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845
2부 62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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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옆 서촌에는 예로부터 명문가 저택이 많다. 하지만 요즘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집을 하나 고르라면 역시 영의정 이덕형의 별가(別家)다. 본가보다 궁궐에서 가까워서 출퇴근하기에 편리하긴 하지만, 그 정도로는 유명해질 이유가 없다. 진짜 배경은 그 집에 사는 사람이다.
“어서 오시지요, 대인. 제 집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이덕형의 첩이면서도 이례적으로 봉작을 받은 숙부인 희씨, 롤리타가 대문까지 나가 웃으며 손님을 맞이했다. 조선에 건너온 지 벌써 11년, 그녀도 벌써 서른을 바라보는 원숙한 부인이 되었다. 다만 차림새는 여전히 스페인에서 하던 그대로다.
아무리 스페인 출신이라지만, 조선에서는 여자가 함부로 손님들 앞에 나서지 않는다는 법도 정도는 그녀도 익숙해졌다. 그런데도 직접 손님을 맞이하러 나선 이유는 찾아온 주빈(主賓) 중 한 사람이자 지금 대문을 들어선 손님이 여자였기 때문이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파촉 말밖에 하지 못하는 진양옥은 되도록 인사를 간략하게 했다. 몸에는 평범한 여자 옷 대신 화려한 전포(戰袍)를 몸에 두르고 있었다. 비록 갑옷은 입지 않았으나, 그 용맹한 기상은 전포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드러났다.
“장군께서는 저와 비슷한 연배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전장에서 이토록 활약하시니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부군께서 함께 돌아오시지 못한 일은 애도를 표합니다.”
진양옥의 남편 마천승은 건주위 기병들에게 포위되어 끝까지 싸우다 죽었다. 전해진 소식에 따르면 칼을 짚고 선 채로 죽은 마천승의 전신에 꽂힌 화살이 28개였다고 했다.
“전장에서 쓰러지는 것은 모든 장수가 바라는 최후입니다. 천자께 충성하다가 죽었으니 그 무슨 아쉬움이 있겠습니까?”
“그렇겠지요. 오늘 마련한 자리가 장군께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면 좋겠습니다. 유 대인께선 잠시 후에 영상 대감께서 직접 모시고 오신답니다.”
두 여인이 한담을 나누며 연회장 쪽을 향했다. 통역을 맡은 사천 출신 묘노가 종종걸음으로 이들의 뒤를 따랐다.
롤리타의 집은 도성에서 일하는 외인(外人)들, 특히 서양인들이 자주 모이는 사교장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조선에서 초기에 받아들인 외국인이 대개 군사고문인 관계로 이들은 대개 무관이다. 출신도 스페인인, 프랑스인, 스코틀랜드인 등 다양하다.
조선에 처음 들어온 외국인들이 스페인 군사고문과 예수회 성직자들밖에 없었던 시절에는 굳이 따로 모이지 않았다. 스페인인들이 훈련원 내에서, 선교사들은 사제관에서 각각 모여서 지내는 데다 스페인인들은 절대 미사를 빼먹지 않으니 일부러 따로 모일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견서사가 유럽에 다녀올 때마다 군부에서 근무하는 유럽인 무관들이 점점 늘어나고, 이들이 조선 여인과 혼인하여 각기 살림을 차린 데다 출신도 다양해지면서 조금 더 세속적인 모임 장소가 필요해졌다. 여기서 나타난 안성맞춤의 모임 장소가 바로 롤리타의 집이었다.
네덜란드인들과 체코인들이 오기 전까지, 유럽에서 들어온 고문관들은 전적으로 남자들밖에 없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들이 조선 여자와 혼인하도록 의도적으로 장려했고, 대부분이 그 권유를 받아들였다. 이국에서 혼자 외로움에 빠지는 것도 못 견딜 노릇이었으니 말이다.
