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898
3부 0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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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내 수행원들은 루이 14세가 자기편이 되어 함께 싸우자는 제안을 했다는 소리를 듣자 일단 경악했다. 내용은 차치하고, 그 교섭이 우리 모가지를 날릴 위험성 때문이다.
“전하, 전하께서는 그런 교섭을 맺을 권한이 없으십니다!”
“부사,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하지 않아도 다 알아듣소.”
이형준은 내가 조금 점잖아지나 싶다가 또 사고를 쳤다고 생각했는지 부들부들 떨었다.
“전하, 차라리 주색에 빠져 놀아나시는 편이 훨씬 낫겠습니다. 이러다가 폐하께서 전하를 의심하신 끝에 본국으로 소환하여 유폐하시거나 폐서인하시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이형준은 유럽에 도착하면 석 달에 한 번씩 체류보고서를 써서 한양으로 보내라는 칙명을 받고 있다. 곧 두 번째 장계를 써야 할 시점인데, 내가 러시아 방문 선언에 이은 큰 사고를 또 치고 만 거다. 둘 다 장계에 적어야 할 판이고 말이다.
“예로부터 우리 대한은 타국이 먼저 침공해오지 않는 한은 절대로 활을 들지 않는 전통을 지켜 왔습니다! 그런데 어찌 불랑국왕이 땅을 얻은 욕심으로 벌이는, 정당하지 못한 전쟁에 뛰어들어 이익을 구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이형준의 도덕심은 참 미묘한 선에 걸치는 모양이다. 종주국인 명나라를 빨아먹을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 군대를 보내 반란군과 싸우는 건 괜찮고, 유럽 국가들이 영토를 놓고 벌이는 전쟁에 한 몫 끼어드는 건 안 된다고?
“마땅히 경우가 다르지요. 대명을 구원해야 했다고 생각하는 건, 우리가 입은 은혜를 갚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 번국인 우리가 힘써 은혜를 갚으면 대국인 명은 마땅히 그 봉사에 답하는 희사(喜捨)를 내놓아야 하는 법이었으니, 그것도 합당한 일입니다.”
“그리고?”
“불랑국과 우리는 같은 급으로 교류하는 동등한 나라입니다. 우리 대한은 저들에게 하등 빚진 것이 없으며, 저들을 위해 피를 흘려줄 어떤 의리도 없습니다. 절박한 상황에 몰려서 긴급히 구원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겨우 땅을 더 갖기 위한 싸움에 끼자는 말입니까?”
이 정도 선이 과거 성리학적 전통과 새 시대의 현실적 실리주의를 모두 가지고 있는 조선 사대부들의 일반적인 수준인가. 이해할 만은 하다. 하지만 먹음직스러운 미끼가 있고 그걸 낚아챌 능력이 있다면, 도전해보는 것도 괜찮은 일 아닌가.
“부사는 필리핀이 어떤 가치가 있는 땅이라고 생각하오?”
나 때는 그냥 국문으로 ‘필리핀’이라고 적었는데, 지금은 한자로 ‘必立彬’이라고 쓰더라. 실제 발음과 크게 차이는 안 나서인지, 저렇게 쓰고 그냥 필리핀이라고 읽는다고 한다. 단, 독립국이 아니라 스페인에 속한 일개 지방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국(國)’은 붙이지 않는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소관이 말하고자 하는 건 가치의 문제가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과거 서반아 국왕 펠리페 2세가 우리 대한을 돕느라고 얼마나 성의를 보였는지 모르십니까?”
“그건 나도 아오.”
맹세코 말하건대 그 문제라면 내가 이형준보다 열 배는 더 상세히 알고 있을걸. 그 ‘도움’을 직접 받은 게 바로 나란 말이다.
“아신다니 다행이군요. 펠리페 2세는 과거에 아무 대가 없이 작물과 가축의 종자를 보내 우리 백성들이 키우고 가꿀 수 있게 하였으며, 장인(匠人)과 무사들을 따로 보내 그 재주를 우리가 배우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 은혜를 잊고 욕심 때문에 그 후예를 향해서 활을 겨눈단 말입니까?”
감정적으로만 보면 이형준의 항변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주장 속에 내가 파고들 허점이 있었다.
