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874
2부 65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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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가뭄이 들고 나라 상황이 안 좋아도 군사력은 계속 유지한다. 유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 조선의 위상은 순전히 대포와 전함으로 유지하는 중이나 마찬가지다. 끊임없이 주변에 우리의 강성함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언제 두려운 존재에서 먹잇감으로 추락할지 알 수 없다. 도적질 한두 번은 골백번이 될 것이고, 곧 본격적인 침공이 뒤따르게 되리라.
“그러니 군사들에게 나가는 녹봉은 절대 밀리지 않게 하라. 흉년이라 저화 가치가 떨어지는 올해 같은 해는 안남미라도 추가로 지급해 주어라.”
조선이 망하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 중 하나가 임오군란이었다는 사실은 내 뇌리에 똑똑하게 박혀 있다. 나라에서 주기로 한 봉급을 제대로 안 줬을 뿐만 아니라 협잡질까지 했으니, 손에 무기를 든 병사들이 그걸 참는다면 그게 더 대단한 일이다.
“예, 전하. 군복을 입고 창을 든 자가 배를 곯는다는 말은 절대 나오지 않게 하겠습니다.”
이럴 때 중요한 역할이 군자감 도제조의 일이다. 군자감을 맡은 이항복은 전국에 산재하는 군량미 창고의 재고를 철저히 파악하여 분배 과정을 감독하고 호조에서 곡식이 들어오는 대로 신속하게 물량을 채웠다. 능력도 뛰어나고 군무에도 익숙하니 만사를 철저히 처리했다.
여기 훈련도감에서도 군사들의 얼굴에 굶주리는 기색은 없었다. 군자감에서 물자를 제대로 공급해도 부대장이 중간에 떼어먹으면 아무 소용이 없지만, 훈련도감 도제조를 맡은 이순신은 그런 것 없이 군사들의 급양에 소홀함이 없다는 증거였다.
“오늘 시범을 위해 모두 온 힘을 다하였습니다. 전하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은 보이지 않을 터이니, 어여삐 보아주소서.”
“그대가 관리하였는데 어찌 못난 모습을 보이겠는가. 내 기쁘게 보겠도다.”
군사들의 시범을 보러 따라온 중신들과 함께 단상 위에 올라갔다. 세자 성이도 내 옆자리에 함께 앉았다. 훈련도감 연병장에 정렬한 정예군사 3백 명이 일제히 군례를 올렸다.
“상감마마 천세! 천세! 천세!”
언제쯤 저 천세가 만세로 바뀌려나. 군례가 끝나자 인솔자 겸 오늘 시범 책임자인 서아지가 앞으로 나서서 고개를 숙였다. 저 친구도 이제 정4품 정령이다.
“전하 앞에서 검법을 시연하게 됨을 무한한 영광으로 여기옵니다. 오늘 선보일 검법은 본래 전 내금위장 임꺽정이 자연스럽게 구사하던 것을 다른 이들도 따라 배울 수 있도록 체계적인 검법으로 체계화한 것이오니, 그 위력이 본래만은 못 하나 무척이나 뛰어나옵니다.”
“그야 그렇겠지. 당연한 일이로다.”
임꺽정은 힘도 초월적으로 강하면서 스피드까지 겸비한 말 그대로 괴물이었다. 신체 스펙이 임꺽정보다 뒤떨어지는 일반인이 그만한 위력으로 검을 휘두를 수 있을 리가 없다. 일반인도 어느 정도 이상 힘을 쓸 수 있게 하는 게 교육과 훈련이지만 말이다.
“자, 시작해 보아라.”
“예, 전하.”
돌아선 서아지가 구령을 내리자 훈련도감에서 고르고 골라 뽑은 정예 살수(殺手) 3백 명이 일제히 환도를 뽑아 들었다. 아, 지금 조선군에서는 허리에 차고 다니는 모든 도검을 환도로 통칭한다. 조총수가 쓰는 날이 직선에 가까운 짧은 칼도, 기병들이 쓰는 신월도도 다 환도다.
자세를 잡은 살수 3백 명은 서아지가 외치는 구령에 맞춰 일제히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찌르고, 베고, 방어로 넘어가는 동작의 연결함은 무척이나 매끄러웠으나 개조(開祖)의 영향은 어쩔 수가 없는지 방어보다는 공격이 중심이 되었다. 전체 동작 중 공격이 7할은 되었다.
