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900
3부 01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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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에 들어서면서 조금 약해진 아침햇살이 커튼 틈으로 비친다. 부드럽고 매끈한, 은은한 향내를 풍기는 살이 내 몸에 닿아있는 게 온몸으로 느껴진다. 간만에 베르사유에서 아침에 눈을 뜬다.
‘일어났어?’
상희는 늘 나보다 먼저 눈을 떴다. 그래도 내 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나를 품에 안은 채 내 머리카락만 쓰다듬고 있곤 했다. 그러다가 내가 잠을 깨고 눈을 뜨면 그제야 웃으며 아침 인사를 건넸다.
“하암…일어나셨어요, 전하?”
올렝카는 다르다. 내가 먼저 일어나면 그제야 일어나서 눈을 비비며 인사를 한다. 어려서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하면 귀엽다. 사실 이 시대에 16세면 충분한 어른이지 싶긴 하다만, 내 생이 웬만한 노인급으로 길어지고 보니 그냥 애로 보인다.
“더 자거라. 네가 내 시중을 들 필요는 없으니까.”
“감사해요….”
나와 만난 첫날부터 배고프다, 졸리다 타령을 했던 걸 보면 은근히 어린 티가 난다. 하는 꼴을 보면 아무리 봐도 귀족이 아니라 그냥 좀 사는 평민 출신 같다. 그래도 폴란드 공주 일행이 얘를 대하는 걸 보면 일단 얀 소비에스키의 딸이긴 한 것 같지만 말이다.
벨을 눌러 시종에게 모닝커피를 가져오게 한 뒤 조용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브레스트에 보름 동안 머물다 왔다고 그런지 아직 관람객들이 웅성거리지 않는 정원 모습이 참 반갑다. 내가 베르사유에서 살고 있다니, 참 현실 같지 않은 현실에 여전히 놀라고 있다.
아, 루이 14세는 웅장한 궁궐을 프랑스 국민들에게 과시하기 위해 일반인도 옷만 제대로 갖춰 입으면 들어와서 구경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테러가 일상화된 21세기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지금은 17세기니까 뭐.
다만 아직 베르사유 궁전은 내가 아는 그 상태로 완성되지는 않았다. 아직도 이 건물 저 건물이 세워지고 있고 정원과 숲이 추가로 조성되고 있다. 역사대로라면 아직 한 30년 정도 더 있어야 완성되겠지?
“전하, 커피를 가져왔습니다.”
“두고 가게.”
이번 커피도 아라비아, 모카 산이다. 커피잔도 조선제인데 기왕이면 커피도 대남도산이면 좋지 않나 싶지만, 아무래도 운송비를 고려하면 아라비아 커피가 더 싸서 그런 모양이다. 홍차는 몰라도 커피는 사실 이쪽이 더 가까우면서 원조기도 하니까.
“아…커피 냄새…. 전하, 저도 마셔도 되나요?”
잠든 것 같던 올렝카가 부스스 눈을 떴다. 그 모습을 보자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물론이지. 다만 맛이 진하니까 물 타서 마시거라.”
내 눈에 들고 싶은지, 올렝카는 내가 하는 거라면 뭐든 함께 해 보려고 노력했다. 커피만 해도 내 곁에 오기 전에는 입도 대 본 적이 없는 아이였다. 내가 입에 대기 힘들 정도로 쓴 커피를 즐기던 상희와는 정말 다르다. 문득 혼잣말이 나왔다.
“상희는 이번 생에 커피라도 마실 수 있는 신분일까….”
수행원들에게 듣기로 상빈, 즉 상희는 내가 죽은 뒤로 꽤 순탄하게 생을 살았던 것 같다. 슬하에 둔 두 옹주는 외국으로 시집가서 다시 만나지 못했지만, 그래도 편지나 선물은 자주 오갔다고 한다. 딸은 못 만나도 외손자들이 들어와서 비공식적으로 찾아가 인사도 올렸고.
우리 외손자들이 상희가 지내는 진안군저(邸)를 비공식적으로 찾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야 말할 것도 없다. 모든 왕자와 왕녀는 법적으로 중전의 자녀로 취급되는 그 법도 때문이지 뭐겠는가. 그나마 마주 앉은 자리에서는 상희를 외조모님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당시 삼사에서 논란이 좀 되었습니다만, 경조께서 고 하명하신 덕분에 그럭저럭 큰 소란 없이 가라앉았습니다.’