“부사, 잘 생각해보시오. 펠리페 2세의 은혜를 갚자면, 합당한 후손이 그 보위를 물려받게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소?”
“…그야 당연한 일입니다.”
“바로 그 가장 합당한 후손이 현 불랑국왕의 자손이란 말이오.”
성년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전왕 펠리페 4세의 자녀는 카를로스 2세 외에는 딸 둘밖에 없다. 첫 왕비인 프랑스의 엘리자베트 공주가 낳은 마리아 테레사 ? 현 프랑스 왕비 마리 테레즈 – 와 계비(繼妃)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가 낳은 마르가리타 마리아 테레사다.
“이복형제가 있기는 하나, 대유주에서는 서자에게 계승권을 주지 않으니 서반아 현왕이 후손 없이 붕어한다면 두 누이나 그 후손이 왕위에 오르는 것이 실로 당연하지 않소? 또한, 그 우선권은 언니인 불랑국 왕비에게 있다고 봄이 실로 가하오.”
마르가리타 마리아 테레사는 외삼촌이자 고종사촌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와 결혼했는데, 22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는 바람에 자식을 얼마 낳지 못했다. 그나마 어려서 다 죽는 바람에 살아남은 건 올해 열세 살 난 딸 하나가 고작이다.
“하지만 불랑국 왕비는 장성한 아들을 두었잖소. 왕세자는 현 서반아왕의 생질(甥姪)이고 또한 전왕의 외손(外孫)이니, 가장 가까운 핏줄로서 서반아 왕위를 물려받을 합당할 권리가 있소. 이를 돕는 일이 어찌 펠리페 2세가 우리에게 베푼 은덕을 갚는 일이 아니겠소?”
스페인 영토를 노리고 스페인과 전쟁을 한다면 분명 배은망덕한 일이 되리라. 하지만 그 정통한 왕통을 즉위시키기 위해 참전하고, 그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받는다고 하면 당연히 문제가 달라진다. 조금 전에 이형준 자신이 그렇게 주장하지 않았는가.
“그렇다 해도 전하께는….”
이형준이 뭐라고 더 반박하려는데 옆에서 듣고 있던 정호찬이 끼어들었다.
“부사 영감, 영감께서 말씀하셨다시피 전하께서는 불랑국왕과 그런 약조를 체결할 권한도 없으시고, 실제로 아무 약조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본국에는 그저 불랑국왕이 그런 제안을 했다고만 알리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정호찬과 내가 합세하자 이형준도 반박을 그만뒀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아직 벌어지지도 않았고 우리한테 충분한 권한도 없는데 그걸 붙들고 늘어지면 뭘 하겠는가.
“알겠습니다. 그럼 폐하께는 최대한 간략한 내용만 적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시오.”
시계를 보니 마침 나갈 시간이 되었다. 장계 때문에 고민하는 이형준을 숙소에 놓아두고, 나는 정호찬을 비롯한 다른 인원들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오늘은 아라미츠가 총사대 시절 친하게 지내던 자기 친구들을 소개해주겠다고 한 날이라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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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 창문 밖으로 구경하는 파리 시가지는 참 신기했다. 사실 나는 현대에서도 파리에 와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치솟는 호기심을 만족하기 위해 약속 장소인 아무개 후작 저택으로 가면서 열심히 좌우 풍경을 살폈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나왔다.
“상희가 같이 왔다면 참 좋았을 것을….”
둘이서 같이 꾸던 꿈 중 하나가 함께 떠나는 유럽 여행이었는데. 이번 생에서도 이루지 못할 듯하다. 17세기 말이라고 하면 여자가 해외여행을 나서기는 좀 어려운 시대니까.
유럽 왕족이나 고위 귀족이라면 어느 정도는 가능하겠지. 하지만 조선에서는 가족이 함께 해외로 이주하는 형태가 아닌 이상 여자가 해외여행을 한다는 건 꿈도 꿀 수 없다. 셀린과 롤리타 같은 경우는 본래가 외국인이었으니 아예 기본이 다르고.
이유는 간단하다. 과거에 문성군부인이 남편 광해군과 함께 유럽에 갔다가 이혼과 현지 정착이라는 대사건을 일으키지 않았는가. 이 전례 덕분에 여자가 여행 삼아서 출국하는 건 도저히 바랄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고 했다. 이것도 광해군 일가가 남긴 똥인 셈이다.
