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892
3부 010화
– 3 –
“전하, 그럴 때는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닙니다. 자, 저를 따라 해 보십시오.”
“식사 중에는 왼손을 탁자 밑에 넣지 마십시오!”
“춤을 출 때는 그렇게 뻣뻣하게 서 계시는 게 아닙니다.”
루이 14세가 붙여준 예절강사는 단순히 내게 프랑스어만 가르친 게 아니었다. 식탁에서 지켜야 할 예법에서 무도회에서 춤추는 법에 이르기까지, 궁정 생활에 필요한 예절 전체를 통으로 내 머릿속에 욱여넣으려는 듯 나를 무섭게 볶아 댔다.
“전하께서는 조선의 왕자이십니다. 도팽 루이 전하에 이어 지금 베르사유에서 두 번째 가는 귀공자라고 하실 수 있지요. 마땅히 춤 정도는 능숙하게 추셔야 하는 겁니다.”
도팽(Dauphin)은 본래 프랑스어로 돌고래를 뜻하지만, 왕세자를 뜻하는 칭호이기도 하다. 왕세자를 왜 하필 돌고래라고 부르냐고 내 선생에게 물어보니, 돌고래를 가문의 상징으로 쓰던 어느 백작령을 왕실에서 사들여 왕세자의 영지로 할당한 데서 유래했다고 했다.
“도팽께서는 지금 몇 살이시오?”
“스물한 살이십니다. 전하께서도 만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고 보니 어제 소개는 받은 것 같다. 첫날에도 인사를 나눴다고 하는데 그건 통 기억에 없으니 할 수 없고.
“아…곧 첫아이를 얻게 되신다고 들은 것 같긴 하네.”
“맞습니다. 왕세손이 태어나시는 거죠.”
확실히 어젯밤 루이 14세도 자기가 곧 할아버지가 된다며 잔뜩 들떠 있었다. 태어날 아이가 아들인지 딸인지도 모를 텐데 그렇게 김칫국물부터 들이켜도 되려나? 나중에 결과가 예상하고 달라져서 실망하면 어쩌려고.
뭐, 설마 실제 역사하고 달라지진 않겠지. 내가 세상을 좀 바꾸기는 했어도 그게 도핀느(Dauphine, 세자빈)의 몸 안에 들어간 정자들의 움직임에까지 영향을 미치진 않았을 테니까. 그런데 실제 역사에서 이 부부가 낳은 첫째 자식이 아들인지 딸인지 모르겠다.
“그걸 알았으면 점쟁이 노릇을 한번 해 볼 텐데….”
다행히 샤를 드 샤티용이라 하는 이 예절강사는 내 혼잣말을 못 들은 모양이었다. 왕세자 도팽 루이가 얼마나 선량한 사람인가 하는 칭찬이 계속 이어졌다.
“도팽께서는 정말 친절하고 관대한 분이십니다. 아직 정치에 관여하지는 않고 계시지만, 곧 다가올 그 날을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계시지요. 조선에서도 왕위를 물려받을 왕세자에게는 공부를 무척 많이 하게 한다고 들었습니다.”
도팽 루이는 7세부터 가정교사에게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그 점에서는 5세 때부터 시강원을 차리는 우리도 별로 뒤질 게 없지만 말이다.
“그야 당연한 일이 아니겠소. 다행히 나는 왕위 계승과는 상관없는 처지라, 그런 교육 없이 이리 자유롭게 외국에도 나올 수 있지만 말이오.”
올해 만 6살이라는 ‘조카’는 이미 시강원에서 잔뜩 혼나면서 공부하고 있겠지. 나야 직접 겪은 적이 없지만, 시강원 선생들이 꽤 엄하다는 정도는 안다. 물론 유럽 왕실에서처럼 매질하면서 가르치지는 않지만, 꼭 때려야 무서운 건 아니니까. 이형준만 봐도….
“그대는 조선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소?”
닷새 동안 예절 수업을 받았더니 진절머리가 났다. 수업을 더 멈춰놓을 겸, 조선이 얼마나 인지도를 쌓고 있는지 확인할 겸 물어보았다. 다행히 샤를은 내 미끼에 잘 낚여 주었다.
