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935
3부 05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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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관이 연초를 꽉 눌러 담고 불을 댕긴 장죽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호부대신 강기석만 빼고 주변을 모두 물린 태황이 은제 물부리를 입에 물고 천천히 연기를 빨아들였다.
중신과 종친들을 모두 내보낸 양화당, 태황은 그 안에 앉아 천천히 연초를 피웠다. 뭔가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을 때 태황은 홀로 연초를 피우며 마음을 가라앉히곤 했다. 선황이 예고 없이 붕어하시며 약관의 나이로 갑자기 제위에 오르던 그해부터 생긴 습관이었다.
조선에서 연초가 퍼진 건 장조 시절부터다. 예수회 선교사들이 가져온 연초는 처음에는 잎을 우린 물을 벌레 퇴치에 쓰는 독초였다. 그런데 누군가가 연초잎을 말려서 썰어 피우기 시작했고, 흡연하는 습관이 삽시간에 전국에 퍼졌다.
연초를 최초로 피운 사람이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장조라는 설이 있다. 적전에서 처음 키운 연초에서 잎을 따다 피웠다는 것인데, 장조가 평생 흡연을 혐오하며 자기 앞에서 절대로 연초를 피우지 못하게 했음을 고려하면 신빙성이 낮다.
장조 때문에 임금 앞에서는 누구도 흡연할 수 없는 법도가 생겨났다. 그 뒤로는 어전에서 연초를 제한할 뿐 아니라, 여염에서도 아랫사람은 윗사람의 허락을 받지 않고는 흡연할 수 없는 게 예의가 되었다.
이에 반해 인접국인 후금과 청에서는 누구 앞이든 자유롭게 연초를 피울 수 있다. 이쪽은 태조 누르하치가 워낙 애연가여서 자기 앞에서 부하들이 연초를 피우건 말건 내버려 두었던 전례에서 비롯한 관습이다.
과거에 연초는 내수사에서 재배 및 판매를 모두 독점했다. 하지만 국내외 소비량이 계속 급증하면서 내수사만으로 그 물량을 다 댈 수가 없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일반 농민들도 연초를 재배할 수 있도록 허용했지만, 조건이 붙었다.
우선 연초는 가장 비옥한 토지인 1등지와 2등지에는 심을 수 없다. 기호작물인 연초 재배 때문에 식량이 부족해지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물론 조선 연초가 후금과 청나라에서 정말 잘 팔리는 상품이긴 하지만, 식량을 버리면서까지 연초를 재배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연초를 재배하려는 자는 호부에 속한 관청인 연초서(煙草署)에 연초세를 납부해야 한다. 연초세는 연초밭 1결에 은 30냥으로, 곡식을 재배하는 논밭이 전세로 6냥을 내는 데 비하면 엄청난 고액을 내는 셈이었다.(1두카트 = 대략 3.5g, 1냥 = 37.5g. 1냥은 대략 10.7두카트.)
연초세를 내지 않은 연초밭이 적발되면 포도청이 출동해서 몽땅 태워버린다. 수확을 마친 뒤라면 어디 숨기기라도 하겠지만 아직 밭에서 자라는 연초를 등에 메고 어디 도망갈 수도 없으니, 연초 밀재배를 하는 자들은 늘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주변을 살피곤 한다.
다만 출동하는 포도청 군사들에게는 횡재하는 날이 되곤 했다. 윗전에는 전부 태웠다고 보고하고, 적당히 뜯어서 말에다 싣고 오면 몽땅 개인적인 수입이 되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부정행위라서 위에서는 엄격히 금하지만, 암암리에 자주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향을 가미한 연초를 조용히 피우고 있는 태황 앞에 금위사장 박중현이 나타났다. 태황이 손짓을 하자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몇 번을 반복하여 읽어도 분명합니다. 성친왕 전하께서는 정말 폴수국 비호군 3백 기를 이끌고 돌궐군 진영에 뛰어들면서 한 창에 3명을 꿰뚫어 쓰러트리셨으며, 환도로 벤 적병은 적어도 아홉(여덟이나 아홉)명은 되옵니다. 심지어 폴수국왕은 그 공을 높이 사서 금 2만 냥에 가까운 포상을 내리기로 약속했다고 합니다.”
