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888
3부 006화
– 7 –
‘지난 1주일 동안 매일 열린’ 루이 14세가 주관하는 저녁 만찬에 참석하라는 초대가 왔다. 하지만 오늘은 가지 않기로 했다. 일단 내가 어디서 온 누구인지 확실하게 파악하기부터 해야 했고, 그러자면 내 수하들과 함께할 시간이 아직 더 필요했다.
더구나 나는 루이 14세의 정신(廷臣)이 아니다. 프랑스와 국경을 맞댄 나라 출신도 아니다. 고로 루이 14세가 같이 밥 먹자고 부른다고 해서 허겁지겁 달려가 비위를 맞출 필요 따위는 전혀 없다. 식사 초대 한 번 거절했다고 루이 14세가 조선과 단교하겠다고 설칠 리도 없다.
“불랑국에 들어온 뒤에 전하께서 저희와 저녁을 함께 하시는 건 처음인 듯합니다.”
이형준이 아까보다 훨씬 풀어진 듯한 태도를 보였다. 내가 프랑스 귀족들과 놀아나는 데만 열중하지 않고 수하들에게 신경을 쓰니, 그 자세만으로도 좀 더 내 평가가 올라갔나 보다.
“그동안 내가 좀 지나쳤소. 아무리 불랑국이 유럽에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상대 나라라고 하나, 어찌 내 나라 내 신하들과 비길 수 있겠소? 내, 좀 더 일찍 이 이치를 깨달았어야 하는 것을.”
내 방에서 함께 식사를 나누며 살살 들어보니, 스페인에서나 이탈리아에서나 성친왕은 매번 난봉질에 여념이 없었나 보다. 물론 여자를 노린다고 해서 늘 성공하는 건 아니었다지만.
헌데 성친왕에게는 좀 고약한 버릇이 있었다. 여자를 유혹해서 동침에 성공해도 그 여자와 지속적인 관계를 갖지 않았다고 한다. 하룻밤 자고 나면 그냥 안면몰수해 버렸다고…그런데 이형준과 정호찬은 그 나쁜 행동을 전혀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전하께서 양희(洋姬)들과 관계를 길게 끌지 않으시고, 일야(一夜)의 대가로 어떤 약속도 안 하신 건 정말 잘하셨습니다. 매번 보석 한 알을 건네는 정도로 끝내신 게 얼마나 다행인지.”
이형준은 내가 계집질을 안 하는 게 가장 좋다고 했다. 하지만 기왕 품을 거라면 지금까지 해왔듯이 그런 ‘떨거지 계집애들’ 따위는 그저 노리개 취급하여 하룻밤 지낸 뒤에 버리는 게 좋다고 덧붙였다. 바로 황실의 체면과 위신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과거 한원부원군이 데려온 숙부인 히씨처럼 양갓집 규수인 것도 아니고, 천한 시녀들이나 멀쩡히 남편이 있는 유부녀를 어찌 황실에 받아들이겠습니까? 결단코 안 될 일입니다. 만약에 전하께서 그런 계집들을 본국으로 데려가려 하셨으면 소인이 죽을 각오로 막았을 겁니다.”
“유부녀야 당연히 데려가면 안 되겠지. 하지만 유럽 왕궁에서 일하는 시녀들은 전부 노비가 아니라 귀족 집안 규수들 아닌가?”
조선에서는 궁궐에서건 반가(班家)에서건 시녀들이 전부 노비였지. 지금 조선 사회가 어떻게 변화했을지 모르겠다만 시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달라지지는 않았을 거다. 하지만 사회적인 배경이 다른 유럽에서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는 것 정도는 알 텐데….
“귀족 규수면 뭐합니까. 하나같이 문란한 유럽 풍속에 물들어서 사내를 꼬드기려 살을 잔뜩 드러내고 엉덩이나 살랑거리며 다니는, 그런 망측한 년들입니다. 그런 것들을 본국으로 데려가서 친왕비로 앉히고 마마 소리를 듣게 하다니! 말도 안 됩니다!”
이 영감은 정말 묘하게 구식이군. 혹시 이형준 정도가 지금 시대 조선 사대부들 평균인가? 그거 정말 갑갑한 세상이겠다. 이 양반만 이러기를 빌어야지.
“부사 영감, 전하께서는 이미 본국에 친왕비를 두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차, 그렇지. 하여튼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전하.”
