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856
2부 634화
– 1 –
가뭄이라는 것은 이 한반도에서 살자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숙명인 모양이다. 작년 병오년(1606)에 시작된 가뭄은 올해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기우제를 더 지내야겠습니다. 부디 윤허하소서.”
조정에서 가뭄 대책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간만에 중추원에 들렀더니 중추원에서도 가뭄과 기우제 타령을 한다. 당연히 내 반응도 까칠해진다.
“작년에도 지낼 수 있는 만큼 지내지 않았느냐? 그리했는데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다른 조치는 할 만큼 했다. 경범죄자를 석방하여 전가사변도 줄였고 ? 중범죄자는 얄짤없다 ? 수라상도 간소하게 했다. 나도 하루 한 끼는 고구마만 먹는다. 치맥도 끊었다.
하지만 이건 다 쇼다. 기우제 역시 마찬가지다. 뭔가 노력하기는 했다는 심리적인 만족을 줄 뿐, 실제로 비가 오게 하는 데 아무 효과가 없다. 그저 낭비, 헛수고일 뿐이니 더 나쁘다. 그러니 기우제를 더 많이 지내자는 소리를 또 들은 내 태도가 냉소적일 수밖에 없다.
“제물을 더 거창하게 준비해 봐야 백성들에게 고통만 끼칠 뿐이다. 마음으로서 비는 정성이 부족했다면 이는 제사를 맡은 관원들한테 문제가 있는 것이니, 이는 내가 윤허하고 말고 할 게 아니지 않으냐? 제물을 많이 마련해서 제사를 더 지낸다고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원칙적으로 하자면 관(官)에서 지내는 제사는 관에서 비용을 내서 준비해야 한다. 중앙에서 기우제를 열면 호조에서 내는 돈으로 제수(祭需)를 준비하고, 지방 관청은 자체적으로 보유한 토지에서 나오는 수입이나 거둬들인 조세 중 지방에 남은 유보분을 쓴다.
문제는 가뭄 때문에 줄어든 전세 수입이다. 수확량이 격감했는데도 전세를 감면해주지 않을 도리는 없고, 전체적인 조세 수입은 대략 3할 정도 줄어들었다. 그 타격은 지방 관청이 훨씬 더 클 수밖에 없다. 중앙 조정은 관세나 외수사 등 다른 수입이 있으니까.
그동안 각 관청에서 비축해둔 전량(錢糧)이 없는 건 아니니만큼, 관청 운영에서 당장 문제가 생길 정도는 아니다. 문제는 기우제 같은 가외 활동을 벌이게 되면, 부족한 재정을 소모하지 않으려고 관할 지역에 있는 백성들을 쥐어짜게 된다는 거다.
“작년에도 인접한 고을에서 서로 호화로운 제상을 차리느라 경쟁을 벌였음을 내 알고 있다. 그 제물을 마련하느라, ‘하늘이 감동하려면 관민이 하나가 되어 성의를 보여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백성들에게 재물을 거둬들였음도 내가 안다.”
백성들이 정말 자발적으로 제물을 바친다면 하지 못하게 막을 건 없다. 문제는 어디까지가 자발적인 헌납이고 어디부터는 반강제적인 갈취인지 칼로 자른 듯 구분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제사를 많이 지내면 지낼수록 후자의 비중이 커질 수밖에 없다.
“또한, 이를 방관하면 할수록 겨우 근절시킨 잡세가 부활하는 계기가 되어버린다. 지금이야 제사 비용이라는 용처가 있지만, 훗날에 탐관오리들이 토색질을 벌이는 명분이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느냐?”
병신년(1596)부터 신축년(1601)까지, 6년 연속 가뭄이 들었을 때도 똑같은 문제가 있었다. 다만 그때는 가뭄이 전국적이지는 않았고, 만력제한테 전비(戰費)로 받아둔 은이 꽤 남아서 그 돈을 썼기 때문에 이런 문제까지 신경을 쓰지는 않아도 됐다.
“전하, 어찌 신들이 그 사실을 모르겠습니까? 물론 일을 맡은 관리들이 제사를 잘 지내고픈 마음에 다소 열의가 지나쳐 무리하는 사례가 있기는 하나, 거부하는 백성들에게 대놓고 돈을 거두지는 못합니다. 저희 향청에서 잘 관찰하고 있습니다.”
조선 초기 재지 사족들의 향촌 관리 기구로 설치된 유향소(留鄕所)는 몇 차례 혁파되었다가 부활하기를 반복하면서 관청(官廳)과 대비되는 향청(鄕廳)이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잡았다.
