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917
3부 035화
– 7 –
튀르크군에는 기병 돌격을 저지할 만한 제대로 된 장창방진이 존재하지 않았다. 내 눈에 들어오는 적의 무장은 소총과 활, 짧은 창과 언월도 정도가 고작이었다. 이런 무기를 들고 중기병의 돌격을 저지하겠다고 나서는 건 헛된 몸부림에 불과하다.
물론 소총과 활을 충분한 수량으로 갖추고 제대로 된 사격 통제를 시행해서 일제사격을 가하면 기병대에 큰 피해를 줄 수 있다. 하지만 지금 튀르크군 진영은 질서 잡힌 사수들도, 침착하게 사격을 통제할 수 있는 지휘관도, 마지막 방어를 해줄 창병대도 남아있지 않았다.
신성동맹군 보병대에 몰려 한가운데로 몰린 튀르크군은 돌격을 당하기 전부터 이미 겁에 질려 있었다. 기병들이 달려들자 산발적인 소총 사격과 화살 세례가 가해졌으나, 막으려는 시도는 그게 전부였다. 제대로 된 반격은 사실상 없었다.
“달려라, 달려!”
혹시 내가 폴란드어에 능숙하다고 해도, 이 엄청난 혼란 속에서 목소리로 명령을 내리는 건 의미가 없다. 내 뒤에서 따라오는 연대 기수가 들고 있는 연대기, 내 손에서 번쩍이는 기병도의 칼날, 투구 뿔에 묶어둔 올렝카의 보라색 스카프가 그 자체로 돌격 명령이었다.
만약 적이 방어진을 계속 유지했다면 후방으로 돌아가 새 창을 들고 다시 돌격했으리라. 하지만 이미 적이 무너지고 있는데 창을 가지러 돌아갈 바보는 없다. 내 연대를 비롯한 전 병력이 앞을 가로막는 모든 방해물을 짓밟으며 돌진했다.
칼과 철퇴가 사방으로 내리쳐졌다. 화살이 적군의 목덜미를 뚫고 가슴에 박혔다. 총성이 울릴 때마다 구멍이 뚫린 시체가 바닥에 나가떨어져 파르르 떨었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그 모든 희생자를 쇄도하는 전마들이 짓밟아 으깼다.
“낙마하면 아군에게 밟혀 죽을 거다! 절대 떨어지지 마라!”
내가 조선말로 호령하자 우렁찬 답이 사방에서 돌아왔다.
“예, 전하!”
내 근접 경호를 맡은 세 무관도 전력을 다해서 싸웠다. 앞에 선 김종건과 홍상훈은 검과 편곤을 들고 휘둘렀지만 정호찬은 활을 들고 달리며 연달아 화살을 날렸다. 겨냥하는 적은 대개 나를 향해 총이나 활을 겨누는 놈들이었다.
정호찬이 분전하는 거야 예상했던 바고, 홍상훈도 별 동요 없이 잘 싸웠다. 크라쿠프에서 특별히 대장간에 주문해서 제작한 편곤을 휘두르는데, 무심한 얼굴로 튀르크군의 머리통을 후려쳐 부수는 모습에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였다.
김종건의 분투도 인상적이었다. 필요 없는 싸움터에 억지로 끌려 나왔다는 불만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하지만 적의 몸에 창을 꽂아 넣자마자 손을 놓고, 잽싸게 칼을 뽑아 휘두르는 솜씨는 실로 일품이었다. 역시 익위사에 거저 들어온 건 아니었다.