에구, 이야기를 듣고 보니 ‘형황’이 굳이 나를 출국시키기 전에 혼인하게 한 데는 유럽에서 웬 ‘근본도 모르는’ 계집애를 친왕비로 만들어 끌고 오거나 혼혈 세자를 데려올까 봐 우려한 것도 있겠구나 싶다. 그걸 알고 있으니 성친왕도 계속 원나잇만 하고 다닌 거 아닐까.
“내가 아무리 망나니라지만,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네. 왕…황실의 법도가 엄연한데 어찌 돼먹지 않은 계집애들 따위를 친왕비로 삼으려고 하겠는가.”
그래도 올렝카는 참 마음에 드는데. 벨라루스 출신이라 그런지 외모가 완전히 엘프다. 아까 대화해 보니 성격도 괜찮은 듯하고. 그런 애를 겨우 하루 상대하고 버리기는 아깝다. 최소한 프랑스에 있는 동안은 함께 지내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데 부사, 내가 그동안 양희들에게 내준 보석은 다 어디서 난 거였소?”
“잊으셨습니까? 그야 당연히 유럽에 오는 길에 골가타 상관에 들렀을 때 진상 받으신 물건 아닙니까. 보석뿐만 아니라 미희와 명주(名酒)까지 바치지 않았습니까? 총관 조기철이 그것들을 바치면서 얼마나 굽실거렸는데요.”
초대 총관 이기빈은 셀린과 함께 콜카타에 있으면서 10년 동안 잘 먹고 잘 지냈다. 막대한 재산까지 모았다. 자한기르에게 받은 선물과 개인적인 교역을 통해서 번 돈, 해적들에게 뺏은 ? 자기가 해적질한 게 아니고? – 돈 등을 모두 합쳐서 은으로 천만 냥이 넘는 재산을 가지고 돌아왔다는데 아무래도 과장 같다. 어쨌건 지금도 그 가문은 조선 최고 부자 중 하나다.
당연히 그 뒤로 콜카타 상관은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파견지가 되어있다. 사소한 흠이라도 보였다간 그 자리를 노리는 다른 놈들에게 당장 끌어 내려질 테니, 지금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놈으로서는 ‘높으신 분’이 찾아왔을 때 온갖 성의를 다해 접대하는 게 당연하리라.
“그런데 언제 끝날지 모르는 우리 일정에, 경비는 넉넉히 있는 거요? 아무리 각국 궁정에서 손님으로 대접해준다고 해도, 주머니에 한 푼도 없이 돌아다닐 수는 없지 않소.”
이런 질문을 해도 될까. 명색이 정사면서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사절단 재정 사정에 대해 모른다고 의심만 사게 되는 거 아닐까.
하지만 내 망설임은 다 헛거였다. 내 질문에 아라미츠는 경탄하는 표정을 지었고, 정호찬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이형준은 음식을 집어서 입에 넣다 말고 ? 우리 사절단은 젓가락을 따로 가져와서 쓰고 있었다 ? 뚝 떨어트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선명히 드러났다.
“전하께서 돈 걱정을 하시다니! 2년 전에 제물포를 떠난 뒤로 처음 있는 일이옵니다!”
“그, 그랬던가?”
성친왕 놈은 도대체 얼마나 생각이 없었기에…라고 생각하다 보니 조금은 이해가 갔다. 이 여정을 시작할 때 성친왕은 겨우 15세였다. 황태자가 아니니까 아무래도 교육도 좀 널널하게 받았을 거고, 억지로 떠난 외유에 흥미도 없었을 테니 돈에도 당연히 관심이 없었겠지.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서장관으로서 회계까지 담당하는 정호찬이 냅킨으로 입을 닦더니 여유 있게 대답했다.
“저희가 출발하기 전에 폐하께서 명하시기를, 유럽에서 필요한 경비는 배내국 국립은행에서 찾아 쓰라고 위임장을 주셨습니다. 70년 동안 서책을 팔아 번 돈이 모두 그 은행에 예금되어 있으니, 적어도 몇 년 동안 전하께서 돈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 것이옵니다.”
“책을 판 돈?”
잠시 후에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알았다. 한석봉을 보내서 번역하게 한 우리 책들, 그거 내며 받은 인세가 70년 동안 베네치아 은행에서 계속 쌓이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동안 내보낸 책의 저작권은 ‘조선 정부’가 보유한 것으로 되어있었다. 당연히 70년 동안 책을 팔면서 받은 인세는 모두 베네치아 국립은행 조선 정부 계좌로 받았다.
