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926
3부 04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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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내가 러시아를 찾아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첫 단추는 끼운 셈이니 말이다.
“조선에서 온 사절이라고?”
“공식 사절은 아닙니다. 유럽 방문 자체는 정부에서 파견한 공식 일정입니다만, 러시아에 온 건 순전히 제 개인적인 호기심입니다.”
내 수하들의 동양식 옷차림 때문에 생겼던 오해는 곧 풀렸다. 부하들은 내가 어서 면담을 끝내고 나오기를 기다리다가 심심한 김에 근처를 구경했는데, 표트르가 거느린 놀이군대가 사용하는 병기고 문이 열린 것을 보고 여긴 뭔가 싶어 잠깐 들여다보던 참이었다.
“실제 무기는 없었습니다. 목총(木銃)과 목도(木刀)만 잔뜩 쌓여 있었지요.”
“그렇다 해도 일군(一軍)을 위한 병장기였음은 틀림이 없으니, 그대들을 잡은 소년병들이 그토록 화를 낸 것도 무리는 아니지. 그토록 군율이 서 있는 것을 보면, 아마 그 소년들은 지금쯤 경계를 게을리한 죄로 수령에게 경을 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일세.”
표트르가 제대로 나라 꼴을 잡기 시작하면 러시아의 군주를 가리키는 명칭도 격을 올려서 불러야겠지. 그냥 루스국왕이라고 하는 게 제일 간단하고, ‘차르’라는 본래 명칭을 병용해도 될 것 같다.
나중에 러시아가 제국을 선포하고 나서면 그때 가서 황제라고 불러도 되고 차르라고 계속 불러도 되고…카이저는 황제보다 글자가 한 글자 더 많고 어감도 이상하다고 금방 사라져서 안 쓰게 됐지만, 차르는 별 어색함 없이 계속 쓸 수 있을 듯하니 말이다.
“무척 건강해 보였사옵니다. 두 수령 중 늘 궁에 있는 형 쪽은 무척이나 아프고 허약하다 하던데요.”
이반 5세의 몸 상태가 매우 좋지 않음은 러시아 국내외에 널리 퍼져 있다. 우리 일행들도 그 정도는 다 알고 있었다.
“그러니 건강한 동생과 친해 두어야지. 형은 분명히 요절할 테니, 나중에 동생이 루스국을 홀로 통치하는 수령이 되었을 때 우리 북방을 평화롭게 만들려면 말일세.”
첫 방문은 성공적이었다. 다시 안으로 들어갈 것 없이, 상자를 열어 보여준 배 부품들만 보고서도 표트르의 두 눈이 빛났다. 그리고 내가 최근에 빈 포위전에 참전했다는 이야기를 듣더니 그때 싸움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졸라댔다.
별궁 주변을 한 시간 가까이 돌면서 프랑수아의 통역으로 온갖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빈 전투에서 겪은 무용담에서 시작해서 바다를 건너올 때 있었던 이야기나 프랑스에서 있었던 이야기들 등등.
표트르가 아무리 키는 나만큼 크더라도 아직은 12살 어린애다. 그렇다 보니 형식상으로는 ‘차르’인 표트르 쪽에서 대화를 주도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내 마음대로 화제를 이끌어갈 수 있었다.
“다음번 회동에서는 조선이 어떤 나라인지에 관한 호기심을 좀 더 키워야지. 조선에 관해 더 잘 알고 친근감을 품게 되면 적대감을 표하지도 않을 테니까.”
세상만사는 모르는 거다. 지금이야 조선이 국경을 범하는 러시아인들을 처바르고도 남는 상황이지만, 나중에 19세기가 되고 20세기가 되었을 때도 계속 잘 풀린다는 보장은 없다. 그때가 되면 ‘표트르 대제가 맺은 조약’이라는 명분도 유효한 방패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 9 –
첫 방문 이후에도 우리는 프레오브라젠스코예를 몇 번 더 찾았다. 그러는 동안 폴란드가 보낸 사절단은 소득 없이 돌아갔다. 소피아가 끝내 신성동맹에 참가하기를 거절한 탓이다. 안타까웠지만 내가 개입해서 뭘 바꿀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표트르와 친분을 쌓는다는 내 목적을 달성하는 데만 신경을 썼다. 세 번째쯤 내가 방문하자 마침내 큰 진전이 있었다. 표트르가 나한테 자기 놀이군대에서 한 자리 맡으라고 권했다. 내가 말을 잘 타니, 기병 지휘를 맡으라는 거였다.