태황이 장죽을 입에서 떼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로다. 그놈이 불랑국에서부터 갑자기 말과 칼과 활을 수련한다기에 무슨 영문인가 했는데, 정말로 이런 결과를 얻으리라고는 짐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본국에 있을 때, 성친왕은 글도 말도 활도 모두 익숙하지 못했다. 말은 그럭저럭 좀 타는 편이었지만, 글도 제대로 안 읽었고 무예 수련도 잘 하지 않았다. 어설프게 습득한 지식을 가지고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면서 말로 하는 간섭만 많았을 뿐이다.
장성한 친왕이 그러고 다녔으면 불순한 의도를 품고 있다고 해서 당장 귀양을 보내도 할 말이 없었을 거다. 부황은 그저 귀엽게 봐주셨고 자신도 한동안은 눈감아줬지만, 그냥 놓아뒀으면 스물, 서른이 되어도 똑같이 놀아났을 터였다. 그랬으면 더 봐줄 수도 없었으리라.
“폐하께서는 충분히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걸 아는 건 그대뿐이다.”
태황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군주와 신하는 잠시 침묵 속에서 지금 상황을 더듬었다. 긴 침묵을 먼저 깨트린 쪽은 금위사장이었다.
“성친왕께 귀국령을 내리시겠습니까?”
“묘당에서 정하겠다 하지 않았나.”
성친왕은 분명 공을 세웠다. 대한의 장수로 싸워서 공을 세운 건 아니지만, 조상이 받은 모욕을 일부나마 갚았으니 공이라면 공이었다. 하지만 형황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멋대로 싸움터에 나가 조정과 황실에 큰 걱정을 끼친 건 분명한 죄였다.
“지금 바로 귀국령을 내리면 조야가 성친왕에게 죄를 아예 묻지 않는다고 받아들일까 봐 걱정이시옵니까?”
금위사장에게는 어차피 처벌에 관여할 권한이 없다. 지금 오가는 대화는 태황이 생각을 정리하게 해주는 계기일 뿐이다. 박중현은 자신이 맡은 역할이 뭔지 잘 알고 있었다.
태황은 입에 머금은 연기를 깊게 빨아들일 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이번 일과 직접 관련이 없는 이야기가 나왔다.
“해성공 이기빈은 스스로 귀환했기에 집에 연금하다가 마침 일어난 전란에서 백의종군에 처하는 정도로 족했다. 허나 성친왕은 굳이 소환해서 벌을 내릴 만큼 과가 공을 뛰어넘지는 않았다. 또한, 공은 공이나 정신 나간 행동을 벌여 얻은 결과임도 분명하다.”
태황은 성친왕이 대유주에 가서도 계속 정신을 못 차린다면 소환해서 처벌하겠다고 이미 공언한 바 있다. 즉, 이번 일을 좋게 보지는 않으나 성친왕에게 벌을 내릴 생각도 없다고 확언한 거나 마찬가지다. 박중현으로서는 더 이상 질문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호부대신.”
“예, 폐하.”
옆에 묵묵히 서 있던 강기석이 조용히 허리를 조아렸다.
“배내국에 서한을 보내서 견서사가 지참한 위임장의 효력을 정지하시오. 이제까지 사용한 금액은 그렇다 치고, 남은 여정에 필요한 비용은 성친왕이 직접 번 돈으로 쓰게 하시오.”
“예, 바로 서한을 준비하겠습니다.”
금 2만 냥이라면, 은으로 환산하면 40만 냥 가까운 액수다. 대한 조정이 걷는 1년 세입의 1푼(1%)을 넘는 돈을 개인 수입으로 얻은 성친왕에게 굳이 국고에서 계속 여비를 대줄 필요가 없다.