유향소가 없어졌다가 설치되기를 반복한 이유는 간단하다. 이것들이 지방관과 사이가 너무 좋아도 문제고, 너무 나빠도 문제였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에 유향소는 지방관과 사이가 나빴다. 고려 말기 혼란 속에서 지방은 한껏 자유를 누렸고, 수도에서 자기들한테 이래라저래라하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유향소가 한껏 기세를 세우니 수령의 권위가 떨어지고 중앙의 통제가 잘되지 않았다.
유향소가 수령과 친해지면 다른 방향에서 문제가 생겼다. 양자가 결탁하여 힘없는 백성들을 털어먹는 데 힘을 합쳤기 때문이다. 공식적인 권력을 쥔 지방관과 지방 사정에 밝은 향반들이 손을 잡으면 백성들은 버텨내는 재주가 없다.
이 폐단이 번갈아 나타나니 태종부터 성종까지 역대 임금들은 몇 차례나 유향소를 없앴다가 다시 만들었다가를 반복했다. 나 역시도 무종 시절에 금위사와 의금부로 대대적으로 향반들을 털었고, 그 뒤로 유향소가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었다.
단, 두 번째로 눈을 뜨니 경성군 덕에 유향소도 다시 살아날 기색을 차츰 드러내고 있었다. 허나 경성군이 육성한 사림 관료들이 퇴임하고 향토로 돌아가 제대로 유향품관(留鄕品官)으로 자리 잡기 전에 내가 눈을 뜨자 유향소의 재흥은 좌절됐다. 공식 명칭도 향청으로 낮아졌다.
“저희는 이 강산을 침노하는 왜적으로부터 피로써 고을을 지켰습니다. 어찌 한갓 지방관과 향리들이 전하의 뜻을 어기고 백성을 노략질하도록 놓아두겠나이까?”
지방관에게 눌려 단순한 자문기관, 향민들을 규찰하는 기관으로 전락하던 향청의 지위를 확 끌어올린 계기가 경인왜란이었다. 속오군을 이끌고 나선 향군장들 대부분이 향청에서 한 자리 맡은 향임(鄕任)들이었고, 전쟁을 치르고 나자 이들의 발언권은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이걸로 끝이 아니다. 5년 뒤 을미동정에도 일부 속오군이 참전했고, 다시 5년이 지난 뒤에 양응룡의 난을 진압하러 가는 의병 참전자도 다수였다. 세 번째는 아예 참가한 의군 대다수가 향반들이었다.
속오군도 어쨌거나 관군이니만큼 향군장이 사병을 갖게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들 다수가 몇 번씩 전장에 나가 얻은 전공으로 품계와 벼슬을 받아 현감이나 군수 따위는 발밑에다 두고 보게 된 경우가 허다했고, 중추원에서 발언권까지 얻었다. 당연히 위세가 강해질 수밖에 없다.
“그대들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제물을 더 마련하여 제사를 거창하게 지내자는 게 아니라면, 어떻게 기우제를 ‘더’ 지내자는 것이냐?”
횟수를 늘린다면 제수를 줄이는 보람이 없다. 한 번 제를 올리는 데 쓴 제물은 재활용할 수 없으니까. 더 많은 제관을 동원하여 절을 하게 한다면 그건 가능할 수도 있겠다. 고을 백성을 전부 끌어내서 절하게 한다거나 말이다.
“작년 가뭄이 하도 심했기에, 지금 기우제를 지내는 데는 대신들만이 아니라 무당과 도사, 불승, 심지어 남만승들까지 나서고 있다. 여기에 도대체 누구를 더 동원하라는 말이냐.”
대신들은 국가 주도로 지내는 국행기우제(國行祈雨祭)의 제관으로 나간다. 각 명산?대천?종묘?사직?북교의 용신들에게 지내는 복잡한 절차의 기우제다. 한 장소에서 최고 3제차, 즉 3번까지도 지내는 제사다.
무당이 기우제에 나서는 거야 뭐 설명이 필요 없겠고, 도사들은 소격서 소속이다. 중종 때 폐지된 소격서(昭格署)는 이쪽 세계에서는 멀쩡하게 유지되고 있다. 조선에서 별 인기가 없는 도교지만, 국초부터 유지된 기관이다 보니 경성군도 소격서를 폐지하지는 못했다.
절에서 기우제를 지내는 것도 뭐 자연스러운 일이고, 남만승들이 나섰다는 건 별일 아니다. 천주교 선교사들이 미사를 보면서 하느님께 ‘이 땅에 비를 내려주십사’ 하고 기원하는 기도를 올렸다는 이야기일 뿐이니까.
“이렇게 많은 이들이 기도를 올려도 아직 비가 내리지 않았다. 아낙네와 아이들까지 나서서 제를 올리게 하자는 말이냐?”