“우리 러시아 군대에는 타타르, 칼미크, 바쉬키르 등 많은 아시아계 기병이 있소. 그러니 그대와 그대 부하 세 사람이 기병을 맡는 건 진짜 러시아군에서 하는 것과 똑같다는 거지!”
그러니까 고증을 맞출 수 있다는 소리렸다. 어차피 모스크바에 가봤자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니, 수락했다. 그 뒤로 나는 표트르를 만나러 한번 프레오…젠장, 너무 길다. 그냥 프레브 별궁이라고 부르자. 여기 오면 3~4일씩 머물며 전쟁놀이에 끼었다 가곤 했다.
헌데 알고 보니 내게 기병대장 직위를 준 건 엄청난 특혜였다. 왜 그런가 하니, 표트르 자신도 일개 병사로 대열 속에 끼어서 훈련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의 전쟁놀이라면 당연히 차르 표트르가 대장을 맡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병사여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차르께서는 남들 위에 서려면 그만한 자격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다. 지금 자기는 연대장은커녕 일반 장교 역할을 할 자격도 없다고 생각해서 졸병 노릇만 하시는 겁니다.”
사실 표트르의 놀이군대에는 이미 서유럽 출신 고문관들이 붙어 있었다. 원래는 정규군에 고용된 장교들이지만, 소피아가 표트르에게 빌려줬다. 소피아는 정말로 표트르를 경계하지 않나 싶어서 이들에게 슬쩍 뒷사정을 물어봤다.
“섭정께서는 차르께서 이 소년들을 기반으로 자기에게 충성하는 정예부대를 키워 자기를 권좌에서 몰아낼지도 모른다는 걱정 같은 건 하지 않으시나 보지요?”
“아무리 진짜 대포를 주었다 해도, 어린애들 놀이일 뿐이니까요. 혹시 차르께서 무력으로 정변을 일으키신다고 해도, 섭정께는 충성을 바치는 스트렐치가 있습니다. 모스크바에 있는 병력만 해도 2만 명이 되지요. 그런데 소년 100여 명이 무슨 근심거리겠습니까.”
그렇게 안심하고 있다가 표트르가 작정하고 깃발을 올리자마자 모래성처럼 무너져내렸지. 소피아가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만, 제대로 된 충돌이고 뭐고 없이 일시에 모든 세력이 표트르 편으로 넘어가 처절하게 몰락한 건 기억한다.
뭐, 나한테 소피아를 걱정해줄 필요는 없으니 이 정도에서 그쳐야지. 표트르와는 국경을 초월한 우정을 쌓을 수 있지만, 소피아랑은 안 된다. 내가 어설프게 건드리고 훌쩍 조선에 돌아가 버리면, 우정이나 사랑이 아니라 원한과 복수심이 피어오를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프레브 별궁에 다녀온 뒤에는 늘 이형준과 마주 앉아 대학을 배워야 했다. 대학을 끝내서 이 수업이 끝난다면야 후딱 끝내버리겠지만, 그 뒤에 또 다른 책이 기다리고 있음을 뻔히 아니 그럴 생각이 안 났다. 그래서 틈만 보이면 이형준이 다른 이야기를 하게 만들었다.
“경조, 선조 두 분 시기에 무묘에 배향한 공신들은 대개 경인왜란과 을미동정에서 세운 전공에 의해 모셔졌지요. 장조께서 무묘에 배향하게 하신 평양군이나 현제공과는 다릅니다.”
