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851
2부 62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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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복은 데려온 시종에게 도움을 받아 옷을 껴입고 막사를 나섰다. 다이샨이 막사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째 일어나시는 데 기운이 없으십니다. 역시 동녀를 집어넣어 회춘을 시켜드려야 기운이 나시겠습니까, 대감?”
“뭐 그럴 것까지는 없네. 간밤에 술이 좀 과했을 뿐이니.”
명군이 심양성을 비우는 준비 기간으로 잡은 지난 사흘 동안, 누르하치는 밤마다 술잔치를 열었다. 심지어 총독 형개 이하 심양을 지키던 명나라 장수들과 회담 종료 직후 심양성 내로 숙소를 옮긴 웅정필, 원숭환과 이항복까지 그 자리에 초대했다.
당연하게도 형개 이하 장수들은 그 초청에 응하지 않았다. 웅정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원숭환만은 그 초대를 받아들여 누르하치의 진중에 술을 마시러 왔다. 그리고 취해서 뻗지도 않고 쌩쌩한 몸으로 심양성으로 돌아갔다가 다음날 다시 찾아왔다.
“그래도 그 젊은 친구 덕분에 내가 눈치를 안 보고 놀러 올 수가 있었지.”
이항복은 아직 젊은 원숭환이 누르하치 앞에서 뭔가 실수를 범하지 않는지 살핀다는 핑계로 함께 찾아왔다. 심양에 있던 다른 장수들은 철수 준비를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었고, 웅정필은 누르하치 앞에서 허리를 굽히고 전하라 부르기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대신 편하게 대화하기는 좀 어려우시지 않았습니까?”
“편한 대화는 지금 하면 되지 않는가.”
매일 건주 진중에 머물면 당연히 웅정필이 의심한다. 그래서 오늘 딱 하루만 꾀병을 핑계로 여기서 잤다. 젊은 원숭환을 사흘이나 데리고 다니려니 도저히 못 견디겠더라고 하면 적절한 핑계가 될 터이다.
“원 군관은 그동안 헛되이 술만 마시지는 않았네. 술자리에서 오가는 대화와 행동을 세심히 살피면서 건주 수뇌부가 어떤 성품인지, 장기(長技)는 무엇인지 등을 조사하는 것 같더군.”
원숭환은 다이샨보다 한 살 어린 갑신년(1584) 생으로 올해 스물셋이다. 유생이면서도 평소 군무에 관심이 많았고, 양응룡의 난을 진압하러 온 조선군을 본 일을 계기로 조선에서 벌어진 왜란에 관해서도 책을 구해 볼 정도였다.
“그 군관은 광동 사람이라지 않았습니까? 경인란록은 도성에서만 간행했다고 알고 있는데, 그게 광동까지 흘러갔는지요?”
“정식으로 간행된 경인란록을 본 건 아닐세. 본인에게 들으니, 조보를 모아 철해서 책으로 엮은 판본을 보았다 하더군.”
매일 전국에 뿌려지는 조보가 수만 부다. 그러다 보니 이를 모아서 철하여 책으로 만드는 이들이 드물지 않다. 그 유통 상황까지 나라에서 다 살피기는 어렵다.
“개중에서도 조보에서 읽은 덕풍부원군의 위업에 크게 감명받았다고 하더군. 그리하여 과거 준비를 계속하는 대신 스스로 군영에 들어가 군관이 되었다 하네. 다만 일신상의 무예는 별로 뛰어나지 못해서 아직 별로 출세하지 못했다 하네.”
명나라에서도 무과를 거치지 않아도, 신분이 낮아도 하급 무관 자리 정도는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자리에서 공을 세워 출세하자면 엄청난 전공을 세워야 한다. 개인의 무예가 매우 뛰어나지 않다면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행동거지를 보면 무척이나 영민하고 현명한 사람일세. 이번에 돌아가면 필시 위에 있는 높은 이들의 눈에 들어 중책을 맡을 인물일세.”
