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945
3부 063화
16.
본국에서 직접 사람이 오니, 무엇보다 좋은 건 생생한 본국 상황을 접할 수 있다는 거다. 우리 일행이 유럽에 도착한 때가 1681년 12월인데, 그 후로 편지 외에 사람이 직접 온 건 처음이니까 말이다.
“본국에서는 다들 어찌 지내시는지요? 모후께서는, 그리고 태황께서는 평안하십니까?”
분위기가 확연히 부드러워진 다음에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성시균은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답을 그리 쉽게 들려주지는 않았다.
“지금은…소관이 말을 삼가야 할 것 같습니다. 혹시 취중에 실언이라도 하였다가는 폐하께 어떤 죄를 지을지 모르는 관계로….”
형황이 믿고 일을 맡기는 측근쯤 되려면 이 정도 마음가짐은 기본인 모양이다. 이 이마를 송곳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양반 같으니.
덕분에 그날 칙사를 환영하는 잔치 자리에서는 내가 베네치아 은행에서 빼 쓴 돈을 도로 메워 넣은 것을 형황이 좋게 봤다는 이야기 이상은 듣지 못했다. 도리어 이쪽이 유럽 여행 중 겪은 갖가지 이야기만 신나게 늘어놓고, 실컷 술이나 마시고 끝났을 뿐이다.
제대로 된 조선 이야기는 다음 날부터 나눌 수 있었다. 물론 이형준과 정호찬도 동석한 상태에서 여러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했다.
“전하께 칙서를 전달함으로써 칙사로서의 제 임무는 다 끝났습니다. 그러니 부디 말씀을 편하게 하십시오.”
“하지만 그래도 칙사이신데….”
“괜찮습니다. 칙서 전달로 칙사로서 맡은 일은 마치게 하라는 황명이 분명히 있으셨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다면…알겠소.”
이형준한테도 안 하던 극존칭을 붙여주면서 대화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는데 다행이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그동안 궁금하던 것들을 하나씩 물었다.
“본왕이 돌궐군과 싸운 일에 조정 중신들은 어찌 반응하였소?”
태후가 보낸 편지에는 조정 내에서의 움직임 같은 건 거의 적혀 있지 않았다. 물론 조정 여론의 대체적인 방향에 관해서는 적었지만, 신하 누가 정확히 무슨 의견을 내놓았나 같은 내용까지는 바랄 수 없었다. 이형준이나 정호찬이 가족에게 받는 편지도 마찬가지였다.
조정의 공식적인 반응이 궁금하면서도 접할 방법이 없어 전전긍긍하던 참인데, 본국에서 직접 칙사가 왔으니 가만있을 수 없다. 묻고 싶은 질문은 이거 말고도 산같이 쌓여 있다.
“이미 여러 해 전 일이라 소관이 기억이 흐려졌을 수 있음을 양해해주소서.”
성시균은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일단 변명부터 했다. 예전에 한때 집현전에서 성시균과 함께 근무했었다는 이형준이 그에게 차를 따라주며 괜찮으니 말해 보라고 다독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전하께서 그토록 큰 공을 세우실 줄은 미처 몰랐기에 꼼짝없이 초상을 치르게 되었다고만 여겼습니다. 폐하께서는 이제 전하의 제사를 치러야 하겠다고 현왕께서 두신 세 아드님 중 셋째인 삼성공을 전하의 양자로 들일 준비까지 하셨지요.”
본래 조선 왕실에서는 임금의 적자는 대군, 서자는 군이라 했다. 이들은 다 품계가 없는 무품이다. 그리고 대군의 적장자는 종1품 군, 세자의 아들과 대군의 적장손과 왕자군의 적장자는 정2품 군에 봉했다. 그 밑은 종2품 군, 정3품 도정, 종3품 부정, 정4품 수, 종4품 부수, 정5품 영(령), 종5품 부령, 정6품 감 순으로 품계가 낮아졌다.
이 제도는 칭제건원 이후로 바뀌었다. 먼저 대군과 왕자군은 친왕과 군왕이 되었다. 그 아래 서열, 즉 태황의 손자들은 공(公)이라 한다. 증손자는 후(侯), 고손자는 백(伯)이다.