“70년 동안 왜 그 돈을 인출하지 않은 건가? 유럽에서 돈 쓸 일도 많았을 텐데.”
“역대 임금들께서는 책을 판 돈으로 방물(方物) 따위를 사들임은 옳지 않다고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꼭 필요한 용처에 쓰게 하신다며, 5대에 걸쳐 잘 관리하셨습니다.”
5대면 나부터잖아. 잘 생각해보니 한석봉을 처음 보내면서 ‘베네치아에서 인세는 일단 현지 은행에 넣고, 잘 모아두어라. 모이기도 전에 아무 데나 함부로 쓰지 말라’라는 명령을 내리긴 했다. 하지만 절대 쓰지 말라는 건 아니었는데….
내 의도는 몇 푼 안 되는 돈 가지고 허술하게 관리하면 녹아 없어지기 쉬우니, 웬만큼 돈이 모여 큰 액수가 되면 그때 가서 어디든 적당한 용처를 찾으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부연설명이 부족했는지 그만 선대의 유지로 절대 쓰지 못하는 돈이 되어버린 셈이다.
뭐, 잘된 일이다. 굳이 교역이나 견서사 경비로 그 돈을 쓰지 않아도 될 만큼 조선 재정이 여유가 있다는 이야기니까. 그리고 지금 당장 내가 쓸 돈이 넉넉하다는 것도 좋고. 무종 시절 내가 심은 나무를 장조 때 베어서 쓴 것과 같은 격이 아닐까나.
다만 한 가지는 좀 신경이 쓰이네. 따로 경비를 주지 않고 유럽에서 알아서 찾아 쓰라고 한 건, 딱히 배려 같은 게 아니라 그냥 자기가 쓸 본국 재정을 축내기 싫어서 그런 거 아닌가? 호조 돈이건 내수사 돈이건 말이다. 아차, 칭제를 했으니 이젠 호조가 아니라 호부겠군.
하긴, 생각해보니 올해가 1682년이면 임술년이다. 성친왕이 조선에서 출발한 해가 바로 2년 전이라고 했으니, 그해는 바로 경신년이다. 경신대기근 와중에 조선을 떠난 거니, 본국에 돈이 없을 만도 하구나.
“그러고 보니 그 대기근 와중에 우리를 내보내시다니, 형황께서도 고민이 많으셨겠군. 내가 너무 어려 그 깊은 마음을 다 깨닫지 못하였네만, 참으로 감사한 배려일세.”
“기근이 그래도 어느 정도 가라앉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한껏 밝아졌던 세 사람의 얼굴이 기근을 언급하는 순간 다시 어두워졌다. 그런데 그 대답은 나를 잠깐 어리둥절하게 했다. 기근이 ‘가라앉았다’라고? 우리가 출발한 게 경신년, 기근이 막 시작된 해였는데?
이건 뭔가 잘못됐다. 내가 아는 것과 역사 진행이 다르다. 지금은 확실히 입을 함부로 놀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형준은 그런 내 눈치를 모르고 탄식하며 발언을 이어갔다.
“지난 경술년(1670)과 신해년(1671) 두 해 동안 닥친 기근은 정말 끔찍했습니다. 전국에서 발생한 아사자만 40만이 넘었지요. 그 뒤로 바다를 건너 대남주와 대미주로 이주한 백성들의 수효만 해도 무려 백만…정말 엄청난 재액이었습니다.”
잠깐! 경술년과 신해년이라고 했어, 지금? 경신대기근이 경신년에 일어난 대기근이 아니고 ‘경’술년과 ‘신’해년에 일어난 기근이라서 ‘경신’대기근이었던 거야? 나 지금까지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네?! 이런 젠장!
성이한테 ‘경신년에 기근이 오리라’라고 유언을 남기지 않기를 백만 번 잘했다. 만약에 그런 유언을 남겼으면, 긴 재위기간 동안 기껏 고생해 놓고 막판에 헛소리했다고 기록에 남았을 뻔했다. 오차가 1~2년 나는 것도 아니고 무려 10년이나 빗나가게 알고 있었다니,
정말 표정 관리가 안 됐다. 하지만 수행원들은 내 굳어진 얼굴이 가뭄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데서 나온 줄 알았는지 별로 수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도리어 철부지 황자가 드디어 백성들의 삶을 걱정하기 시작한다고 대견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기근의 와중이라 하신 전하의 말씀도 틀리지 않습니다. 경신년에도 본국에 가뭄이 든 건 마찬가지니까요. 신묘년(1651)부터 경신년까지 30년 동안, 본국에 가뭄이 들지 않은 해는 겨우 7년밖에 안 되지 않습니까.”
