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85
1부 08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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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사복 십여 명이 넉가래를 들고 열심히 눈을 밀었다. 나머지는 쌓인 눈을 모아다가 단단히 다져 가면서 기단을 쌓았다. 얼마 안 가서 사람이 밟고 올라서도 될 만큼 단단한 눈 장대가 만들어졌다. 높이는 2m 정도였다.
“이만하면 충분히 높다. 순전히 눈을 가지고 이 정도로 쌓았으니, 애 많이 썼다.”
계단을 통해 위에 오르자 연무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장대를 만드느라 눈을 긁어모았지만 아직 전체 면적에서 70% 정도는 무릎까지 눈이 쌓인 채였다. 어제 쌓인 눈이지만 참 많았다.
“눈을 굴려 커다란 눈덩어리를 두 개 만들도록 하라. 둘 다 이 장대 앞까지 굴려오되 하나는 다른 하나보다 조금 더 작게 만들어 큰 눈덩어리 위에 얹으라. 그리고 나면 가져온 숯으로 얼굴 형상을 그리라.”
“예, 전하.”
겸사복장이 군례를 올리며 물러갔다. 내 뒤에 서 있던 상희가 기막혀하는 표정을 지었다.
“연산, 넌 눈사람도 직접 안 만들어? 아무리 왕이라지만 너무하는 거 아냐?”
“부하들한테 눈사람 좀 만들게 하면 어때서? 나 혼자서는 저렇게 큰 걸 만들 수도 없단 말이야.”
난 눈이 좋다. 지구온난화 때문에 어릴 때만큼 눈이 오지 않아서 유감이 많았는데, 여기에 오니 눈이 많이 와서 정말 기뻤었다. 헌데 첫해 겨울에 직접 눈사람을 만들려고 했더니 임금이 체통을 지켜야지 그러고 놀면 안 된다는 잔소리를 하도 들어서 관뒀다.
게다가 같이 놀 사람도 구하기 힘들었다. 중전이랑 후궁들에게 같이 놀쟀더니 다들 추위를 많이 타서 내키지 않아 했다. 결국 그동안 눈장난은 궁녀나 내관들이랑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만들면 나중에 시끄러워져서 안 돼. 그리고 저 양반들 눈사람 잘 만드는데? 오늘은 신임 겸사복장을 데려오는 바람에 내가 설명을 좀 자세히 했지만, 무사들은 다 알아. 그동안 매년 대여섯 개씩 만들었단 말이야. 저만한 걸로.”
“잘 만들고 못 만드는 게 문제가 아니잖아. 저 사람들은 애초에 네 호위병으로 지원했지 손에 동상 걸려가면서 눈사람이나 만들려고 너한테 온 게 아닐 텐데? 장난은 내시들하고나 해.”
“당연히 궁에서는 내관이나 궁녀들하고 놀아. 하지만 지금 여기는 궁 밖이잖아. 너랑 저 사람들밖에 없다고.”
“그럼 나랑 같이 만들면 되잖아.”
뜻밖이었다. 나도 모르게 주춤했다. 지금 상희가 한 말,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우리 둘이 만들어도 내 키만 한 눈사람 정도는 만들 수 있어.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는데 체통이 무슨 상관이야? 저 사람들은 본래 임무대로 주변에 누가 오지는 않는지 경호나 하라고 하고, 정 눈사람을 만들고 싶으면 우리 둘이 만들자.”
상희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닥에 주저앉더니 차고 있던 팔토시를 걷어 올리고 주섬주섬 눈을 뭉치기 시작했다. 장갑도 안 낀 손이 금방 빨개졌다.
“야, 너! 그…알았어. 여봐라, 겸사복장! 다들 물러나서 평소처럼 주변 경계만 하라.”
내 지시가 떨어지자 겸사복들은 작업을 중단하고 일사불란하게 장대 주변에서 사라졌다. 그들이 굴려 만들던 눈덩이 두 개만 덩그러니 남았다. 상희가 직접 뭉친 눈뭉치를 거기 보탰다.
“하려면 이거나 끼고 해.”
“아, 고마워. 장갑, 정말 아쉬웠어.”