이는 사실 고려 때 제도를 부활시킨 것이다. 본래 고려에서는 왕자나 부마에게 후나 백을 봉했다가 공으로 올리곤 했다. 그리고 신하들에게도 이런 작위를 내렸으나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된 충렬왕 이후 폐지하고 군호제를 시행했다.
조선 초기, 왕자들과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한동안 공후백의 작위를 수여한 사례는 있다. 하지만 명나라와의 관계 탓에 다시 오등작을 폐지하고 군호제로 돌아갔다. 그 뒤로 2백 년 동안 군호제가 계속 유지되다가 칭제건원과 더불어 오등작 제도가 다시 시행된 거다.
다만 그동안 굳어진 조선의 법도에 따라 공후백의 각 봉작은 상속되지 않는다. 혹 사유가 있을 시 승작이 될 수는 있으나, 그래도 다음 대에서는 다시 내려간다. 그리고 어떤 봉작을 받건, 임금으로부터 4대를 넘겼을 때 평민이 되어야 하는 점은 동일하다.
당연하지만 신하가 공을 세워 공후백의 작위를 받았을 때는 당대로 그친다. 작위와 함께 품계, 녹봉이 오르기는 하지만 그것뿐이다. 후손에게 작위나 봉토를 물려줄 수는 없다.
“삼성공은 어떤 성품이오? 황상께서 내 양자로 고려하셨다면, 평소의 품행이 폐하의 눈에 들었다는 말일 텐데…본국을 떠난 지 8년이 되고 보니 솔직히 조카라지만 얼굴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군.”
“전하께서 배에 오르실 때 삼성공께서는 고작 3살이셨으니, 기억나지 않는 게 당연하실 겁니다.”
현왕의 아들 3명은 각각 나이가 19세, 16세, 11세라고 했다. 맏이인 영해공 이철은 이미 군역을 수행할 나이라 족친위에 들었을 것이고, 둘째 강녕공 이고는 나이도 얼마 안 되는 놈이 종학 대신 반촌다점에 죽치고 앉아 커피잔을 기울이며 한량질하기 바쁘다나.
“그래도 노상에서 여인네들을 희롱하며 황실의 체면에 먹칠하지는 않으십니다.”
“그건 참으로 다행이오.”
반촌다점과 반촌주점은 반촌극장의 위세에 힘입어 지금도 도성에서 가장 번성하는 카페와 술집이다. 여전히 번호표를 받고 대기하다 입장해야 할 만큼 손님이 많고, 도성의 상인이나 사대부들에게는 말 그대로 핫플레이스가 되어 있다.
물론 이런 유망한 사업에 70여 년 동안 아무도 나서지 않았을 리는 없다. 지금 도성에서 성업하는 다점은 10여 곳은 족히 된다. 하지만 그중 선두는 단연 반촌다점이다.
지금 반촌다점을 비롯한 반촌그룹 ? 내가 편의상 부르는 호칭이다 ? 을 소유하는 주인은 진안군의 손자인 회령후 이홍진이라고 한다. 도성에 거주하는 종친 중에 가장 부유한 이를 꼽으라면 단연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라, 선망의 대상이라고 한다.
물론 이 재산이 전적으로 반촌그룹에서만 나온 건 아니다. 나와 상희한테 각각 물려받은 전답에다 조부인 진안군 ? 참, 연이 때 ‘진왕’으로 봉작되었다 ? 이 평생 집필한 모든 소설 판권도 회령후가 가지고 있다. 고로 여기서 나오는 수입도 상당히 많다.
지금 조선에서 도서 판권은 저자 사후 60년까지 인정한다. 발명 특허권도 출원 시점에서 30년밖에 안 되는데 책 저작권은 사후 60년씩이나 되는 건 균형이 안 맞는 부분 아니냐고 물었더니 이형준은 이렇게 답했었다. 명분을 중요하게 여기는 성격다운 답이었다.
‘기계는 조금만 있으면 새로운 것이 나와 가치가 떨어집니다만, 좋은 글은 세월이 지나도 그 가치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글을 쓴 이에게 더 오래 권리를 보장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호찬이 내놓은 설명은 이형준과 조금 달랐다. 늘 그렇듯 실리에 치중한 해석이다.
