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86
1부 086화
– 1 –
“시신을 처음 검안한 의금부 관원은 뭐라 하였나?”
“그것이, 제대로 만나보지도 못했습니다.”
포도대장 휘하 종6품 포도부장 박헌은 지금 의금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의금부 안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는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제 막 홍길동 일당을 완전히 소탕하고 청주에서 올라왔는데 쉴 틈도 없다고 생각하니 쓴웃음이 났다.
“의금부 내에서 일어난 일은 의금부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말라 하였습니다.”
“어허, 도성에서 일어난 범죄는 모두 우리 포도청에서 관할해야 하거늘.”
금상이 즉위한지 3년째 되던 해, 도성 안 5부에 각각 하나씩 있던 포도장 직위를 없애고 도성 전체를 통합해서 관할하는 포도청을 만들었다. 종2품인 포도대장이 도성 전체의 치안 유지를 책임지고 있었다.
“의금부는 특별한 곳이고, 죄인을 잡은 경험도 많으니, 그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일일이 포도청에 맡기지 않아도 충분하다는 겁니다. 이치를 따져도 말이 잘 먹히지를 않습니다.”
“판의금부사 대감이 그리 명하셨다던가? 아니면 지의금부사 대감이?”
지금 판의금부사는 우의정 이극균이 한참 전부터 맡아 수행하고 있다. 의금부 수장인 판의금부사는 원래 겸직이기 때문이다. 부책임자인 지의금부사는 노사신의 아들 노공필이 최근에 임명받아 맡고 있었다.
“모르겠습니다. 그저 관원들이 문을 굳게 닫고 버티고 있을 뿐이옵니다. 포도대장 영감이 써 주신 공문을 들이밀어도 막무가내입니다. 소문이 퍼질까봐 그러는 게 아닌가도 싶습니다.”
“거참.”
알 수 없는 일이다. 의금부는 임금이 직속으로 거느리는 수사기관이다 보니, 뭔가 임금의 의중이 작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간다 해도 열어주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사건이 일어난 게 이틀 전인데, 이제까지는 아무도 의금부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종사관 나리께서도 가봤지만…포도대장께서 직접 찾아갈까 하는 의논까지 하고 계십니다.”
“아니다. 포도대장께서 나서신다면 의금부를 찾아갈 게 아니라 지의금부사 대감 정도는 직접 찾아가 따져야 하지 않겠느냐.”
종2품이면 영감이다. 영감 소리를 들으며 대우받는 포도대장이 기껏해야 4,5품밖에 안 될 의금부 관리들을 직접 만나 따진다면 체통이 서지 않는다. 박헌과 같은 휘하 관리들이 최대한 해보고 안 된다면 그제야 위쪽 우두머리들 간에 대화를 하는 게 맞는다.
“문을 여시오! 포도청에서 왔소!”
뒤를 따르던 포교 오진헌은 안절부절 못했지만 박헌은 태연했다. 포도청 생활 20년, 그동안 별의별 사건을 다 겪었다. 양반네들이 집안에서 은폐하려던 사건을 파내기도 했고 차마 남들에게 드러내 말하지 못할 만큼 끔찍한 사건도 봤다. 의금부와 얽힌 적은 없었지만.
“돌아가시오. 포도청에 와 달라 청한 적 없소.”
잠시 후 굵직한 목소리가 나타나 답했다. 대문은 여전히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았다.
“국법이오. 상감마마께서 정하신 지엄한 국법이 있는데 어찌 이리 무례하게 구는 게요? 어서 문을 열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게요!”
상대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잠시 뒤에야 목소리가 돌아왔다.
“혹시 주상께서 내리신 교지라도 들고 오셨소?”
“그렇지는 않소. 허나 주상께서 정하신 뜻을 수행하고 있음은 확실하니, 어서 문을 여시오.”
잠시 또 침묵이 찾아왔다. 조바심이 났는지 뒤에 있던 오진헌이 떨면서 속삭였다.
“나리, 왕명을 함부로 사칭했다가 들통이라도 나면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왕명을 사칭한 적 없다. 그저 상감의 뜻을 따르고 있다 했을 뿐, 어명으로 왔다고 한 적은 없지 않느냐. 설사 저들이 트집을 잡아도 책임은 내 몫이니, 오 포교 자네는 아무 걱정 말고 조용히 있기나 해라. 그리 담이 작아서 어떻게 포교 노릇을 하겠느냐?”
박헌은 느긋하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의금부 내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데도 정문 일대를 오가는 백성들의 모습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긴 저들에게는 의정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귀에 들어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들어오시오.”
사람 하나가 간신히 들어갈 만큼 문이 살짝 열렸다. 박헌이 앞서 들어가자 오진헌이 떨면서 따라 들어왔다. 뒤에서 문이 닫혔다.
“어서 오시오. 귀하는 포도청에 속한 누구시오?”
