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867
2부 64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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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 몸이 무겁다. 시커먼 암흑을 헤치고 나가는 느낌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게 처음 겪는 상황이 아니다. 적어도 두 번 정도는 과거에 체험했다. 그게 언제인지도 기억났다.
‘무종 때…그리고 경성군 때?’
그래, 죽었…다가 살아났던 바로 그때. 처음 한 번은 엄밀히 말해 죽었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두 번째는 확실히 죽었다가 다시 깨어났다. 그때 이 암흑을 거쳤다.
처음에는 처음이라, 지난번에는 칼 맞은 뒤라 경황이 없어 그랬는지 순식간에 지나갔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암흑 속을 지나가는 그 감각이 손끝에, 아니 전신으로 한껏 느껴질 지경이다. 아주 짙은 안개 속을 걷고 있는 것 같다. 혹시나 하고 외쳐 보았다.
“상희야! 중전! 세자야! 상선! 내금위장! 게 아무도 없느냐? 제기랄…결국 또 죽은 건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발밑은 흙도 아니고 돌도 아니고 나무도 아니다. 푹신하다. 상황을 보니 여기가 어딘지는 분명했다.
“그럼 다음에 나올 게 누구일지도 뻔하겠군….”
큰 고통 없이 자다가 죽게 해준 건 감사해야겠지만 가족들에게 유언을 남길 틈도 주지 않은 건 너무하지 않나. 하지만 천녀에게 항의하려고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그 망할 년은 보이지 않았다. 지난번엔 분명히 뒤에서 나타났는데.
“이보시오! 천녀! 어서 나오시오!”
‘야 이년아, 당장 나와!’하고 소리치지 않는 건 내가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겠지. 하지만 몇 번을 소리쳐 불러도 천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참다못해 내가 직접 나서서 어둠 속을 더듬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서 나오시오, 천녀! 이번엔 또 일이 어떻게 되었…으아악!”
분명히 지난번에 여기 왔을 때는 어둠 속에 끝없는 벌판만 펼쳐져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내 몸은 분명 낭떠러지를 수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하다가 그만 정신을 잃었다.
진동과 굉음이 주변을 마구 뒤흔들었다.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평범한 연기가 아닌 화약 타는 냄새, 그것도 흑색화약이 아니라 현대식 무연화약 냄새다. 군대에서 사격할 때마다 맡은 바로 그거다. 그리고 뭔가 무거운 게 내 등을 내리누르고 있다.
이게 대체 뭐지 하는 순간 굉음과 함께 날아든 흙덩이가 뺨을 후려쳤다. 그제야 눈이 번쩍 떠졌다. 다음 순간 지척에서 또 한 번 굉음이 울리고 땅이 흔들렸다. 흙덩어리와 파편이 마구 날고 화약 냄새가 물씬 풍겼다. 이건, 이건 포격이다!
“으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는 순간 내 등에 얹혀 있던 무거운 짐의 일부가 툭 하고 옆에 떨어졌다. 고개를 돌리니 그건 피에 젖은 사람의 손이었다. 내 등에 얹혀 있는 무거운 짐은 사람이었고, 나는 시체를 업은 채 엎어져 있었던 거다. 또 한 번 비명이 터졌다.
당장 일어나서 내 몸 위에 있는 시체를 집어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사방에서 포탄이 터지고 있는데 그런 짓을 하는 건 자살행위다. 여기가 어딘지는 모르지만, 기껏 눈을 뜨자마자 죽고 싶지는 않았다.
등에 업은 시체를 엄폐물 삼아 필사적으로 땅바닥을 기었다. 10m쯤 떨어져 있는 교통호가 보였기에, 일단 거기까지만 가면 이 포격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살았다!”
간신히 교통호에 도착했다. 시체와 함께 안으로 굴러 들어가서 그대로 호 바닥에 늘어졌다. 잠시 숨을 돌리고 나서 시체가 된 이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그대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고맙네.”
자세를 보면 이 시체는 나를 구하기 위해 몸으로 나를 가린 게 분명했다. 누군지는 몰라도 감사할 이유는 충분했다.
“그런데 도대체 난 누구지…?”
새롭게 각성해서인지 몸은 확실하게 젊어진 것 같다. 팔다리를 움직여보니 큰 부상은 없다.