사슴가죽으로 만들고 솜으로 안감을 댄 내 승마장갑을 벗어서 건네주자 상희가 반색했다.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진즉에 한 켤레 줄 걸 그랬구나 싶었다. 왜 겨울 첫 드라이브를 나오고서야 그 생각이 든 걸까. 그런 내 옆에서 상희가 찬탄하는 목소리를 냈다.
“임금이 좋긴 좋구나. 이런 것도 있고. 백성들은 가죽장갑 같은 건 꿈도 못 꾸거든. 아니 가죽이고 뭐고 장갑 자체가 없지. 높으신 양반들은 모르겠지만.”
“양반들도 없어. 궁중에도 없었어.”
본래 조선에서는 장갑이 없었다. 겨울에는 팔에 토시를 끼거나 천으로 싸매고 다닌다. 나도 보통은 거의 실내에 있으니 방한에 크게 신경을 쓸 일이 없었지만, 말을 타러 나올 때는 손이 시렸다. 손바닥 피부도 거칠어지고. 그래서 장인들에게 장갑을 만들게 해서 쓰고 있었다.
“여기 오고 첫 겨울에, 말 타러 나오는데 손이 시려서 장갑 가져오라고 했더니 그런 거 없다더라고. 그래서 구해보려고 해도 없기에 갖바치를 불러다가 만드는 법을 대충 일러주고 직접 만들게 했지. 지금도 나 혼자만 끼어.”
장갑을 직접 만들기 전에 알아보니 중국에서도 대부분 소매에 손을 넣거나 토시를 끼었다. 아주 고가품으로 비단장갑 같은 건 있는 모양인데, 승마할 때 그런 걸 낄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냥 새로 만드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저 무사들은?”
“팔토시 끼지. 손 싸매고. 그리고 몇 번 권해봤는데, 다들 익숙해져서 필요 없대. 낯설기도 하고, 임금이 특별히 사용하는 물건을 똑같이 쓰기는 부담스러운가봐.”
“네 와이프들은?”
상희는 내 아내인 중전과 두 후궁들을 그냥 하나로 묶어서 이렇게 불렀다. 아마 (실제) 나이들이 다 자기보다 어리니까 편하게 부르는 듯싶다. 개중에 누구를 딱히 지칭해서 이야기를 꺼내거나 하지는 않는데, 정말 관심이 없어서인지 다른 감정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걔네들도 필요 없다고 안 쓰더라. 소매 속에 손 넣고 있으면 되니까 없어도 된대. 하긴 뭐 걔들은 추울 때 밖에 나와서 하는 활동 자체가 거의 없지만.”
상희가 표정 변화 없이 장갑을 위아래로 뒤집어 보며 말했다.
“이거, 예쁘게 장식 좀 더 해서 시장에 내놓으면 팔리지 않을까? 아니면, 네가 어디 선물할 때 써도 괜찮을 것 같은데. 억지로 끼게 할 건 물론 아니지만, 있으면 또 사용하게 되니까.”
“흠, 그러려나.”
하긴 생각해 보니 명나라 황후에게 보내는 조공품으로 예쁘게 만든 가죽장갑 같은 거 보내도 되겠지 싶다. 신하들한테 하사품으로 주는 것도 괜찮겠고. 고려해 봐야겠군.
– 23 –
“과인이 그동안 심사숙고한 바, 홍길동과 같은 난적(亂賊)이 또 나오지 않게 하려면 서얼금고법을 폐기해야 하겠도다.”
신하들이 술렁거렸다. 서자를 벼슬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서얼금고법은 개가금지법처럼 성종 때에 와서야 비로소 확립된 것도 아니고, 태종 때부터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태종이 서자 출신인 정적 정도전과 막내동생 방석(정확히는 이쪽은 후처 소생 적자)을 증오했던 까닭이다.
“전하, 서얼은 벼슬에 올리지 않는다 함은 대전에 명확히 규정되어 있사옵니다. 서얼뿐만 아니라 장리(贓吏, 부패관리)의 후손 역시 과거에 오를 수 없는 바, 이는 벌이 자손에게까지 미침을 보여 악한 행위를 경계하옵고자 함이고 서얼은 그 신분을 천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예조판서 이세좌가 떨리는 목소리로 간언했다. 그래, 이 양반은 성종 때 서얼금고법에 예외사례를 만들려고 하자 지금하고 똑같은 논리로 반대했었지.
“예조판서에게 묻겠다. 어찌 서얼을 허통하여서는 아니 되는가?”