“조선은 동방에서 우리 프랑스와 가장 가까운 나라지요.”
출발은 괜찮군. 과연 이 뒤에는 어떤 깨는 이야기가 나오려나.
“앙리 대왕께서 재위하던 시절에 그 장조대왕이라는 분께서 처음 사절을 보내 교류를 트신 이래로, 우리 프랑스는 조선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앙리 대왕께서 파견하신 많은 기술자가 조선 수도 한양에 대성당을 지었고, 교역을 통해 서로가 많은 이익을 얻었습니다.”
프랑스가 수출한 물건들은 공예품과 시계, 책, 견직물 등이고 수입한 물건은 도자기, 차, 모피, 면직물과 역시 견직물이었다. 프랑스산 견직물과 조선이 생산하는 중국식 견직물이 서로 간에 차이가 크다 보니 교환이 이루어진 모양이다.
“제 조부님께서도 조선에 다녀오신 적이 있습니다. 선왕이신 루이 13세 폐하께서 파견하신 사절단의 일원으로 뽑힌 덕분에 폐하께서 내리신 친서를 휴대하고 왕복 5년에 걸친 긴 여행을 하셨었지요.”
“오, 그런 일이 있었소?”
그동안 이형준이나 정호찬에게 들은 정보 중에는 그런 대목이 없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빼버렸던 모양이다.
“1642년에 조선에 도착하셨다 했으니 딱 40년 전이로군요. 조선에서 4번이나 우리 쪽으로 사절을 보냈는데 우리는 한 번도 안 보낼 수 없다는 선왕 폐하의 강력한 뜻이 있으셨습니다. 유감스럽게도 폐하께서는 사절단이 돌아오시기 전에 승하하셨지만 말입니다.”
“호오, 그런 사례가 있었구려. 내, 공부를 잘 하지 않아 몰랐소.”
양국 관계에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이런 사건도 몰랐으니, 이제 프랑스 궁정에서도 내가 무식한 왕자라고 소문이 자자하게 퍼지겠군. 에휴, 어쩔 수 없지.
“한창 짓는 중이던 마포 대성당을 보고 오셔서 그 아름다움을 무척이나 칭찬하셨지요. 제가 어릴 때도 그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 커다란 색유리창과 높은 종탑, 넓은 면적과 튼튼한 성벽에 대해 아주 상세한 설명을 하셨지요. 아직 미완성이었지만.”
“마포 대성당은 그대들 프랑스인 건축가들이 지었으니 한층 더 기뻤겠지.”
대성당이 완공된 해는 병오년(1666), 내가 태어난 다음 해였다. 가뭄 때문에 자금 조달에서 다소 차질을 빚어, 대성당을 완공하는 데 거의 60년이 걸렸다. 대성당 이야기는 나도 궁금한 화제였던지라 정호찬에게 물어서 확실하게 들었다.
마포 대성당은 완공되자마자 주교좌 성당이 되었다. 조선 교구 주교직은 벌써 4대째 예수회 출신 사제들이 계속 맡고 있고, 관할 구역은 조선과 청나라, 후금이다. 광해군이 혹시 주교를 맡아 돌아오지 않았냐고 물어보니, 광해군은 죽을 때까지 조선에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이유는 정호찬도 모른다고 한다.
금교령이 내린 일본은 마카오에 있는 예수회 동아시아 지부에서 직접 관리한다. 도쿠가와 막부는 30여 년 전에 일어난 대규모 천주교 반란을 진압한 후, 공식적으로 천주교 신앙을 금지했다. 다만 가톨릭에 호의적인 조선 측의 눈치를 살피느라, 탄압이 실제 역사처럼 엄혹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조선령으로 탈주하는 신자는 거의 방관하는 수준이라고 한다.
하지만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금교령을 내린 이상, 조선에 있는 주교가 대놓고 일본을 자기 관할로 두겠다고 나서면 상황이 곤란해진다. 그래서 형식상으로는 일단 마카오에서 관할하는 모양이라며 정호찬이 웃었었다. 아라미츠는 쓴웃음을 지을 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고.
“순수하게 성당으로 짓지 않고 절반은 요새, 절반은 성당인 점은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고 하셨지요. 왕실을 위한 일이니까요.”
