 전역에 있는 술집 매상을 신나게 올려주고 있다. 이곳 반촌주점 역시 저들이 즐겨 찾는 술집 중 하나다.
“아바마마께서 생각을 바꾸신 계기는 여전히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만, 방향은 분명 옳다고 생각합니다. 옛날 무종대왕께서 여셨던, 백성을 풍요롭게 하는 한편으로 군사는 강하게 하는 부국강병의 길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으로 나라를 이끄는 길입니다.”
“그러하다. 관자에서도 ‘곳간에서 명예, 인심, 예절이 나온다’라고 하지 않았더냐.”
관자(管子)는 제나라를 번영하게 한 명재상, ‘관포지교(管鮑之交)’의 그 관중이 쓴 저서다.
“천하에 오직 우리 조선 하나만 존재한다면 얼마든지 덕을 추구하며 고고하게 살 수 있다. 하지만 우리를 노리는 수많은 도적이 사방에 있으니 덕을 지키며 어찌 이를 다 감당하겠느냐? 나라와 백성을 지키려면 덕을 말하되 만사를 덕으로 해결할 수 없음도 알아야 한다.”
“예, 아바마마.”
나라를 지키려면 강병이 필요하고, 강병을 유지하려면 부국부터 먼저 이루어야 한다는 건 성이도 지난 20년 동안 절실히 깨달았다. 무종 때부터 기반을 갖춰두지 않았었다면 어떻게 그 긴 전쟁을 버텨낼 수 있었겠는가.
“이번 대리청정은 이제 끝이다. 내일 아침부터는 내가 다시 국사를 돌볼 것이다. 그동안 내 자리를 맡아 네가 수고가 많았으니, 오늘은 주변 눈치 없이 마음껏 마셔 보자꾸나.”
궁궐 안에서 술판을 벌이자면 아무래도 중전 눈치를 안 볼 수가 없다. 그래서 가끔 부자가 모두 미복 차림으로 궁을 빠져나와 이런 자리를 갖는다. 물론 경호는 확실하다.
“아바마마, 그렇다 해도 이곳보다는 소자의 집이 낫지 않겠습니까?”
“오, 영창대군, 혜산군, 진안군 모두 왔구나. 자, 너희도 앉아라.”
아들네 집에서도 며느리 눈치가 보이는 건 똑같다. 내가 누군지 모르는 곳을 찾아 가볍게 한잔하는 쪽이 훨씬 마음에 든다. 인정(통행금지)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 천천히 마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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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에 대리청정을 개시했으니 34일 만이구나. 근정전 앞에서 백관의 하례를 받으니까 이제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기분이 든다. 쉬는 동안은 좋았지만, 그 휴식도 이제 끝을 낼 때다.
조회를 끝낸 뒤에는 특별한 행사가 하나 있었다. 홍타이지에게 항복을 받는 자리다.
“황태극을 대령하라!”
여진 복장을 한 홍타이지가 조용히 계단 밑에 섰다. 그리고 용상에 앉은 내 앞에 엎드려 세 번 절하고 매번 절할 때마다 세 번씩 바닥에 고개를 조아렸다. 즉, 홍타이지는 삼궤구고두례(三?九叩頭禮)를 내게 바쳤다.
“보잘것없는 소인의 형이 감히 전하의 군세에 덤비다가 패하였기에, 이미 죽은 형을 대신해 소인이 그 죄를 전하께 빌고자 북방의 예에 따라 절을 올리옵니다. 그 싸움은 오직 부덕한 형 탓에 일어난 것이었으니, 부디 저희 만주에는 죄를 묻지 말아 주시기를 비옵니다.”
어째 역사를 일부러 뒤집는 것 같아서 홍타이지한테 절을 받으면서도 별로 기분은 안 좋다. 왜란을 승리로 이끌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다. 상대가 아직 어린애라 그런가.
절을 받고 있으려니 상희에게 홍타이지의 청혼 이야기를 꺼낸 생각이 나는군.
“설마 연이도 건주위에 시집보내려고?”
“아니, 그러겠다는 게 아니고 그 녀석이 그런 청을 했다고. 다이샨이 희정옹주랑 결혼한 게 부러웠나 봐.”
“그야 당연히 부럽겠지. 그 애는 당당한 조선의 왕녀니까.”