“겨우 소기가 말입니까? 아무리 윗전에게 잘 보인다 해도 총기 정도 아닐지요.”
명나라에서 총기(總旗)는 군사 50명을 거느린다. 조선군에서 1개 소대를 30명으로 잡으니, 조선군 소대장보다는 명나라 총기가 거느리는 병력이 많으나 중대장보다는 적다. 조선군 1개 중대는 125명이다.
“자네보다는 내가 더 오래 살면서 사람을 많이 보았지. 원 군관은 분명히 출세할 사람일세. 적어도 총병 이상 올라갈 걸세. 대국이 그때까지 존속한다면 말이지만.”
“대감께서는 그전에 대국이 망하리라고 보시는 겁니까?”
“일반론일 따름일세. 어찌 배신으로서 불충하게 그런 언급을 입 밖에 내겠는가.”
이항복은 주상께서 장차 계획하신 건주 입관 계획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존재가 원숭환, 웅정필 두 사람이리라고 보았다. 사실상 다이샨과 같은 세대니까 말이다. 하지만 드러내놓고 ‘그자들이 입관에 장애가 된다’고 할 수는 없다. 다이샨이 누구에게 누설할지 알 수 없으니까.
“황제께서 붕어하시면 황태자께서 즉위하실 것이고, 그 뒤에는 다시 황태손께서 즉위하시어 자자손손 이어가시는 것이 천하의 이치가 아니겠는가. 물론 그 천명이 다른 곳으로 넘어가지 않는다면 말이네만.”
“저는 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는데, 황태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부황에 비하면 아주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군주의 재목일세. 황상이 셋째 황자를 지나치게 총애하여 책봉을 미루는 바람에 스무 살이 넘어서야 황태자 책봉을 받았고 제위 승계를 위한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어떤 문제점이 나라를 옥죄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지.”
장차 다이샨이 건주왕 자리에 올랐을 때 마주할 상대기도 한 명나라 황태자 주상락(朱常洛)은 다이샨보다 한 살 위로, 역시 같은 세대다. 세자 이성은 주상락보다 열 살 위라, 나이로는 한참 앞서는 셈이다.
“황상의 보령이 겨우 마흔넷밖에 안되시니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황태자가 제위에 오르게 되면 대국은 체제를 정비하고 지금보다 더 안정된 상황을 만들 걸세. 물론 대국에서는 환영할 일이겠지만 우리에게는 조금 괴로워질 수도 있음이야.”
지금이야 명나라가 조선을 위한 아주 고마운 물주 노릇을 해주고 있다. 건주도 마찬가지다. 신나게 쥐어 터지고도 반격도 제대로 못 하는 먹잇감 신세다.
하지만 황태자는 다를 거다. 지금 황제처럼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로 조선에 은혜를 베풀어주는 대신에 부황이 내준 빚을 받아내려고 들 가능성이 훨씬 크다. 조선군을 데려다가 써먹는 대신 명나라에서 정예군을 제대로 양성할 테고 말이다.
“그리고 나면 옛날 당나라가 그랬듯이 주변국들을 하나씩 쳐서 무릎을 꿇리겠다고 나설지도 모르지. 물론 덕이 있는 황제라면 안 그러겠지만.”
“그럴지도 모른다는 사실만으로도 저희로서는 무척 큰 위협이지요.”
다이샨은 이항복의 장인 권율의 집에서 여러 해를 살았다. 그렇다 보니 이항복과도 평소에 자주 접했다. 이항복을 정식으로 스승으로 모신 건 아니지만 그 제자들인 최명길, 이시백 등 젊은 문사들과도 잘 어울렸다.
자연스럽게 이항복의 사상에도 영향을 많이 받았다. 지금 건드리기 껄끄러운 핵심을 피해서 장래 천하의 추이에 관해 편안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이다.
“나라가 위태로워질 수 있음을 뻔히 알면서 어찌 덕이 있는 황제가 제위에 오르기만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우리 스스로 가진 힘으로 어떤 상황에건 대처할 수 있어야겠지요.”