눈앞에 수염을 보기 좋게 기르고 풍채가 좋은 사내 하나가 서 있었다. 마른 몸에 수염은 매우 짧게 다듬은 박헌과는 상당히 대비되는 용모였다.
“본관은 포도대장 영감 예하에 있는 포도부장 박헌이라 하오. 그대는 누구시오?”
박헌은 상대의 물음에 지체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굳이 시간을 끌 필요가 없었다. 상대도 선선히 대답했다.
“본관은 의금부 경력 정호찬이오.”
– 2 –
누구든 살인사건은 단독으로 수사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개인적인 감정이 개입된다거나 실수를 할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서다. 꼭 다른 관청 사람이 한 번 더 수사를 해야 한다. 박헌이 노리고 들어간 부분이 여기였다.
“이름은 많이 들었소. 홍길동을 추포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하더군.”
“말하기 부끄러운 일입니다.”
정호찬이 나이는 좀 더 아래였지만 의금부 경력은 종4품, 포도부장은 종6품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확실히 직급 차이가 났다. 홍길동을 잡은 공으로 가자될 수도 있겠지만 정호찬보다 높아지기는 힘들 터였다. 정호찬은 직책은 종4품이지만 품계는 종3품 상품, 중직대부니까.
“도적떼에 직접 들어가 기밀을 캐내다니, 쉽지 않은 일이오. 본관으로서는 엄두도 나지 않는구려. 마침 저쪽 뇌옥에 홍길동이 있으니, 한번 만나보시겠소? 아무리 자복하라 해도 통 입을 열지 않으니, 그대가 한번 얼굴을 비춰 봄도 나쁘지 않을 듯하오.”
“좋습니다. 저를 만나면 혹 홍길동이 뭔가 입 밖에 내놓을지도 모르지요.”
두 사람은 뇌옥 입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 의금부에서는 의도적으로 모든 감방을 볕이 들지 않는 지하에 만들어놓고 있었다. 투옥된 모든 죄수는 외부인과 접촉할 수 없고, 오직 의금부에서 제공하는 식사만 먹으면서 심문을 받는다.
“듣자하니 의금부에서는 소뼈로 끓인 국물에 밥을 말아 죄수들에게 준다던데, 사실인지요?”
“풍문에 불과하오. 소뼈는 어쩌다 한 번 주는 거요. 대개는 나물국으로 하루 한 끼요.”
“그렇다 해도 우대로군요. 죄인들에게 어이 그런 좋은 대우를 하시는지요? 일반 옥사(獄舍)에서도 밥 따위 주지 않고 그 가족들이 옥바라지를 하게 하는데 말입니다.”
“전하께서 명하시기를, 의금부에 수감된 이들은 모두 중죄인이니 외인(外人)을 절대 접하지 못하게 하라 하셨소. 옥바라지도 금지하시고, 대신 굶주려 죽지 않도록 의금부에서 밥은 주라 하셨기에 관원들 밥을 나눠주고 있소. 그래야 장을 맞아도 잘 버틸 테니까.”
“그건 그렇지요. 죄인은 마땅히 그 죄상을 밝혀 그에 합당한 벌을 받게 해야지, 때려죽일 필요는 없으니 말입니다.”
박헌 역시 기껏 잡아들인 죄인이 재판도 끝나기 전에 맞아죽어 버리는 허탈한 경험을 한 적이 몇 번 있었다. 분명 더 깊은 속사정이 있을 것이건만, 범인으로 지목된 당사자가 사망하면 재판은 대개 유야무야 끝나버렸다.
“여기가 홍길동이 있는 뇌옥이오. 자, 들어오시오.”
파수를 서고 있는 옥지기와 잠깐 대화를 나눈 정호찬이 횃불을 받아들고 손짓했다. 박헌이 뒤를 따라가며 흘깃 보니 문설주 위에 ‘도산(刀山)’이라고 적혀 있었다.
“훗, 설마 도산지옥의 그 도산은 아니겠지.”
박헌은 망설임 없이 어두운 계단을 내려갔다. 그 자신의 손으로 잡아넣은 홍길동을 만나기 위해서.
– 3 –
어두운 뇌옥 안에는 다른 죄수가 없었다. 홍길동 한 사람만이 벽 꼭대기에서 들어오는 실낱같은 햇볕을 받으며 앉아 있을 뿐이었다.
“건강하셨소, 두령.”
“네놈은 박가 놈이 아니냐. 부두령으로 올리려고 내가 열심히 키웠던.”
홍길동은 박헌을 보고도 별다르게 흥분하는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다. 그동안 받은 문초로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지만 딱히 화가 나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네놈이 관가의 끄나풀인 줄은 알았다만, 포도청 놈인 줄은 몰랐다. 역시 멍청한 충청감영 소속은 아니었군.”
“포도청 관원인 줄은 어찌 아셨소?”
“옥지기가 알려주더군.”
박헌이 정호찬을 돌아보며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경력 나리, 이 도산옥을 관할하는 옥지기가 지나치게 입이 가벼운 듯합니다.”