그나마 ‘가까운 종친이 외국에 나가는’ 데 대한 금제는 내가 첫 번째 선례가 되면서 이제 깨졌다. 하지만 여자가 해외에 나가려면 아직 뚫어야 할 벽이 많다. 사실, 사내들이 딸이나 처를 데리고 해외에 나가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여자와 바가지는 밖에 내돌리면 깨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공연히 집안의 부녀를 데리고 외방에 나오면 자유로이 주색을 즐길 수 없는데, 누가 굳이 집안의 부녀를 데리고 나오겠습니까? 전하께서도 친왕비 마마를 두고 나오시니 편하지 않으십니까?”
“그렇긴 하다만….”
정호찬의 말에 따르면, 해외를 수시로 오가는 외수사나 수군 관리들은 주재하는 고을마다 현지에 첩 하나씩 두는 정도는 보통이라고 한다. 대개는 현지인 여자지만, 간혹 조선에서 첩을 데려다 놓기도 한다. 조선인이 아닌 다른 나라 출신인 경우도 있다.
“토인 여자 외에도 당녀(唐女, 중국 여자)나 왜녀(倭女)를 구해다 두는 경우도 많습니다. 둘 다 구하기도 쉽고, 용모도 가장 입에 맞으니 말이지요. 남만이나 천축 계집들은 시커먼 피부부터 보기 좀 그렇고, 체취도 고약한 편이라 말입니다.”
거기서 나온 혼혈아들은 어찌 되냐 하니, 본국으로 데려오지 않고 그 어미와 함께 현지에 그냥 버리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데려와 봐야 가문에 누만 되지, 보탬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라나. 잠시 혀를 내두르다가 물어보았다.
“옛날 이기빈처럼 양첩을 데리고 나가 밖에 두는 경우는 없나?”
“해성공 이기빈이 데리고 있던 백면나인 셀린은 첩이 아니라 후처나 마찬가지였으니 조금 경우가 다르지요. 그렇지 않더라도 양첩은 얻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 귀중한 것을 자주 찾기도 힘든 나라 바깥에 던져두겠습니까?”
조선에 거주하는 백인들 중 가장 큰 집단인 네덜란드인들은 다들 독실한 천주교도라 첩이 되는 것도, 비신자와 혼인하는 것도 극도로 꺼린다고 한다. 게다가 수백 명씩 집단이주를 했으니 자기들 집단 안에서 상대를 구하기도 쉽다.
그런 연유로 지금도 네덜란드인 집단은 거의 조선인들과 피가 섞이지 않았다. 네덜란드인 남자가 조선 여자를 첩으로 두는 사례는 있어도, 그 역은 거의 없다나. 체코인 역시 규모는 작아도 이들과 마찬가지라고 한다.
혼혈에 거리낌이 없는 건 남자들만 건너온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프랑스 놈들밖에 없다. 이 자들은 개종 여부와 무관하게 조선 여자들과 혼인하면서 당연히 혼혈아를 잔뜩 낳았고, 권세가들이 맞아들인 ‘양첩’도 대개 이쪽 계열 혼혈인 경우가 많다. 펠리페 2세 시절 건너온 기술자와 고문관들도 따지자면 이쪽에 속한다.
“그쪽이야 그래도 정식으로 혼인해서 낳은 양민이니 괜찮습지요. 문제는 다른 쪽에서 난 혼혈아들입니다.”
“무슨 문제가 있기에 그러는가?”
정호찬이 이야기하다 말고 씁쓰레한 표정을 지었다.
“양인들은 체구가 크고 건장하며 양물까지 크니, 그예 혹한 부인네들이 남몰래 양인들을 이부자리 속으로 끌어들였다가 들통이 나서 패가망신하는 사례가 간혹 있지요. 참으로 몹쓸 일입니다.”
“허어? 나름 은밀히 한다고 했을 텐데 어찌 들켰느냐?”
