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853
2부 63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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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용산에 있는 명군 군영에서 조촐한 잔치가 열렸다. 모든 장수와 군사들에게 술과 고기가 넉넉히 주어졌음에도 분위기는 전혀 흥겹지 않았다.
“유 총병, 내 술 한잔 받으시오. 일이 이렇게 되어 내가 다 미안하오.”
“아닙니다, 전하. 전하께서는 소장과 소장이 거느리는 군사들에게 할 수 있는 모든 배려를 하셨습니다. 저희에게 미안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유정의 눈에는 핏발이 서고 눈두덩이는 퉁퉁 부어 있었다. 이항복에게 명나라 사정을 듣고 며칠 내내 한숨도 자지 못하고 밤새 울어댄 흔적이다. 옆에 늘어앉은 유정의 휘하 장수들도 그다지 좋은 안색은 아니었다. 다들 낯빛은 창백하고 표정은 어두웠다.
“그대들이 적에게 굴하지 않고 용전했음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건만, 조정에서는 간교하고 음흉한 자들이 그대들에게 죄를 묻자 한다니 어찌 답답하지 않을 수가 있겠소. 과인이 나서서 옹호하고 싶어도 간신들 때문에 천자께 그 뜻이 닿지 않으니 슬플 따름이오.”
말이 좋아 간신들 탓이지, 실제로는 만력제 본인이 빡쳐 있다. 경략 양호는 완벽했던 자기 계획에 손을 대서 망가뜨렸고, 다른 일선 장수들은 알량한 목숨을 건지겠다고 도망을 쳤다. 그 죄를 황제가 어떻게 용서한단 말인가?
그걸 빤히 아니 조정 신하들은 연신 황제의 비위를 맞추는 상소를 올리고, 그나마 피해자를 줄이기 위해서 모든 책임을 양호와 이씨 일가에게 집중시키고 있다. 명령에 따라 싸우다 죽은 나머지 장수들이라도 구하기 위해서다.
“소장도 마 선무사와 함께 최후까지 싸우다 죽었어야 했습니다. 살아남아 무슨 영화를 길게 누리겠다고 빠져나왔다가….”
“그대가 끝까지 싸우려고 했음은 내가 아오. 하지만 천병 본진이 무너진 데다 우리 군사가 독자적으로 적을 치러 나서기도 어려웠으니 어찌 그 뜻을 이룰 수 있었겠소.”
유정을 주저앉히느라 애 좀 먹었다. 유정은 겨울 동안 10여 차례나 내게 글을 올려 건주를 칠 원병을 내달라고 졸랐고, 나는 명군과 협공하지 않고 우리만 나가면 소용이 없다고 애써서 달래야 했다.
“처음에 소장은 정병 수십만을 거느리고 계시면서도 군사를 일으키지 않으시는 전하를 보고 서운함을 금치 못하였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알겠습니다. 전하께서 노력하여 대군을 내보내 적을 치셨다 해도, 황성에서는 호응하지 않았으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유정이 탄식했다. 나를 비롯해 주변에 앉은 이들은 모두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황상께서 이번에 노추에게 왕호까지 내리신 것을 보니, 조정 전체가 간적의 흉계에 넘어가 저들을 편들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지난번 싸움이 아무리 무모하고 어리석었다 하나,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소장뿐 아니라 용전한 군사들까지 처형하리라는 공고가 있었겠습니까?”
자기 한 사람만 처형되는 거라면 유정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귀국할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자기뿐 아니라 함께 사지를 헤쳐나온 군사들까지 죽게 되리라는 말을 이항복에게 듣고 나서는 귀환하려는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군사들은 두고 가더라도 저는 귀국하여 황제 폐하께 칼을 받아야 죽어서 요동에서 쓰러진 장졸들을 볼 낯이 있을 듯합니다. 전하께서는 부디 제가 대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배를 내어주시옵소서.”
“군주가 잘못된 판단을 내릴 때는 거스를 수도 있어야만 진정한 충신이 아니겠소? 육가가 말하기를, 군주의 옆에 붙어 교언영색으로 눈과 귀를 가리고 작당하여 현혹하는 자들이야말로 간신이라 하였소. 지금 양호와 이씨 일가를 벌주자는 자들이 바로 간신이 아니고 무엇이오?”
육가(陸賈)는 초한쟁패기에 한고조 유방을 따르던 신하 중 한 사람이다. 유방의 측근 중에서 ‘유일한 문장가’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문장에 뛰어나고 말재주도 좋았다. ‘말을 타고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말 위에서는 천하를 다스릴 수 없다’는 말을 처음 한 사람이 바로 육가다.
“그대는 황상께서 사면을 행하시기를 기다리며 잠시 쉬고 있는 것이 진정한 충이라고 보오. 다만 도성을 오가는 칙사나 대국 상인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하자면 그대와 그대가 거느리던 군사들을 모두 지방으로 내려보내야 하는데,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구려.”