이 일만이 아니라 여러 다른 예화로 미루어봐도 성이 녀석이 확실히 가족에 대한 배려는 있었던 것 같다. 조용히 잘 지내기만 하면 형제들도 잘 챙겼고, 내 비빈들에게 하는 예우도 확실했고. 덕분에 진안군도 평생 글이나 끄적이면서 속 편히 잘 살았다고 한다.
‘그놈이 쓴 임진록 참 기가 막혔는데….’
정호찬이 마침 그 책을 가지고 있기에 빌려서 읽어봤다. 그런데 다른 의미에서가 아니라 초반 진행이 너무 실제 역사랑 비슷해서 기가 막혔다. 그래도 그 소설에서는 왜군 진격이 한강에서 막혔고, 임금도 몽진하지 않고 도성에서 버티긴 했다. 역사보다 잘 풀렸네.
도성 수비군이 적과 한강을 사이에 놓고 혈전을 벌이는 사이 수군은 왜군과 일본 본토를 연결하는 수로를 끊고, 각도에서 올라온 근왕군은 적의 보급로를 끊었다. 견디지 못하게 된 왜군은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철수하다가 죽령을 넘지 못하고 탄금대 앞에서 섬멸당했다.
소설 속 조선은 전쟁 준비가 그다지 철저하지 못해서 일본에 반공까지 가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이만하면 매우 잘 대처한 셈 아닐까 싶다. 몽진도 안 했잖은가. 다만 실제 역사처럼 몽진하는 묘사를 넣었다면, 아무리 진안군이 왕자라도 불경죄로 경을 쳤겠지 싶다.
맨 뒤에 붙어 있는 납세인지를 보니 이 책이 인쇄된 해는 연가 17년이었다. 연가(延嘉)는 경신대기근을 수습한 공덕으로 열조가 된 내 선황의 연호다. 1650년이 연가 원년이니, 연가 17년은 1666년이다. 그러고 보니 연가 17년은 마포 대성당이 완성된 해이기도 하다.
다만 이건 8쇄본이고, 초판이 나온 해는 만력 39년이라고 되어있었다. 내가 죽은 무신년(1608)이 만력 36년이었으니까, 내가 죽고 3년 뒤에 낸 거다. 연이가 칭제건원하기 이전에 있었던 일이라서 그냥 명나라 연호로 적었나 보다.
책 뒤편에 본문과는 별개로 실린 연보(年譜)를 보니 진안군이 평생 쓴 소설은 한 40편쯤 된다고 했다. 지금 여기서 그런 종류의 책을 주문했다가는 무슨 소리를 듣게 될지 모르니, 언젠가 귀국할 때가 오면 그때 가서 다른 것들도 구해다 읽어봐야겠다.
연보 맨 뒤에는 진안군이 사망한 해가 연가 3년 임진년(1652)이라고 적혀 있었다. 향년 67세…조카 연이가 칭제하는 모습을 보았고 생전에 군왕에 봉해져 전하 소리까지 들었다니, 나름대로 편안히 살다가 간 셈이다.
그나저나 이번 세상에서 상희는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그동안 몇 번이나 고민해봤지만, 어떻게 행방을 알아볼 방법이 없다. 지금 내가 본국에 있을 것 같으면 조보에다 사람 찾는 광고라도 낼 텐데, 프랑스에 머물고 있으니 뭐 할 수 있는 게 있어야 말이지.
어쩌면 이번 생에는 각성 시기가 어긋나서 아직 세상에 없을지도 모르고, 한참 전에 벌써 각성했지만 이미 다른 사람과 맺어져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나한테 상희를 원망할 권리는 없겠지. 나한테도 당장 올렝카가 붙어 있는 판에….
“전하,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세요? 이따가 국왕 폐하를 만날 일이 걱정되시나요?”
“그건 아니다.”
휴우, 마음 편하게 먹자. 아무리 보고 싶다고 해도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알 수 없으니, 일단은 직면한 현실에 충실해 보자고 결심하지 않았나. 이번 생에서 다시 만날 인연이라면 언젠가 꼭 만나게 되겠지.