몸에 걸치고 있는 건 20세기 스타일의 모직 천으로 된 군복이다. 확실히 어디 군복인지는 모르겠지만 색깔은 회록색이고 가슴에는 봉황새 문양이 박혀 있다. 나와 함께 있던 그 시체도 같은 군복을 입었다.
내 허리를 보니 가죽 권총집을 차고 있다. 속에서 권총을 꺼내 보니 이것도 모양이 낯설다. 내 기억 속에 있는 어떤 20세기 권총과도 똑같지 않았다. 계급장은 분명 어깨에 붙어 있지만 이게 무슨 계급인지 알 수가 없다.
“군의병! 군의병!”
누가 내 옆에서 조선말, 아니 한국어로 소리치고 있다. 돌아보니 역시 나랑 똑같은 군복을 입은 병사 하나가 피투성이가 된 동료의 머리를 끌어안고 목이 터져라 소리치고 있었다. 모두 한국군이거나 여기가 한국 땅이긴 한 모양이다.
그에 답하듯 참호 저편에서 적십자 완장을 팔에 두른 호리호리한 병사가 뛰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달려온 군의병은 아직 앳된 소녀였는데, 급히 부상자를 응급처치한 뒤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잠시 눈이 마주치는 순간 섬?한 충격이 내 가슴을 엄습했다.
“사, 상희야!”
부상병의 피와 초연으로 얼룩진 군복을 입고, 피로와 슬픔으로 지친 얼굴을 보자 안타까운 마음이 북받쳐 올랐다. 하지만 내 애타는 목소리를 듣고도 상희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누구시죠? 혹시 저를 아시나요?”
“난 널 알아보는데 왜 넌 날 못 알아봐? 아, 그렇지! 너는 얼굴 그대로지만, 난 늘 얼굴이 바뀌었지! 나야, 나! 연산이라고! 잊었어? 아니면 혹시 내가 아는 그 상희가 아닌 거야?”
“연산!”
상희가 갑자기 달려들어 끌어안았다. 주변에서는 헤어진 애인이라도 만난 줄 아는지 야유와 욕설이 쏟아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주저앉아 울고 웃으며 감격을 나눴다.
“어떻게 여기 왔어? 전선 시찰 나온 거야? 소련군이 밀려와. 제발 여기 좀 철수해 줘!”
“잠깐잠깐. 내가 먼저 물을게. 지금이 언제야? 여긴 어디고?”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여긴 북만주 전선이잖아. 벌써 소련이랑 전쟁 시작한 지 2년째야. 이번에도 너 황족 정도는 되는 거지? 제발 서둘러! 포위당하기 전에 전부 후퇴해야 한다고!”
정신이 멍했다. 상희가 날 바로 못 알아본 걸 보면 내가 왕, 아니 황제가 아닌 건 분명하다. 지금 사진이 없을 듯하지는 않은데, 내가 황제라면 전국에 사진이 뿌려져 있었을 게 아닌가. 하지만 내가 황제 아닌 황족이라고 해도, 이런 최일선 참호에서 구르고 있을 것 같지는….
“왜 말이 없어? 빨리 근위병 불러! 어서 빠져나가자고!”
상희가 나를 마구 흔들었다. 가슴 속에서 뭔가 절그럭거렸다. 상희는 여기 신경 안 쓰는 것 같지만 나는 그 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이거 군번줄인가? 그럼 난 일반병? 장교? 하여튼 황족은 분명히 아닌 것 같다. 황족이 군번줄까지 걸고 이런 데서 구르고 있을 리가 없잖아.
이거 난감하네. 아무래도 이번 생은 틀린 것 같다고 상희한테 어떻게 말하지?
“상희야, 상희야. 잠깐 내 말좀 들어봐. 지금 아무래도….”
“듣긴 뭘 들어?”
전혀 전쟁터에서 들리는 것 같지 않은 부드러운 목소리. 눈을 번쩍 뜨니 익숙한 방 안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는 상희, 상빈 이씨 처소였다. 포탄이 비처럼 쏟아지는 북만주 전선의 참호 속이 아니었다.