“이해해 준다니 고맙소.”
마포 대성당은 마포나루를 방어하면서 한양에서 서쪽으로 빠져나가는 통로를 지키는 요새 역할을 한다. 유사시 황실이 대피하는 첫 번째 피난처는 북한산성이지만, 강화도 역시 중요한 피난처다. 마포에서 배를 타거나 강을 건너 움직이면 바로 강화도로 갈 수 있다.
“그 외에 조선에서 프랑스에 건너온 건 뭐 없소? 물건이든, 습관이든.”
“조선의 행정 체계나 철학이 연구 대상이 되기는 했으나, 직접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원체 다른 나라니까요.”
웃으면서 이야기하던 샤를이 문득 고개를 들어서 시계를 보았다. 그러더니 크게 당황하면서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런, 잡담에 너무 빠져 있었군요. 전하, 어서 일어나십시오. 오늘 저녁 무도회에서 망신은 당하지 마셔야 할 것이 아닙니까.”
내가 망신을 당하는 것보다는 날 가르친 자기 체면이 더 중요하겠지. 어쩔 수 없이 한숨을 쉬며 일어나 스텝을 밟는 연습을 다시 시작했다. 뭐, 춤도 일단 배워두면 쓸모가 있기는 할 테니까.
– 4 –
무도회에는 내 보좌관 세 사람도 참석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나는 또 이형준에게 잔소리를 실컷 들어야 했다.
“전하! 왜 하룻밤으로 끝내겠다던 계집을 계속 데리고 다니시는 것이옵니까? 후환이 두렵지 않으시옵니까?”
무도회에 참석한 내 파트너는 당연히 올렝카였다. 새하얀 얼굴이 기쁨과 행복으로 휘황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형준은 그런 건 상관하지 않았다.
“전하,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제껏 우리 황실에서는 단 한 번도 외인을 비빈으로 들인 적이 없습니다. 선조께서 내달인 후궁을 들이신 적은 있으나, 그것도 그 아비가 내강 상단 도방 중 하나였기에 그 배경을 감안하여 받아들이신 것이었사옵니다!”
상단의 서열은 대방>도방>대행수>행수>서기>사환 순으로 내려간다. 아직은 각 상단의 대방 자리는 순수 조선인이 차지하지만, 이주민 출신들도 도방까지는 올라간 사례가 여럿 있다. 그 구조 자체가 합작사업이나 마찬가지인 내강상단이 당연히 그런 변화가 가장 빨랐다.
그나저나 백인 미녀들이 조선에 흘러들어온 지 벌써 80년이나 됐는데 4대를 내려오는 동안 아무도 비빈으로 안 들였다고? 그게 말이 돼?
“부사 영감, 전하께서 옛일을 잘 모르신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막 지르시면 아니 되십니다. 정식으로 간택 후궁으로 들인 사례가 없다는 것이지, 백면나인으로 궁에 들어간 뒤에 승은을 입어 후궁이 된 사례가 적어도 두 번은 있지 않습니까.”
의구심을 느낀 내가 반문하기 전에 정호찬이 먼저 태클을 걸었다. 그런데 이게 날 역성드는 건지 은근히 까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하여튼 사정은 알겠다. 궁녀는 본래 관비 중에서 뽑는데, 옛날 중전이 배우로 만들겠다고 궁에서 내보낸 우크라이나 출신 백면나인들은 법적으로는 극단에 매인 관비 신분이었다. 고로 작정만 하면 왕실에서 궁녀로 들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소생이 없었으니 결과적으로 볼 때 황실에 피가 섞인 적은 없는 거잖소. 이방인 피가 섞인 황자라니, 생각만 해도 온몸이 떨리오!”
이형준은 정말 예상 밖의 면에서 고리타분하다. 조선에 와서 사는 서양인의 수가 만 단위를 넘나드는 세상이 되었는데, 황실에는 그 피를 섞을 수 없다고 주장하다니.
“전하, 그저 피를 섞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선조께서 받아들인 양빈은 후사를 얻지 못하여 분란이 없었습니다만, 만약 양인 모후를 두고 천주교도로 자란 황자가 나온다면 어찌 천하를 어지럽힐 계기가 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그야….”
