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894
3부 0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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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베르사유에 도착한 지도 벌써 열흘인데, 앞으로 얼마나 더 머무르게 되는가?”
의문을 해결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직접 질문하는 거다. 시종 3명과 아라미츠를 제외한 우리 일행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내 질문을 받은 이형준은 별로 망설이지도 않고 대답했다.
“불랑국을 떠나고 싶으십니까, 전하?”
“딱히 당장 떠나고 싶은 건 아니지만, 언제 떠나게 될지 궁금해서 말이오. 다음 행선지는 어디로 할지도 궁금하고.”
“그야 전하께 달렸지요. 서반아에서도, 로마에서도 매번 전하께서 ‘충분히 놀았으니 이만 떠나자’ 하신 뒤에야 발을 떼지 않았습니까.”
말이 좋아 견서사지, 정말로 진지하게 보낸 사절단이 아니다 보니 운영이 순 주먹구구였다. 하기야 어디를 가든 손님으로 환영을 받는 데다 딱히 돈에 몰리지도 않으니, 여행 일정 따위는 내키는 대로 짜면 그만이었을 터이다.
“방문국을 고를 때도 내 임의로 순서를 정했던가? 내 통 기억이 아니 나는군.”
“그야 관례에 따라 정하였지요. 매번 견서사가 올 때마다 대유주의 정문 격인 서반아를 먼저 들르고, 법왕이 있는 로마를 두 번째로 방문하는 게 그동안 여섯 차례에 걸쳐 유럽을 찾은 견서사 일정의 관례였습니다. 이를 지키지 않은 건 7차 견서사 때 한 번뿐입니다.”
7차 견서사는 루스국, 즉 러시아와 국경조약을 체결하러 유럽에 왔다. 견서사는 내가 4번 보내고 성이가 2번을 보냈는데, 그 뒤에 즉위한 연이는 ‘계속 가뭄이 드는데 뱃길에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라면서 왕위에 오른 뒤 대규모 견서사 파견을 중단했다.
갑자년(1624)에 떠나 무진년(1628)에 귀국한 6번째 견서사 이후, 유럽과 조선의 교류는 전적으로 민간 상선을 이용했다. 조선 대형 상선들은 미주 항로에 우선 투입하다 보니 유럽 항로를 오가는 건 대개 유럽 쪽 배였다. 나만 해도 잉글랜드 배를 타고 오지 않았는가.
딱 한 번 있었던 예외가 국경 협상 때문에 건너온 7차 견서사였다. 선황은 ‘루스놈들에게 대한의 위엄을 보여주겠다!’라면서 내가 했듯이 대형 갈레온 4척으로 구성한 대규모 선단을 파견했다. 이 함대는 스페인, 네덜란드를 거쳐서 발트해로 들어가 당당한 위엄을 뽐냈다.
“하지만 선황께서는 한 가지 사실을 알지 못하셨지요. 덕분에 기껏 한 고생이 반쯤 허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조정에서 대유주 사정을 좀 더 정확히 알고 폐하께 고하였더라면 사절단을 파견하시기 전에 한 번 더 고민하셨을 것입니다.”
“그러게나 말일세. 24년이나 된 일이라지만 내가 다 안타깝네그려.”
선황, 연이의 아들, 그러니까 내 ‘증손자이자 아버지’가 기껏 공들여 파견한 함대가 제대로 위용을 떨치지 못한 이유는 간단했다. 기나긴 항해 끝에 도착한 발트해에, 러시아 영토라고는 단 한 조각도 없었기 때문이다.
“해안에 있는 땅은 모두 수배국의 영토이고 루스인들은 죄다 내륙에 있으니, 일부러 세상을 빙 돌아 찾아온 보람이 확 떨어지지 않았겠습니까. 그런 줄 알았으면 굳이 루스국까지 우리가 직접 배를 몰고 가겠다고 나서지도 않았을 겁니다.”
‘수배국(須培國)’은 스웨덴을 가리킨다. 스웨덴말로 자기네 나라를 부를 때는 스베르그인지, 스베리예인지 한다는데 거기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들어보니, 웬만한 유럽국가 이름은 다 이런 식으로 한자화가 됐다. 도시명까지는 다 바꾸지 못한 듯하지만.
“탈린이라는 항구에 배를 대고 거기서 육로로 루스국 수도 막수구파까지 가는데, 꼬라지를 보니 항구 하나 갖지 못하고 사는 이유를 바로 알겠더군요. 그런 자들이 어떻게 대륙을 지나 우리 변경까지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막수구파’는 당연히 모스크바를 뜻한다. 아직 표트르 대제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기 전이니까, 지금 러시아의 수도는 모스크바다.