“네가 자다 말고 갑자기 나랑 중전마마, 세자 저하를 찾더니 천녀를 부르며 호통을 치더라. 그러면서 마구 발버둥을 치다가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나한테 할 말이 있다잖아. 언제 깨우면 좋을까 당황하던 참에, 네가 조용해지니까 나도 조용히 대답해서 깨웠어.”
“그랬구나….”
온몸이 진땀으로 끈적거린다. 이건 방이 더워서는 아닐 것 같다. 잠시 기분을 추스른 뒤에 상희에게 꿈 이야기를 했다. 끝까지 들은 상희는 명쾌하게 결론을 내렸다.
“개꿈이야. 흉년 때문에 스트레스도 심하고, 다음 생은 어떻게 될지 불안하기도 해서 그런 꿈을 꾼 거야. 생각해 봐. 20세기면 지금부터 300년이잖아. 이번에 70년 만에 우리를 깨운 그 천녀가, 다음번 간격을 그렇게 멀리 띄울 리가 없잖아.”
“그건 그렇겠다.”
수긍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상희가 부드럽게 나를 껴안았다.
“그래도 그 꿈에서 한 가지는 마음에 드는데.”
“그 난장판에서 마음에 들 게 뭐가 있어?”
“깨자마자 헤매지 않고 바로 나 만났잖아. 매번 서로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몇 년씩 헤매야 했는데 그러지 않고 바로 만났다니 좋다.”
내가 개꿈 때문에 심란해하니까 이런 말로라도 기분을 풀어주려는 태도가 고맙다. 보답하는 의미로 나도 상희의 어깨에 두른 두 팔에 힘을 주었다. 그래, 이건 개꿈이야. 어쩌다 개꿈 한 번 정도 꿀 수도 있는 거지. 이걸로 뭐 나쁜 일이 생기기야 하겠어?
“전하! 급보이옵니다. 미주에서 귀환하던 보급선단 중 대선 1척이 침몰하고 백여 명이 넘는 인명을 잃고 말았다 하옵니다.”
“무엇이라!”
이런 제기랄! 이러려고 그런 꿈을 꾼 거였나!
– 24 –
이번에 돌아온 보급선단은 2년 전인 을사년(1605) 5월에 인디언들을 태우고 떠났던 함대다. 5백t급 갈레온 2척과 8백t급 갈레온 2척 해서 총 4척이었는데, 그중 8백t급 한 척이 필리핀에 도착했을 때 난파하고 말았다.
“대동양(태평양)을 건널 때 바람이 제대로 불지 않는 바람에, 예정보다 많이 늦어졌습니다. 그래서 물과 식량이 부족해지는 바람에 마닐라에 들러 약간 보급을 받고 오려고 하다가….”
함대를 지휘하던 수사 윤형욱은 배가 암초에 걸려 파선할 때 그만 바다에 빠져 실종되었다. 하필이면 난파한 배가 좌선인 공이안(恭而安)이었던 탓에 혼란이 바로 수습되지도 못했다.
“그래서 주변을 수색하고 생존자를 찾느라 현지에서 한 달을 허비했다고?”
“송구하옵니다.”
내 앞에 엎드린 수군 정령 박두성이 부들거리면서 떨었다. 공이안과 함께 돌아오던 8백t급 갈레온 불비(不比)의 선장으로, 윤형욱의 뒤를 잇는 차선임 지휘관이었다. 즉, 부사령관이다.
“잃은 사람의 수는 얼마나 되느냐?”
치솟는 화를 간신히 가라앉히면서 물었다. 그래, 첫 항해에서 알래스카에서 침몰한 소선 한 척만 빼고 무사히 돌아왔던 게 도리어 놀라운 일이었지. 필리핀 근해에서는 마닐라 갈레온도 종종 난파한다고 했으니, 경험이 부족한 우리 선원들이 사고를 당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남은 배 세 척과 선인들을 총동원하여 찾아서 시신 스물세 구를 건졌고, 인근 도서(島嶼)에 흘러간 사람 서른여섯을 구했습니다. 하지만 물에 흘러가 찾지 못한 이의 숫자가 총 여든여섯 명입니다. 수사와 감관이 모두 사라져 구하지 못했습니다.”
백 명이 넘게 잃었다니, 신음이 절로 나왔다. 그런데 보고 내용이 좀 이상했다. 스페인 당국 쪽에서 전혀 지원을 안 해 줬나? 우리 배랑 사람만 가지고 실종자 수색을 했다고?