“이미 쓴 돈은 다시 반납하라 하시겠습니까?”
“그럴 필요까지는 없소. 애초에 빌려준 돈도 아니지 않소.”
태황이 성친왕에게 따로 돈을 내주지 않고 필요한 만큼 베네치아 은행에서 인출해서 쓰게 한 건 그게 가장 안전하고 편하기 때문이었다. 조선에서 거액의 경비를 가지고 출발한다면 도중에 도적을 만날 위험만 커진다. 인원도 얼마 안 되는데, 공연히 표적이 될 필요가 없다.
“위임장의 효력을 정지시켰다고 성친왕에게 통보할 필요는 없소. 큰돈을 얻었으면서 계속 나랏돈에 손을 대려고 할지, 이제 스스로 해결하려 할지도 한번 살펴보겠소.”
“예, 폐하.”
“그리고 그대는 인제 그만 가 보시오. 성친왕비의 일은 내 유감이오. 황실에서 할 일은 다 할 것이니, 너무 원망하지 말기 바라오.”
“아니옵니다. 그저 신의 딸이 박복하여 그런 것이지, 어찌 감히 남을 탓하겠나이까.”
강기석이 나가자 박중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호부대신이 일단 말은 저렇게 하지만 훗날 원한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감시를 강화함이 좋지 않겠습니까?”
“강기석은 충직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성친왕을 대유주에 보내기 전에 혼인부터 해야겠다 했을 때 스스로 딸을 내놓겠다고 나서지 않았겠느냐? 성친왕비가 젊은 나이에 그만 유명을 달리한 건 안타깝지만, 그렇다 해서 짐을 거스를 사람은 아니다.”
“알겠사옵니다.”
금위사는 태황의 칼이다. 태황이 휘두를 필요가 없다고 하면 칼집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헌데 양자는 어찌하시겠사옵니까. 성친왕께서 싸움터에 가신다는 말을 듣고 현왕 전하의 세 아들 중 셋째인 삼성공을 양자로 넣어 제사를 지내게 하려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대로 실행하시어 성친왕비의 제사를 지내게 하시겠는지요.”
잠시 생각하던 태황이 고개를 저었다.
“되었다. 아직 성친왕이 살아있으니 제사를 지낼 양자가 급하지 않다. 성친왕비의 위패는 원각사에 두어 원각사에서 제를 맡게 하겠다고 묘당에서 밝힐 것이다.”
혼인을 한번 했으니 양자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건 들일 수 있다. 그리고 성친왕을 새로이 혼인시킬 필요도 있다. 이미 태후는 성친왕이 귀국하는 대로 새로 짝을 지어주겠다고 아까 태황에게 선포했다. 그때쯤이면 홀몸이 된 지 여러 해, 도의상 거리낄 것도 없다.
성친왕이 데리고 다닌다는 양첩은 논의할 거리도 되지 않는다. 폴수국 국왕의 사생아라고 했는데, 측실이라면 눈감아줄 수 있지만 어디 친왕의 왕비로 얼녀를 들인단 말인가? 폴수국 국왕이 정식으로 사신을 보내 왕녀라고 밝히며 국혼을 제안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더구나 성친왕은 이제 제위를 물려받을 서열에서 황태자 다음이다. 새로이 처를 들인다면 마땅히 출신이 남부끄럽지 않고 나라에 혼란을 초래하지 않을 명문가에서 들여야 한다.
얼녀 출신인 양첩 따위는 성친왕이 알아서 좋도록 처리할 일이다. 도중에 적당히 버리고 오든, 본국에 데리고 와서 측비로 삼든 관심 없었다.
“현명하신 판단이옵니다.”
박중현이 고개를 숙이자 이번에는 태황이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예왕은 요즘 어떠한가.”
“예왕 전하께서는 늘 똑같으십니다. 매일 원각사에 불공을 드리러 다니시는 혜비 마마를 충실히 받드시고, 매일같이 학문을 닦기를 게을리하지 않으며, 모든 품행이 방정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두루두루 만나는 종친이나 중신들과의 관계도 매우 좋습니다.”
