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881
2부 외전 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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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한구석, 작은 동네 성당에서 자그마한 추도미사가 열렸다. 흔하게 볼 수 있는 동네 미사였지만 참석한 이들 중에 교구 주민은 하나도 없었다. 미사를 집전한 신부는 본당 신부가 아닌 아시아인이었고, 참례자들은 예수회 소속 신부 몇 사람뿐이었다.
“‘아무리 생전에 우리 교회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고 해도, 개종하지 않은 이교도 군주를 위한 추도미사를 허락할 수는 없소이다’라고 하더군. 휴우.”
흰옷을 입은 한호와 마주 앉은 광해군이 한숨을 쉬었다. 그는 조선에서의 위치를 포기하고 성직자가 된 시점에서 예전에 가지고 있던 지위를 모두 버렸지만, 한호는 여전히 그를 ‘나리’라고 불러주었다.
“어쩔 수 없지요, 나리.”
본국에서는 임금의 승하 소식을 알리기 위해 견서사를 보내지는 않았다. 포르투갈 상선을 통해 전달된 서한은 로마에 있는 광해군에게 제일 먼저 왔고, 그 뒤에 베네치아로 갔다. 지금 유럽에 머무는 조선인은 이들뿐이다.
자신들을 유럽에 파견한 선왕께서 이미 2년 전에 승하하셨다는 소식이 도착하자 베네치아 주재 조선 번역관들 사이에서는 대소동이 벌어졌다. 진행하던 모든 작업을 당장 중단했고, 흰 천을 구해다 상복을 지어 입고 사흘 동안 곡을 했다.
한호는 원래 지난번 견서사가 귀환할 때 돌아갈 수 있었지만, 자원해서 베네치아에 남았다. 번역관들의 좌장 격으로 작업을 주관하다가 비보를 접하고 급히 로마로 온 참이었다.
“그래도 나리께서 계시니 그 정도라도 할 수 있었던 게 아니겠습니까. 만약 나리께서 여기 계시지 않았다면, 어느 양인이 전하를 위해 미사를 드렸겠습니까.”
두 사람 모두 기억하고 있다. 20여 년 전 경인년, 조선에서 왜란이 터지자 군사와 백성들이 수없이 피해를 보았다. 그때 조선에 와 있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부탁받기도 전에 나서서 이들 가엾은 죽은 이들을 위한 위령미사를 드렸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안 된다고?
“예수를 영접할 기회도 없이 죽은 자들을 위한 미사는 드릴 수 있지만, 마음만 먹으면 쉽게 개종할 수 있었으면서 끝까지 개종을 거부한 사람을 위한 미사는 안 된다니.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조선에 선교사가 들어간 지도 벌써 25년이다. 그동안 교회는 계속 성장했고, 국왕은 인력을 초빙해다가 성당을 직접 지어줄 정도로 두둑한 후원을 해주고 있다. 선교사들은 계속 왕궁을 드나들며 국왕과 왕세자의 개인 교사 노릇도 하고 있다.
“법왕청 일각에서는 상감께서 보이는 이런 태도를 이미 마음속으로 교회에 귀의한 증거라고 보았소. 재위 중에야 조야의 반발을 우려해 개종을 선언하기 어렵더라도, 적어도 임종을 맞아 숨을 거둘 때는 개종하리라고 기대한 이들이 많았지.”
하지만 숨을 거둔 선왕은 교회와 관련된 유언은 단 한 마디도 남기지 않았다. 그리고 새로 즉위한 세자는 ‘부왕의 예에 따라’ 자신은 어떤 종교에도 기울어지지 않겠다면서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그 소식을 들은 로마에서는 실망감의 물결이 넘쳐날 수밖에 없었다.
“그 실망감 때문에 추도미사를 허락하지 않은 듯하오. 성 베드로 대성당은 아직 신축공사가 안 끝났으니 제하더라도, 다른 주요 성당에서라도 꼭 전하를 위해 미사를 바치고 싶었는데.”
로마에는 중요한 성당 7개가 있다. 성 베드로 대성당?성 바오로 대성당?성 세바스티아노 대성당?성 요한 대성당?예루살렘 십자가 대성당?성 로렌초 대성당?성모 마리아 대성당의 7개로, 이 성당들을 순회하는 순례 과정도 있다.