“루스국 백성들이 사는 모양을 보니 많이 어설프던가?”
“그 숫자는 꽤 많으나, 피부 하얀 야인일 뿐입니다. 옛날에 수백 년간 달자들에게 지배를 받은 탓인지, 몽고 달자들과 크게 다르지도 않습니다.”
7차 견서사가 모스크바에 도착한 해는 무술년(1658)이었다. 이형준은 그때 말단 서기관으로 따라갔었다는데, 러시아에 대해 무척 안 좋은 인상을 받았던 모양이다.
“루스인들이 얼마나 야만적인지는 놈들이 동토에서 하는 짓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오직 물욕에 눈이 어두워 토인들을 강압하여 모피를 빼앗고 부녀를 납치하니, 이 어찌 사람이 하는 짓이라 하겠습니까?”
몇 번이나 들었다. 딱 40년 전인 임오년(1642)에 처음 우리와 충돌한 러시아인들이 북방의 동토(凍土), 즉 시베리아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말이다.
러시아인들이 모피를 찾아 동진한 건 내가 아는 역사와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모피를 얻기 위해 놈들이 택한 수단이 원주민 정복인 점도 같았다. 시베리아에 진출한 러시아 카자크들은 토인 부락을 덮쳐 남자들은 모피를 모으는 노예로 삼고 여자들은 성노예로 삼았다.
요동을 넘겨받고 막 옛 북해, 그러니까 바이칼호까지 도달하는 등 차츰 세력을 넓혀 가던 조선은 난데없이 보호를 청하며 밀려드는 토인들을 맞닥뜨려 어리둥절해야 했다. 이를 통해 비로소 소문으로 듣던 러시아인들이 바로 코앞에까지 와 있음을 알았다.
“선조께서 격노하시어 저들을 쫓아내라 이르시니, 그 뒤로 10여 년에 걸쳐 동토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사옵니다. 싸움에서야 불리할 이유가 전혀 없었으나, 워낙 추운 지역이고 보니 일단 그 추위를 견디며 적을 찾는 게 더 어려웠지요.”
러시아인들과 접촉한 지 8년이 지난 경인년(1650)에 연이가 죽었다. 그 뒤를 이어 즉위한 선황은 국경 문제를 원초적으로 해결하려면 러시아인들의 수도에 쳐들어가 담판을 벌여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래서 부황(연이)이 중단한 대규모 견서사를 다시 보냈던 거다.
“루스국 수령은 세상 반대편까지 대규모 사절단을 보낼 수 있는 우리 대한의 힘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두 나라 사이의 경계를 북정호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래나강으로 하는 협상이 무난히 이루어졌지요. 참으로 뿌듯한 날이었습니다.”
북정호(北精湖)는 연이 때 바이칼호에 새로 붙인 이름이다. 래나강(來羅江)은 아마 북극해로 흘러가는 ‘레나(Lena)강’이 아닐까 싶다. 이형준의 설명을 내가 아는 지리적 상식에 맞춰봐도, 거기가 맞는 듯하다.
“웅장한 용산별궁에 그 조약이 체결되는 장면을 그린 벽화를 걸었으면 참 좋았을 것을.”
안토니오가 전파한 서양 미술을 생각하면 프레스코화 정도는 그릴만 할 거다. 아니면 유화? 벽에 직접 그리기보다는 액자로 만들어서 거는 쪽이 조선인들 취향에는 더 맞겠지. 정호찬도 안타까운 듯 한숨을 쉬면서 내 의견에 동의했다.
“그러게 말이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용산별궁은 터만 닦아 놓은 채 70년째 주춧돌 하나 놓지 못하고 있으니, 언제나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사옵니다.”
지금 용산에는 원구단에 제를 드릴 때 사용하는 작은 제각 하나가 있을 뿐, 내가 예전에 기획한 별궁은 아직 삽도 뜨지 못했다. 이미 며칠 전에 들은 이야기지만 새삼 서글퍼진다.
그동안 용산별궁을 못 지은 이유는 간단했다. 끝이 없는 가뭄이었다.
도성 서쪽을 지키는 요새로서, 건설에 충분한 당위성이 있었던 마포대성당 건축에도 60년이 걸렸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별궁’에 막대한 자금을 들이붓는 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나마 쉬엄쉬엄 짓던 마포대성당이 완공되어서 성당에 투입되던 인력과 자금을 별궁 건설로 돌릴 수 있게 되자마자 경신대기근이라는 핵폭탄이 터져버렸다. 그런 형편이었으니 이제껏 별궁 터가 휑뎅그렁하게 비어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쩝, 그건 나중에 어떻게 되어가는 형편을 봐야지.
