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941
3부 05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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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라고 말은 했지만, 사실 서재보다는 서고라고 부르는 편이 정확하다. 책장에 제대로 꽂아둔 책은 거의 없고, 암스테르담과 런던에서 모은 3천여 권 대부분이 상자에 포장된 채 쌓여 있기 때문이다. 그림도 습기가 차거나 손상되지 않게 단단히 포장해서 쌓아두었다.
“많이도 모으셨습니다.”
“탐나는 게 참 많더라 그 말일세. 프랑스에서 나온 책도 있네.”
내가 프랑스를 떠나고 얼마 안 가서 죽은 콜베르의 경제 정책에 관한 책 같은 거 말이지. 콜베르는 프랑스 해군을 확장하는 데도 크게 공헌했으니 충분히 참고할 만한 사람이다. 그 사후에는 장남인 장바티스트 앙투안 콜베르가 해군대신 자리를 이어받았다고 들었다.
“조선으로 떠난 ‘동방의 현자’ 호가 차라리 좀 더 늦게 완성되었으면 이 짐들을 전부 실어 보낼 수도 있었을 텐데, 그 시기가 어중간해서 그냥 떠안고 있게 되었지. 일반 상선 편으로 보내자니 운임이 너무 많이 나올 것 같고.”
‘동방의 현자’는 내 배 동현(東賢)을 가리킨다. 지금 인도양쯤에 가 있겠지.
책은 무겁다. 현대에서도 우리 집이 이사할 때면 살림을 나르는 트럭 한 대에 책만 나를 트럭 한 대를 따로 빌려야 했다. 무거운 책 상자를 나르느라고 고생한 인부들에게 수고비 조로 얼마씩 더 쥐여줘야 했던 건 물론이다.
그림은 반대로 가벼운 대신 부피가 크다. 부피를 줄이겠다고 액자에서 떼어내 돌돌 말아 보관하면 캔버스에 칠한 물감이 갈라진다. 적당히 작은 그림이라면 액자에 끼운 채 잘 싸서 상자에 담으면 되지만, 큰 그림은 그것도 어렵다.
“이 커다란 상자는 뭡니까, 전하?”
“그림 한 점이 든 상자일세.”
“단 한 점이라고요?”
두 사람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책 상자에 기대놓은 커다란 상자를 쳐다보았다. 하긴 두께는 얇은 편이지만 폭과 높이는 각기 5m, 4m나 되는 큰 상자에 든 그림이 달랑 1장뿐이라고 하면 누구나 눈이 동그래질 거다. 하지만 어쩌랴, 정말로 그렇게 큰 그림인걸.
“이 그림을 사고 싶으시다고요?”
“그렇소이다.”
내 제안을 받은 암스테르담 민병대 회관 간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40년 전에 그린 《프란스 반닝 코크 대장과 빌럼 반 루이텐부르크 부대장이 지휘하는 민병대》라는 그림을 사고 싶다는 사람이, 그것도 아시아에서 찾아올 줄은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인지 간사가 내놓은 대답은 가타부타하는 결정이 아니었다. 반문이었다.
“이 그림을 왜 사려고 하십니까? 이건 우리 대원들을 그린 그림일 뿐이고, 외부인에게는 별로 가치가 없을 텐데요. 게다가 일반 가정에 걸어두기에는 너무 큽니다.”
“별다른 이유는 없소. 내가 본국에 가져갈 기념품으로 그림을 좀 모으고 있는데, 내 눈에 무척 잘 그린 그림이라고 생각해서 가지고 싶을 뿐이오. 분위기도 쇄신할 겸, 여러분께서는 저 그림을 처분하고 여기 대강당에는 새 그림을 놓으시면 어떻겠소?”
상대가 거절한다고 말하기 전에 잠시 펜을 빌려달라고 했다. 가지고 있던 네덜란드 은행 어음에 액수를 적어 내밀자 간사의 눈이 아까보다 더 커졌다.
“3천 길더 내겠소. 어떻소?”
“3, 3천 길더라고요?!”
민병대에서 이 그림을 주문했을 때 낸 비용이 1,600길더였다고 알고 있다. 90% 가까운 수익을 올리면서 새 그림도 마련할 기회이니, 민병대 쪽에서도 관심이 있을 거래다.
“그게…제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는 일입니다. 논의를 거쳐야 하니 기다려주십시오.”
“기꺼이 연락을 기다리겠소.”