“내 생각도 그러하네.”
이항복은 천천히 다이샨의 얼굴을 훑었다. 한동안 못 만나는 사이 제법 원숙해졌다. 입에서 나오는 말도 공허한 읊조림이 아니고 확신에 찬 의지가 내비쳤다.
과거 한양에 머무를 때의 다이샨은 역시 애송이였다고 할 수 있었다. 이것저것 배운 지식은 많았지만 경험이 부족했다. 건주로 돌아와 정치와 전쟁에 뛰어들어 실권을 행사하면서 비로소 원숙하게 다듬어졌다고 할 수 있겠다.
“그대의 부친은 이제 왕호를 받고 요동을 얻은 것으로 만족할 셈인가?”
“아닙니다. 건주국왕은 명나라에서 책봉 받은 왕호일 뿐이지요. 아버님께서는 황제께 받은 왕호와 별개로 스스로 만주의 ‘한’을 칭하기로 하셨습니다.”
이항복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질문이 이어졌다.
“칸을 칭하려면 원 태조(칭기즈칸)의 혈통을 이어야 하지 않는가?”
칭기즈칸의 후예인 보르지긴 씨, ‘황금 씨족’이 아니면 몽골의 대칸을 칭할 수 없다. 과거에 토목보에서 명군을 격파한 오이라트 출신 에센 칸이 대칸의 자리에 오르기는 했으나, 반발을 사서 부하들에게 곧 살해당했다.
“그건 상관없습니다. 아버님, 아니 아바마마께서는 만주의 한이 되시려는 거지 몽골의 칸이 되시려는 게 아니니까요.”
편하게 대화하던 다이샨이 급히 고개를 저으며 표현을 정정했다. 이항복은 물론 그 자신도 누르하치를 왕으로 칭하는 일이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이항복이 웃었다.
“그래, 아바마마라. 그렇지. 책봉을 받았으니까. 그러면 나도 이제 자네에게 세자 저하라고 받들어 모셔야겠군.”
“농담 마십시오. 제가 어찌 감히 대감께 존대를 받겠습니까? 대감께서는 실로 저를 가르친 스승이나 다름없는 분이신데 말입니다.”
다이샨이 얼굴을 붉히며 두 손을 내저었다. 그때 심양성 쪽에서 나팔소리가 크게 울렸다.
“오, 드디어 성문이 열리는 모양이군.”
심양성 서문인 영창문(永昌門)과 남문인 보안문(保安門)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지난 사흘 동안 떠날 준비를 마친 명나라 군사와 백성들이 남부여대하고 성문을 나서기 시작했다.
“옛날이었다면 그대들이 저 대열을 급습했을지도 모르겠군.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아닌가.”
“간단히 포로와 재물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저희 건주도 이제 평범한 도적 떼가 아닙니다. 책봉까지 받은 군왕으로서 어찌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더구나 대감께서 여기 서서 이렇게 보고 계시는데, 감히 무도한 짓을 할 수는 없지요.”
“허허, 그렇군.”
철수하는 명나라 군민(軍民)을 공격하면 당장은 주머니가 두둑해질지 몰라도 장차 조선 및 명나라와의 관계는 완전히 끊어진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고 황성평에 있는 조선군이 당장에 허투알라로 짓쳐들어올 게 뻔하다.
“아바마마께서는 칙사와 약속한 바를 지키실 겁니다. 요서를 넘보지 않고 요동을 평온하게 다스리는 데 진력하실 것이고, 조공을 성실히 바치겠으며, 할하 원정을 감행하실 겁니다. 이는 제가 확실히 보장할 수 있으니, 대감께서도 안심하십시오.”
“믿겠네.”
두 사람은 잠시 더 한담을 나누었다. 그때 성문 쪽에서 명나라 기병 일군(一群)이 이쪽으로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도 막아서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곧 이항복 앞에 도착했다.
“누군가 했더니 낙 부총병이 아니오. 무슨 일이시오?”