다만 이들에게 조선인 아내가 완전히 만족스러울 수는 없었다. 그러던 참에 이들의 눈앞에 혜성처럼 나타난 존재가 바로 롤리타였다. 젊고 아름다운 귀족 가문의 영애이면서 조선에서도 한 손에 꼽을 중신의 아내, 주변에 거느린 미모의 백인 시녀들.
아직 중세 기사의 덕목을 간직하고 있는 무관들로서는 받드는 귀부인으로서 더 이상 완벽한 존재를 찾을 수 없었다. 유럽 무관들은 이덕형이 왕에게 받은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봉작을 공작(公爵)에 준하는 작위로 취급했으므로, 롤리타는 ‘한원공작부인’이라고 불렀다.
“여러분, 자꾸 저를 그렇게 부르시면 안 됩니다. 진짜 공작부인은 공작님의 본가에 계시는 이씨 부인이에요. 나는 공작님의 ‘옆방 여자(측실)’라서 공작부인으로 불릴 자격이 없어요. 정 부르려거든 내가 받은 작위에 맞게 백작부인으로 부르세요.”
“그 ‘진짜 공작부인’은 평생 코끝도 볼 수 없는데 그분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세뇨라 롤리타, 그대를 저희가 원하는 대로 부르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이덕형의 부인은 물론이고 명문대가 규방에 있는 조선 여자들은 미혼이건 기혼이건 이들과 절대로 마주치지 않았다. 궁궐에 들어갈 때도 공식 행사에 출석하는 왕비 이외에 다른 하렘의 여인들을 볼 기회는 거의 없다. 맥클로스키 휘하 근위대 정도가 유일한 예외다.
롤리타는 조선에서 이 고문관들이 교제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유럽인 여성이면서 유일한 귀부인이었다. 어떻게든 띄워주고 싶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공작부인을 모시는 기사들이 되는 쪽이 백작부인을 모시는 기사들이 되는 것보다 더 낫습니다. 오성 공작님, 공감하시지 않습니까?”
“당연하지, 당연한 일이고말고.”
놀러와 있던 이항복이 맞장구를 쳤다. 듣고 있던 이덕형이 인상을 찌푸렸다.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오. 형은 정승으로서 저들에게 옳은 법도를 가르칠 생각은 않고 왜 엉뚱한 바람에 동조하는 거요?”
“나는 그저 저들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고 했을 뿐일세. 그리고 저들은 숙부인을 그 품계에 어긋나는 정1품 정경부인으로 부르겠다는 게 아니고, 저들의 말로 두케사(duquesa, 공작부인)라고 부르겠다는 것뿐인데 딱히 뭐 그러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
유럽의 귀족 작위는 혈통으로 세습된다. 하지만 조선 국왕이 수여하는 봉작은 1대에 한하며 자손에게 세습되지 않는다. 그 외에도 차이점이 많으니 어느 품계가 어느 작위에 대응한다고 확실히 규정하기는 곤란하다.
“그러니 저들이 그저 여흥으로 희씨를 공작부인으로 부르건 말건 내버려 두세나. 고향 말로 붙인 별명일 뿐이라고 여기면 그만 아닌가.”
“알겠소이다. 형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이런 사연을 거쳐 롤리타의 집은 조정에서 일하는 외국인 고관들이 드나드는 사랑방 역할을 하게 되었다. 체코인들과 셀린까지 도성에 정착하면서 롤리타와 시녀들이 도성에 있는 유일한 유럽인 여자는 아니게 되었지만, 그녀들은 본래 평민이니 여전히 격이 달랐다.
다만 이들도 조선 예법에 적응하기는 했다. 롤리타의 집에 모이는 날은 언제나 바깥주인인 이덕형이 집에 있을 때였다. 이덕형이 본가에 가거나 왕명을 받고 지방에 내려갔을 때, 혹은 관청에서 퇴청하지 못한 날 같은 경우에는 절대 방문하지 않았다.
“저희 욕심 때문에 공작부인께 폐를 끼칠 수는 없으니까요.”
맹서군 대대장, 장 미셸이 호탕하게 웃었다. 내금위에서 맥클로스키와 동격인 유일한 유럽 출신 무관이다. 조선 이름은 장미설(張彌卨)이다.