렘브란트의 《야경(夜警)》을 손에 넣을 기회가 아닌가. 당연히 기다려야지. 이런 기회는 다음 생에는 절대로 없을 거다.
저쪽에서 팔아주기만 한다면 내가 부른 값의 5배라도 낼 의사가 있다. 용산별궁에, 혹은 국립미술관 같은 곳에 이걸 걸어두면 얼마나 뿌듯하겠는가.
“최종적으로는 6,600길더로 낙착을 보았다네. 사들일 때 골치 아픈 논란이 있었던 그림인 탓도 있어서, 민병대 쪽에서는 파는 데는 별 이의가 없었지. 하지만 일단 팔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니 한 푼이라도 더 남기려고 들더군.”
논란이란 건 별거 아니다. 그림에 들어간 민병대원 16명이 각자 렘브란트에게 그림값으로 100길더씩 냈는데, 전원이 똑같이 나오지 않고 일부 대원만 확연히 부각되게 그려놓은 게 문제였다. 당연히 제대로 안 나온 대원들이 불만을 터트렸다.
그 사건으로 렘브란트는 그림 주문이 확 떨어지는 불운을 겪었다. 그렇다고 이미 시장에 나온 렘브란트 그림이 값이 내리지는 않았지만, 그래 봐야 화가에게는 도움이 안 됐다. 새 그림이 팔려야 살림이 펴지지, 중고가가 높아 봐야 화가한테는 한 푼도 안 돌아간다.
“운반도 큰일이셨겠습니다.”
“말도 말게. 그림과 그림을 지탱하는 지지대 무게를 다 합치면 무려 천 2백 파운드라네. 상자 무게까지 하면 2천 파운드를 넘지.”
캔버스, 액자, 프레임까지 합친 무게가 5백 킬로그램을 넘는다. 여기에 웬만한 충격으로는 부서지지 않게 만든 상자 무게까지 더하면 거의 1톤이다.
“동방의 현자 호가 돌아오면 그편으로 조선에 보내야지. 이 많은 책과 그림을 조선까지 보내려면 운임이 한두 푼이 아닐 테니까. 저택이야 이 짐이 없어도 어차피 빌리는 것이고.”
바다를 건너가는 동안 습기 때문에 그림이 상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긴 하지만, 유럽에 놔두면 사들인 의미가 없으니 가져가야 한다. 최대한 잘 포장해서 운반 중에 손상이 생기지 않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수집한 그림 수는 렘브란트가 37점, 프란스 할스라고 초상화로 유명한 화가 작품이 16점, 베르메르가 11점, 풍속화가인 피테르 데 호흐 16점이다. 하지만 이건 네덜란드 ‘현대 화가’들만 계산한 거고, 전세기 인물들인 루벤스와 브뤼헬도 각기 12점, 7점씩 모았다. 총 99점.
전부 내가 네덜란드에 체류하는 동안 산 건 아니다. ‘야경’을 비롯해서 일부는 내가 직접 사들였지만, 작품 대부분은 잉글랜드로 건너온 뒤에 화상(?商)을 통해서 구매했다.
당연하지만 포장하지 않고 벽에다 걸어둔 작품도 몇 점 있다. 여기 있는 동안에도 그림은 감상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중 가장 애착이 가는 것 둘만 고르면, 하나는 루벤스가 그린 《한복을 입은 남자》다. 추기경으로 서임된 시절의 광해군이,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리게 했다고 한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갓과 도포를 몸에 걸쳤을까.
광해군은 죽을 때까지 조선에 돌아가지 않았고, 지금도 로마에 잠들어 있다. 이 초상화와 함께 혼이라도 고국에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떨까 싶다. 이번 생이라면 상희에게 ‘광해군이 실은 너를 좋아했던 모양이다’라고 알려줘도 큰 문제가 안 되겠지.
두 번째는 프란스 할스가 그린 데카르트 초상화다. 데카르트가 한동안 네덜란드에서 지낸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린 모양이다.
다만 조각 종류는 전혀 사지 않았다. 조각의 본산은 역시 이탈리아 아닌가? 잉글랜드에 머무르다가 이탈리아로 넘어가면 그때 수집할 생각이다. 그리스나 로마 시대 조각도 살 수 있으면 사고, 르네상스 것도 모아보고.
“프랑스에 계실 때는 미술품에 별 관심이 없으시더니, 변하셨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내가 너무 어려서 정치나 군사에만 흥미가 있었지. 나도 나이가 들면서 좀 바뀐 것 같네.”