아라미츠는 도망치는 적병을 베거나 이미 쓰러진 자들을 짓밟지는 않았다. 하지만 먼저 덤벼드는 적병에게는 서슴없이 칼을 뻗었다. 측면에서 내게 총이나 활을 겨누는 녀석들도 베었다. 덕분에 내가 한층 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몇 명째일까, 뒤처진 튀르크 병사의 뒷덜미를 기병도로 내리친다. 강철로 벼린 칼날이 한 치 남짓한 살을 베고 들어가자 뼈가 걸린다. 하지만 ‘카라벨라(karabella)’라고 하는 묵직한 기병도는 사람 척추 정도는 우습게 쪼갰다. 양초를 베는 정도 저항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기병도 날이 휘어 있는 이유는 이론적으로는 옛날부터 알았다. 하지만 내가 직접 휘둘러 사람을 베어 보니 기병에게 휜 칼이 좋은 이유가 몸으로 체감이 된다. 정말 부드럽게, 저항 없이 칼이 미끄러지며 사람을 벤다. 도중에 뼈가 걸려도 칼이 막히지 않는다.
심지어 옆으로 휘두른 칼이 투구를 쓰지 않은 머리를 후려치면서 말 그대로 ‘머리 뚜껑이 열리는’ 광경도 보았다. 깔끔하게 잘린 두개골 윗부분이 허공으로 날아오르고, 피와 뇌수가 사방으로 튀었다. 내 얼굴에도 피가 묻었다.
피만 튀는 게 아니다. 내가 벤 적병들이 지르는 비명도 잇달아 내 귀를 찔렀다. 하지만 처음에는 날카롭게 들리던 그 비명들은 얼마 안 가서 덤덤해졌다. 여기는 전장이고 나는 내 역할을 수행하는 한 병사일 뿐이다. 내 역할은 적을 죽이는 거다.
자극 하나하나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치는 여기 없다. 나는 사람을 벤다는 의식도 없이, 훈련한 대로 눈앞에 보이는 형체들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모두 밟아라, 밟아 버려!”
보통 말은 사람을 밟기를 꺼린다. 하지만 훈련된 전투마들은 앞에 놓인 튀르크군의 몸이 살았건 죽었건 상관없이 짓밟으면서 질주했다. 내 오추마(烏?馬), 이형준이 항우가 몰아도 될 말이라며 이름을 지어준 오추마도 수많은 시체와 부상자를 그 발굽으로 밟아 뭉갰다.
어느새 튀르크군 대열은 완전히 무너졌다. 2만 기 가까운 신성동맹군 기병대가 맹렬하게 돌격하면서 6~7만 명 정도 되어 보이던 튀르크군 본대까지 무너졌다. 흥분에 취한 내 눈에 수천 개나 되는 천막이 보였다. 적 본진까지 돌파하는 데 성공한 거다.
빈으로 가지 않기를 정말 잘했다! 행여 빈으로 갔다가 제때 도망치지 못했다면 굶주림에 시달리며 원군이 오기만 기다리다 대포에 맞아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보다야 지금이 낫지!
“저 바보 자식!”
그때 내 오른쪽에서 나보다 좀 앞서던 김종건이 갑자기 비명과 함께 앞으로 나뒹굴었다. 말이 총이나 활에 맞았거나, 마구 짓밟고 달리다가 어디 발이라도 걸린 게 분명해 보였다. 윙드 후사르는 애초에 경기병이라, 사람은 갑옷을 입어도 마갑(馬甲)은 사용하지 않는다.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아직 천막이 늘어선 적 본진까지는 거리가 남았다. 여기다 내버려 두면 누가 탄 말에 짓밟혀 죽을지 모른다. 기병도를 왼손으로 옮겨 쥐며 소리를 쳤다.
“손 내밀어!”
김종건도 숙련된 무관이다. 바닥에 뒹굴기는 했어도 곧바로 일어나 위험을 피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두 손이 맞닿는 순간 바닥을 박차고 몸을 솟구친 김종건이 안장 뒤에 앉아 내 허리를 잡았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괜찮다!”
왼손에 잡은 칼을 다시 오른손으로 옮기려는데 나를 향해서 황급히 총을 겨누는 튀르크군 병사가 눈에 들어왔다. 도저히 도망칠 수 없을 것 같으니 최후의 발악을 시도하려나 본데, 칼로 내려치기에는 아직 거리가 있었다.