“완벽하군.”
“예, 너무도 완벽합니다. 그래서 의심이 갑니다.”
예왕에게는 어떤 흠도 없었다. 군왕 작위를 가진 황자로서 법망을 피하는 선에서 충분히 권세를 부릴 수 있는데도, 일절 그런 난행은 하지 않았다. 백성들을 착취하지도, 상인들에게 뇌물을 받지도, 관리들에게 압력을 가하지도 않았다.
“하다못해 술도 마시지 않습니다. 궁궐에서 잔치가 열릴 때 입술에 술잔을 대기만 하는 건 폐하께서도 보셨을 겁니다. 다른 종친이 여는 주연에 가는 적도 없고, 자기 집에서도 단 한 잔도 마시지 않습니다. 연년이 가뭄인데 어찌 자신이 술을 마시겠느냐는 겁니다.”
“참으로 칭찬할만한 언행이로구나.”
“그렇다 해도 폐하께서 명하신다면 당장이라도 추포하겠습니다만….”
금위사는 증거 없이는 누구도 체포하지 않는다. 증언이든 문서든,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확보했을 때만 죄인을 잡아 심문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 증거란 것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였던 경우가 허다하다. 죄를 만들기로 작정하면 죄목이 되지 않을 것이 없다.
“예왕 전하께서는 대명동에 연줄이 있습니다. 중원을 정벌하고 대명공을 떠받들어 대명을 회복한다는 명분을 내세워서 보위를 노린다는 죄목을 걸어 추포할 수도 있습니다.”
충분히 실천 가능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태황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아무 죄도 짓지 않은 대명공의 관작을 삭탈하고 대명동을 피바다로 만드는 지경으로 몰릴 뿐이다. 예왕이 드러내놓고 아무 짓도 하지 않은 한은, 그저 태황이 되고 싶다고 머릿속으로 생각만 했다고 해서 처벌할 수는 없다.”
입안에 든 연기를 뿜어 작은 구름을 만든 태황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예왕도 황자다. 그렇다면 제위에 앉고 싶은 욕심도 있을 것이고, 자신이 제위에 앉고자 한다면 어찌 처신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으리라.”
태조 이후 이 나라를 통치한 임금은 총 16명, 금상은 17번째로 즉위한 임금이다. 그동안 서자가 보위에 오른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명조가 아들을 하나도 두지 못하는 바람에 장조를 양자로 들여 대를 잇긴 했지만, 대한에서 양자는 서자가 아니다. 적자다.
그전에는 태조부터 단종까지, 또 세종의 적자인 세조부터 명조까지 한 대도 끊기지 않고 적자가 보위를 물려받았다. 장조 이후로 금상까지도 계속 적자였다. 만약에 예왕이 보위에 오른다면 서자 출신으로 옥좌에 앉은 첫 번째 임금이 될 것이다.
“그 의도가 어디에 있건, 예왕이 자기 품행을 바르게 하고 황실과 사직을 위해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그대로 두어야 한다. 사리에 맞는 행동을 한다고 벌을 줄 수는 없다.”
“예, 폐하.”
예왕이 태종이나 세조처럼 정변을 일으킬 위험은 거의 없다. 일단 예왕에게는 사병이라고 할 만한 전력이 없다. 그리고 도성 일원에 주둔하는 오군영 군사 4만, 금군 1600은 태황의 손에 단단히 장악되어 있다. 어떻게 몇백 정도 사람을 모은다고 해도 범궐은 턱도 없다.
“게다가 궁장(宮牆)을 넘으려면 공성포가 필요할 게 아닌가.”
부황인 열조가 그런 사태까지 예상하고 축조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황궁을 둘러싼 궁장은 높이가 15자(4.5m)에 기단부 두께만 8자(2.4m)에 달한다. 벽돌로 겉을 쌓고 잡석을 회로 버무려 속에 채워서, 통나무 기둥으로 두드리는 정도로는 절대 뚫지 못한다.