“법왕 성하께 특례를 허락해달라고 서면으로 청을 드려 보았지만, 통 답이 나오지 않았소. 직접 뵙고 다시 청하자니 지금 내 지위로는 성하를 뵙기도 어렵고….”
지금 교황 파울루스 5세(Paulus V)는 로마 출신의 법률가로, 교회 세력을 확장하려고 매우 노력하는 군주다. 그래서 새 잉글랜드 국왕인 제임스 1세와도 충돌하고 있고, 아시아 선교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
“사실 성하께서는 전하께서 입교할 듯하다가 끝까지 입교하지 않은 데 대해서도 공개적으로 실망감을 표한 바 있소. 아마 그게 괘씸해서 추도미사를 불허하셨을 수도 있소.”
지난 20여 년, 교황청에서 조선을 대하는 태도는 그 당시에 재임하는 교황의 성향에 따라서 달라지곤 했다. 요즘은 교황청에서 예수회가 주도권을 잡은 만큼 예수회가 호의적으로 보는 조선 국왕을 위한 미사 정도는 열어줄 법한데, 이번에는 그게 잘 안 되었다.
“양인들은 입교라는 형식을 매우 중시하니까요. 여기 로마는 교회의 본산이니 그 형식이 더 엄할 겁니다. 교회 시각에서 변방인 조선에서와는 다르겠죠.”
“앙리 4세가 살아있었으면 파리에서 추도미사를 올려줬을지도 모르겠지만….”
조선 국왕을 무척 높게 평가하고 조선과 관계 강화를 계획하던 앙리 4세는 임금의 부고가 도착하기 직전에 암살자의 단도에 찔려 죽었다. 그래서 프랑스도 지금 국상을 치르는 중이라, 이교도 나라 왕을 위한 추도미사 따위를 차릴 계제가 아니다.
“형식이 무어 중요하겠습니까. 나리께서 선왕께 올리고자 하는 성의가 중요한 것이지요.”
“그야, 내가 사람인 이상 마땅히 해야 할 일 아니겠소.”
출가했다고는 하지만 광해군은 엄연히 종친이다. 그리고 승하한 임금은 그에게 있어서 제법 가까운 육촌형님이었다. 출가 여부를 떠나서 어떻게든 챙기는 게 당연한 상대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생전에 전하께서 부여하신 임무를 잘 수행하는 것, 그거 하나뿐이오. 내 역할은 유럽과 조선 사이에서 교회를 통해 중재를 맡는 것이고, 귀공을 비롯한 번역관들은 우리 조선의 풍속을 저들에게 전하고 또한 저들의 풍속을 본국에 전하여 알리는 것이지.”
서로를 모를 때 분쟁이 생기기 더 쉬워진다. 선왕께서는 그 점을 명백히 이해하시고 서적을 통한 교류를 중시하셨다. 직접 만나지 않으면서도 서로를 아는 데 있어서 책만큼 좋은 수단도 없으니, 매우 효과가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동의보감에 대한 저들의 평은 어땠소?”
동의보감은 무술년(1598)에 유럽에 건너온 3차 견서사가 가지고 왔다. 원체 그 분량이 많은 데다 번역에 의학지식이 필요하고, 번역 우선순위도 밀렸다. 그래서 유럽에 가져온 지 11년이 된 작년에야 라틴어판이 베네치아에서 나올 수 있었다.
“본국에서 정한 방침 때문이라도 사서삼경이 우선 번역될 수밖에 없긴 했지. 유럽 대학에서 아시아를 알기 위해서라며 그런 책들이 제법 인기도 끌었고.”
광해군이 쓴웃음을 지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자기 전처인 유씨가 이들이 번역한 라틴어판 시경을 주제로 논문을 써서 박사 학위를 땄기 때문이다. 그녀가 지금 피사 대학에서 강의하는 과목도 중국 문학이다.
“의사들에게 일단 호기심은 끌었습니다. 다만 그 처방의 유효성에 관해서는 논란이 상당히 있지요. 근본적으로 유럽 의사들이 실제 효험을 본 게 아니니까요.”
동의보감에 나온 처방은 대부분 조선에서 구할 수 있는 약재를 기본으로 한다. 유럽에서는 조선산 약재를 구할 수 없으니 당연히 조선 의서가 큰 의미가 없다.