평양군 신립은 북방에서 세운 공이 컸고, 유극량 역시 마찬가지다. 현제공 김지는 이들과 달리 무기 개발에서 세운 공적 덕분에 무묘에 들었다.
김지가 만든 전차, 아니 귀차는 여전히 분해조립이 용이한 이동식 진지 이상으로는 쓰지 못하고 있다. 군기시에서 스무 량 정도 보유하고는 있는데 그저 쌓아만 놓았을 뿐, 개발할 때 상정한 용도대로 사용할 엄두는 여전히 못 내고 있다고 했다.
“기관을 달아 기관으로 움직일 생각은 아무도 아니 해 보았는가?”
“경조께서 시도해보신 사례는 있다 하나, 그렇지 않아도 무거운 차체가 더 무거워지면서 수레 축이 부러져 내려앉았다 알고 있습니다. 축을 철봉으로 바꾸었더니, 이번에는 철봉이 휘어서 바퀴가 돌지 않고 또 바퀴가 땅을 몇 치나 파고들었다 하더군요.”
역시 탱크를 만들려면 캐터필러가 필요하겠구나. 일반 바퀴를 가지고는 축이 부러지거나 접지압 때문에 바퀴가 땅에 박혀 제대로 움직일 수 없겠고, 방향 조정도 어렵겠지. 무게를 줄인다고 장갑판을 벗기면 방어 효과가 급락할 테고, 기관이 작으면 출력이 부족하고.
내가 본국에 돌아가면 분위기 좀 살피고, 정치와 상관없는 부분에서는 목소리를 좀 낼 수 있겠다 싶으면 캐터필러를 만들어서 증기 전차를 개발해보고 싶다. 물론 지금 시대 기술로 캐터필러에다가 조향장치까지 제작할 수 있을지는 심히 걱정이지만….
“그 외에는 대개 경인왜란과 을미동정에서 전공을 세운 장수들입니다. 경조께서 계실 때 충무대왕 이순신을 필두로 하여 일곱 사람이, 선조께서 계실 때 두 사람이 올랐습니다.”
성이 때 무묘에 오른 사람은 권율, 임꺽정, 황진, 정발, 김시민, 김응서다. 연이 때 무묘에 오른 2명은 전란 때 가장 젊은 축이었던 사노부, 정충신이다.
사실 정충신은 일본과 싸웠을 때는 별 공적이 없었다. 하지만 사르후 전투 때 건주위에서 보낸 대군을 말 그대로 섬멸하는 대공을 세웠고, 이후에 도원수까지 승진하면서 조선군을 강병으로 키워냈다. 그 공적을 인정받아 마지막으로 무묘에 배향된 장수가 되었다.
내가 한 가지 놀라면서도 좀 후련했던 건 내가 처음 무종 때 무묘에 넣었던 고려 때 장수 4명, 박지?안우?김득배?이방실이 연이 시기에 무묘에서 빠졌다는 사실이었다. 대신 그 자리에 박위?이지란?배극렴?최무선이 들어갔다. 정치적 고려가 들어간 인선이 분명했다.
다만 새로 넣은 4명이 훨씬 눈에 띄는 전공을 쌓은 건 사실이었다. 더구나 그중 최무선은 김지에 앞서 존재한 신무기 개발자로서 충분한 의의가 있었다. 공돌이가 이미 무묘에 들어 제사를 받는다면, 2명째를 추가하지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이제 무묘에 배향된 장수는 총 34명, 의례적으로 둔 강태공과 관우를 제외하면 실질적인 배향 인원은 32명이 된다. 그렇게나 무묘에 들고 싶어 하던 이일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옛날 충무대왕 이순신을 등쳐먹으려 했던 전과가 결국 발목을 잡고 만 모양이다.
또 하나 안타까운 사람은 서림이다. 일신에 갖춘 재주로만 보면 서림도 충분히 임꺽정과 함께 무묘에 들어갈 만했다. 하지만 끝내 들지 못했다.