순간 대답이 궁했다. 천주교 신자로 자란 황자가 조선을 통째로 개종시키겠다면서 제위를 노릴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니 말이다.
물론 조선 임금이 개인적으로 종교를 가질 수는 있다. 하지만 임금에게는 국가 제례를 맡을 의무가 있는데, 이를 거부하는 종교를 믿겠다고 하면 문제가 커진다. 아마 당장에 사방에서 반란이 터질 거다.
이형준은 유럽 전체가 패를 갈라 싸운 30년 전쟁 이야기까지 하면서 조선에서 그런 참극이 벌어지게 할 수는 없다고 했다. 하지만 내게는 간단히 반박할 수 있는 논리가 있었다. 바로 내가 태황의 아들이 아니라 동생이라는 거다.
“황실에 질서가 있는데 어찌 그런 일이 쉽게 일어나겠는가? 태자가 아닌 다른 황자가 설사 천주교 신도라 한들 애초에 계승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태황이 아니라 그 아우라, 행여 내가 천주교를 믿는 후손을 둔다 해도 제위를 노릴 일은 없지 않은가.”
까놓고 말해서, 역모를 꾸미고 싶은 놈은 종교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명분을 잡아 반기를 들 거다. 조선인 모친을 둔 종친이면 반기를 안 든다는 보증이라도 있나? 예왕은 어디 천주교도인가?
“잘 생각해보시오, 부사. 내가 이 여자, 저 여자 건드리면서 추하게 구는 것보다는, 여기서 머무르는 동안은 이 올렝카 한 명만 정인(情人)으로 삼아 데리고 다니는 편이 황실의 체면에 먹칠을 훨씬 덜 하리라 보이지 않소?”
정인이 아니라 정부(情婦)가 더 적절한 표현이겠지만, 차마 그렇게 부르지는 못하겠다. 바로 내 옆에서 팔짱을 끼고 생글거리며 웃는 애를 어떻게 대놓고 정부라고 부르나? 그리고 조선에 정부라는 표현이 있지도 않고. 간부(姦婦)라면 있지만.
당연하겠지만 올렝카는 조선말을 전혀 모른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자기를 놓고서 논쟁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내 얼굴을 보면서 어서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릴 뿐이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합시다. 연회에 참석했으면 뒤섞여 즐겨야지 어찌 우리끼리 어울려서 격론만 벌이다가 돌아가겠소?”
이형준에게는 포기할 기색이 없어 보였지만 시의적절하게 정호찬이 붙들었다. 그 틈을 타서 나는 올렝카와 함께 뺑소니를 쳤다. ‘스승님’께 혼이 나더라도 내일 나야지.
이형준에게서 떨어진 뒤로는 무도회장 안을 마음껏 돌아다니며 차려진 술과 음식을 즐기고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국왕인 루이 14세는 오늘 참석하지 않았지만, 다른 주요 인사들은 잔뜩 있었다.
“제가 이런 자리에 있다니, 꿈 같아요. 원래는 감히 이런 데 나설 수도 없는 신분인데….”
내 옆에 바싹 달라붙은 올렝카는 행복에 겨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피식 웃으며 머리카락을 살짝 쓰다듬어주었다.
“내 곁에 있는 동안은 계속 이렇게 누릴 수 있을 거다. 내 짝으로서.”
올렝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잡고 있던 내 왼팔을 꼭 껴안았다. 부드러운 가슴의 감촉을 팔꿈치로 느끼면서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다가 갑자기 떠날까 봐 그러느냐? 걱정하지 마라. 내가 여기 머무는 동안은 그대를 꼭 곁에 둘 테니까.”
“떠나신…뒤는요?”
“그야 함께 떠나면 되지 않느냐?”
같이 폴란드 찍고 러시아까지 가는 것도 괜찮겠지. 모스크바 구경도 할 겸. 그럼 올렝카를 집에 데려다주는 셈도 될 테니까.
그런데 ‘함께 떠나자’라는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올렝카의 두 눈이 광채를 발했다. 어라? 얘 혹시 나랑 잠시 연애하고 선물 챙기는 정도로 만족하려는 게 아니라 나 따라서 조선까지 갈 생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