내가 한숨을 쉬고 입을 다물자 이형준이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당장 급한 일이 아니라 그런지 이형준은 용산별궁에 관한 이야기에 굳이 끼어들지 않았다.
“하여튼 루스는 참으로 잔인하고 뒤떨어진 족속들입니다. 그래서 정계 협정차 찾아간 7차 견서사 외에는 한 번도 방문하지 않은 것이고요. 헌데, 전하께서는 왜 이미 다 짜놓은 일정에 관해 하문하시는지요. 혹시 방문하는 순서라도 바꾸고 싶으십니까?”
기존에 짜인 우리 일정은 스페인 – 로마 – 프랑스 – 잉글랜드 – 네덜란드 – 오스트리아 – 베네치아 – 몰타 ? 스페인 순서로 되어있었다. 처음부터 몰랐던 걸 드러내지 않고 저걸 전부 캐내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던지.
“뒤쪽 순번에 있는 나라에 아직 방문을 허락해달라는 청을 보내지 않았으니, 지금 바꾸려 하신다면야 바꾸는 건 문제가 아닙니다. 어디부터 가고 싶기에 그러십니까?”
어차피 끝이 정해지지 않은 여행이다 보니, 어디에 얼마나 머물건 다 우리 자유다. 나를 따르는 이들도 그런 사정을 다 알고 있다 보니, 내가 향후 일정을 바꾸고 싶다고 해도 별로 괘념치 않았다.
“잉글국보다 루스국을 먼저 한번 가보고 싶소.”
“예에에? 그 야만스러운 구석에 뭐하러 가려고 하십니까?”
이형준의 얼굴이 확 찌그러진다. 안 좋은 인상이 아주 단단히 박혔구먼. 이 양반이 대체 뭣 때문에 러시아에 안 가려고 하는지는 모르겠다만, 기왕 온 유럽이니 나는 한번 가보고 싶다. 러시아, 가볼 만한 땅이잖은가. 그런데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정호찬이 끼어들었다.
“전하, 혹시…루스국에 가서 백면나인들을 실컷 탐하시려고 그러시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백면나인은 본래 백인 출신 궁녀를 뜻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조선에 처음 들어온 백면나인 전원이 우크라이나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동유럽 출신 백인 미녀를 가리키는 두 번째 의미가 덧붙었다. 정호찬이 말한 건 물론 두 번째 의미다.
정호찬이 싱글거리면서 던진 한마디를 들은 이형준의 눈매가 삽시간에 먹이를 노리는 매와 같이 날카로워졌다. 첫 번째 목적은 아니더라도 열 번째 목적쯤 되는 본심이 들켰으니, 얼른 변명을 꾸며내는 수밖에 없었다.
“어, 어험, 험. 아무려면 내가 그저 여색을 탐하려고 대유주를 횡단하고자 하겠는가?”
사실 내 마음은 거의 70세다. 하지만 몸이 17세가 되면서 오장육부가 쌩쌩해지고 보니 수시로 생각이 뽕밭으로 날아가는 참이다. 게다가 장조 때 거느린 여자 숫자만 해도 열이나 되었던 기억이 생생하고…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정말 여자나 품으러 러시아에 가겠는가.
“비록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북방, 얼어붙은 동토라고 하나 루스국은 우리와 국경을 맞댄 인접국이오. 저들과 평화를 유지하자면 저들의 군주를 만나 친교를 맺을 필요가 있지 않겠소? 아무리 개인의 사정이 국사에 개입될 여지가 없다 해도, 친해서 나쁠 것은 없을 거요.”
사실 이게 러시아에 가고 싶은 첫 번째 이유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지금 러시아 황제는 표트르 1세다. 바로 그 표트르, 표트르 대제란 말이다!
물론 표트르가 목표로 삼은 방향은 서쪽, 유럽으로 나가는 통로를 얻는 것이었음을 나도 잘 안다. 러시아는 아시아 방면으로의 진출은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일단 끝냈고, 표트르는 멀리 아시아보다는 가까운 유럽으로 나가기 위해 스웨덴과 싸우는 데 주력했다.
하지만 이쪽 세계에서는 다르다. 조선과의 국경이 레나강이라면 러시아는 태평양에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 누군지 모르겠는 그 황제는 레나강을 국경으로 하는 조약을 선뜻 맺었을지 몰라도, 표트르라면 그걸 뒤집겠다고 나설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내가 친교를 맺어 두면 저들이 조금이라도 망설이게 할 수도 있지 않겠소? 아예 오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렇게 대유주까지 왔으니 직접 찾아가서 친분을 맺어 둘까 하오.”
“별로 좋지 않은 생각이신 듯합니다.”
이형준은 딱 잘라 고개를 저었다.