유정은 일단 대구로 간다. 아무래도 지방군 중에 가장 전력 보강에 신경을 써야 할 지역이 경상도니까 말이다. 명나라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조식 계열 향군장들이 많은 곳이라서 좀 부딪힐 수도 있지만, 유정 개인은 인품이 훌륭한 장수니까 잘 받아들여질 거다.
다른 군사들도 모두 유정과 함께 보내기로 했다. 삼남 각지에 분산해서 보낼 경우, 귀향이 좌절되어 자포자기한 군사들이 무뢰배가 되어 민폐를 끼칠 우려가 있다. 도성에서도 이놈들은 여진병들을 상대로 여러 번 폭력사태를 일으켜서 진압에 애를 먹게 한 전과가 있다.
남쪽에서 똑같은 일이 터지지 않게 하려면, 휘하 병사들을 장수들이 통제할 수 있도록 유정 이하 전원을 한곳으로 보내야 한다. 지휘계통이 살아있어야 질서도 유지되니까.
지금 생각하고 있는 이주 예정지는 대구성 남쪽이다. 3천이나 되는 군사들을 대구성 안에다 정착시킬 수는 없으니, 대구성 남쪽 벌판에 마을을 아예 하나 새로 건설할 생각이다.
“그대들을 이 나라에 두자면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소. 내 녹을 받고 내 기(旗)를 받들자면 마땅히 내게 신종(臣從)하고 내 벼슬을 받아야 하는데….”
유정이 갑자기 의자에서 내려가 무릎을 꿇었다. 다른 장수들이 황망히 그 뒤를 따랐다.
“그것만은 용서하소서. 전하께서 베푸신 크신 은혜는 평생 잊지 않을 것이나, 소장은 황제 폐하의 신하가 되기로 맹세한 몸입니다. 충신은 두 군주를 섬기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차마 그 명은 받들 수 없습니다. 부디 지금의 신분 그대로 머물도록 허락하소서.”
그럼 상하 관계가 골치 아파지는데…유정은 정3품에 해당하는 총병이다. 이건 조선 품계로 따지면 정1품 정승에 해당하며, 도성 바깥에는 유정만큼 높은 사람이 없다. 대구 관리들 쪽에서는 날벼락이 떨어지는 셈이다.
“알겠소. 다만 우리 사정상 그대의 직위에 맞게 대우할 수 없음은 양해해주기 바라오.”
다만 이렇게 솔직하게 나오는 게 차라리 나은 점도 있다. 거짓으로 진심을 속이다가 나중에 뭔가 사고를 쳐서 내 뒤통수를 갈기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물론입니다, 전하. 허나 소장이 거느린 장졸 중에서 조선에 귀부하고 싶다고 나서는 자가 있으면 구태여 막지 않겠습니다. 당당히 본향에 돌아갈 수 없다면 여기 눌러앉겠다는 자들을 어찌 막겠습니까. 아직 출사하지 않은 소장의 아들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낯선 곳에서의 기약 없는 삶이 힘겨우면 그럴 수도 있겠지. 정착을 선택한 천병들이 우리 조선 백성들과 화합하여 잘 지낼 수 있도록 그대들도 힘써 주기 바라오. 그런데….”
내 시선이 진양옥을 향해 돌아갔다. 사천병 3천 중에 유일한 여자이면서 또 중전의 친구가 된 여장군이다.
“그대는 어찌하기로 마음을 먹었느냐? 원한다면, 그대 한 사람 정도는 어떻게든 고향으로 돌려보내 줄 수 있다. 부군의 시신을 담은 관과 함께 말이다.”
진양옥은 여자다. 다시 말하면, 지금 입고 있는 전포를 벗고 여자 옷을 입는다면 크게 눈에 띄지 않고 사천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마천승의 시신이 든 관이야 어떻게든 둘러대면 그만인 것이고.
“원한다면 어떻게든 돌아가도록 해주겠다. 어서 말해 보아라.”
주산진을 오가는 선편을 이용하면 상해로 가는 건 쉽다. 거기서 장강으로 오가는 오씨 상단 상선을 타면 사천으로 직행한다. 여자 한 명과 시종 몇 사람 정도는 티도 안 난다.
미리 마음을 정하고 있었던 듯, 진양옥은 파촉 방언으로 서슴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통역을 맡은 묘노를 통해 돌아오는 대답은 뜻밖이었다.
“제 부군과 저는 일군(一軍)을 이끄는 장수입니다. 장수 된 자로서 거느린 군사들을 버리고 가는 일은 생각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우리 마씨 집안이 거느린 군사 2천을 이 동쪽 땅에다 버리고 저 혼자 사천으로 간다면, 죽은 부군이 관을 열고 뛰쳐나올 것입니다.”