내 질문을 받은 중추원 판사 조헌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조헌은 중추원에서 세를 잡은 조식 계열이 아닌지라 중추원 영사까지는 오르지 못했다. 중추원에서 최고위직인 영사(정1품, 1명)와 판사(정2품, 2명)는 구성원 간의 호선으로 뽑고 내가 승인하는 형태다.
“전하께서 아직 지내지 않으셨습니다.”
“무엇이? 과인에게 직접 기우제를 지내란 말이냐?”
깜짝 놀란 내 눈을 보고도 조헌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늘에 성의를 보이려면 임금인 내가 기우제를 지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더불어서 조선 천지를 발칵 뒤집을 제안까지 내놓았다.
– 2 –
조헌이 내놓은, 그리고 중추원 지사와 동지사들 다수가 동의한 친행기우(親行祈雨) 주장은 조정을 완전히 뒤흔들어놓았다. 조선왕조 개창 이래 단 한 번도 없었던 전례였기 때문이다.
“과거 인종대왕 시절, 가뭄이 하도 심하여 친행기우가 논의된 적이 적어도 세 차례 있기는 하였습니다. 하지만 혹여 비가 내리지 않았을 시에는 문제가 크겠기에, 한 번도 실행에 옮긴 적이 없습니다.”
예조판서 홍진이 부들부들 떨며 설명했다. 굳이 끝까지 들을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 문제가 무엇인지는 굳이 듣지 않아도 알겠다. 임금이 나서서 직접 기우제를 올렸는데도 비가 내리지 않으면 왕의 권위가 떨어진다 이거겠지.”
“실로 주상 전하의 말씀이 옳으시옵니다. 또한 이제까지 한 번도 친행기우를 한 적이 없다 보니 그 예법도 수립되어 있지 않으며, 하늘을 대하는 것은 본래 천자만이 가지는 특권인데 번국인 우리 조선에서 과연 천제(天祭)를 지내도 되느냐 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소격서에서는 이미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있지 않으냐.”
“소격서에서 제를 지내는 제관은 품계도 없는 별관(別官)입니다. 그러니 제를 지낸다 해도 그 격은 천상의 잡신이지, 천제(天帝)를 상대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전하께서 나서서 제를 지내신다면 마땅히 천제를 상대로 하셔야 하는데, 이 어찌 우리가 가능하겠습니까?”
천제에 대한 제사는 천자인 중국 황제만 지낼 수 있다. 제후국인 조선에서는 천제에게 비는 제사를 올릴 수가 없다. 격에 맞지 않는 짓이다.
“신도 역시 중추원 판사 조헌이 올린 글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는 재야에서 임의로 올린 허언이라 할 수 있으니, 진지하게 따르기에는 너무도 곤란합니다.”
조헌은 그저 내 앞에서 입으로만 떠든 게 아니었다. 상소문을 써서 조정에 올렸고, 편전을 발칵 뒤집어놓은 이 논란도 그 상소문에서 비롯되었다.
『…작금의 이 가뭄을 해소하자면 전하께서 직접 하늘에 청하여 비를 내리게 하시는 수밖에 없사옵니다. 그 연유를 따지면 이러하옵니다.
첫째, 본래 하늘에 직접 비는 것은 천자가 하는 일이옵니다. 하지만 지금 북경에 좌정하고 있는 천자께서는 천하 만민을 돌보는데 아무 관심이 없으십니다.
천자께서는 우리 동방은 물론이고 자기 자녀인 중원 백성조차 힘써 돌보려 하지 않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어찌 우리가 각자도생을 고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둘째, 본래 이 삼한 땅은 중원과는 별도로 천제를 지내왔습니다. 전조(고려) 때만 해도 개성 남문 밖에 환구단(?丘壇)을 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이는 태종대왕 시절까지 유지되던 관습입니다. 세조대왕께서도 잠시 재개하셨으나 곧 폐쇄하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본래 예로부터 유지하던 환구단을 닫고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으로 개명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대국의 요구와 이를 맹종한 일부 선비들의 상소로 인한 것인데, 그 두 가지가 이미 다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국에서는 우리에게 관심이 없고 대국을 맹종하는 선비들도 없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전하께서는 풍운뇌우단이라 바뀌어 불리는 옛 환구단을 다시 되돌리시고, 그 격에 맞추어 개축한 후 그 위에서 하늘에 제를 올려 비를 기원하소서. 그래야 실로 하늘에서 우리 조선을 어여삐 여겨 비를 내리시리라 사료되옵니다….』
“중추부 판사 조헌이 올린 상소는 그 내용이 아주 틀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대국을 섬기는 제후국임은 분명하며, 우리가 직접 하늘에 제사를 지내다가 들통난다면 매우 좋지 않은 결과를 얻을 것입니다.”