“바로 그 인접국이라는 점이 문제입니다. 무술변계조약을 맺은 뒤 20여 년 동안은 루스와 큰 충돌이 없었다고 하나, 아직 완전한 우호국으로 자리매김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게다가 이번에 전하께서 어떤 연유로 견서사로 보내지셨는지 잊으셨습니까?”
러시아군을 끌고 돌아가서 북방에서 난을 일으키려 했다는 누명이라도 쓰면 끝장이다. 나만 죽는 게 아니고 동행했던 이들까지도 전부 역모죄를 덮어쓰게 될 거다. 이형준은 그런 이유를 대며 러시아행을 반대했다. 허나 이런 반응은 이미 예상한지라, 반론도 당연히 준비해두었다.
“그게 사실이 아니라고 부사가 입증하면 되지 않소. 그대가 나와 함께 온 이유부터가, 내가 엉뚱한 길로 가지 않도록 감시하고 계도하기 위함이 아니오? 내 계획에 대해 폐하께 알리고, 행여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잘 다스리겠다고 상세한 서한을 써서 본국에 보내시오.”
이형준이 아무리 내 ‘스승님’이라고 해도, 이번 견서사에서 정사는 나다. 내가 결행하겠다고 작정하면 이형준으로서는 손쓸 방법이 없다. 날 꽁꽁 묶어서 가둘 건가, 어쩔 건가?
물론 뻗대기만 해서 좋을 건 없다. 채찍을 한번 휘둘렀으니 당근도 한번 내밀 차례다.
“부사, 너무 안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지 마시오. 분명 루스국은 우리가 경계해야 할 새로운 이웃이오. 그러니 이참에 내가 저들의 수도에 가서 저들의 허실을 직접 살핀 뒤 폐하께 이를 상세히 아뢰어 국정에 도움이 되게 한다면 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소?”
한마디로 합법적인 첩보원, 화이트 스파이 노릇을 하겠다는 말이다. 이 제안에는 이형준도 솔깃한 듯 굳이 잔소리를 달지 않았다.
“그리고 내 원을 순순히 들어준다면…나도 부사가 바라는 일을 하나 실천하리다. 앞으로는 이제껏 해왔듯이 이 여자 저 여자에게 달라붙어 추근대지 않고 진중하니 지내겠소.”
“그것이 진심이십니까?”
“속고만 사셨소? 그리고 나는 지금 술 한 잔도 아니 마셨소.”
예전에 술김에 한 허언들과는 다르다는 강조다. 그리고 최근 며칠 동안은 그전과 달리 궁정 여자들에게 껄떡대는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기에 설득력이 더 있을 터였다.
“허나, 하나는 봐주어야겠소.”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올렝카, 그 폴수국 규수 말이오. 그 아이 하나만은 정인으로 삼아 데리고 다닐까 하오. 이 먼 객지에 와서 객고를 풀 상대가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소?”
‘폴수국(乶秀國)’은 폴란드를 뜻한다. 폴란드를 폴란드어로는 ‘폴스카’라고 부르는 데서 나온 표기다.
이형준은 딱 잘라 안된다고 하지는 못했다. 만약 자기가 거절하면 내가 도로 난봉꾼으로 돌아갈까 봐 우려된 모양이다.
“게다가 그 규수는 비록 서녀이기는 하나 폴수국 왕의 딸이오. 그만하면 집안도 괜찮은 편 아니오? 내가 어울리기에 모자라는 상대는 아닐 듯하오.”
올렝카가 사실은 공주, 아니 옹주라는 내 말에 이형준이 두 눈을 크게 떴다. 내가 말하기 전까지 전혀 몰랐던 모양이다.
“그, 그렇사옵니까? 하지만 그렇다 하여도 지금은 단지 시녀가 아닙니까. 부왕에게 딸로서 인정받지 못한다면 그저 흔한 여염의 처녀일 뿐, 어찌 왕녀라 하겠습니까?”
친부에게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사생아는 친자가 아니다. 조선에서도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멸시받는 후레자식이 되기 일쑤다.
“게다가 전하, 그 처녀가 진짜 폴수국 왕녀라면 그건 다른 의미에서 또 문제이옵니다. 한 나라의 왕녀를 일단 손댄 이상 버릴 수도 없지 않습니까?”
“왜 꼭 버려야 하오? 내가 명색이 친왕인데, 양첩 하나쯤 후비(後妃)로 두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소? 본국에 있는 친왕비도 이해할 거요.”
지금은 21세기가 아니니까 말이지. 몇 번 더 설득이 오가니 마침내 이형준도 손을 들었다. 이제 언제쯤 동쪽으로 떠나면 좋을지 적당한 시점을 잡아봐야겠다. 물론 베르사유에서 즐길 만큼 즐기고 나서의 이야기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