부총병 낙상지(駱尙志)는 본래 요양 사람으로, 이씨 일가를 위해 일하는 장수 중 하나였다. 예전 을미동정 때 이여백과 함께 일본에 가서 이항복과 얼굴을 익혔고, 이여송을 따라 몽골 원정에 나섰다가 패잔병을 수습해 돌아오기도 한 숙장이다.
황명 때문에 이여백이 죽었을 때는 낙상지도 크게 분개했지만, 그렇다고 건주로 넘어가지는 않았다. 자기 휘하에 거느린 몇몇 군사들과 그 가족들만 데리고 형개에게 합류, 북경에서 올 원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에는 원군 대신 철수 명령을 받았지만.
“도독 대인을 모시러 왔습니다. 함께 요서로 떠나셔야 하지 않습니까.”
낙상지는 말에서 내려 이항복에게 귀환을 재촉한 후에야 다이샨을 향해 몸을 돌리고 가볍게 예를 올렸다. 순서가 바뀐 데다 왕자에게 올리는 예라고 보기엔 태도도 허술했지만, 다이샨은 굳이 이를 트집 잡으려 하지는 않았다.
“그렇지. 하지만 성내에 있는 군민이 모두 나오면 칙사께서 어차피 건주국왕께 하직 인사를 드리러 오실 게 아니오? 책봉식도 해야 하고. 본관도 그때 함께 돌아가면 될 듯하오.”
“그러십니까, 알겠습니다.”
다행히 이항복이 하루를 보낸 막사 주변에는 요양에서 새로 귀순한 옛 요동군 출신 군사는 없었다. 그자들이 있다가 형개와 만났다면 분위기가 다소 험악해졌으리라.
“고향을 떠나려니 낙 부총병도 감개가 무량하겠소. 어디, 요양에 얽힌 옛이야기라도 나한테 들려주지 않겠소?”
이항복이 낙상지에게 이야기를 시키는 사이 다이샨은 살짝 자리를 피했다. 명나라 장수하고 같이 있어서 지금 딱히 득을 볼 일은 없으니 말이다.
– 27 –
성문을 나서는 명나라 군사와 백성들의 대열은 온종일 이어졌다. 군사 4만에 백성 3만이나 되는 숫자가 심양을 떠나야 했으니, 해가 질 때까지 성문이 열린 채 닫히지 않은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대들이 가는 길을 우리가 굳이 호송할 필요는 없겠지?”
“저희 군사들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후위를 맡아서 마지막으로 성문을 나선 사람은 칙사 웅정필 자신이었다. 웅정필은 심양성을 떠나는 마지막 사람이기를 스스로 자처했다. 그리고 부사 원숭환 및 시종 몇 사람만 거느린 채 와서 누르하치를 정식으로 건주국왕으로 봉하는 책봉식을 올렸다.
“천천히, 안전하게 돌아가기를 빌겠네. 그럼 다음에 또 보세나.”
“건주왕께서도 평안하소서.”
책봉식을 마친 웅정필 일행이 마지막 인사치레를 하는 동안에 심양을 떠나는 명나라 백성들의 행렬은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 누르하치는 석양을 향해 꿈틀거리며 전진하는 한인들의 대열을 향해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맡겨 두는 것뿐이다.”
옆에 있던 측근 몇 사람은 누르하치의 언급을 확실히 들었다. 그리고 주군의 다짐에 호응해 모두 함께 소리 없이 웃었다. 그깟 한인 백성 3만 따위, 잠시 명나라 영토에 맡겨 둬도 된다. 훗날 때가 오면 거둬오면 그만이다. 그동안 새끼를 쳐서 숫자도 더 늘어 있을 것이다.
“나를 따르라! 입성한다!”
명군은 떠나면서 성문을 닫지 않았다. 누르하치는 측근 장수들과 정예 병사 5천을 거느리고 보무당당하게 남문인 보안문을 지나서 성내로 들어갔다. 성안에는 고려인과 여진인, 몽골인을 합해서 대략 3만 명이 남아있을 터였다.
