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885
3부 0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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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너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앙드레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방에는 세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조선인, 다른 한 사람은 뜻밖이지만 유럽인이었다. 갈색 머리에 푸른 눈, 게다가 예수회 특유의 검은 수도복까지 차려입었다. 세 사람 모두 일어나서 내게 허리를 숙였다.
자리에 앉으며 차분하게 둘러보니, 이번에는 눈앞에 있는 사람들이 누군지 금방 다 알겠다. 이들은 앙드레나 올렝카와는 달리 오래전부터 알던 사람들이라서 정보도 더 풍부하고, 생각도 금방 나나 보다.
“기침이 늦으셨습니다. 지난밤에 상대한 폴란드 아가씨가 무척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유창한 조선말로 눙치면서 크게 껄껄거리는 이 유럽인의 이름은 아르망 다라미츠(Armand d’Aramitz). 프랑스 출신 선교사로, 내가 유럽에서 불편을 겪지 않게 어학과 예절을 가르치기 위해 조선에서부터 따라왔다. 조선에 7년이나 머무른지라 조선말과 한문에도 능숙하다.
경성군 때 조선에 온 예수회원들은 거의 스페인인이었다. 이탈리아랑 포르투갈 출신이 소수 섞인 외에 다른 나라 사람은 없었는데 프랑스인이 들어왔고 게다가 내 측근이라니, 74년 만에 세상이 확실하게 바뀌긴 했구나.
근데 성이 ‘아라미츠’라고? 거, 삼총사에 나오는 아라미스(Aramis)하고 너무 비슷하잖아?
“자네 혹시 루이 13세 시절에 트레비유 대장 밑에서 총사대에 복무했었던가?”
“하하, 전하. 저는 겨우 40세밖에 안 되었습니다. 선왕 폐하께서 돌아가신 해에 태어났는데, 제가 어떻게 선왕 시절에 총사로 복무했겠습니까? 제가 한때 총사대에서 근무한 것은 맞지만, 그건 금상 폐하 밑에서였습니다. 다만 친척 중에는 복무한 사람이 있습니다만.”
“그런가.”
삼총사 이야기에 나오는 달타냥이 실존 인물을 모델로 했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다. 그런데 아라미스도 모델이 있었던 건가? 이거, 프랑스에서 지내는 중에 아토스나 포르토스도 만나게 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흠, 흠!”
헛기침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격식을 갖춰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나이 지긋한 양반이 나를 무서운 표정으로 노려보다가 고개를 휙 하고 돌렸다. 정말 못 참아주겠다는 표정이다. 그래서 유들유들하게 웃으면서 한 마디 던졌다.
“부사, 너무 역정을 내지 마시오. 내 아직 어려서 성인의 도를 전부 깨닫지 못했으니, 어찌 도리에 맞추어서만 살 수 있겠소?”
이 영감은 나를 수행하는 견서사 부사 이형준이다. 왜 부사냐고? 그야 당연히 친왕인 내가 정사니까 이 영감님이 부사겠지.
베르사유는 유럽 한복판, 화려한 서양 왕실 문화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이런 데 와서도 80년 전과 똑같은 복식을 지키고 있다니, 엔간히 꼬장꼬장한 양반인 모양이다. 난봉꾼 성친왕을 수행하면서 세상을 도느라 속깨나 썩였겠구먼.
“소인이 어찌 친왕 전하께 역정을 내겠사옵니까? 옳지 않은 말씀이니 거두어 주시옵소서.”
옳지 않기는. 지금 그 목소리에도 짜증이 팍팍 배어 있는데. ‘나’, 즉 성친왕 때문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 지금 발언만 들어도 알 수 있겠다.
“부사 영감, 처음 있는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천축에서도, 서반아에서도, 로마에서도 매번 있었던 일입니다. 그만 화를 푸시지요.”
세 번째 사람, 서른 살 즈음으로 보이는 젊은이가 끼어들었다.
“성친왕 전하께서는 아직 혈기방장한 젊은이십니다. 그리고 자고로 영웅호색이라 하였으니, 객지에 나와 객고를 좀 푸신다고 하여 안될 것 있겠습니까?”