예상대로 상희는 까칠한 태도를 보였다. 홍타이지 놈이 입을 조심하지 않은 탓으로, 소문이 이미 궐내에 다 퍼진 상태였다. 그 소문을 들은 상희는 둘째 딸까지 먼 북방으로 시집보내고 싶지 않다는 태도를 확연하게 드러냈다.
“난 싫어. 분명히 말할게. 싫다고. 얼굴도 못 보는 외국에 딸을 시집보내는 건 하나로 족해. 둘이나 보내고 싶지 않아.”
이럴 줄 알았지. 물론 나도 확실히 결정한 건 아니다. 다만 이항복도 지적했듯이, 누르하치 쪽에서 만에 하나 다이샨을 쳐낼 경우를 대비할 보험으로 홍타이지를 잡아두는 것도 괜찮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연이 본인 생각은 어떨까?”
“당연히 거절이지. 이 도성을 떠나서 저 북쪽 여진족 소굴에서 살고 싶을 리가 없잖아.”
“본인한테 한번 물어보면 어떨까 싶은데.”
“그걸 꼭 물어봐야 알아?”
상희랑 이런 식으로 다툰 것도 꽤 오랜만이다. 자기 자식이 걸린 문제니 날카로워지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지만. 희연옹주 본인 의사를 물어는 보고 싶다.
“그대가 그리 간곡하게 말하니, 내 군사를 일으켜 건주를 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차후에 그대의 부친이 행동을 조심하게 하고자 그대를 본국에 잡아둘 것이니, 영의정의 집에 머물며 예를 배우고 도리를 익히도록 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제 내일이면 김시민과 유정이 온다. 그전에 홍타이지를 치워서 눈에 띄지 않게 해둬야지. 잘못 눈에 띄었다가는 목을 베어 천자 앞에 바쳐야 한다고 할지도 모르니까.
유정 입장에서야 홍타이지의 목 하나라도 건져서 자기 공적으로 삼고 싶겠지만, 내 눈에는 그 머리가 수급 1개 이상의 가치가 있다. 확실히 살려두고 뭐든지 쓸모를 찾아볼 생각이다.
– 6 –
서대문 밖에 나가서 기다리고 있으니 개선하는 군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자리에서 일어서자 번쩍이는 갑옷과 창검, 휘날리는 깃발이 보인다. 김시민이 거느리고 출전했던 경군 7천 명이 보무당당하게 돌아오고 있었다. 그 옆에는 명군 깃발도 보인다.
“오는구나. 실로 자랑스럽게도 말이다.”
“전하, 역시 서대문 밖까지 와서 맞이하실 필요는 없지 않았겠습니까?”
병조판서 홍여순은 내가 직접 귀환하는 군사들을 마중하러 나온 게 영 마땅찮은 듯했다.
“전하께서 옥체 미령하시어 세자 저하께 대리청정을 명하셨었습니다. 이를 거두신 지 이제 겨우 이틀이옵니다. 행여 다시 병을 앓으실까 걱정이니, 이제라도 먼저 환궁하시옵소서.”
“아니다. 이미 기치와 창검이 보이는데 어찌 들어가겠느냐? 개선식도 열어주지 못하는데 내 여기까지라도 나와서 저들의 노고를 위로해야 할 게 아닌가.”
병가 중에 잠시 치른 어전회의에서 정했듯이 이번 원정에서 거둔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식은 없다. 하지만 공을 세운 장수와 군사들에게 신상필벌은 확실하게 내릴 예정이고, 특별한 공이 없는 자들이라 해도 임금이 베푸는 술과 고기 정도는 실컷 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 서대문 앞에는 술독과 고기를 삶는 솥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모두 돌아오는 군사들을 위해 내가 준비한 만찬이다. 오늘은 9월 20일, 양력으로는 10월 31일이다. 조금 쌀쌀하기는 해도 야외에서 잔치를 베풀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마침내 지척까지 다가온 군사들의 대열이 멈췄다. 말에서 내린 김시민이 급히 달려와서 내 앞에 부복했다. 부원수 김응서와 참모장 김충선도 그 뒤에 같이 엎드렸다.
“신, 어명을 받자와 건주위 토벌에 종군하였으나 그만 세부득이하여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부디 신에게 무거운 벌을 내리시고, 신을 따른 장졸들은 용서하소서!”