“서얼은 그 신분이 천하고 성품이 용렬하기 때문입니다.”
“서얼은 왜 신분이 천하고 성품이 용렬한가?”
“비자(婢子)나 창기(倡妓)를 그 어미로 하여 태어난 경우가 많은 까닭입니다.”
“비자나 창기의 몸을 빌려 태어난 것이 서얼 본인의 죄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비자나 창기인 부녀가 천민을 상대로 해서라도 제대로 혼인하지 않고 서얼인 아들을 낳은 것이 부녀 스스로의 죄인가?”
나와 이세좌가 주고받는 문답이 계속 이어지는 동안, 편전 안에서는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우리 두 사람의 목소리 외에 오직 들리는 소리라곤 사관이 책장을 넘기는 소리뿐이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서얼인 아들을 낳게 한 죄는 그 아이의 아비에게 가장 크게 있지 않은가?”
내가 추궁하는 말에 이세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기 때문이다. 상전이 이불 속으로 끌어들이는데 안 된다고 반항할 수 있는 계집종이 존재할까? 손님이 올라타는데 밀어낼 수 있는 기생이 얼마나 있을까? 그걸로 먹고 사는데?
“여색을 탐한 죄는 그 아비에게 가장 크게 있건만, 아비와 적손들은 죄를 받지 않는데 왜 죄 없는 서얼 자손이 그 벌로 과거도 보지 못하고 평생 한을 품으며 살아야 하는가? 마땅히 서얼금고법은 폐지해야 한다. 적어도 면천된 서얼에게는 동등하게 등과할 기회를 줌이 옳다.”
올해도 며칠 안 남았다. 이 해가 다 가기 전에 이 문제는 끝을 본다. 개가금지법을 넘어뜨린 기세를 타고 끝장을 보겠다고 내가 단단히 결심한 만큼 이번에는 반대도 거셌다.
“전하! 적서의 차별이 적절히 유지되지 않으면 나라가 흔들릴 것입니다. 서자 주제에 재주가 있다 하여 적자를 능멸하는 풍조가 확산되면 어찌 아름다운 질서가 유지되겠습니까?”
대간 하나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었다.
“이 좆 같은 새끼들아! 니 좆이나 자르고 그따위로 지껄여라. 서얼이 더럽다고 욕하는데, 아무데나 싸질러서 그 더럽다는 서얼을 줄줄이 만든 네놈들 좆대가리가 좆나게 더 더럽다!”
욕을 뱉어놓고 나자 나 스스로도 아차 싶었다. 그동안 잘 참았는데. 젠장.
신하들 눈치를 한번 쓱 살피니 신하들도 당황한 모양이었다. 사관조차 방금 내가 지껄인 욕을 사초에 어찌 적을지 몰라 망연자실한 채 머뭇거리고 있었다. 난처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내가 먼저 얼른 본래 화제로 돌아가 입을 열기로 했다.
“어, 어흠. 어쨌든 서얼들에게 길을 만들어줌은 필요하다. 뛰어난 재주를 가진 서얼을 등용하지 않고 그저 서얼이라는 이유로 길을 막는다면, 불만을 품고 나라를 해칠 것이다. 이번에 붙잡은 도적의 괴수 홍길동만 하여도 그 홍가의 적손들에 비해 훨씬 뛰어난 인재가 아니냐?”
홍길동에게는 두 적형이 있었다. 큰형 귀동과 둘째형 일동은 벼슬을 했으나 그 아들들은 모두 벼슬을 하지 못했다. 딸이 숙의가 되었을 뿐.
“지략과 무재를 보건대, 홍길동은 벼슬길이 열렸다면 필시 무관으로 대성하였으리라. 허나 출사할 수 없으니 가산(家産)이나 관리하다가 도적질을 시작한 게 아니냐? 솔직히 말해보라. 그대들이 서얼허통을 반대함은 저들을 묶어놓고 집안의 잡일이나 시키려 함이 아니냐?”
그뿐이 아니다. 한정된 벼슬자리를 놓고 다투는 양반계층 간의 경쟁 때문에 나중에 붕당이 일어나고, 당쟁이 심해지며 서얼에 대한 차별도 갈수록 심해진다. 적자들이 올라갈 벼슬도 부족한데 서얼들을 받아줄 리가 있겠는가. 다만 이 자리에서 그 이야기까지 하지는 않았다.