젠장, 이쪽 세계에서도 덩치 크고 코 큰 남자는 양물도 크다는 속설이 통하는 모양이군. 중요한 건 거시기 크기가 전부가 아닌데 말이다. 아무리 도구가 커 봐야, 쓰는 놈이 제대로 쓸 줄 모르면 아무 소용이 없는 법이다.
“밀회 현장을 들키지 않았다고 해도, 희고 검은 색모색목(色毛色目)한 아기를 낳고 보면 양인 간부(姦夫)를 두었음을 숨길 재주가 없지 않겠습니까? 덕분에 신세를 망친 부인네들이 잊을 만하면 하나씩 튀어나오곤 했습지요.”
“어허. 허나, 그거야 스스로가 잘못한 때문이니 누구를 탓하겠는가.”
불륜 상대인 양인 사내 쪽도 붙잡히기만 하면 유부녀와 간통한 죄로 호되게 매를 맞는다. 그래도 가끔 사고가 터졌다는 걸 보면, 성욕도 확실히 인간의 본능이긴 본능이다.
“옛날 상빈 이씨께서는 이를 가엾게 여겨 집에서 쫓겨난 부인네들과 그 자녀들을 모아서 보살피셨습니다. 도성 바깥, 남산 아랫자락에다가 자혜원(慈惠園)이라는 집을 지어 갈 곳이 없는 어미와 그 자식들을 두어 머물게 하시고, 천주교 신부들에게 돌보게 하셨습니다.”
“상빈…께서? 장조의 후궁이신 상빈 말이냐…?”
상희가 그런 일을 했단 말이지? 하긴 그 시대에 불우한 혼혈아들을 모아서 보살피려고 할 사람이 상희 말고는 없었을 것 같기는 하다. 시설 관리도 천주교 신부들이 맡는 편이 가장 나을 것 같고. 불교에서 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서양인들이 얽힌 일이니.
“집을 따로 마련할 만큼 그런 사례가 많았더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순수한 우리 백성으로 고아나 기아가 된 아이들도 모아 돌보았지요. 기근이 심해지면서 버려진 아이와 부모를 잃은 아이 수천을 돌보아 키워낸 곳이 자혜원이고 우리 견서사를 따라온 역관 이홍석도 그곳 출신이지 않습니까.”
예수회 신부와 자원한 신도들이 돌보다 보니, 수용된 아이들이 외국어를 익히기는 유리한 환경이다. 그래서 여기서 실력이 우수한 아이들은 사역원에서 뽑아다 쓴다고 했다. 우리를 수행하는 이홍석만 해도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네덜란드어에 라틴어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한다나.
“잉글랜드 말은 모른다는가?”
“사람이 완벽할 수는 없는 법이지요.”
“아쉽구나.”
내가 혀를 차자 정호찬이 슬며시 속삭였다. 이홍석이 마차 안에 동석하지 않고 마부석에 앉아 있지만 그래도 혹시 들릴까 봐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전하, 혹시 잊으셨을까 봐서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절대 이 역관에게 자혜원이 있던 동리 이름을 언급하시면 안 됩니다. 매우 기분 상해하니, 부디 배려를 부탁드립니다.”
“동리 이름이 어떻기에 그러느냐? 나는 자혜원이 어디 있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모르실 리가 없을 텐데요. 이태원이잖습니까.”
이태원! 이태원(梨泰院)은 본래 조치원, 장호원, 사리원처럼 여기 있던 원(院)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현대에 있을 때는 임진왜란 이후에 생긴 줄 알았는데, 내가 연산군이 되었을 때 보니 이미 존재하는 지명이었다.
“세간에서는 동리 이름을 따서 자혜원을 이태원(異胎院)이라고 부르는 자들이 많습니다. 자혜원에서 자란 이들은 이를 매우 모욕적으로 여기니, 행여 실수로라도 그리 부르지 말아주십시오.”
“알겠네. 주의하지.”
파리 풍경을 구경하며, 잡담을 나누며 이동하다 보니 목적지에 도착했다. 저택 정문 앞에 아라미츠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전하, 오는 길은 평안하셨습니까? 자, 이쪽으로 들어오시지요.”
화려한 저택 장식을 감상하며 안내를 따라 들어가니 서른 명은 족히 될 것 같은 남자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일제히 일어서서 내게 예를 표했다. 아라미츠, 정말로 발이 꽤 넓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