그럴 수야 있나. 천천히 용상에서 내려가 김시민의 어깨를 잡고 자리에서 일으켰다. 그리고 간곡한 위로를 건넸다.
“도원수가 이번에 훌륭히 군사를 이끌었음을 내 알고 있다. 성의껏 노력했음에도 원한 바를 이루지 못함은 천운이 따르지 않아서이니, 어찌 이를 가지고 그대 탓을 하겠는가? 자책하지 말라. 그대 잘못이 아니다.”
원정이 실패한 건 직접적으로는 개떡 같은 작전을 세운 데다 실행 책임자 인선에도 실패한 양호 놈에게 책임이 있다. 을미년에 봤을 때는 그렇게까지 멍청해 보이진 않았는데.
이차적으로는, 아니 근본적으로는 필요하지도 않은 원정을 명령한 만력제에게 책임이 있다. 어느 쪽이건 우리 탓은 아니다.
“그대들도 용감히 싸웠다 들었소. 그대들이 선보인 분투에 경의를 표하오.”
“과분한 칭찬이십니다.”
유정과 그 휘하 장수들이 내게 예를 표했다. 제후국 국왕이라는 내 신분 문제가 있다 보니 유정은 김시민처럼 땅에 엎드리지 않고 고개와 상체만 약간 숙였다. 격이 낮은 인사가 딱히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뭐 어쩌랴, 유정은 상국인 명나라 장수인데.
“패군지장을 이리 환대해주시어 감격스럽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귀국하면 이를 꼭 황제께 아뢰어 전하를 포상하시도록 하겠습니다.”
“포상을 받고자 하는 행동이 아니오. 천장을 대하는 마땅한 도리로서 내 행하는 것이니, 내 부족한 성의나마 기쁘게 받아주면 고맙겠소.”
유정은 이쪽 세계에서도 역시 인간이 된 사람이다. 내게도 지극히 정중하게 대했고, 보고를 들으니 도성으로 올라오는 도중에도 우리 백성들에게 전혀 피해를 주지 않았다고 했다. 패전 때문에 울화통이 터진 군사들이 패악을 부릴 법도 한데, 사고 한 건 없었다니 놀랍지 않은가.
내 뒤에 있던 이항복이 나와서는 유정과 중국어로 인사를 나누었다. 저 양반이 중국어는 또 언제 익혔지. 양응룡의 난을 진압하러 갔을 땐가? 그러고 보니 그때도 이항복은 유정과 함께 싸웠었구나. 이번 겨울 동안 이항복 집에 머무르라고 해도 되겠다. 둘이 서로 원한다면.
“유 총병, 그대가 거느린 막료(幕僚) 중에는 여인도 있소?”
유정 뒤에 늘어선 하급 장수들은 한쪽 무릎을 땅바닥에 꿇고 있었다. 그중 여자로 보이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수염이 없고 곱상한 것이, 분명히 여자였다.
“사천에서 온 순무사 마천승의 처 진양옥입니다. 지금 공식적인 벼슬은 없으나 마씨 가문의 가병인 백간병 2천을 휘하에 두고 있습니다.”
“대단하군. 우리나라에도 과거 전장을 누빈 여무사는 있었으나, 이런 여장군은 없었거늘.”
다지 생각나네. 조선에 머무는 동안에 중전이랑 한번 만나게 해주면 재미있어하겠지 싶다. 중전도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했던 게 꽤 가슴에 맺혔던 사람이니까 말이지.
“그대들도 우리 군사들과 함께 마음껏 먹고 마시도록 하시오. 여기서 힘을 쌓아야 황제께서 후에 명을 내리셨을 때 그에 따라 움직일 수 있지 않겠소.”
“감사합니다, 전하.”
과연 만력제가 어떤 명을 내리려나. 설마 이번에는 우리보고 당장 군사를 일으켜서 유정과 함께 건주위를 치라고 하는 건 아닐 테지?
만약에 그런 칙서가 온다면, 나는 폐렴이 재발했다고 주장하면서 다시 드러누워 버릴 테다. 그럼 그놈이 어쩌겠어?
지금 건주위는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다. 우리가 나서서 쳐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내가 내린 지시에 따라 허투알라에 또 간 정여립도 이를 전제로 해서 교섭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