이 젊은이는 뭔가 변화된 옷을 입었다. 이쪽도 분명 도포를 입기는 했는데, 소매 폭이 왕창 좁아졌고 소맷단이라거나 옷깃 모양도 바뀌었다. 색깔도 흔히 쓰이는 흰색이나 옥색이 아니라 밝은 파란색이다. 아래로 살짝 보이는 신발도 코가 뾰족하긴 해도 분명 양화(洋靴)였다.
7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으니 이 정도 변화는 자연스럽겠구나 싶다. 그 옆자리에 앉아 있는 부사 이형준과 이 청년, 서장관 정호찬이 옷차림이 다른 것도 당연하겠지.
‘잠깐, 정호찬이라고?’
순간적으로 두 눈이 크게 떠졌다. 그 이름을 내가 어떻게 잊어?! 이건…동명이인이겠지?
설마 지금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정보가 거짓은 아닐 테지만, 당황스러운 기분은 어쩔 수 없다. 정호찬이 내게 웬만큼 의미가 있는 이름이었어야지 말이다.
“정 서장관, 그대 본이 어디였던가?”
“연일 정씨이옵니다, 전하. 다만 포은의 후손은 아닙지요.”
포은 정몽주가 연일 정씨였다. 정몽주의 후손이라면 지금 보이는 것처럼 행동을 가볍게 할 수 없으리라. 만고의 충신인 정몽주의 후손답게 행동해야 한다는 압박이 은연중에 있으니까.
정호찬(2호)이 정몽주와 같은 연일 정씨라고 하니 롤리타를 숙부인으로 책봉할 때 한명회를 전례로 삼았던 일이 문득 생각난다. 한명회는 사촌지간인 정몽주의 손녀 둘을 첩으로 두었고, 그중 한 명이 1품 정경부인에 봉해졌었다. 이게 첩에게 품계를 줄 수 있다는 전례가 되었다.
“그러한가. 그대의 본이 연일인가….”
“전하께서는 보학(譜學)에 밝지 않으시니, 잊으신 것도 당연할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옛날 정호찬 본관이 뭐였지? 경주 정씨였던가? 하여튼 여기 있는 정호찬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알기는 하지만 기분 참 묘하네. 이 녀석도 금위사인 걸까? 그러고 보니 이놈이 나한테 대하는 태도가 묘하게 허물이 없다. 혹시 나랑 꽤 친한가?
“서장관이 어느 집안 출신이건, 지금 그걸 따져 무엇하시겠습니까? 이 늙은 몸은, 기껏 먼 바다 건너 대유주까지 오셨으면서 계집이나 끼고 뒹굴고 계시는 친왕 전하 때문에 속이 터질 지경입니다!”
내가 정호찬 2호랑 시시덕거리고 있으니 이형준이 버럭거리며 화를 냈다. 역시 꼬장꼬장한 노인네군. 내가 일부러 딴청 피우는 걸 못 참는 걸 보니.
이 양반 태도를 보니 하나 더 알겠다. 이렇게 서슴없이 날 나무라는 걸 보면, 둘 중 하나다. 이 영감이 내 개인 스승이라도 되거나, 내가 정치적으로 정말 힘이 없는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명색이 친왕인 나를 이렇게 대놓고 꾸짖을 리가 없다.
“이 부사, 예전…처음 왔을 때부터, 견서사는 다소 즐거움을 취해도 괜찮았잖소. 오성부원군 이항복은 숱한 미인을 만나 밤을 보내며 인연을 쌓았고, 한원부원군 이덕형은 숙부인 히씨를 데려오지 않았소? 그 외에도 수많은 선례가 있을 텐데?”
하마터면 ‘경성군 때’라고 말할 뻔했다. 젠장, 도대체 내 묘호가 뭘까? 종과 조 중에 무엇을 받았는지, 어떤 시(諡)를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혹시 경성군 시절에 그린 내 초상화라도 보면 기억이 나려나. 천녀가 과연 초상화나 거울로 보는 얼굴도 인정해줄지 모르겠군.
“전하, 형황께서 이러라고 전하를 대유주에 보내신 게 아니옵니다!”
형황(兄皇)이라. 여기서 두 가지 또 알았다. 먼저, 그동안 조선은 확실히 칭제를 했다. 황제 칭호를 뭘로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왕보다 한 단계 높게 올린 건 분명하다. 설마 천황(天皇)은 아니겠지. 그건 일본에서 이미 쓰고 있으니까.