“약재가 필요 없는 외과술은 유럽이 훨씬 뛰어나고 말입니다. 아예 책에서 언급도 없고요. 그나마 인삼 복용에 관한 언급이 없었으면 아예 출판이 안 됐을지도 모릅니다.”
인삼은 지금 유럽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조선산 약재다. 한동안 견서사는 오지 않지만, 예수회가 수익사업으로 들여다 팔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오는 이윤은 외수사와 예수회가 반분하고 있다.
이 신비한 뿌리는 복용자에게 원기를 회복하게 하는 탁월한 효과를 보이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인삼이 어떤 질환에 효과가 있는지, 어떤 용법으로 복용해야 하는지 유럽인들에게 알려주는 가장 신뢰성 있는 문헌이 동의보감이었다.
“완본은 대학교 같은 곳에서 연구용으로 사들이긴 해도 개업의들이 실제 활용하려고 사지는 않습니다. 어차피 약재를 못 구하는 데다가, 분량이 많아서 가격도 비싸니까요. 그래서 인삼이 들어가는 처방만 따로 골라낸 발췌본도 있습니다. 그건 좀 팔리더군요.”
조선에서 더 많은 약재가 들어오면 동의보감이 인기를 끌게 될 수도 있다. 조선에 주재하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하는 주요 활동 중 하나가 의서와 약재 수집이라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니 말이다. 중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저들은 새 약재를 구하느라 열심이다.
선왕께서도 인삼 종자를 제외하면 저들의 약재 수집에 큰 제한을 두지 않으셨다. 의술이란 널리 알려 사람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니, 제한함은 옳지 않다며 말이다. 다만 인삼은 너무도 중요한 상품이기에 종자 유출은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괴혈병이나 두창에 관한 처방은 유럽에서도 충분히 유효하지 않은가? 괴혈병은 선원들에게 치명적이고, 두창은 걸리면 어른도 절반, 아이는 8할이 끝내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죽는 무서운 병이거늘.”
“유럽에서도 나름대로 대처법이 없지는 않은 데다, ‘조선인은 체질이 달라서 그런 병에 잘 걸리지 않는다’라는 인식도 있는 모양입니다.”
신선한 고기나 채소가 괴혈병 병증을 완화한다는 사실은 유럽에서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저 그 인과가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탓에 처방이 의학계에서 공인되지 않았을 뿐이다. 말린 과일과 차, 절인 채소가 효과가 있다는 동의보감이 특출날 게 없다.
종두법 역시 마찬가지다. 한호는 극단적으로 이런 말까지 들었다고 했다.
“아무 처치 없이도 말씀대로 두창에 걸린 사람 중 절반은 낫는데, 이런 수상한 처방을 굳이 시험할 필요가 있느냐고 하더군요. 소 고름을 일부러 몸에 넣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면서 말입니다.”
“허허, 내가 바로 그 치료법으로 살아난 사람이거늘….”
광해군이 혀를 찼다. 자신에게 종두침을 놓던 소의 이씨의 그 고운 모습이 불현듯 뇌리에 떠올라 가슴 한쪽이 아련해져 왔다.
“저들은 아마 나리께서 그 절반에 해당하는 사람이라고 평할 겁니다. 그 인식이 바뀌려면 적잖은 세월이 필요하겠지요.”
한호가 말했듯, 유럽과 조선 사이에는 아직 서로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간극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광해군은 소리 없이 한숨을 쉬며 마음을 다졌다. 자신의 나이 올해로 서른여섯, 아직 삼십여 년은 더 두 세계 사이를 좁히기 위해 일할 수 있으리라.
– 11 –
이번 가뭄도 4년을 끌었다. 병오년(1606)에 시작된 가뭄은 기유년(1609)까지 계속 이어졌다. 선왕께서 환구단을 만들어서까지 하늘에 비를 빌었으나, 그 효과는 바로 나타나지 않았다.
“뜻이 하늘에 전해지는데 한 해 정도는 걸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내강상단 도방 권기태는 각 지부에서 올라온 보고 문서를 점검하면서 수하에 있는 서기들과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5년 만에 찾아온 풍년 덕에 각 지부에서는 매출이 상당히 호조를 나타내고 있었다.
“선왕께서 직접 승천하여 담판을 지으셨으니, 상제(上帝)라 해도 더 이상 하계에 비를 주지 않고 버티기는 어려웠을 걸세. 어쨌건 장조대왕 마마 덕분에 비가 온 셈이긴 하지.”