“동의하오. 바꿔야겠군.”
정호찬이 고개를 끄덕이자 박헌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제 다 끝났으니 웬만하면 불라는 대로 다 불지 그러시오? 여기를 벗어날 희망 같은 건 없소. 꼭쇠, 황두, 하림이 모두 다 잡혔소. 전부 내가 잡아서 충청감영에 넘겼단 말이오. 다들 충청감영에서 목을 잘라 기둥에 매달 거요.”
홍길동의 얼굴에서 약간 꿈틀거리는 기색이 느껴졌다. 하지만 입은 열리지 않았다.
“뒤에 계시는 그분을 믿소? 하지만 그분도 두령을 구하진 못할 거요. 상감께서 두령을 족치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계시거든. 자칫하면 그분도 상감이 내리시는 벌을 피하지 못할 거요.”
홍길동이 웃었다. 아주 자연스러운, 전혀 구석에 몰린 사람 같지 않은 웃음이었다.
“그분은 절대 다치지 않는다. 주상이 뭐라고 하건 말이지. 엄가 놈이 영원히 입을 다물게 된 이상, 그분을 건드릴 수 있는 자는 없다.”
박헌과 정호찬 두 사람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박헌이 천천히 말했다.
“그러기를 빌겠소. 두령이 처형되는 날, 인사는 드리러 가리라.”
“꼭 오게. 기미년 섣달 그믐날이니까.”
홍길동은 할 말은 다했다는 듯 눈을 감고 뒤로 몸을 눕혔다. 두 수사관은 조용히 몸을 돌려 밖으로 나왔다.
“확실히 그대가 있으니 입을 좀 열었군. 든든한 배후가 있음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동안은 그나마도 입 밖에 내지 않았으니.”
“저야 패거리 내에 있을 때 뒤를 봐주는 이가 있음을 홍길동에게 직접 들었으니까요. 그게 누구냐가 문제이겠습니다만.”
정호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임금으로부터 귀띔을 받은 바가 있었지만, 아무에게나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박헌이 입을 열었다.
“헌데 엄귀손이 죽었음을 저 자가 어찌 알았겠습니까?”
“그야 그 입이 가벼운 옥지기 탓이 아니겠소. 그 자를 그저 교체하는 정도가 아니라 잡아들여 문초해야겠소.”
“옥지기를 수감하라는 명을 내리시기 전에 한 가지만 더 확인시켜 주시지요. 엄귀손이 있던 뇌옥을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좋소. 따라오시오.”
두 사람은 몇 칸 떨어진 거리에 있는 다음 뇌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설주를 보니 여기에는 ‘발설(拔舌)’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의미를 깨달은 박헌이 헛웃음을 지었다. 앞서 들어간 정호찬이 손짓을 했다.
“들어오시오.”
문을 활짝 열자 뇌옥 안에는 다른 죄수는 없고 엄귀손의 시신만 홀로 눕혀져 있었다. 입가에는 피가 말라붙어 있고 두 눈은 퀭하니 뜨고 있었다. 아직 날이 추워서 시신은 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정호찬이 차분하게 설명했다.
“신주무원록에 따라 목구멍에 은비녀를 넣어두고, 입을 봉했다가 한나절 뒤에 꺼내보아 변색 여부를 확인했소. 역시나 색이 변하였소.”
“그럼 독을 먹은 것은 맞는군요.”
“헌데 무엇을 통해 독을 먹었는지 알 수가 없소. 옥리가 주는 국과 밥 외에는 먹은 게 없을 텐데, 같은 밥을 먹은 다른 이들은 아무도 중독되지 않았소.”
“소인이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뇌옥은 열려 있었다. 양해를 구하고 안으로 들어간 박헌은 조심스럽게 바닥에 깔린 짚더미 사이를 뒤지기 시작했다. 한 식경 가까이 꼼꼼하게 찾던 박헌이 바닥에서 엄지손가락만한 시커먼 덩어리를 주워들었다. 이빨자국이 선명했다.
“이겁니다.”
“그건…떡이 아니오? 피가 묻은?”
처음으로 정호찬의 표정에 흔들림이 왔다. 하지만 박헌은 여전히 태연했다.
“굳은 정도를 보면, 빚어낸 지 사흘쯤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갓 찐 떡을 들여와서 엄귀손에게 주었군요. 여기 드나들면서 엄귀손에게 음식을 줄 수 있는 사람…몇 명 안 될 겁니다.”
두 사람은 떡조각을 들고 뇌옥 밖으로 나왔다. 정호찬은 부하를 시켜 닭을 한 마리 가져오게 했다. 떡을 한 조각 떼어 먹이자 닭이 그대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정호찬이 혀를 찼다.
“등하불명(燈下不明) 이라더니 본관이 그 짝이군. 옥지기를 당장 잡아들여 문초해야겠소.”
“서두르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상한 낌새를 채면 뺑소니를 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