명나라 쪽 입장을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예조판서 홍진은 친행기우에 동의하기를 망설였다. 그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건 칭제건원만 안 할 뿐이지 사실상 황제국이 되자는 소리니 말이다. 이때 대사헌을 거쳐 형조판서로 올라온 정인홍이 나서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통(正統) 14년(1449)에 가뭄이 심하니 당시 영의정 황희가 세종대왕께 아뢰기를, 공자와 자로의 예에 따라 원단에서 친히 하늘에 기도하시라 하였습니다. 이때 대왕께서 이를 말리며 말씀하시기를, ‘제후로서 하늘에 제를 지냄은 참람하다 할 수 있다’라고 하신 바 있습니다.”
음, 정인홍도 일단은 사대부인데다 조헌과 다른 조식 계열이다 보니 천제까지 동의하기에는 좀 어려운 모양이다. 더구나 이쪽 세계에서도 조선 최고의 성군인 세종대왕까지 거론했으니, 당연히 반대겠지. 이어서 하는 말은 또 누구를 예로 들려나.
“하오나 세종대왕께서 계시던 시절에는 천자께서 온 천하 백성을 어여삐 여기시어 최대한 열심히 돌보셨으니 제후로서 감히 하늘에 제를 올림이 참람한 행동이 맞았습니다. 허나 지금 중원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천자께서 천자로서 행동하고 계십니까?”
격한 표현에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 칠순이 넘은 정인홍 본인은 양응룡의 난에 출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곽재우를 비롯해 많은 동문이 명에 다녀왔다. 그리고 명나라가 지금 얼마나 엉망진창인지, 그들이 직접 보고 들은 바를 그대로 전했다. 당연히 평가가 하락할 밖에 없다.
“천자께서는 제대로 하늘에 제례도 지내지 않고 후궁에만 처박혀 계신다고 하니, 이럴 때는 우리가 임의로 제를 지낸다 해도 비례(非禮)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당장 우리가 살려면 해볼 수 있는 일은 무엇이건 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형판은 대국에서 이를 문책하면 무엇이라 답하려 하는가?”
“그야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랬듯이 잡아떼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매번 대국에서 우리 일에 개입하여 트집을 잡을 때마다 일단 부인하였으니 말입니다. 지난번 건주위(建州尉)의 일 역시 그리 처리하였으니, 환구단에서 천제를 올리는 문제도 그리하면 됩니다.”
뭔가 문제가 있을 만한 일이 생길 때마다 구라로 넘긴 건 실제 역사에서도 그랬으니까 그건 뭐라고 할 말이 없군. 내가 잠시 답을 망설이자 홍진이 나서서 이의를 제기했다.
“형판께서는 쉽게 말씀하십니다만, 건주위의 일은 건주위가 이미 본향으로 돌아가 도성에서 살지 않기에 쉽게 임기응변으로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허나 만약 대국에서 칙사가 오면 도성 한가운데 쌓은 환구단을 못 볼 수가 없을 것인데, 어찌 이를 숨기겠습니까?”
우거지상이 된 홍진은 계속 질문을 이어갔다. 정인홍은 태평하게 듣고 있었다.
“칙사가 올 때마다 환구단을 해체하여 숨겨두시렵니까? 그렇게 만들지 못할 이유는 없지만, 기껏 만든 환구단을 칙사가 올 때마다 숨긴다면 그 또한 우리 위세가 깎이는 일입니다. 벌써 없앤 지 200년 가까이 지났으니, 그냥 없는 채로 두어도 별문제는 없다고 봅니다.”
“그 문제는 간단합니다, 예판.”
기로소에 가도 무방할 나이에 현역으로 조정에 있는 정인홍이다. 그 기백을 상대할 사람은 많지 않다. 홍진도 마찬가지다. 걱정하는 소리가 그쳤다.
“당당하게 이야기합시다. 칙사가 따지면, 천자께서 대신 하늘에 빌어주시지를 않으니 우리 손으로 직접 제를 올렸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천자께서 본래 행하셔야 마땅한 책무를 다시 행하신다면 우리는 기꺼이 환구단을 다시 헐겠다고요.”
곧 다른 신하들이 뛰어들어 논전이 벌어졌다. 하아, 이거 나도 쉽게 뭐라고 하기 어렵구만. 이 논쟁이 올해 안에는 결론이 나려나 모르겠다. 이 친행기우 논란 때문에 미주 이민단 모집 문제까지 스톱돼 버렸으니.
이 분위기가 반전되려면 견서사 귀환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다. 과연 언제쯤이면 오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