2년 전에 승하하신 장조대왕의 마지막 위업이 환구단 건립과 이를 통한 가뭄 해소였다. 그 결과 상감께서 그만 돌아가신 일은 모든 백성들에게 슬픔으로 다가왔지만 말이다.
“다음 가뭄 때도 임금님이 친히 기우제를 지내실까요?”
“어려울 걸세. 선왕께서 기우제를 지내고 바로 쓰러져 돌아가셨으니, 누가 됐건 임금님께 ‘직접 기우제를 지내시라’라고 권하는 작자는 ‘임금님, 죽으세요’라고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 취급을 받을걸?”
비록 지금은 상단에서 도방 노릇을 하고 있지만, 권기태의 근본은 명문가인 안동 권씨 가문 출신이다. 태어나서 자라며 익힌 조정과 양반 사회에 대한 지식이, 상단에서 구르며 몸에 밴 거친 말투와 어우러져 상당히 위험한 언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곤 했다.
“지금 임금님은 감히 임금의 권위를 넘보는 자가 있으면 당장에 삼족을 멸하리라는 기운을 사방으로 뿜고 계시니, 4년이 아니라 10년 가뭄이 들어도 그런 제언을 올리는 간덩이가 부은 자는 없을 걸세.”
선왕은 듣기 싫은 소리를 하는 신하가 있으면 듣기 싫다는 티를 팍팍 내면서도 일단 끝까지 참고 듣기는 했다. 하지만 새로 즉위한 금상은 아예 참지 않겠다는 기색을 대놓고 드러내고 있어서, 간언을 올릴 때도 주의가 필요하다는 게 조정 안팎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였다.
“왜국에서 벌어들이는 운송료는 많이 줄었군.”
입으로는 대화를 나누면서도 눈은 열심히 서류를 훑었다. 권기태의 지적에 서기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왜국에서 전란을 치른 지 15년이나 되었으니 말입니다. 저들도 슬슬 배를 다시 짓고 직접 짐을 나르기 시작했습니다.”
경인왜란과 을미동정으로 일본에서 배가 씨가 마른 지도 벌써 15년이다. 그동안 왜인들은 전쟁으로 불타버린 집과 절을 복구하는데 우선을 두었지만, 근래 들어서는 오사카를 중심으로 해서 선단을 재건하려는 노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언젠가 이렇게 될 줄은 알고 있었지. 당연한 일이기도 하고.”
왜란과 동정으로 일본에서 배가 씨가 마르고 산에서 나무가 없어졌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말이 그런 것이지 재건할 능력까지 사라진 건 아니다. 배를 만드는 배목수 수천 명이 멀쩡히 남아있고, 나무는 다시 자랄뿐더러 목재는 수입할 수도 있다.
“송방 놈들은 왜국에 목재만이 아니라 배까지 팔고 있지. 뭐, 우리로서는 한 철 장사 잘한 셈일세.”
내강상단이 일본 내 수운에 참여한 방법은 주로 선박을 임대해주고 운임을 받는 식이었다. 자체적으로 보유한 선박과 중소 선주들을 동원하여 송방이 끼어들기 전에 확고하게 주도권을 잡았다. 여기 끼어들 수 없었던 송방은 해삼위에서 건조한 배를 일본에 판매하고 나섰다.
“그놈들한테야 그게 가장 확실하게 이문을 남기는 방법이니까. 그러리라고 예상해서 우리도 새 배는 최소한으로 투입하고 수군에서 불하받은 낡은 배만 사용해 비용을 줄였지만 말일세. 뭐, 그래도 10년 이상 잘 뽑아 먹었지. 이젠 다른 장삿거리를 찾아볼까.”
그나마 에도 막부가 상선 용도라고 해도 대형선 수입을 금지하는 바람에 득을 크게 보았다. 을미조약에서 규정한 수군제한령에 기반한 제한인데, 그나마도 없었으면 다테 마사무네 같은 자들은 연해주에서 들여온 선박으로 대규모 상선단을 재구축했을지도 모른다.
“왜국이 수군을 재건하면 복수전에 나설지도 모른다고들 하지만…내가 보기에는 그럴 걱정 같은 건 없어 보이는데 말이지.”
“저희가 보기에도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