시체가 관을 열고 뛰쳐나오다니, 강시라도 된단 말인가? 비유 참 거시기하네.
어쨌든 진양옥은 차분한 태도로 귀국을 거절했다. 자기도 다른 군사들과 함께 대구로 가서 터를 잡겠다면서 말이다. 마천승의 시신은 어쩔 생각이냐고 묻자 또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대구에 가서 양지바른 곳에 시신을 묻고, 사천의 흙을 가져다 봉분을 쌓고 사천의 나무를 가져다 그 옆에 심겠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대나무를 심어 사천의 풍경을 만들겠습니다.”
사천의 대나무 숲이라면 판다가 사는 곳이지. 양응룡의 난 때 이항복이 데려온 판다는 지금 응방에서 잘 지내고 있다. 좀 외로워하는 듯하기는 하다만, 큰맘 먹고 짝을 구해주려고 해도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라서 말이다.
판다와 달리 원숭이들은 너무 많아져서 골치다. 무슨 새끼를 그렇게도 잘들 치는지. 원숭이 따위를 잡아먹을 수도 없고….
“알겠다. 필요한 땅을 내어줄 터이니, 묘소를 만드는 일에 아쉬움이 없도록 하라. 외수사에 명하여 사천에서 흙과 나무도 구해오라 하겠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진양옥한테는 나중에 열녀문이라도 세워줘야겠군. 이제 남쪽으로 이주하고 나면 내가 다시 볼 일은 없어 보이니, 나중에 성이한테 챙기라고 해야겠다.
– 30 –
조선 도성에 온 지도 벌써 반년이 되었다. 그동안 이덕형의 본가에 머무르면서 바깥 외출을 삼가던 홍타이지는 유정이 지휘하는 명나라 군사들이 영남대로를 따라 대구로 떠나는 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비로소 자유롭게 도성을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마음이 풀리나?”
옆에 선 이항복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홍타이지가 웃으며 답했다.
“물론입니다, 부원군 대감.”
홍타이지가 지금 이덕형의 집에 머물기는 하지만, 요즘은 이항복과 어울릴 때가 더 많았다. 이덕형은 영의정이다 보니 아무래도 처리할 업무가 더 많은 탓이다.
오성부원군 이항복은 명나라에서 돌아온 뒤 군자감(軍資監) 도제조를 맡고 있다. 군자감은 호조 예하에 있는 관청이지만, 군사들에게 지급하는 급여와 군량을 관리하는 중요한 기관이다 보니 정1품 도제조를 두어 맡게 했다. 다만 평시에는 그리 일이 급하지 않다.
“그동안 오도리 군관인 척하고 다니느라 고생이 많았네. 자네는 죽었다고 돼 있긴 하지만, 혹시라도 들켰다가는 재미없는 일이 생길 테니 말이지.”
사천병들은 도성에 머무르는 몇 달 동안 여러 번 난동을 일으켰다. 매번 상대는 경군에서 복무하는 여진인 군사들이었다. 도성 백성들에게는 행패를 부리지 않았으나, 여진인만 보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몇 번은 칼부림도 벌어졌다.
“차라리 요동군이었으면 상대를 잘 구분하니까 괜찮은데, 사천 구석에서 온 놈들이다 보니 누가 우리 편인지 제대로 모른단 말이야. 머리 깎은 것만 보면 복수한답시고 달려들었으니.”
“졸지에 여진병들만 날벼락을 맞았지요.”
지금 도성에 있는 여진군은 기병으로만 6천 기 정도 된다. 숫자로만 보면 사천병보다 훨씬 많지만 수백 개나 되는 부락에서 응모한 탓에 응집력은 매우 약하다. 오도리도 보통 하나처럼 지칭하지만, 실상은 동청례의 오도리를 중심으로 한 여러 친조선 부족을 가리키는 통칭이다.
그렇다 보니 패싸움이 벌어지면 십중팔구는 사천병들이 이겼다. 여진병들은 자기하고 다른 부족 출신이 사천병들에게 둘러싸여서 몰매를 맞는 장면을 보면 바로 뛰어들어 합세하는 대신 군기대를 부르러 갔다. 결과적으로는 그게 더 나은 일이긴 했지만.
“그래도 오도리는 해를 안 입었지. 남만갑을 입고 다니면 여진족이 아닌 줄 알고 사천병이 건드리지 않았으니까.”
한 달 남짓 계속되던 사천병들의 난동은 결국 상감께서 사천병들이 성내에 출입하지 못하게 한 뒤에야 가라앉았다. 물론 여진족 출신 군사들은 용산에 있는 천병 군영 가까이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자, 구경을 마쳤으면 가보게나. 오늘도 이조참판 집에 간다고 했지?”
