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921
3부 039화
– 2 –
500명이나 되는 대규모 인원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아직은 폴란드 영토 내고, 실제로 일행을 인솔하는 주역은 국왕이 특사로 보내는 폴란드 귀족이라 내가 크게 수고할 건 없었다.
기왕 호위대 삼아서 동행할 거라면 작년에 나와 함께 빈 전투에 참전한 내 연대와 유란드 경이 함께 갔으면 싶었다. 하지만 국왕은 차르니에츠키가 전선에서 맡은 역할이 중요하다며 그 병력을 뺄 수 없게 하고, 국왕파로 호위대를 편성했다. 나로서는 아쉬운 일이었다.
그나마 국왕이 즈비슈코를 이쪽으로 보내주기는 했다. 하지만 다른 장교나 병사들은 모두 낯선 이들이었다. 같이 피를 덮어쓰면서 함께 전장을 누빈 내 연대원들이 그리웠다.
“어쩔 수 없을 겁니다, 전하. 폴수국왕은 루스국 수령에게 신성동맹에 동참하라는 전갈을 보내는 참이지 않습니까? 전하의 호위는 어물쩍 가져다 붙인 명분일 뿐이고, 실제 목적은 국사 파견이니 자신에게 고분고분한 이에게 그 역할을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탁자 앞에 앉은 이형준이 지적한 바는 나도 이해가 됐다. 내가 얀 소비에스키 입장이라도 내 친서를 들고 적국에 가는 사자를 내 반대파 중에 뽑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처럼 폴란드 전체가 하나로 뭉쳐 싸우는 상황에서도 그 파벌을 굳이 따져야 할까.
“하지만 낯선 이들에게 둘러싸여 여행하자니 약간은 거북한 게 사실이오. 부사를 비롯한 우리 사람들이야 다 한 식구지만, 저들은 아니잖소. 그리고….”
하루 여정을 마치고 숙소 거실에서 잠시 한담을 나누는 중이었다. 내가 이야기를 하다가 말자 이형준이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쓴웃음을 지었다.
“바루사바에 폴희를 두고 와서 더 허전하신 모양이군요.”
“사실 그러하오. 아무래도 있다가 없으니 좀 허전하구려.”
겨울이 되어 전쟁터에서 돌아왔을 때, 올렝카는 바르샤바에 있었다. 처음에는 크라쿠프에 있었지만, 빈을 해방한 뒤에도 전투가 더 이어진다는 연락을 받고 바르샤바로 돌아간 거다. 그리고 왕궁에서 공주들의 시녀 노릇을 하면서 원정군이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공주들의 시녀로 궁에 있다 보니 공식 개선식에서 나랑 만나지는 못했다. 내가 올렝카를 제대로 볼 수 있었던 때는 공식 행사가 다 끝난 뒤 빌라노비에 궁궐 정원 한쪽에서였다.
“성모님께서 제 기도를 들어주셨어요….”
3개월 만에 나와 해후한 올렝카의 첫마디가 이 말이었다.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올렝카는 단박에 내 품에 뛰어들었다. 나도 두 팔에 힘을 주어 올렝카를 꼭 끌어안았다.
부드러운 몸, 따뜻한 체온. 그리고 내 가슴을 적시는 눈물. 이번에도 내 가슴은 올렝카의 눈물로 흠뻑 젖고 말았다. 이 폴란드 아가씨는 은근히 눈물이 많았다.
“울 것 없다. 무사히 돌아오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느냐? 네게 한 약속을 지켰을 뿐인데 왜 이리 자꾸 우느냐.”
“성모님께서 제 기도를 들어주셨기에…기뻐서 우는 거예요.”
한참이 지나 울음을 그치고 나서야 겨우 올렝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맙다는 말을 건넬 수 있었다. 잘 접어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여기저기 핏자국이 남은 스카프도 꺼내 그 작은 손에 조심스레 쥐여주었다.