“전하, 허나 태종대왕께서 처음 정하신 법입니다. 개가금지법은 의론이 분분하였으되 성종께서만 강하게 주장하시고 그 선대 임금들께서 모두 주장하지는 않으셨으나, 서얼금고법은 성종께서는 물론 태종께서도 강력히 주장하셨기에 경국대전에 들어간 것입니다.”
영의정 한치형이 조심스럽게 나를 말렸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분명 태종께서 정하신 바를 무시할 수는 없다. 서자들 중 능력도 없고 품성도 나쁜 자들이 많이 있음도 알고 있다. 허나 적자라고 하여 그런 이들이 없느냐? 적자 중에도 역적이 있고, 적자이면서 망나니인 자들도 흔하지 않으냐? 지난 무오년의 역적들은 모두 서자였느냐?”
출세할 희망조차 없는 이들과 약간이라도 있는 이들은 다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사회적 반발을 무릅쓰고서라도 서자들에게 문이라도 열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과인은 앞으로 그 출신이 서자라 하여도, 벼슬길을 막지 않겠다. 다만 중신들이 우려하는 바를 일부 감안하여, 문과에 응시하고자 하는 이는 3년 동안 변방이나 수군에서 군역을 치러 어미의 신분에서 오는 오욕을 모두 씻어낸 뒤에야 할 수 있도록 하겠다. 어떠하냐?”
군역을 3년이나 지운다고 하면 애초에 포기할 자들이 많을 게다. 하지만 하려고만 하면 절대 불가능한 게 아니고, 진정 서얼이라는 신분을 벗어나고 싶다는 본인의 의지에 따라서는 충분히 가능하다. 그리고 군공을 세우면 얼마든지 단축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대들은 질서를 뒤집고 서자가 적자를 능멸하는 일이 생길까 우려하는데, 적서가 완전히 같을 수는 없다. 가문을 잇고 제사를 지냄은 적자의 일이고, 서자는 이를 도울 뿐이다. 서자가 적자를 무시하려든다면 마땅히 법으로 엄히 다스릴 일이다.”
이 정도까지는 양보한다. 왕위도 적자인 대군이 우선적으로 계승하니, 가문을 잇는 일도 적자가 우선할밖에.
“전하, 급한 일이옵니다.”
밖에서 무슨 내용인지 몰라도 전갈이 왔다. 잠시 편전 밖에 나갔다 온 도승지가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도승지는 무슨 일인가?”
“그것이, 저…난적 홍길동의 일로 의금부에서 심문하던 엄귀손이 죽었사옵니다.”
“무엇이? 내가 절대 죽여서는 안 된다 하지 않았느냐!”
엄귀손은 충청도 홍천 출신으로, 용력이 강해 당상관까지 지낸 무관이다. 하지만 원래 탐욕하고 비루한 성격이라 비난을 많이 받았으며, 본래 재산이 거의 없었는데 지금은 서울과 고향에 각각 저택을 짓고 곡식을 수천 석이나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엄귀손은 도적떼와 한패가 분명하기에, 그 연루된 바를 다 캐낼 때까지 절대 죽여서는 안 된다 하지 않았느냐? 장살시키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토록 강조했는데!”
“그것이, 장살이 아니라 합니다. 의금부에서는 분명히 그동안 사정을 두어 매를 쳤고, 오늘 심문을 재개하려고 옥문을 여니 피를 토하고 죽어 있었다 하옵니다.”
의금부 안, 그것도 바깥사람이 쉽게 드나들 수 없는 뇌옥 안에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
직감적으로 느낌이 왔다. 누군가가 입을 막기 위해 엄귀손을 죽인 것이다. 당장에 불호령을 내렸다.
“찾아라! 분명 흉수가 손을 쓴 것이다. 분명히 매를 치면서 사정을 두었는데도 죄인이 피를 토하고 죽다니, 될 말이냐?”
으으, 묵은 숙제를 다 풀면서 며칠 안 남은 올해를 깔끔하게 마무리하려고 했더니 이놈의 홍길동 건이 발목을 잡는구나. 누가 이런 짓을 벌였는지, 잡기만 하면 끝장을 내 줄 테다! 감히 임금이 잡아놓고 있는 죄수를 멋대로 죽이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