“이곳 심양을 성경(盛京)으로 개칭하겠노라.”
심양의 중심은 심양위지휘사(瀋陽衛指揮使)가 사용하던 관저다. 그 대청 한가운데 우뚝 선 누르하치가 건주국왕으로서 첫 번째 왕명을 부하들에게 내렸다.
“또한, 허투알라 대신 이곳 성경을 새 도읍으로 삼는다. 다만 정식으로 수도를 옮기는 때는 이 관저를 허물고 새 궁궐을 건축한 뒤가 될 것이다.”
건주는 이제 ‘위(衛)’로 지칭되는 일개 부족이 아니다. 엄연한 왕국이니만큼 위엄을 제대로 세울 수 있는 궁궐이 필요했다.
“그리고, 새로 얻은 요동 전역에 명을 내려 고려인이 몇 명이나 되는지 파악하라. 그리고 모두 살던 곳에서 끌어내어 정료우위 구련성으로 모으도록 하라!”
정료우위(定遼右衛)는 요양에서 관할하던 위다. 봉황성에 치소를 두고 건주를 비롯한 여러 여진 세력으로부터 조선으로 가는 육로를 보호했지만, 북경에서 한양을 오가는 사신과 교역이 모두 수로를 택하게 되면서 중요도가 급격하게 떨어졌다.
구련성(九連城)은 정료우위가 관할하는 국경의 성채로, 조선 의주부(義州府)와 맞닿아 있는 사실상 유일한 명의 영토다. 하지만 이곳 역시 육지로 오가는 사행이 끊기면서 예전과 비교해 무척 쇠락해 있다.
“전하, 구련성에 명나라 군사들이 남아있을 텐데 그건 어찌 처분하시겠습니까? 해안을 따라 금주위로 가라고 보내주시겠습니까?”
“호호리, 분명히 말해두지만 나를 전하라고 부르지 말라. 너희는 나를 한이라고 칭해야 할 것이다.”
누르하치는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신하들이 자신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부터 먼저 확실히 정했다. 그리고 나서야 질문에 답했다.
“만약에 구련성에 도망치지 않은 명군이 남아있다면, 일단 한군팔기로 귀순하기를 권하라. 하지만 거부하면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쏘아죽이고 시체는 압록강에 던져버려라. 그런 놈들은 없었던 거다. 알겠나?”
“예, 한.”
조선 측이 감시하지만 않는다면, 누르하치는 귀찮은 일을 감수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전부 도망치고 없었다고 하면 그만인데, 왜 퇴로까지 보장해 주면서 신경을 써야 한단 말인가.
“앞으로 몇 년은 요동 지배를 다지면서 힘을 비축하도록 하자. 새로 얻은 30만 백성을 모두 우리 백성으로 받아들이는데도 시간이 필요하니까.”
탈출을 허용한 건 심양에 사는 한인들뿐이다. 하지만 조선의 눈치를 살피느라고 머뭇거리는 동안 요서로 도망친 자가 많았고, 요양 함락 후에 도망친 자들도 많다. 누르하치는 이런 수를 고려해서 요동 인구를 30만으로 잡았지만, 어쩌면 더 적을 수도 있다.
“한, 고려인을 굳이 전부 조선에 넘겨야 하겠습니까? 돌려받을 포로 숫자에 맞춰서 적당히 내주셔도 될 듯합니다. 당장 우리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짧게 볼 게 아니다. 조선에서 우리가 원하는 만큼 왜병과 화약을 받으려면 우리도 주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괜히 재다가 조선왕에게 미운털이 박히느니, 우리가 먼저 통 크게 선사하고 돌아올 답례를 기다리는 편이 낫다.”
누르하치는 이런 문제로 조선왕과 거래를 시도할 생각이 없었다. ‘전하께서 알아서 처분해 줍시사’고 맡기는 편이 훨씬 낫다는 걸 그동안의 경험으로 익히 알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