“네 마음이 담긴 머릿수건이 내 곁에서 나를 지켜 주었단다. 이 얇은 천이 얼마나 많은 튀르크인의 죽음을 보았는지 알면 깜짝 놀랄 거다. 다 네 덕분이다.”
“저는 전하께서 무사히 돌아오신 게 많은 이교도를 죽이신 것보다 더 기쁜걸요.”
아직 울음기가 다 가시지 않은 코맹맹이 소리였다. 그 태도가 너무나도 고맙고 귀여워서 두 팔에 힘을 주어 꼭 안아주었다. 이렇게 순진하게 나를 좋아하는 감정을 표시하는 상대는 세 번의 생을 통틀어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지나간 두 번 생애를 돌이켜보면, 나와 관계를 맺었던 여자 수는 무려 12명이나 되었다. 일단 상희. 그리고 무종 때 중전이었던 신씨와 후궁 2명, 장조 때 중전이었던 김씨와 후궁 7명이다. 올렝카는 나한테 13번째 여자…인 셈이다. 전생한 이후 기준으로 말이다.
올렝카가 내 마음속에서 비중을 차지하게 된 건 그저 미모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처음엔 외모 때문에 관심이 생겼고, 폴란드 왕의 딸이라는 배경이 뭔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따져볼 궁리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순수하고 귀여운 마음에 점점 더 끌렸다.
사실상 이런 풋풋한 연애는 지난 40여 년 동안 이번이 처음이다. 중전 두 사람과 나머지 후궁들은 모두 내가 눈을 뜨고 깨어났을 때 이미 옆에 있었으니 말이다. 나중에 내 손으로 후궁에 들인 2명도 마찬가지다. 그녀들과 나 사이에 서로를 알아가는 연애는 없었다.
신씨나 김씨에게 애정이 없었다는 건 아니다. 그녀들은 나름대로 좋은 여자들이었고 나도 그 두 사람을 좋아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임금과 중전으로 관계가 확립된 상태에서 모르는 부분을 채우며 만들어가는 과정과 아예 백지상태에서 시작하는 연애는 다르지 않나.
상희와도 다르다. 상희와의 연애는 동갑내기 현대인으로서 동등한 성인 사이의 관계였다. 겉보기 나이로는 내가 한참 연상일지 몰라도, 둘만 있을 때는 우리는 동등했고 같은 격으로 대화를 나눴다. 내가 왕이라는 것만 빼면 우리에게는 같은 배경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올렝카는 상희와도 다르다. 올렝카랑 이야기하고 있으면 첫 여자친구를 사귀었던 진짜 10대 시절, 이젠 기억도 가물가물해지는 그 옛날 풋사랑 같은 느낌이다. 현대 기억은 분명 27세 시점에서 고정이었지만, 그건 그때보다 더 오랜 옛일이니 당연하겠지.
재회한 올렝카와는 포근하고 편안한 나날을 보냈다. 거칠고 험한 사내들끼리 보내야 하는 살벌한 전쟁터에서 돌아와 올렝카를 안고 있으니, 정말 다른 세상에 온 기분이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나를 좋아하는 여자아이와 있는 평화로운 세상.
가정이지만, 만약 내가 성친왕의 몸에 들어오는 게 하루만 늦었어도 올렝카가 지금처럼 나랑 맺어질 일은 없었을 거다. 혼란에 빠진 내가 내 정체를 파악하느라 정신이 없는 참에, 어제 나랑 잔 여자가 누군지 알아볼 여유 따위는 없었을 테니까.
내가 눈을 뜬 날은 정말 아슬아슬한 타이밍이었다. 성친왕은 조선에서 출발한 뒤로 계속 그랬듯이 올렝카도 한번 동침하고는 버릴 생각이었고, 내게 넘겨줄 기억 따위도 남겨두지 않았을 거다. 나는 성친왕이 누구랑 원나잇을 했는지 지금도 하나도 모른다.