“예왕이 제위에 앉으려면 짐과 태자가 모두 급사하는 정도 사태는 일어나야 한다. 그날을 앞당기고자 예왕이 뭔가 수를 쓴다면 마땅히 처벌해야겠지. 하지만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그저 땅바닥에 누워 감이 떨어지기만 기다린다면, 괘씸하더라도 그걸 죄라고 할 수는 없다.”
“알겠사옵니다.”
어느덧 대통 안에 채운 연초가 거의 다 타들어 갔다. 한 번에 연초를 두 대 연달아서는 피우지 않는 태황이 마지막 연기를 뿜으며 천천히 중얼거렸다.
“그런데 성친왕에게 한 가지, 참으로 신기한 일이 있도다.”
“무엇이옵니까, 폐하.”
“성친왕의 마술(馬術)은 그저 안장에서 떨어지지 않고 달리는 수준이었고, 궁술은 예왕이 쏘는 것만도 못했으며, 다른 병기는 아예 다뤄보지도 않았다. 총은 소리가 커서 싫다면서 손도 대려고 하지 않았지. 그런데 어찌 그리 갑자기 온갖 병기에 능숙해졌단 말인가?”
달려드는 멧돼지를 화살 하나로 잡고, 수십 보 앞을 뛰어가는 사슴을 강선도 없는 총으로 단발에 명중시켰다. 숙련된 기사를 창술로 낙마시키고 전장에서는 장수가 되어 갑옷을 피로 물들이며 싸웠다. 죄다 옛날의 그 성친왕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니었다.
“처음 보고가 들어왔을 때는 뭔가 착오가 있으리라고 여겼다. 아무리 금위사 관원이라고 해도 착각이 있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 도착한 보고서까지 다 보고 나니 더 이상은 의심하기 어렵다. 성친왕은 확실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게다가 필체까지 달라지지 않았나.”
마침내 대통 속에서 피어오르던 마지막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태황은 다 피운 장죽을 탁 하고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대도 들은 적이 있을 텐데? 장조께 실은 무종대왕의 혼이 씌었다는 소문이 예로부터 궁궐 내에서 내려오고 있음을.”
“예, 폐하.”
잠시 말을 멈추었던 박중현이 조심스럽게 이의를 제기했다.
“그 소문은 장조께서 무종조 때 일은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면서 그 뒤에 있었던 일은 잘 모르셨고, 또한 바로 어제까지 대면하던 신하들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셨다는 데서 생기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성친왕께서는 다르십니다.”
“다르다고?”
“예. 품행이 그전과 달라지기는 하셨으나 그리 급하게 바뀐 것이 아니라 천천히 바뀌셨고, 수행하는 관원과 노비들의 얼굴도 모두 멀쩡히 알아보셨습니다. 그렇다면 성친왕께는 다른 혼이 씌워지지 않았고, 분명히 전하 본인의 혼이 들어있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과 무기 다루는 솜씨가 갑자기 좋아진 것은?”
“그분께서도 장조 폐하의 후예시니, 그 자질이 불현듯 깨어났다고 보시면 되지 않을지요. 더구나 전하께서 불랑국에서 개심하시고부터 매일 말과 활, 검을 수련하기를 게을리하시지 않았음은, 저희 관원이 보낸 보고서에도 명확히 적혀 있지 않사옵니까. 필체야 연습에 따라 바뀔 수도 있고요.”
“그 말이 옳기는 하다.”
태황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멀찍이 있던 대전 내관이 급히 달려왔다.
“그 점은 생각해 보도록 하지. 조 내관, 가서 예부대신을 불러라. 성친왕이 대유주에 가서 돌궐을 쳐서 장조께서 당하신 모욕을 장렬하게 복수한 전말을 조보에 실으라 명해야겠다.”
“예, 폐하.”
내관과 금위사장을 모두 내보낸 태황은 잠시 홀로 걸으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성친왕에게 과연 어떤 처분을 내리면 적절할까? 천천히 생각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