“망할 놈!”
혹시나 하고 두 자루 준비한 수석식 권총 ? 조선에서 가져온 짐보따리 속에 있었다 ? 중 한 자루를 안장에서 뽑아 쏘니 나를 노리던 적은 바로 쓰러졌다. 그놈을 지나치면서 권총을 다시 안장에 꽂으니 어느새 천막 대열이 코앞이었다.
“공격! 적장을 붙잡아라!”
아직 우리 말발굽이 닿지도 않았건만, 공성전을 계속 수행하느라 뒤에 남아있던 튀르크군 후방부대 병력도 흩어져 도망치고 있었다. 튀르크군이 전면 붕괴하는 순간이다. 이 정도로 삽시간에 무너지는 상황이라면, 튀르크군 총대장도 아직 막사에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전하, 소관은 여기서 내리겠습니다!”
“조심하게!”
김종건이 뛰어내리더니 바닥에 떨어져 있는 튀르크군 칼을 들었다. 여기는 사방에 천막이 들어서 있으니 질주하는 말발굽에 밟힐 일은 없을 터, 내려놓고 가도 안심이다.
김종건은 낙오했지만 다른 세 사람과 즈비슈코, 연대 기수는 계속 내 곁을 지켰다. 앞을 막는 적병들을 계속 베어 넘기며 달린 끝에 마침내 우리 일행은 골인 지점에 도착했다.
“뒤져라! 적괴를 찾아 붙잡아야 한다!”
우리 일행이 철저히 뒤졌지만, 금과 비단으로 장식한 화려한 천막 안팎에는 주인이 쓰던 화려한 물건만 잔뜩 쌓여 있을 뿐 사람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천막 주인, 빈을 공략하려던 오스만 튀르크군 총사령관 카라 무스타파 파샤는 이미 도주한 뒤였다.
“어쩔 수 없지. 기수는 연대기를 꽂아라! 이 천막은 우리 연대가 점령했다. 술잔 하나라도 훔쳐 가는 놈이 없도록 철저하게 지켜라. 그리고 주변에 있는 다른 천막도 뒤져라!”
역시 오스만 재상이 가진 부는 수준이 다르다. 비단에 금실로 수놓은 군기를 비롯해 천막 안팎에 가득한 온갖 화려한 물건들을 보고 있으니 절로 마음이 흐뭇해졌다. 몽땅 내가 가질 수야 없겠지만, 적어도 일부는 내 몫으로 받을 수 있겠지.
천막 밖으로 나오니, 그새 튀르크군 본진 전체가 아군에게 장악되어 있었다. 은빛 갑옷이 피에 젖은 윙드 후사르와 적군에 속한 타타르인들과 구분하기 위해서 모자에 긴 지푸라기를 꽂은 우리 쪽 타타르 기병들이 잇달아 지나갔다.
“이야아아!”
나도 모르게 칼을 치켜들며 환성을 질렀다. 진짜로 이겼다! 내가 딱히 바꾼 건 없이 역사 그대로 일어난 승리지만, 내가 몸으로 직접 뛰어서인지 말할 수 없이 뿌듯했다.
– 8 –
연대원들을 급히 집결시켰다. 내가 선두에 있는 사이 뒤쪽에서 본대를 지휘하던 유란드가 서둘러 병사들을 정돈했다.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가 곧 온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전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다가 급히 달려온 이홍석이 전한 소식이다.
사실 우리가 카라 무스타파의 천막을 포획하자마자 즈비슈코가 국왕에게 소식을 알리러 갔었다. 이런 큰 전과를 보고받았으니, 국왕이 친히 살피러 오는 건 당연하다.
국왕이 사열하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문득 오추마의 재갈과 말고삐가 피에 젖어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시선을 더 낮춰 봤더니 말의 가슴과 다리도 온통 피범벅이었다. 꼭 피가 고인 연못에 들어갔다 나오기라도 한 듯, 무릎까지 온통 피에 젖어 있었다.