정말인가? 입이 떡 벌어질 일이다. 이건 장조 때 들던 가뭄하고는 비교할 수가 없는 수준이 아닌가. 그때는 그래도 풍년과 흉년의 비율이 2:3 정도는 됐었다. 그런데 1:3이 넘다니, 정말 백성들이 기근을 버티고 살아남기가 어려웠겠구나.
“나는 그때 너무 어렸던 탓으로 궐 밖의 일에 대해 잘 몰랐네. 이제라도 듣고 싶으니, 우리 대한이 그 난관을 어찌 극복했는지 들려주지 않겠는가?”
의식적으로 조선이 아니라 대한이라고 표현했다. 내 입에도 이게 얼른 익어야 하니까. 이제 세상이 바뀌었는데 내 입에서 계속 조선, 조선 운운할 수는 없지 않나.
“농사는 망했으나 비축한 환곡 천만 석을 털고 고기잡이와 장사로 큰 몫을 보태어 간신히 버티었습니다. 내강 상단이 난바다에 나가 낚은 고기에다 우리 교역선들이 아모국에서 어포와 어비를, 강남과 안남, 일본에서 미곡을 대량으로 들여와서 소요를 겨우 충당하였습니다.”
담비농장에서 사료로나 쓰던 생선 내장과 온갖 잡어가 언제부턴가 비료로 만들어져 농지에 공급되고 있었다. 국내에 공급되는 어비(魚肥) 대부분은 함경도와 연해주에서 생산하지만, 그 수요가 점점 늘자 아모국에서도 얼마간씩 들여오고 있다고 한다.
‘일본으로 가는 어비가 줄었겠군….’
에도 시대 일본의 농업 생산 증대는 홋카이도산 어비에 크게 의존했다. 우리가 수입한 양이 일본으로 가는 어비 공급을 중단시킬 정도는 아니겠지만, 영향이 없지는 않겠지.
“부사 영감, 그것만 가지고는 그 큰 기근을 버텨낼 수 없었잖습니까? 그렇게 식량과 비료를 들여와도 전국에서 아사자 수십만이 나왔습니다. 다른 해결책이 필요했지요.”
이형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 ‘다른 해결책’이 마땅찮은 게 분명했다.
“기근 피해를 줄이려면 먹여 살릴 입을 줄이는 수밖에 없고, 그러려면 백성들을 여유 있는 땅으로 사민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건 나도 아오. 하지만 호구(戶口)는 곧 나라의 힘이고, 우리 백성을 만리 밖으로 보내는 일이 어찌 즐겁겠소?”
경술년부터 경신년까지, 우리가 조선을 떠나기 전 10년 동안 본국에서 빠져나간 인구만 100만이라고 했다. 그래도 내지인 본국 13도에는 아직 1600만에 달하는 백성이 있고, 외지 8주에 사는 백성은 이제 800만에 달한다고 한다. 합치면 2400만이다.
내가 죽었을 때 본국 인구가 약 1200만이었다. 북방 3주에 구주, 대남 인구까지 합치면 딱 1400만이 될까 말까였으니, 그동안 기근으로 잃은 인구를 빼도 1000만 명이 늘어난 셈이다. 새로 확장한 요동주에 영락주, 그때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던 미주 인구도 대폭 늘었다.
“외지 8주에는 현지 토인들도 많습니다. 구주 백성 50만 중에는 무려 절반이 왜인입니다.”
“거기야 원래 왜인들 땅이 아닌가. 왜인들이 많은 것도 당연하지.”
일본 이야기를 더 들으니, 도쿠가와 막부가 오사카를 추가로 개항한 이유는 이해가 갔다. 어차피 쇄국으로 갈 게 아니라면 막부가 최대한 많은 이익을 얻는 방향으로 일을 추진하는 게 당연하고, 그러자면 일본에서 최고로 번성하는 상업도시인 오사카를 여는 게 자연스럽다.
하지만 진서장군부가 막을 내렸다는 건 놀라웠다. 정치적인 배경이 되어주던 명나라 조정이 무너지자 일본국왕으로서 아소 씨가 가지고 있던 입지가 급격하게 약해졌을 건 이해가 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진해서 문을 닫을 것까지는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