올렝카는 자기를 한번 함락시킨 다음에 곧바로 안면몰수에 들어간 나를 보고 상처만 받고 폴란드로 돌아갔을 거다. 버림받고 울며 돌아온 딸내미를 맞이해서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폴란드 국왕 앞에, 내가 사정도 모르고 어정어정 나타났으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어디서 닳도록 구른 애도 아니고 이렇게 예쁘고 착한 애를 한번 먹고 버리려고 했다니, 성친왕은 천벌을 받아도 싸다. 천녀의 말에 따르자면 그놈도 연산군과 경성군에게 합류했을 텐데,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아마 그놈은 이슬람교 천국에 처박혀서 안 나오지 않을까.
어쨌든 딱 그 타이밍에 눈을 뜬 덕분에 올렝카와 맺어졌다. 그뿐 아니라 그 인연으로 빈 포위전에도 참전, 막대한 재물까지 손에 넣었다. 그러니 이게 천녀의 의도였다면 정말 기가 막힌 각성 타이밍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겨울 동안은 그렇게 올렝카와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사냥에 동행하기도 하고, 서로 자기 나라 민담 같은 것도 들려주었다. 밤이 되면 서로를 한껏 원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렇게 지내면서 마음의 가책이 없었던 건 아니다. 가끔은 내 품에 안겨 잠든 올렝카를 보면서 상희가 올렝카로 각성하면 어떨까 하고 혼자서 생각하곤 했다. 그러면 지금 내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죄책감도, 미안한 감정도 사라질 테니까.
나는 세 번째까지 계속 조선인으로 각성했다. 하지만, 혹시 상희는 이번 인생에서 조선을 벗어났을 수도 있지 않을까?
얼굴이 달라졌어도 좋다. 그건 아무런 문제도 안 된다. 나도 매번 각성할 때마다 외모가 바뀌었는데 뭐 어떤가? 우리가 공유하는 기억만 있다면, 그거 하나만 있으면 된다.
지금 상희가 내 앞에 나타난다면, 많은 것을 함께할 수 있다. 충분히 놀고먹을 수 있는 재산까지 손에 넣었겠다, 상희와 자유롭게 유럽 여행이나 하면서 살아도 된다. 수행원들만 어떻게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고 말이다.
깨어난 상희가 지금 이 상황이 뭐냐고, ‘난 누구고, 대체 내가 왜 네 품에 안겨 있느냐’고 물을 수도 있다. 내가 자기를 기다리지 않고, 각성 때 이미 법적 관계로 묶여 있지 않아서 헤어져도 상관없었던 다른 여자를 계속 품고 있었던 것에 대해 화를 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면 어떤가? 상희를 만나기 위해 앞으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는 긴 세월, 그동안 혼자 목말라하는 것보다는 그게 낫다. 그리고 상희라면 처음에는 화를 낼지 몰라도 나중에는 용서해 주리라. 우리에겐 서로보다 더 소중한 상대가 없으니까.
하지만 상희가 올렝카에게 들어온다면 올렝카는 자기 영혼을 잃는다. 즉, 죽고 만다. 두 사람의 영혼이 한 몸에 있을 수는 없으니까. 상희를 소환하는 제물이 되는 셈이다. 그렇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올렝카는 올렝카로서 나한테 소중한 사람이다.
지난 1년 반 동안 그녀와 함께 쌓아 올린 추억도 무척 즐거웠다. 하지만 상희와 올렝카는 내가 함께한 세월의 크기에서 너무도 차이가 난다. 내가 상희와 공유하는 기억은 현대부터 이어진다. 내가 지금도 가끔 엄마의 된장찌개를 그리워하는, 그 기분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상희 외에는 있을 수가 없다.
올렝카를 버릴 생각은 없고, 버리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두 사람을 나란히 놓고 경중을 따지자면 상희 쪽으로 추가 기울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런 복잡한 심경이 올렝카에게서 상희가 각성했으면 좋겠다는 심경으로 발현되었지 싶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결국 겨울이 끝날 때까지 올렝카가 조선말을 알아듣거나 침이나 지압 같은 의술을 쓸 수 있게 되진 않았다. 올렝카는 계속 올렝카 그대로였다. 순진하고 귀여운, 미모의 폴란드 아가씨 그대로.