“무척이나 아름답사옵니다, 아바마마.”
“세자도 저 검법이 배우고 싶으냐?”
웃으며 농담처럼 받았다. 성이는 이장곤을 닮아서 체구가 꽤 건장하다. 이 녀석이 임꺽정의 검법…백정검법을 익히면 정말 원조 창시자인 임꺽정만 한 위력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네가 직접 검법에 능숙해질 필요는 없다. 하지만 알아볼 수 있는 눈은 있어야만 하느니라. 그래야 장차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알 수 있으니.”
군사훈련에는 표준 교범이 필수다. 그래야 농부 김씨도, 나무꾼 이씨도 필요할 때 군인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 그리고 통치자에게는 어떤 교범이 필요한지 파악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논어 안연편(顔淵篇)에 나오는 공자와 자공의 문답을 기억하느냐?”
“병(兵)과 식(食)과 신(信) 중에서 버려야 한다면 병과 식부터 순서대로 버리라는 무신불립(無信不立)의 고사 말씀이시옵니까? 아바마마.”
“그러하다.”
사실 안연편을 구성하는 문답 12개 중 자공이 등장하는 건 이거 하나뿐이다. 그리고 군비에 관해 언급한 것도 이거 하나뿐이다. 그래서 외우고만 있다면 기억해내기는 쉽다.
“믿음이 없다면 다른 어느 것도 존립할 수 없다는 말은 맞다. 하지만 셋 중 하나를 버려야 하는 상황이 초래되었다는 것 자체가 군주로서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쉴새 없이 일사불란하게 검법을 펼치는 군사들을 나란히 바라보면서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꽤 무거운 두정갑을 입고도 다들 몸놀림이 가벼운 걸 보니, 저 녀석들 모두 속에 붙은 철편을 제거하고 나온 모양이다. 이럴 때는 두정갑이 편하긴 하군.
“일찍이 사마양저가 천하수안 망전필위(天下雖安 忘戰必危, 천하가 평안해도 전쟁을 잊으면 분명 위태로워진다)라 하였다. 우리만 사는 세상이 아닌 이상 병을 포기할 수는 없다. 안팎의 사정에 맞추어서 그 규모를 늘리거나 줄이는 거야 가능하지만.”
춘추시대 최초의 전략가이자 명장으로 대접받는 사마양저(司馬穰?, 성은 田씨)의 현대에도 유명한 명언이다. 그런데 내가 이 말을 하자 세자도 같은 사마양저의 발언을 들어 화답했다.
“또한, 그 앞에서는 국수대 호전필망(國雖大 好戰必亡, 나라가 커도 전쟁을 좋아하면 분명 망한다)이라고 하였습니다. 외적이 쳐들어오면 철저히 응징하기를 망설이지 않으셨으나 절대 먼저 힘을 쓰지는 않으신 아바마마의 뜻을 소자도 잊지 않겠습니다.”
“그래. 우리의 힘은 우리의 사직과 백성을 지킬 정도면 족하니라.”
경인왜란 같은 대규모 전면전이 터질 일은 적어도 당분간은 없어 보인다. 일본도, 명나라도, 건주도 우리를 침략할 능력은 없다. 그러니 앞으로 상황을 살펴 군비를 줄이거나 지출 방향을 적당히 조절할 수가 있다. 자고로 과도한 군비도 나라를 망하게 하는 건 분명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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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감에서 택한 길일에는 다행히 눈은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매서운 찬바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오늘 날짜를 양력으로 따지만 12월 15일이니, 살을 에는 칼바람이 불고도 남는다. 내 뒤를 따르는 백관과 종친들도 모두 담비가죽 털옷으로 전신을 단단히 감쌌다.
“힘들구먼.”
기왕 하는 쇼, 제대로 정성을 보인답시고 경복궁에서 둔지산까지 아무것도 안 타고 걷기로 한 게 실수였다. 젊고 건강할 때였으면 반 시진(1시간)이면 너끈히 왔을 길이, 행렬을 이루고 온 탓도 있지만 1시진 꼬박 걸렸다.
“전하, 부디 이제라도 가마에 타시옵소서.”
“아니다. 정성을 보인다고 걷기 시작했는데 도중에 가마를 타면 백성들이 뭐라 하겠느냐? 조금만 더 가면 환구단에 도착하니 그냥 가겠다.”