“공작께서 안 계시는 날 외간 남자들이 무더기로 드나들면 동네 사람들이 공작부인을 놓고 험담을 떠들어댈 게 아닙니까. 귀부인의 명예를 더럽힘은 저희가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롤리타의 집을 너무 혼잡하게 만들지 않게 하기 위한 규칙도 있다. 그녀와 동향인인 스페인 출신 고문관들은 누구나 여기를 드나들 수 있지만, 다른 나라 출신들은 가장 직위가 높은 이 한 사람만 올 수 있다. 나머지는 특별히 허락을 받아야 한다.
이는 단지 롤리타의 평판만을 위한 규칙은 아니다. 남편인 이덕형이 ‘외인 무사들로 도당을 모아 난을 일으키려 한다’라는 모함을 받지 않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지금이야 국왕에게서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다지만, 세상일이란 모르는 법이다.
“귀공이 공작부인의 시녀들에게 수시로 집적대는 걸 보면 별로 그 말이 신뢰는 안 가는데. 본인의 품행부터 일단 단정히 하시오. 도성 과부들도 좀 그만 후리고 다니고.”
맥클로스키가 비아냥거렸다. 그는 스코틀랜드인이지만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전역을 돌면서 용병 생활을 했기에, 보통 스코틀랜드인들처럼 태도가 무뚝뚝하지는 않았다.
“미인을 보면 즐겁게 말을 거는 건 당연한 일이오만?”
교성도감(敎城都監) 제조를 맡은 프랑스인 건축가, 앙드레 마르탱이 같은 나라 출신인 장을 편들었다. 마포에 대성당을 건설하는 실질적인 총책임자다. 도제조는 조선인 고관이지만, 서양 건축술을 모르니만큼 실제 책임자는 마르탱이 될 수밖에 없다.
대성당에는 나루터를 방어하는 요새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 조정은 이 성당을 ‘교성(敎城)’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석재, 목재, 벽돌과 유리 같은 자재와 인부를 조달하는 전담 관청까지 설치했다.
“이 공사를 끝내려면 적어도 30년은 일해야 할 테니 그 정도 준비야 당연하겠지요.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이 땅에 머무르면서 수도승처럼 지낼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러니 미인을 찾아 사방을 두리번거릴 수밖에요.”
“그럼요, 그렇고말고.”
옆에 앉은 안토니오가 두 팔로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이 모임이 죄다 군인 일색일 때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마르탱이 벼슬을 받아서 이 자리에 낄 자격이 생기자 함께 참석했다. 고향은 달라도 같은 예술가를 대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런 면에서, 오늘 새로 참석하신 중국 부인도 참으로 미인이라 칭송하지 않을 수 없군요. 최근 부군을 잃어 미망인이 되셨다 하던데, 그로 인해 얼굴에 어린 슬픔이 강인한 아름다움과 섞여 실로 형언하기 힘든 매력을 빚어내는 듯합니다. 제가 초상화를 그려드려도 될까요?”
통역을 통해 안토니오의 말을 전해 들은 진양옥은 잠자코 고개를 저었다. 안토니오가 다시 한번 권하려는데 하인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천장께서 대감마님과 함께 납시십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울한 표정의 유정을 앞세우고, 이덕형과 사노부와 김충선이 그 뒤를 따라 줄줄이 대청으로 들어왔다. 차와 과자를 놓고 한담을 나누던 이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의자가 덜컹거리는 소리가 대청을 채웠다.
“됐으니 앉으시오.”
유정의 통역은 따로 두지 않았다. 이덕형이 한어(漢語)를 구사하니, 크게 필요하지 않다.
“이 자리는 우리 조정에서 봉직하는 외방인(外邦人) 중 우두머리격에 해당하는 이들을 따로 부른 것입니다. 상감께서도 천장께 이미 몇 차례 주연을 베푸셨지만, 소인도 대인을 모셔다가 대접하고 싶던 차에 다른 이들도 함께 자리하면 어떨까 하여 청하였습니다.”