“웬만하면 함께 데려가고 싶었지만, 폴수국왕이 대놓고 만류했으니 어쩌겠소. 바르샤바에 두고 갔다가 돌아올 때 다시 만나는 수밖에.”
지금은 5월. 라스푸티차도 끝났으니 러시아에 가기에는 딱 좋은 계절이다. 하지만 그다지 승차감도 좋지 않은 마차를 타고 1천km는 충분히 넘고도 남을 그 먼 길을 가다니, 국왕이 자기 딸을 말리고도 남을 일이기는 하다.
도착한 뒤의 안전 문제도 있다. 만에 하나라도 러시아 안에서 싸움이라도 벌어질 경우, 나와 내 부하들은 어떻게 탈출할 수 있을지 몰라도 여자인 올렝카까지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거기서 무슨 일이 있을지 어찌 아는가.
러시아와 우호를 쌓아 형황에게 칭찬받을 거리를 하나라도 더 만들기 위해 처음 예정대로 러시아에 가기는 한다만, 위험을 무릅쓸 각오를 하고 준비가 된 사람이 가는 것과 준비가 안 된 사람이 가는 건 전혀 다르다.
솔직히 말하자면 얀 소비에스키가 자기 딸을 붙들어놔 줘서 다행스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러시아에서 올렝카의 신변을 걱정하지 않고 움직일 수 있으니까 말이다. 헌데 이형준은 또 다른 관점에서 판단을 내린 모양이었다.
“어흠, 전하. 루스에는 폴희보다 훨씬 뛰어난 미색이 많…이 있습니다.”
“그건 나도 아오만.”
올렝카만한 미모가 흔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일단 맞장구는 쳐 주자. 그런데 이런 말을 왜 하나 싶어서 쳐다보니 이형준이 괜히 얼굴을 붉히면서 헛기침을 했다. 나한테 뭐 거북한 이야기라도 할 생각인가?
“혹시나 해서 여쭙습니다만, 전하께서는 혹시 루스에서 양첩을 몇 명 더 얻으실 생각으로, 그 일에 방해될 것 같은 폴희를 바루사바에 두고 오신 것은 아니겠지요?”
“절대 아니오! 내, 이미 불랑국에 있을 때 부사에게 약속하지 않았소? 폴희와 함께 해도 좋다고 허락해주면, 다른 여인은 더 건드리지 않겠다고 말이오.”
“부디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루스에서 함부로 여인을 건드리고 다니시다가는 후회하실 수도 있으니, 유념해 주십시오, 전하.”
“알겠소.”
내게 여자를 더 건드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은 이형준이 먼저 침실로 들어갔다. 내가 또 여자를 건드릴까 걱정하다니, 아무래도 아직 나를 완전히 믿지 못하는 모양이다.
올렝카가 있다가 없으니, 여자가 그리워서 한눈을 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나? 별로 그럴 생각은 없는데 말이지.
– 3 –
러시아는 우리 입국을 제지하고 나서거나 하지는 않았다. 폴란드 사절단도, 거기 덤으로 붙은 우리 11명도. 입국을 거부하기는커녕 우리가 방문한 첫 대도시인 스몰렌스크에서부터 매우 괜찮은 대접을 받았다.
인원이 많은 데다 이웃인 폴란드 사절단이 좀 더 중시되기는 했다. 얀 소비에스키 국왕이 보내는 친서를 가져왔다는 통보를 받은 러시아인들은 모스크바로 가는 여정에 필요한 모든 편의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폴란드 사절단도 거칠게 굴지 않고 예의를 지켰다. 그 모습을 보니 스몰렌스크 도착 하루 전, 밤에 숙소로 나를 찾아온 즈비슈코가 스몰렌스크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분개하던 모습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