– 16 –
루이 14세와의 두 번째 만남은 지난번과는 달랐다. 이번에는 오를레앙 공작이 출석하지 않았고, 루부아 후작과 콜베르 같은 대신들 몇 사람이 동석했다.
물론 이 많은 사람이 나 하나를 만나기 위해 모인 건 아니다. 루이 14세가 대신들과 함께 국사를 의논하는 회의 석상에 내가 잠시 불려왔을 뿐이다.
내가 허리 숙여 인사를 하자 루이 14세가 자애로운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래, 브레스트는 잘 다녀왔는가? 보고 싶은 건 다 봤고?”
“예, 폐하.”
브르타뉴반도에 있는 브레스트는 프랑스 해군이 운영하는 3대 주요 군항 중 하나다. 다른 하나는 지중해에 면한 툴롱, 다른 하나는 서부 대서양 연안에 있는 로슈포르다. 삼총사에서 악역으로 나오는 로슈포르 백작과 관련이 있는 도시인지는 잘 모르겠다.
“콜베르 경이 안배해준 덕분에 견학을 잘 마쳤습니다. 현장을 둘러보기만 한 게 아니라 하고 싶던 일도 잔뜩 해 보았고요.”
나도 모르게 입가가 살짝 일그러졌다. 아까 올렝카를 보고 지어졌던 부드러운 미소와는 다른, 내가 정말 고생을 사서 했음을 자인하는 쓴웃음이었다.
“대공 전하…정말 메고 가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일세. 믿고 맡겨 보게나.”
이형준과 정호찬을 비롯한 내 수행원들이 경악하는 표정으로 보는 가운데, 허름한 작업복 차림을 한 내가 굵직한 각재(角材)를 메고 번쩍 일어섰다. 그리고 거침없이 걸어가 지정된 장소에 내려놓았다.
“정말로 계속하시겠습니까? 재무대신 각하께 전하께서 조선소 각 부문을 잘 둘러보실 수 있도록 편의를 봐 드리라는 지시를 받기는 했습니다만, 이러시리라는 연락은 없었던지라….”
프랑스인 조선기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날 말렸다. 하지만 나는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호기롭게 외쳤다.
“걱정하지 말게나. 이 정도 일은 제대로 힘쓰는 일 축에도 못 드니까. 거기 쌓인 각재를 다 나른 뒤에는 못질도 좀 해 볼 수 있을까?”
“무, 물론입니다.”
조선기사의 뒤를 따라 걸어가려는데 이형준이 달려와 매달렸다. 당장이라도 통곡할 듯한 기세였다.
“제발 그만두시옵소서! 전하께서는 친왕이십니다! 막일꾼이 아니십니다!”
“부사, 몸으로 익히지 않으면 이런 건 배울 수가 없소. 참으시오.”
허허 웃고 발걸음을 옮기는데 기어코 뒤에서 통곡 소리가 들렸다. 어휴, 정호찬이 나서서 좀 진정시켜 주겠지.
브레스트 해군 공창(工廠)에는 새로 건조하는 배와 수리 중인 배 수십 척이 있었다. 나는 브레스트에 도착한 뒤에 사흘 동안 항구와 조선소를 둘러보고, 열흘 동안 조선소에서 온갖 잡일을 하고, 이틀 동안 의관 이진원에게 침 맞고 뜸 뜨면서 쉬다가 파리로 돌아왔다.
이형준은 열흘 내내 난리를 쳤다. 자기가 바란 건 내가 종친답게 품위를 지키면서 성실히 사절 임무를 수행하는 거지, 막노동꾼처럼 일하라고 요구한 게 아니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나도 아무 생각 없이 그 힘든 일을 했던 게 아니다. 다 목적이 있어서 한 일이다.
생전 해 보지 않은 중노동에 온몸의 뼈와 관절이 비명을 질렀지만, 그래도 그만한 소득은 있었다. 예전처럼 서류만 넘기는 게 아니라 직접 몸으로 구르면서 조선소라는 곳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체험할 수 있었고, 조금이지만 기술도 배웠다.