스코틀랜드인부터 일본인까지. 조정에서 일하는 외국인 고관들은 모두 불렀다. 조선인들만 눈앞에 가득 앉아 있으면 유정이 더 거북해할 것이 분명했을뿐더러, 이덕형으로서도 계획하는 바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임금과도 이미 논의한 바였다.
“전하, 전하께서는 정녕 천장과 천병을 봄이 오면 귀국시키려 하십니까?”
“그러하다. 저들의 수는 고작 3천 명인데, 배 십여 척이면 넉넉히 보내줄 수 있지 않으냐. 이미 우리가 천자께 입은 은덕이 있으니, 그 군사를 잘 보살펴서 송환하는 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는 우리를 위한 방책이기도 하다.”
만약 명군 수천 명이 조선 영토로 넘어왔다는 사실을 명나라 조정이 알게 된다면, 조선에서 그 군사들을 부양하면서 건주위를 공격하게 하려고 할지도 모른다고 주상께서는 우려하셨다. 중신들은 설마 그럴 리가 있겠느냐고 했지만, 상감의 견해는 달랐다.
“요동 연변의 작은 섬을 저들이 차지하고 들어앉으면 힘으로 몰아내지도 못하고 의도적으로 양로를 끊어 몰아내지도 못할 골치 아픈 존재가 될 것이다. 총병 유정은 올바른 도와 의리를 알고 행하니 그런 배은망덕한 짓을 하지 않겠으나, 우두머리만 교체할 수도 있지 않으냐.”
명나라 조정에서 양호 대신에 난폭하고 무도한 장수를 보내 조선에 주둔하게 할 수도 있다. 철수는커녕 증원군을 보낼지도 모른다. 배후에서 건주위를 위협하는 명군이 조선 영내에 대거 주둔하면, 당연히 건주위와의 관계도 심하게 나빠질 게 뻔하다.
“그런 빌미가 생기기 전에 몽땅 돌려보내 버리는 편이 낫다. 그러면 대국에서도 설마 새로 군사를 보내겠다는 말은 하지 못할 것이다.”
“전하, 그렇다면 저들이 우리 땅에 귀화하도록 하면 어떻겠습니까? 저들이 더 이상 천장이 아니고 천병이 아니게 된다면 어찌 대국에 응원을 청하고 원병을 받겠습니까?”
“영상은 어찌 그런 말을 하는가? 천장과 천병이 어찌 우리 조선에 넘어온다는 말인가?”
“지난번 이여송이 나선 할하 정벌 때도 그랬지만, 황제께서는 싸움에 패한 장수들에게 매우 엄하십니다. 병부상서 석성이 패전 책임을 지고 처형당했고, 이여송 역시 전사하지 않았다면 무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번에도 병부시랑 양호가 투옥되지 않았습니까.”
이항복이 동지사로 간 뒤, 그 배를 이용해서 성절사가 돌아왔다. 성절사 심영권 ? 진안군의 장인인 그 심영권이다 ? 은 어사가 이여백을 체포하러 요양으로 출발했다는 소식까지 가지고 도성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면 아마 죽을 거라는 이항복의 전언도 함께였다.
“양호는 이미 투옥됐고, 전선에서 물러난 죄로 총병 마림의 벼슬을 깎고 이여백을 압송하는 상황입니다. 어차피 유정 총병도 돌아가 봐야 무사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설득해서 여기 눌러 앉히는 방향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혹시나 하여 준비도 하지 않았습니까.”
“확실히 병안(丙案) 국서가 그런 상황을 상정하기는 하였다. 하지만 총병 유정은 그저 살기 위해 도망친 게 아니라 악전고투 끝에 피칠갑을 하고 포위를 뚫은 것인데, 설마 천자께서 그 공을 인정하지 않고 그리 심한 벌을 주려 하시겠는가?”