가마든 코끼리든 타고 싶은 심정이야 나도 간절하지. 하지만 이건 여행이 아니다. 하늘에 잘못을 빌고 자비를 청하러 가는 길이다. 그런데 어떻게 팔자 좋게 가마나 타고 유람하듯 갈 수 있겠는가.
“환구단이 조금만 일찍 완공되었어도 전하께서….”
“되었으니 도승지는 아무 말 마라.”
장마철에 갑자기 쏟아진 폭우로 공사 현장이 무너지지만 않았으면, 예정대로 음력 9월까지 제단을 완성할 수 있었겠지. 그랬으면 이런 추위 속에서 기우제를 지내느라 고생하지 않아도 되었다. 가뭄은 해소하지도 못하고 피해만 입힌 어설픈 홍수 같으니.
하여간 공사가 완료된 건 음력으로 10월 말이 되어서였으니 도리가 없다. 폭설이 쏟아진다 해도 피하지 않고 제…아니, 폭설이 내리면 필요 없지. 하여간 이제라도 제사를 지내긴 해야 한다. 겨울 가뭄도 분명히 가뭄은 가뭄이니까.
“그런데 전하, 오늘 제례는 기우제가 아니라 기설제(祈雪祭)라고 칭하는 편이 도리어 도리에 맞을 듯하옵니다. 이미 11월에 접어들었는데 눈이면 몰라도 설마 비가 오겠사옵니까?”
“세종대왕께서 환구단에 제를 지내면 기우와 강설을 모두 비는 것이니 굳이 기설제가 따로 필요하지 않다고 하셨고, 성종대왕께서 국조오례의를 편찬하실 때도 기설제는 넣지 않으셨다. 기설제는 나라의 예법에 없는 제의니, 미리 정한 대로 기우제를 칭함이 낫다.”
고려 때는 기설제를 지내면서 도교의 신인 태일구궁(太一九宮)에게도 기도를 바쳤다. 조선 유학자들은 이 점을 싫어해서 기설제를 지내지 않았다. 그럴 이유가 없어서겠지만, 소격서가 살아있는 이쪽 세계에서도 딱히 기설제가 공식 의례로 부활하지는 않았다.
“기설제건 기우제건 이름이 무슨 대수란 말이냐? 하늘에서 뭔가 내리는 게 중요한 것이지. 비가 아니라 눈이 많이 내려도 도움이 되는 건 맞으니, 뭐든지 오기만 해주면 좋겠다.”
비가 제대로 오지 않은 지 벌써 3년이나 되었으니 제발 뭐라도 내려달라고 간구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과학적으로는 단돈 10원어치도 쓸모가 없는 짓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기우제라도 지내러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둔지산 밑에 도착하니 미리 준비한 장막이 처져 있었다. 안에다 불도 따뜻하게 지펴놓아서 오는 동안 얼어붙은 몸이 겨우 좀 녹았다. 하지만 오래 쉴 수가 없었다. 금방 일어났다.
“전하, 좀 더 몸을 덥히시옵소서.”
“밖에 있는 이들을 더 기다리게 할 수는 없다.”
나를 따라 기우제를 지내러 온 다른 종친들과 관원들, 군사들은 장막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밖에 서서 떨고 있다. 그들을 생각하면 나 혼자 이 안에서 따뜻하게 불이나 쬐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일단 환구단부터 만들기는 했다만, 수행하는 이들이 편히 쉴 수 있는 자리도 필요하겠다. 봄이 되면 그 공사를 꼭 하도록 하라.”
도대체 어떤 놈이 이번 의전을 기획했는지, 환궁하면 찾아서 혼을 좀 내야겠다. 천막 몇 동 더 치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내가 쉴 곳만 준비한단 말이냐. 이번 기우제가 효과가 없어서 한 번 더 지내게 되면, 그때는 장막이라도 좀 넉넉히 치라고 해야지.
“그리고 돌아갈 때는 더 추울 게 아니냐. 공연히 지금 쉰다고 늘어져 있으면 돌아갈 시각이 더 늦어지기만 할 테니, 얼른 끝내고 서둘러 돌아감만 못하다.”
“환궁할 때는 걷지 말고 가마를 타시지요.”