사실 나이와는 별 관련이 없다. 70년 가까이 살았는데 서너 살 더 먹는다고 예술에 관해 없던 흥미가 생길 리 없지 않은가.
네덜란드에 와서 그림을 모으기 시작한 건 심리적, 재정적인 여유 덕분이다. 일단 빈에서 얻은 전리품 덕분에 주머니가 두둑해졌다. 네덜란드에서 받은 모후의 편지 덕분에, 형황이 아무리 나한테 화를 내도 모후가 목숨은 지키게 해주리라는 확신도 생겼다.
물심양면으로 여유가 생기니 비로소 예술품을 살 생각이 들었다. 이만한 규모라면 훗날 ‘성친왕 컬렉션’이라고 해서 네덜란드 미술관 하나 따로 만들 만하지 않을까?
귀국하면 풍경화나 정물화는 모후나 형황한테 몇 점 바치고, 인물화는 모두 내가 소장할 생각이다. 조선에서야 자기 집안사람도 아닌 서양인을 그린 인물화를 갖고 싶어 할 사람도 없을 테니, 누가 달라고 하지도 않을 거고 말이다.
다음 생에서 내 인생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점을 생각하면 몇 점 감춰둘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림은 보관이 잘못되면 끝장이니 그건 포기했다. 만약을 대비해서 뭘 묻어둔다면, 역시 금이겠지. 금은 썩지도, 녹슬지도 않으니까.
무종 때야 죽을 줄도 몰랐으니 다음 생을 대비할 생각 따위는 당연히 못 했다. 장조 때는 죽기 직전까지 바쁘고 힘들어서 고려할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다음 생에도 임금일 테니 대비 따위는 할 필요도 없다고 여겼고.
하지만 이번에 임금이 아닌 친왕으로 눈을 뜨고 보니 다음 생(이 또 있다면)에서는 이번 각성보다 더 나쁜 처지로 시작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조금씩 든다. 그럼 정말로 한 푼이 아쉬워질 수도 있다. 이번에 귀국하면 정말 으슥한 산골에다가 금괴라도 좀 묻어놓을까.
서재를 둘러보고 나온 뒤에는 만찬이 있었다. 이들 두 총사와 면식이 있는 우리 무관들도 어울려서 즐겁게 환담하며 술과 음식을 즐겼다. 영국인이 아니라 프랑스 요리사를 고용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카자크 6형제도 흥을 돋운다며 나섰다. 하나는 자기네 전통악기인 ‘반두라’라는 현악기를 연주하고 나머지 다섯은 ‘호팍’이라는 자기네 춤을 췄다. 저 펄쩍펄쩍 뛰는 춤은 언제 봐도 춤이 아니라 곡예에 가까워 보인다. 참 흥겹기는 하구먼.
9.
왕립학회에서 나와 가장 친한 사람 중 하나가 에드먼드 핼리다. 왕립학회 행정직원이라서 나랑 접촉이 많기도 하지만, 혜성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한 게 결정적이다.
핼리는 일정 주기를 두고 나타나는 특정 혜성에 관해 이미 깨닫고 있었다. 아직 공식적인 논문으로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이론의 기반은 수립돼 있었다. 나는 여기에 몇 가지 근거를 제공해주었다.
“맞소. 75년에서 6년 주기로 지구 주변에 나타나는 혜성이 있지. 우리 조선에서도 확실히 관찰한 바가 있소.”
“역시 기록이 일치하는군요!”
핼리는 뉴턴이 출판하지 않고 처박아두었던 프린키피아 원고 편집을 몇 년 동안 도왔다. 그 책이 마침내 출판된 게 작년인데, 그 편집을 도우면서 태양계 여러 행성의 공전 궤도를 연구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당연히 혜성 연구도 그 일부였다.
“지난 1682년에 온 혜성은 제가 직접 보았었지요. 그리고 기록을 살펴보니, 1607년에 온 혜성의 궤도도 1682년의 그것과 똑같았습니다.”
“맞소. 우리 조선에서 기록한 자료도 똑같소. 검증에 도움이 되겠소?”
“물론입니다!”
1607년에 온 혜성…그때는 상세한 관측을 하지는 못했다. 구름이 낀 날이 많았던 탓이다. 게다가 가뭄과 홍수가 연이어 터지던 때라, 혜성은 확실히 불길한 징조로 간주했었다.