두 번째로, 나는 왕자(王子)가 아니라 왕제(王弟), 아니 황제(皇弟) 상태다. 올렝카는 나를 ‘조선의 왕자’라고 불렀지만, 그건 엄밀히 말해 틀린 호칭이었던 셈이다.
과연 ‘부황’이 죽은 지는 얼마나 되었을까? 그리고 ‘형’은 왜 17살밖에 안 된 나를 유럽에 보냈을까? 이것들 외에도 의문이 허다하다. 답을 얻으려면 앞에 있는 세 사람에게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영감님 화를 조금 더 돋워야겠다.
“폐하께서 나를 파견하신 이유야 간단하지. 대유주 군주들과 친목을 다지고 나라를 위해서 배울 것이 있으면 잘 배워오라고 보내신 게 아닌가. 예로부터 견서사가 수행하는 책무가 그거 아닌가? 그런데 견서사가 언제 시작됐더라?”
내가 맹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자 마침내 이형준의 화가 폭발했다. 이 양반, 행동하는 양태가 꼭 정철 같군.
“장조대왕께서 처음 견서사 파견을 시작하지 않으셨사옵니까! 전하께서는 어찌 그런 것조차 잊으실 수 있사옵니까!”
“미안하이. 내가 공부에 좀 손을 놓고 살았더니.”
내 묘호는 장조가 되었나 보다. 시법에 쓰는 ‘장’ 자라고 하면 莊, 壯, 章, 長 4가지 중에서 하나겠지. 의미를 보면 莊과 壯 중 하나일 것 같은데, 내가 싸움터에서 전사하지는 않았으니 壯은 아니지 싶다. 아마도 ‘莊祖’겠군. 나쁘지 않은 묘호네.
내가 두 번째 생에서 세운 위업을 생각하면 장조 정도는 충분히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과오가 없지는 않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덮을 만한 공적도 세웠으니까 말이다.
“장조대제께서 행하신 가장 큰 업적 중 하나가 견서사 파견이거늘, 전하께서는 어찌 잊으실 수 있습니까! 전하 이전에 7차례에 달하는 견서사 파견이 있었고, 전하께서는 8번째 견서사로 나오셨습니다. 그 정도는 기억하고 계셔야지요!”
내가 장조 시절 죽기 전에 보낸 견서사가 4번이다. 그럼 그 뒤로 74년 동안 보낸 견서사가 고작 3번이라는 소린가? 25년에 1팀? 그건 너무 적잖아? 난 적어도 7년에 1번씩은 보내라고 지침을 만들었을 텐데?
“잠깐, 부사. 우리 일행이 몇 명이오?”
“그야 11명입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십니까?”
왜 묻긴. 내가 정사를 맡은 이 ‘견서사’가 과연 제대로 된 견서사인지 확인하려고 물었지.
11명? 장난해? 내가 보낸 견서사는 인원이 가장 적을 때도 50명은 보냈어! 11명이면 진짜 사절이라고 할 수 있는 인원은 여기 넷이 고작이겠네. 나머지는 다 하인들일 테고.
갑자기 맥이 확 풀린다. 니미, 이게 무슨 사절단이야. 골치 아픈 동생을 간단히 처분하려는 해외 추방이지. 나, 형한테 미움받고 있었네.
저 영감이 나한테 계속 땍땍거리는 이유도 알겠다. 나랑 친해서 내가 애처로워서 그러는 게 아니고, 나 때문에 덤터기 쓰고 쫓겨난 게 빡쳐서 그 화를 나한테 풀고 있는 거였다. 이해할 만은 하다만 기분이 좀 나쁜데?
‘나’, 즉 성친왕이 유럽에 도착하자마자 주색에 빠져서 놀아난 이유도 단박에 납득이 간다. 부황은 돌아가셨고 형황은 자기를 미워해서 본국에서 추방당했는데 이역만리 타국에서 점잖게 굴면서 체면을 유지할 정신 따위 있을까? 17세 애송이가?
임해군이 그랬듯이 즉위를 도와줄 원군을 얻어 돌아갈 수도 없다. 지금 이 17세기에 지구를 반 바퀴 돌아 대군을 보내서 ‘내’ 즉위를 도와줄 수 있는 나라 따위는 없으니, 계획된 일정에 맞춰 유럽에서 여흥이나 즐기다가 귀국할 수밖에 없는 거다.
잠깐, 그런데 돌아갈 수는 있는 건가? 기한이 정해진 시한부 추방인 거야?