“어찌 마닐라에 있는 서반아 관헌에게는 지원을 청하지 않고 너희끼리만 찾으려고 했느냐? 혹시 원조를 청했는데 저들이 거절했느냐?”
박두성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수사가 부재한 상황에서 신이 멋대로 나서서 외인(外人)에게 도움을 청해도 될지 판단하기 어려웠습니다. 훗날 저들이 이 일을 빌미로 우리 조정에 뭔가 부당한 요구라도 하면 큰일이라 여겼기에 저희 손으로만….”
“그런 판단은 그대가 할 것이 아니다!”
선교 문제 때문에 스페인과 우리 사이에서 조금 말썽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기빈 덕분에 그건 일단 가라앉았고, 마닐라와의 관계도 괜찮다. 그 정도 도움 요청은 충분히 해도 될 만큼 말이다.
“필리핀에는 수천 개나 되는 섬이 있습니다. 당장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주변 섬으로 흘러가 표착한 이들까지 찾아가 구해야 합니다. 우리 힘만으로는 애초에 그 일대에 있는 모든 섬을 샅샅이 뒤지는 게 불가능합니다.”
예조참판 이수광은 조정에서 필리핀 지리를 가장 잘 안다. 1차 견서사로 갔다가 돌아오면서 구리를 사느라 필리핀 각지를 누비고 다녔던 경험 덕분이다.
“나중에라도 서반아 총독부에 원조를 청해서 함께 수색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체면 때문에 사고가 났다는 말도 꺼내지 못하고 서둘러 돌아왔다면, 아니면 뭔가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면 절대 그대로 넘기셔서는 아니 될 일이옵니다.”
“예조참판의 말이 옳다. 우리 군사들의 목숨이 달려 있는데 그 정도 융통성은 있어야 할 게 아니냐? 당장 사람 수백 명이 바다에 빠져 없어진 상태인데, 바로 옆에 있는 이들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은 않고 정치적인 문제를 신경 써? 이런 주제넘은 자를 보았나!”
“그, 그것이 아니오라…실은 마닐라까지 구원을 청하러 갈 배와 사람으로 수색을 서두르는 편이 차라리 낫다 여겼기에….”
박두성은 시커먼 얼굴이 종잇장처럼 창백해져서는 비 오듯 땀을 흘렸다.
“네 이놈! 네놈이 감히 누구 앞에서 일구이언(一口二言)을 하느냐! 수사가 없어지면 네놈이 사고 책임을 져야 하겠기에, 어떻게든 수사 하나만 찾아서 책임을 피하려고 한 것이 아니냐?”
“아, 아니옵니다!”
바닥에 엎드린 박두성이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저놈, 아무래도 수상하다. 저건 어떻게 혼자 잘해보려다가 실수한 게 아니고, 뭔가 뒤가 켕기는 짓을 한 놈의 행동이다. 이건 단단히 뒤를 캐 봐야 할 일이다.
“병판! 당장 저자를 군기대 감방에 투옥하라. 그리고 엄히 문초하여 서반아 관헌을 찾아가 협력을 청하지 않은 진짜 연유를 진술케 하라. 그리고 귀환한 장졸 전원을 교동도에 머무르게 하여 육지로 나오지 못하게 하고, 출범할 때부터의 모든 상황을 진술케 하여 서로 대조하라!”
개선식을 거행하고 포상금을 듬뿍 받은 지난번 귀환 때와는 완전히 다른 대접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구린내가 너무 많이 나잖아.
“어명을 받들어 행하겠습니다.”
병조판서 홍여순이 바로 고개를 숙였다. 그가 보기에도 뭔가 수상쩍은 모양이다.
“덕진성에서 출발할 때 무엇을 얼마나 실었는지, 그리고 벽란도로 가지고 돌아온 양이 그중 얼마인지 파악하는 데 우선을 두어라. 수색이 부실한 원인이 거기 있을 수 있다.”
어쩌면 좌선이 좌초했다는 보고조차도 사실이 아닐 수도 있겠다. 설마 그렇기까지야 했을까 싶다만, 제대로 한번 캐보자. 숙련된 수사관은 군기대에도 많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