“아니다. 정성을 보이러 온 길이니, 돌아갈 때도 그냥 걷겠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솔직히 눈앞이 캄캄하다. 이대로라면 비가 내리기도 전에 제사 지내다 지쳐서 죽겠다. 젠장, 얼른 끝내고 집에 가야지.
어쨌건 제단 위에 올라와 주변을 둘러보니 마음이 더 무거워진다. 사방에 날씨를 관장하는 여러 천신과 하늘의 별자리, 명산과 강과 바다를 나타내는 위(位)를 모셨고, 그 주변에는 오색 갑옷을 차려입은 군사들이 역시 갖가지 색깔과 그림으로 장식한 깃발을 들고 빼곡하게 섰다.
거창한 준비를 보니 한층 더 부담감이 밀려온다. 지금 시대에 사람이 무슨 짓을 하건 진짜 비가 내리는 데는 아무 소용도 없는데, 과연 이 뒷수습을 어떻게 하나. 역시 정성이 부족했다 치고 비가 내릴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야 하나?
속으로 크게 한숨을 쉬면서 제문을 펼쳐 들었다. 옛 전례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2백여 년 전 옛날인 세종 7년, 1425년에 환구단에서 기우제를 지냈을 때 썼던 제문을 살짝 손봤다.
“아아, 하늘은 만물을 낳는 존재라. 소리와 형체와 모양을 가진 모든 존재는 하늘이 내리는 은총으로 나고 자라서 본성과 생명을 유지하나니, 혹시나 받은 것을 잃는 일이 있으면 또한 하늘을 부르면서 보호해 주기를 비는 것은 당연한 이치에 속하며 감정에도 필연이라.
이 몸이 덕이 부족함에도 만민의 위에 군림하였음도 실로 하늘의 보우함을 힘입은 것이라, 모든 일을 시행하는 데에 항상 하늘의 뜻에 어김이 있을까 염려되오며, 혹시나 재앙의 변고가 있게 되면 내 잘못인가 하여 꾸지람을 받들려고 밤낮으로 근심하고 경계함이 또한 여러 해라.
몇 년에 걸친 심한 한재(旱災)를 만나니, 두려우면서 당황스러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몸소 반성하고 스스로 책망하노라. 형벌이 적중하지 않아서 백성이 무고히 죄에 빠졌음인가, 등용과 조치가 합당하지 못하여서 충성한 사람과 간사한 자가 조정에 섞였음인가….”
산꼭대기에 있는 제단 위에는 아래쪽 평지보다 훨씬 바람이 세게 불었다. 칼날 같은 바람이 내가 입은 누비옷 틈새를 바늘처럼 파고들었다. 제관 주제에 초피옷 따위를 걸치고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 벗었는데, 정말 죽도록 추웠다.
깃발을 들고 주변을 둘러싼 군사들은 모두 모피 장갑을 끼고 얼굴에도 모피를 둘러 가렸다. 내가 그렇게 시켰다. 다른 신하들도 옷을 최대한 껴입고 몸을 웅크려서 추위를 견디고 있다. 하지만 나는 제문을 읽어야 하다 보니 얼굴을 가릴 수도, 몸을 숙일 수도 없었다.
“…어찌 이 가뭄에 내 잘못이 전혀 없다고 하겠는가. 이에 소박한 예의를 갖추어 하느님께 비오니, 바라건대 하느님께서 이 정성을 살피시고 이 고충의 하소연을 들으시어 백성의 깊은 아픔을 특히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그리고 이 몸이 쌓은 잘못된 허물을 용서하시고 풍족하게 비를 내려, 억조 인민과 대소 중생으로 하여금 다 흐뭇한 혜택을 입어 각각 그 생을 이루게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나이다.”
추위를 견디며 제문을 끝까지 읽으려니 절로 목소리가 떨렸다. 임금이라는 의무감 때문에 피하지도 못하고 이 자리에 서 있는 내 신세를 생각하려니 너무도 처량했다. 두 눈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우러러 은하를 쳐다보려니 농사의 걱정을 견디기 어렵습니다. 이에 삼가 산천에 제사하며 간절한 정성을 다하오니, 바라건대 하느님께서 보유하신 신명한 힘으로 허락하시어서 단비를 흐뭇하게 내리어 주시옵소서.”
겨우 제문을 다 읽고 났을 때, 내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반쯤 범벅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젖어버린 눈썹과 수염은 반쯤 얼어서 버석거렸다. 몸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떨렸다.