“부사, 그런데 우리 11명이 귀국하는 시기는 언제요? 말해 보시오.”
“그야…당연히 폐하께서 불러들이실 때가 아닙니까.”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구먼. 이형준도 이 질문을 받고 처음으로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탁자 위에 두 다리를 느긋하게 뻗었다.
“여기 있는 우리 다들 알고 있잖소. 그대들은 나 때문에, 그리고 나는 차마 내 입으로 말할 수 없는 ? 사실은 모르니까 ? 그 이유로 인해 고국을 떠나 대유주를 떠돌아야 하는 신세요. 처자식을 본국에 남겨두고서 말이오. 아니, 나한테 처자식이 있기는 한가?”
최대한 비웃는 표정을 지으며 냉소하듯 내뱉었다. 부하들이 어떻게 대답하건 적절히 반응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후사는 없으나 혼인은 하셨습니다. 견서선에 올라타기 한 달 전에 금천 강씨 집안 규슈와 가연을 맺고 오시지 않았습니까.”
정말 본국에 본처가 있네? 그런데 한 달이라고? 그거 제대로 혼인했다고 하기도 힘들구먼. 출국하기 전에 부부가 같이 잔 날이 한 사흘은 될까 궁금하다.
“그랬소? 정 서장관이 깨우쳐주니 비로소 기억이 좀 나는구려. 하지만 세상 반대편에 오고 보니 처의 이름도, 얼굴도 기억이 안 나오. 나는 처자 따위 없이 생이 끝난 거나 마찬가지요. 이로 인한 아픔을 달래기 위해 여흥을 좀 즐기기로서니, 그게 그렇게 못할 일이란 말이오?”
내가 탁자 위에 걸친 다리를 꼬면서 냉소를 퍼붓자 세 사람 모두 선뜻 답하지 못했다. 와, 무게 따위 안 잡고 이렇게 하고 싶은 말 실컷 하는 것도 도대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겨우 몇 시간 전까지 임금 자리에서 받고 있던 스트레스를 생각하면 정말….
기왕 젊어졌고, 이미 망나니 취급받는 황자의 몸에 들어왔으니 한껏 즐겁고 편안하게 한번 살아보자. 나 때문에 빡친 ‘형황’이 나를 본국으로 소환해서 반역죄로 처형하거나, 자금지원을 중단할 정도로 거칠게 놀지만 않으면 되는 거다.
“전하, 그리 말씀하시면 아니 됩니다. 황상께서는 전하의 후사를 걱정하셨기에 혼사를 마친 뒤에야 전하께서 나가시도록 하셨습니다. 그에 대한 고마움은 전혀 품지 않으시고 투덜거리며 불만만 표하시다니, 어찌 친왕다운 태도라 하겠습니까?”
이형준은 확실히 내 감시역으로 따라온 모양이다. 그래, 저 영감 체면도 적당히 세워주면서 이 대화를 끝내야겠다. 황제에 대한 불평불만만 늘어놓다 보면 이 영감이 나를 암살해버리고 빨리 귀국할 생각을 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옳소. 본국에 처가 남았으니, 내게 무슨 일이 생겨 돌아가지 못한다고 해도 양자를 들여서 내 제사는 지내게 할 수 있겠지. 폐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에 마땅히 감사드려야 하겠소.”
감사는 개뿔. 아예 ‘형’의 목적이 그건지도 모르는데. 애초에 날 제거하고 양자를 들여 겨우 제사나 지내게 하려는 심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그걸 알아챈 척할 필요는 없겠지.
“내가 전날 좀 과로한 탓에, 아직 머리가 멍해서 실언을 조금 했을 수도 있으니 그대들에게 양해를 부탁하오. 그나저나, 왜 그리 급하게 나를 보고자 재촉하였소?”
얼굴이 굳은 이형준 대신 정호찬이 점잖게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여색에 너무 심하게 빠져 계신 듯하여 잠시 뵙고 주의를 환기해드리고자 하였지, 지금 당장 처리하셔야 할 긴급한 중대사가 있다거나 해서는 아니옵니다.”
“그런가, 알겠다.”
하기야 강제 외유를 나온 황제(皇弟)가 할 일이 뭐 얼마나 있겠나. 그래도 제대로 설명해줄 사람들을 만났으니, 이것저것 궁금한 사항과 여기서 사는 데 필요한 문제들을 물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