“예, 대감.”
고개를 숙여 인사를 마친 홍타이지가 말에 올랐다. 그가 입은 호복(胡服)은 도성에서 하도 흔한 것인지라, 주변에서 눈길을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서 오시오, 김 공. 모처럼 가벼운 차림이구려.”
“천병이 떠난 덕분에 겨우 철갑을 벗었습니다.”
이조참판 김류는 십자가를 목에 걸고 반갑게 손님을 맞았다. 천주교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이라면 언제나 방문을 환영하는 바다.
“경징아, 가서 차를 내라 하거라.”
“예, 아버님.”
사랑방 구석에 앉아서 성서를 필사하던 청년이 부친의 명을 받고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김류가 홍타이지에게 아들을 소개했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못 봤으리다. 내 맏아들인데, 기축년(1589)생이라서 올해 열여덟이오. 그대가 임진생이라 하였으니 그대보다 세 살 위구려.”
“앞으로 형님으로 모셔야겠군요.”
홍타이지가 웃으며 말하자 김류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대는 공식적으로 존재를 드러내지는 못하고 있으나 사실상 건주의 왕자가 아니오. 그대가 청한 탓에 나도 말을 놓고 있기는 하지만, 법도대로 하자면 나도 그대에게 대감이라고 칭하며 고개를 조아려야 하거늘 어찌 내 아들에게 호형(呼兄)하라고 하겠소.”
누르하치는 정식으로 건주국왕으로 책봉을 받았다. 처음 정여립을 통해서 그 소식이 도성에 전해졌을 때만 해도 아직 공식화되지는 않았지만, 이항복이 돌아오자 확실히 홍타이지는 건주 왕자로서 대우를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본인이 극구 그런 취급을 사양했다.
“저는 죽은 것으로 하고 명나라 조정의 눈길을 피하고 있습니다. 그런 제가 어찌 조선에서 왕자 대접을 받겠습니까? 그저 이제까지 해왔듯이, 조선을 흠모하여 북에서 찾아온 건주 청년 ‘김태극’으로 대해주시면 됩니다.”
“허허, 참. 그래도 그게 아닌데.”
과거 볼모로 왔던 다이샨은 한자로 쓴 자기 이름을 조선식으로 읽은 ‘김대선(金代善)’이라는 이름을 썼다. 김씨 성은 여진족은 금나라의 후손이라는 데서 땄다.
홍타이지는 자기 이름을 한자로 쓴 ‘황태극(皇太極)’에서 ‘황’을 빼고 ‘김태극’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조선에서 신분이 좀 높은 이들 중에 세 글자 이름을 쓰는 사람이 별로 없을뿐더러 ‘황’자는 황제를 뜻하는 글자이므로 이름에 쓰는 것을 무엄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대가 말하는 바가 틀린 것도 아니니 나는 말을 놓겠네만, 내 아들에게 형이라고 부르며 존대하지는 말아 주시오. 겨우 세 살 차이를 가지고 형이라 존대하는 것도 우스우니.”
“그럼 그러지요, 참판 나리.”
홍타이지가 수긍하자 김류가 다소 안도하며 교리서를 집었다. 그리고 홍타이지 앞에 책을 펼치며 다소 미심쩍은 듯이 중얼거렸다.
“나로서는 그대가 스스로 나를 찾아와 교리를 배우고 싶다 한 일이 주님의 안배하심이라고 느껴지오. 저 먼 북방까지 성자님(聖子, 예수)의 사랑을 전파하게 하시려는 주님의 깊은 뜻이 있었기에 그대를 내게 보내주신 것이지.”
“실로 그러할 것입니다.”
홍타이지가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하지만 김류의 표정은 개운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런 생각도 드오. 그대가 천주의 가르침을 알고자 하는 것이, 신앙을 받아들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우리 조선이 그러하듯 선교사들을 건주에 받아들여 서양 문물을 직접 받아들이고자 하는 술수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든단 말이오.”
홍타이지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하지만 마침 그때 김류의 아들 김경징이 문을 열고 직접 차를 담은 쟁반을 들고 들어오는 바람에,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느라 김류는 홍타이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럴 리가요. 저는 그저 천주교의 가르침을 접하고 궁금증을 느꼈기에 좀 자세히 배워보고 싶을 뿐입니다.”
“알겠소. 자, 경징이 너도 거기 앉아라. 너도 곧 견진성사를 받아야 할 때가 되었으니 다시 한번 교리를 기초부터 접하며 마음을 닦는 거다.”
“예, 아버님.”
김경징은 차분하게 차 석 잔을 주전자에서 따른 뒤에 홍타이지 옆에 앉았다. 두 젊은이를 앞에 둔 김류는 매우 차분하면서도 진지한 태도로 가톨릭 교리를 설명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