제문을 다 읽고 주춤거리면서 물러서자 기다리고 있던 내관들이 눈물을 흘리며 급히 달려와 가죽옷을 들고 내 몸을 덮었다. 뜨거운 차가 담긴 잔을 받아서 가까스로 한 모금 마시니 겨우 몸에 온기가 조금 돌았다. 하지만 여전히 이가 따닥거릴 만큼 추웠다.
내관들에게 둘러싸인 내가 뒤로 물러서자 남은 예식은 다른 제관들이 앞에 나서서 맡았다. 내가 마저 끝내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추위 탓에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당연히 비는 오지 않았다.
“전하, 제발 가마를 타시옵소서.”
“아니다. 내가 지금 가마를 타면 필경 ‘임금께서 방자하게 굴어서 비가 내리지 않았다’라는 소문이 돌 게 아니냐. 올 때처럼 걸어가겠다.”
기우제를 다 끝내고 나니 어느새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다. 찬 칼바람은 여전히 매섭게 몰아쳤고 신하들은 제발 가마를 타시라고 울다시피 하면서 말렸으나, 그렇게 노력한 기우제가 실패했다고 생각하니 가마를 탈 생각도 나지 않았다.
또 1시진을 걸어 경복궁에 도착하니 중전과 상희를 비롯한 비빈들이 전부 광화문까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삽시간에 눈물바다가 펼쳐졌지만, 괜찮으니까 다 처소로 들어가라고 억지로 쫓아버렸다. 중전과 상희도 내 재촉을 받고 망설이면서 처소로 돌아갔다.
내관들에게 시중을 받으면서 옷은 갈아입었다. 하지만 저녁 수라는 한 술도 뜨지 못했다. 너무도 춥고 피곤한 데다, 실패한 기우제를 어떻게 수습하면 좋을지 하는 걱정으로 머리가 차 있다 보니 배가 고프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잠자리에 들지도 못하고 혼자 강녕전에 앉아서 밤새 생각했다. 기우제가 왜 실패했는지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필요는 없다. 애초에 아무 의미 없는 시도였으니까. 문제는 백성들에게 이 상황을 어떻게 해명하는가다.
“젠장, 조보에 싣지 말라고 할까.”
보도 통제를 명령하려면 할 수 있다. 경국대전에는 조보에 관한 규정이 없고, 고로 이런 건 싣지 말라고 내가 예조에다 지시하면 그만이다. 환구단 건설에 관한 보도가 이미 여러 차례나 나가긴 했지만, 환구단이 완성됐다고 꼭 기우제를 바로 드리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일단은 싣지 말라고 한다. 그러다가 비건 눈이건 내리면, 그때 가서 ‘그동안 전하께서 친히 기우제를 X차례나…’하고 보도하도록 하면 어떨까. 그러면 내 권위도 깎이지 않고….
우르릉거리는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익선관까지 쓰고 책상 앞에 앉은 채로 깜빡 잠이 들었었나 보다. 그런데 방금 그 우르릉…소리는 뭐지?
“저…전하!”
느닷없이 내가 방문을 박차고 나오자 방문 앞에서 대기하던 숙직 내관이 깜짝 놀라 바닥에 엎드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발걸음을 놀렸다. 지금 들린 소리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급했다. 이거, 천둥소리 맞나?
“비…!”
대청마루로 나가 바깥으로 나가는 문을 열어젖히는 순간 번개가 번쩍이며 눈앞을 밝혔다. 그리고 곧이어 닥친 천둥소리가 내 귀를 울렸다.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폭포처럼 퍼붓는 비가 이미 강녕전 앞마당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정말로 비가 오는 모습을 보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저, 전하! 아니 되시옵니다!”
나도 모르게 버선발로 돌계단을 내려섰다. 지금 내리는 게 정말 비 맞나?
차가운 빗방울이 내 얼굴을 후려쳤다. 쏟아지는 비는 옷 속으로 파고들면서 피부를 적셨다. 그 차가운 감촉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이거, 정말 비다! 비가 온다고!
“전하, 이러시면 아니 되시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옵소서!”
뛰어나온 내관들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어서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며 급히 소동을 벌이는 내관과 상궁들 사이를 끌려가면서 무의식적으로 되뇌었다.
‘비가 오다니…이게 뭐야…정말, 기우제가 통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