상감께서는 뭔가 기대를 품으신 듯했다. 하지만 이덕형을 비롯하여 한 번이라도 만력제를 만나본 적이 있는 신하들은 이구동성으로 고개를 저었다.
“천자께서는 주상과 다르십니다. 어찌 주상께서는 유 총병과 같은 충신과 그 수하 군사들을 불구덩이로 밀어 넣으려 하시나이까?”
신하들은 입을 모아 유정이 돌아가면 분명히 죽으리라고 했다. 이항복이 병부시랑 이화룡을 만나 직접 들었다 하지 않았는가. 비록 조정 방침이 확실히 결정되기 전에 심영권이 돌아오는 바람에 확정된 결정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만하면 틀림없다.
“저들이 목숨을 건지게 하려면 전하께 귀순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을 돌리도록 신들이 잘 설득해 보겠으니, 부디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알겠다. 뜻대로 해보라.”
주상께서는 마지못한 얼굴로 허락해 주셨지만, 이덕형은 꼭 성공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만약 쓰레기 같은 자였다면 그냥 가서 죽으라고 내버려 뒀겠지만, 유정은 그렇게 죽게 하기는 너무 아까운 사람이었다.
“자, 유 대인. 한 사람씩 소개 올리겠습니다.”
이덕형은 상석에 앉은 유정에게 탁자 주변에 앉은 이들을 하나씩 소개했다. 왜인이면서도 많은 전공을 세워서 임금의 첫째 부마가 된 사노부, 조선에서 가장 뛰어난 정승 중 하나였던 윤두수의 사위 김충선 등이 먼저 소개를 받았다.
“왜국은 야만스러운 족속들이 산다고 하여 그동안 많은 경멸을 받았지요. 하지만 지금 우리 조선에서는 그 출신이 어디건, 전하께 충심을 다하고 공적을 세우면 그만한 대우를 받습니다. 토사구팽 같은 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토사구팽이라는 말에 유정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었다. 잠시 소개를 멈췄던 이덕형이 차례를 기다리는 다른 이들을 마저 소개했다. 그동안 임금이 베풀어준 위로잔치에 두 번 참석한 외에 숙소인 이항복의 집에서 두문불출하던 유정에게는 이들 모두 처음 보는 신기한 존재였다.
“세상 반대편에서 온 서양인들까지…왕께서는 실로 아량이 넓으시군요.”
“그렇습니다. 전국에 있는 서양인과 왜인, 한인(漢人)을 합치면 수천 명이나 됩니다. 모두가 전하의 신하로서 열심히 최선을 다하고 그에 맞는 보상을 받고 있습니다.”
유정의 얼굴에 알 수 없는 빛이 떠올랐다. 이덕형은 서두르지 않으리라고 다짐하면서 뒤에 서서 명을 기다리는 청지기에게 일렀다.
“주방에 일러 술과 음식을 내도록 하게.”
“예, 대감마님.”
곧 시비(侍婢)들이 음식을 담은 소반을 들고 나왔다. 롤리타네 주방이 자랑하는 진짜 스페인 요리와 조선 요리, 일본 요리에 사천 요리까지 잔뜩 펼쳐졌다. 고기, 생선, 채소, 두부와 같은 재료가 각기 다른 요리법으로 상에 올랐다. 술 역시 각국에서 온 명주가 망라되어 있었다.
“오늘은 조선 달력으로는 동지(冬至)입니다. 궐내에서 동지하례(冬至賀禮)도 다 드리셨지요. 그리고 유럽 달력으로는 12월 22일, 3일 뒤가 성탄절입니다. 동지와 성탄절을 모두 축하하며 이 술 한 잔을 함께 나누도록 합시다.”
모두가, 잠시 망설이긴 했지만 진양옥까지도 술잔을 들었다. 그리고 함께 들이켰다.
이덕형은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꼭 오늘 이 자리에서 결판을 볼 생각은 없었다. 이항복이 돌아오려면 적어도 두 달은 걸릴 테니, 그때까지만 유정이 마음을 돌리게 하면 되는 것이다.
*진양옥 by 동사원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