옆으로 눈길을 돌려 살펴보니 다른 병사들도 별 차이 없었다. 적과 뒤섞여 찌르고 베면서 온통 피를 덮어썼고, 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쓰러진 튀르크인들의 시체를 밟고 피가 고인 웅덩이를 밟을 때 튄 튀르크군의 피다.
내가 이런 피바다를 처음 본 게 아니다. 무자호란 때도 숱하게 보고, 경인왜란 때 논산과 동래를 비롯한 전장에서 몇 번이나 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감상이 다르다. 내가 휘두르던 칼이, 내가 탄 말이 직접 피를 흘리게 했기에 다른 걸까.
지금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이 끔찍하다거나, 내가 죽인 적군 병사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 같은 건 들지 않았다. 전투 때 고조된 흥분이 아직 가라앉지 않은 탓인가 보다.
“전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음? 뭘?”
누가 부르나 싶어 돌아보니, 감사와 후회가 가득한 얼굴을 한 김종건이 서 있었다. 아까 내 말에서 내린 뒤에도 싸웠는지, 얼굴을 비롯한 상반신에도 피칠갑을 했다. 끝까지 말에서 내리지 않고 싸운 이들이 하체에 주로 피가 튄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아까 전하께서 소관을 직접 붙잡아 말에 태워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때 소관을 구해주지 않으셨으면 어느 발굽에 치여 죽었을지 모릅니다.”
잠시 망설이는 듯하던 김종건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얘가 왜 이래?
“전하께서는 제 생명의 은인이십 니다. 이 은혜를 갚기 위해 소관이 할 수 있는 한 충성을 다 바치겠습니다.”
“사람 싱겁기는…그대는 폐하께서 정하신 내 수하 아닌가. 당연히 서로를 살리고자 최선을 다해야지, 어찌 곤경에 처한 모습을 보고 그냥 지나친단 말인가? 그리고 폐하께서 계시는데 어찌 그대가 본왕에게 충성하겠는가. 내, 그대의 마음만 고맙게 받겠으니 굳은 충성을 바칠 이는 오직 폐하 한 분으로 여기게. 누가 들으면 큰일 날 소리 하지 말고.”
마침 소비에스키가 아직 오지 않기도 해서, 말에서 내려 김종건을 붙들어 일으켰다. 보니 피와 먼지로 범벅이 된 얼굴에 눈물이 글썽했다.
“전하, 정말, 정말 달라지셨습니다. 벽란도에서 만사 체념한 상태로 배에 오르시던 그…그분이 정녕 아니신 듯합니다.”
“내가 불랑국에서 이제부터 새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 않았는가. 여태 내 말을 안 믿고 있었는가? 자, 어서 저기 있는 정 서장관에게 가게나. 마침 돌궐군에게 노획한 군마가 몇 필 있으니, 타고 있으라고 내줄 걸세.”
김종건을 뒤쪽으로 보내는데 국왕이 도착한다고 알리는 나팔소리가 들렸다. 말에 오르니 이번 전투의 승리자, 얀 소비에스키가 위풍당당한 태도로 호위대와 함께 나타났다. 나한테 연대병력을 빌려준 차르니에츠키도 함께 따라오고 있었다.
“첫 전투에서 이런 전과를 올리다니, 실로 대단하네! 대공, 그대가 경험을 더욱 쌓는다면 아주 용맹한 장수가 될 수 있을 것 같군. 내가 몸이 너무 불어서 그대처럼 맨 앞 전열에서 돌격에 동참하지 못하고 그 뒤를 따른 게 아쉬울 뿐일세.”
얀 소비에스키는 나를 칭찬하면서도 내가 포획한 화려한 천막과 그 앞에 늘어선 전리품, 카라 무스타파가 타던 명마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지금 국왕은 신성동맹군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이므로, 이 모든 재물은 그에게 우선권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