“추모공(鄒牟公) 서림은 총이건 활이건 쏘면 맞히지 못하는 표적이 없어 세간에서 예(?)의 환생이라 칭할 만큼 뛰어났으나, 그것이 일개 사수의 재주에만 그칠 뿐 장수의 경지에 오르지는 못하였습니다. 어쩔 수가 없지요.”
무묘에는 못 올랐지만, 예전보다 총을 더 중시하게 된 조선군 내에서는 서림이 명사수의 수호신 같은 존재가 되었다고 한다. 정기 사격 검정일이면 궁수건 포수건 앞다투어 서림의 제단 앞에 제물을 바치고 좋은 성과가 나오기를 빈다고 하니, 무묘보다 나을 수도 있겠다.
‘사격이라면 다지도 서림 못지않았는데.’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총을 바꿔가면서 적을 연달아 쓰러트리던 다지가 생각난다. 굳이 비교하자면 다지는 근거리 연사에 좀 더 뛰어났고 서림은 장거리 저격에서 솜씨가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비교하지 않아도 두 사람 모두 뛰어난 명사수임은 분명했다.
다만 다지는 여자였던데다가, 이장곤과 혼인하면서 일찌감치 군력(軍歷)을 마감한 탓에 서림이 그렇듯 군사들에게 숭배를 받지는 못한다. 하지만 뭐 어떠랴? 고다지전 출연 덕분에 굳이 고린내 나는 군사들 절 따위 안 받아도 다지 이름이 영원히 남게 생겼는데.
“아직도 반촌극장에서 고다지전을 공연한단 말이오?”
“물론이지요. 고다지전과 홍희동전은 의인황후께서 직접 쓰신 극본이라 하여 지금도 반촌극장에서 매달 1회씩은 꼬박꼬박 상연합니다. 연희(演姬)라면 정경부인 고씨 역과 산도발 역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어찌 그 이름이 잊히겠습니까?”
지난 70여 년, 손가락 발가락을 다 동원해도 세지 못할 만큼 많은 악극이 무대에 올랐다. 장조 때부터 존재하던 정도극단과 반촌극단, 두 극단 외에도 전국에 십여 개는 족히 되는 극단이 생겨나 전국을 돌며 공연을 올리고 손님을 받고 있다. 구주 출신 왜인극단도 있다.
이들 작은 극단들은 주로 지방을 돌며 도성에는 차마 올라올 엄두를 못 낸다. 이에 반해 최고 명문 극단인 두 극단은 도성을 중심으로 팽팽한 경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들은 심지어 상도나 북경까지 가서 공연하곤 할 정도다. 물론 이때 대사는 조선말로 한다.
“그러고 보니 부사, 섭정 중인 루스 공주도 자기 손으로 연극을 쓰는가 하면 조보에 글도 가끔 쓴다고 하더이다. 물론 루스말로 말이오.”
“루스 공주가요? 우리 의인황후께 비길 바는 못 되겠으나, 그 공주도 재주가 없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신기한 건, 갈수록 이형준의 태도가 차츰 안정되어간다는 점이었다. 오기 전에는 그렇게 오기 싫어하고 도착한 뒤에는 사방을 경계하며 비판을 퍼붓더니, 차츰 경계도 느슨해지고 태도도 부드러워졌다. 소피아만 해도 예전에는 암탉이네 태평공주네 하지 않았었던가.
꼭 예상하던 위험이 실현되지 않고 무사히 지나가자 기뻐 안도하는 사람 같아 보였지만, 애초에 이형준이 상정한 위험이 뭔지를 모르니 알 수가 없다. 혹시, 26년 전 러시아에 왔을 때 누구 원수진 사람이라도 있었던 걸까? 어쩌면…혹시?
그렇게 글공부와 전쟁놀이를 병행하며 느긋하게 지내는 참에 두 가지 소식이 연달아 내게 전달되었다. 하나는 내가 러시아에 온 지 4개월 만에 드디어 소피아가 나를 만나보겠다고 결심했다는 길보, 다른 하나는 표트르가 홍역에 걸려 중태에 빠졌다는 흉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