그때 혜성을 보겠다고 밖에 나가기는 했다. 하지만 나도 나이가 들어 눈이 많이 흐려져서 궁궐 뜰에 나가서도 혜성을 제대로 보기 어려웠다. 그래도 그 긴 꼬리를 한 번은 확실히 볼 수 있었다.
핼리 혜성을 두 번째로 만난 건 1682년 여름, 프랑스에 있던 시절이다. 지난번 생보다 더 밝아진 눈으로 돌아온 혜성을 보고 있으려니 만감이 교차했다. 지난번 생에서 혜성을 볼 때 내 옆에 있던 가족들과 신하들이 그리웠다.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들이 말이다.
“그 혜성은 저도 봤어요, 전하. 다음에 또 올 때는 우리가 같이 혜성을 볼 수 있을까요?”
“우리가 둘 다 90이 넘도록 장수한다면야….”
지난번에 날아온 혜성은 당연히 올렝카도 봤다. 다만 혜성이 제일 잘 보이는 시기에 내가 조선소 일 배운다고 브레스트에 가 있었던지라, 나와 함께 보지는 못했다.
“핼리가 주장하듯 76년마다 그 혜성이 돌아온다면 다음번은 1758년 경이겠지. 너는 92세, 나는 93세…아무래도 어려울 듯싶다.”
“역시 힘든가요.”
나와 만난 지 6년, 올렝카도 이제는 완연한 성숙미를 풍기는 여인이 되었다. 22살이라면 현대 세계에서는 아직 어린 학생 취급이지만, 이 세계에서는 이미 클 만큼 다 큰 성인이다.
다만 올렝카는 아직 임신은 한 번도 하지 못했다. 원인이 뭔지는 아직 모르겠다. 우리 둘 중 한쪽에 신체적인 원인이 있는지, 그냥 우연히 그렇게 된 건지. 현대에서 말짱한 커플이 아무리 노력해도 애가 안 생기는 경우를 못 본 것도 아니니 후자일 수도 있겠지 싶다.
나야 딱히 자식이 아쉬울 일도 없고, 객지에서 돌아다니려면 아무래도 애가 딸리지 않는 편이 덜 힘들기도 해서 올렝카에게 아이가 생기지 않아도 별 유감이 없다. 그런데 올렝카는 나랑 생각이 달라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자신에게 죄의식을 느끼고 실망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눈치가 보인다고 해서 애 같은 건 안 낳아도 된다고 대놓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여자는 당연히 애를 낳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17세기 애가 그런 소리를 들으면 무슨 생각을 하겠나.
이런 상황에서 내가 올렝카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자기가 자식을 못 낳는다고 해서 내가 자기를 미워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꾸준히 잘해 주는 수밖에 없다. 다만 오직 한 가지 문제만은 내가 확실하게 해결해줄 수가 없지만….
‘전하…혹시 제가…전하의…아내가…될 수 있을…까요…?’
성친왕비가 죽었다는 소식을 받은 나는 왕비를 추모하는 의미에서 올렝카와 석 달 동안은 침실을 따로 썼다. 그 별거를 마치고 다시 올렝카와 같은 침대에 누웠던 날 밤, 내 가슴에 얼굴을 묻은 올렝카가 자그마하게 속삭였다.
‘이제 전하께는 정식 부인이 없으시잖아요…. 이 박사님은 절대 안 된다고 말씀하셨지만…. 혹시….’
가슴이 먹먹했지만 ‘그래, 널 아내로 맞으마’라는 말은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내가 진짜 23세 된 성친왕이었다면 당당하게 그렇게 말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황실의 정치적 입장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었다.
‘신께서 허락하신다면 그렇게 되겠지.’
이 정도 대답이 최선이었다. 올렝카는 잠시 침묵하더니 내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조용히 중얼거렸다.
‘감사해요….’
올렝카도 내 처지를 이해하는 듯, 정처 자리 문제로 더 매달리지는 않았다. 애초에 자기 것이 아니었던 자리니 앞으로도 탐내지 않겠다는 태도인 듯해서 나도 무척 안쓰러웠다.
“전하, 저는 준비 다 끝났어요. 전하께서는요?”
내가 잠시 지나간 일을 생각하는 사이 올렝카는 화사한 드레스를 멋지게 차려입고 외출할 준비를 마쳤다. 그 아름다운 자태를 보니 절로 내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음, 나도 다 됐다. 나가보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