역사책에 보면 표트르 대제가 서유럽 시찰을 나왔을 때 네덜란드 조선소에서 직접 일하며 기술을 익혔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직접 굴러보니, 표트르가 ‘직접 익힌’ 기술은 딱히 고급 레벨은 아닐 것 같다. 고급 기술은 며칠, 몇 주 정도 일한다고 습득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하여간 돛대 위에도 올라가 보고, 타르에 적신 섬유 부스러기로 만든 뱃밥으로 선체 틈도 메워 보고, 프랑스인 조선공들과 어울려 밥도 먹고 대화도 하면서 조선소 분위기를 익혔다. 조선에 있었다면 절대 못 했을 일 하나를 해 본 셈이다.
덤으로 이 조선소 노동은 비교적 안전한 방법으로 내 체력적 한계를 시험해 볼 기회기도 했다. 성친왕의 키는 5자 10치(약 175cm), 체중은 120근(72kg)으로 체격은 비교적 괜찮은 편이지만, 과연 전체적인 체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다소 미지수였기 때문이다.
물론 무거운 자재나 위험한 공구를 많이 사용하는 조선소는 인명사고 위험이 큰 위험한 작업장이다. 하지만 조선소 측에서도 사고 위험이 있는 현장에 나를 보내는 부주의한 짓은 하지 않았고, 나도 너무 위험한 일은 알아서 삼갔다.
이런저런 목적을 모두 무난히 달성하고 돌아온 만큼 브레스트 여행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누가 시키지도 않은 고생을 내가 사서 한 건 분명했고, 그 일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쓴웃음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전하께서 사전 협의도 없이 인부 노릇을 하겠다고 덤벼드시는 바람에 우리 감독관들이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후일 우리 관리하에 있는 어느 작업장에 방문하시더라도, 그런 일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미안하오, 재무대신. 앞으로는 주의하겠소.”
피로에 지친 얼굴을 한 콜베르가 내게 날 선 항의를 보냈다. 미리 양해를 구하지 않은 건 분명 잘못이니 사과는 했다. 하지만 내가 사전에 조선소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콜베르에게 양해를 구했다면 절대 허락하지 않았을 게 아닌가?
루이 14세는 콜베르와 달리 멋대로 저지른 내 행동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도리어 지난번 면담 때 그랬듯, 무척 재미있어하는 기색이었다.
“놔두게, 재무대신. 대공이 해 보고 싶다지 않은가. 지금 체험해보지 않으면 귀한 몸으로 언제 또 그런 일들을 해 보겠나?”
“폐하, 성친왕 대공이 우리나라에서 사고라도 당한다면, 우리는 주인으로서 손님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소관은 대공에게 우리 프랑스 해군의 위용을 보여주려 브레스트 항구를 방문할 수 있게 배려하였지, 사고를 유발하라고 보내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사고는 안 났잖은가. 그럼 된 거지 뭘.”
루이 14세는 서슴없이 쿡 자르더니 날 돌아보았다.
“그대가 고문관으로 데려갔으면 하는 이들의 명단을 제출하면서 우리 조선소를 견학하고 싶다고 요청하기에 짐이 허락했었지. 그래, 브레스트에 다녀온 소감을 정리하면 어떤가?”
“프랑스 해군의 위용은 역시 막강했습니다. 우리 조선 해군에 꼭 필요한 요소를 한 가지 고르라고 한다면, 저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프랑스제 군함을 꼽겠습니다.”
이미 답은 준비해두었으므로 서슴없이 대답했다. 내 답을 들은 루이 14세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고 다른 대신들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콜베르 혼자만 무관심한 표정으로 묵묵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짐의 군함이 그대의 마음에 든다니 무척 기쁘네. 성친왕 대공, 그대는 매우 정확한 눈을 가지고 있군.”
“감사합니다, 폐하.”
전체적인 해군력에서 보면 프랑스는 20세기까지 계속 영국에 뒤졌다. 하지만 그 근본적인 원인은 숙련된 선원의 부족, 그리고 육군에 자원을 우선 집중할 수밖에 없는 전략적 환경에 있었다. 특히 범선 시대에는 군함 자체는 프랑스제가 영국제보다 우수한 경우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