‘책을 팔아서는 기계를 만들어 파는 만큼 돈을 벌기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니 혼자 팔 수 있는 기간이라도 좀 더 길게 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좋은 기계는 하루빨리 많은 이들이 만들어 쓸 수 있게 하는 게 중요하니 특허가 짧은 편이 낫고 말이지요.’
각각 명분과 실리를 더 중시하는 두 사람의 설명을 들으면서, 세상이 꽤 바뀌었다고 해도 아직 사대부가 지배하는 조선 사회의 기반은 여전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신기술 발명보다 책 쓰는 일이 사회적으로 더 높이 평가받는다는 면에서 말이다.
“삼성공께서는 두 형님과 달리 집에서 책이나 보는 조용한 학동이셨습니다. 현왕 전하를 닮아 몸은 건강하십니다만, 행동거지는 태자 전하와 비슷하시지요. 지금도 아마 바뀌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내 양자가 될 뻔한 삼성공 이순은 어려서부터 태자와 친했다고 했다. 2살밖에 차이가 안 나서 그런지, 동궁으로 불려가 사촌형인 태자와 함께 책을 읽으며 동무 노릇을 하곤 했다고 말이다. 아마 그 점을 형황이 좋게 평가했을 수도 있겠다.
“처음에 조정에서는 도리어 별말이 아니 나왔습니다. 다들 전하께서 이미 돌궐군의 칼에 돌아가셨을 줄로만 알았으니 다들 성토도 삼가고 폐하 앞에서 말을 조심하였습니다.”
빈 전투에 참전하겠다고 알리는 내 편지는 하필이면 조카 경친왕이 병으로 죽은 지 20일밖에 안 되었을 때 한양에 도착했다. 그 바람에 형황이 더 노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정말 설상가상이었으리라.
“하지만 보다시피 나는 멀쩡히 살아 있지 않소.”
“그러게나 말이옵니다. 그래서 승전보가 올 때까지 비교적 조용하던 묘당에서, 전하께서 큰 공적을 세우셨음을 알고 비로소 격론이 벌어졌습니다.”
그전까지 조정에서의 여론은 내가 전쟁에 뛰어든 건 이형준이 나를 잘못 보좌한 탓이니, 이형준을 소환해서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정도였다고 했다. 아니면 8차 견서사 전원을 나를 죽게 한 죄를 물어 영구 추방형에 ? 유럽에 버린다는 소리다 ? 처하거나 말이다.
하지만 내가 말짱하게 살아 있고 전공까지 세운 사실이 밝혀지자 내 처우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하지만 그 세는 처음부터 확연히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태후께서는 전하를 바로 본국으로 불러들이고 싶어 하셨으나, 예부대신 송시열을 필두로 한 조정 중론이 반대로 기울었습니다. 전하께서 그 의도야 어찌하였건 사전(私戰)을 벌인 것은 분명한데, 불러들여 처벌할 것이 아니라면 불러들임이 옳지 못하다고 말이지요.”
“그 뜻을 충분히 알 만하오.”
형황이 지금 나를 귀국시켜주면 안 좋은 선례가 된다. 장차 누가 됐건, 본의 아니게 나라 밖에 나간 놈들에게 ‘조기에 귀국하고 싶으면 적당한 명분을 붙여 사고만 치면 된다’라는 인식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 그나마 이기빈은 공무 수행 중이었지만 난 그것도 아니었으니.
내가 형황 입장이었더라도 사고를 친 동생을 당장 불러들이기는 쉽지 않다. ‘상대의 처지’를 너무 잘 이해하는 것도 이럴 때는 문제로군.
“그리하여 논의 끝에 일단 불러들이기는 하되, 본국이 아닌 미주에 머무르시게 하면서 좀 더 수양하시게 하자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전하께서 범하신 잘못을 엄히 물어야 한다는 중신들이 워낙 다수라서…주상께서는 끝까지 그 논의에 직접 개입하지는 않으셨고요.”
애초에 내 ‘추방’을 결정한 장본인이 형황이었다. 그 당사자가 풀어주자는 말을 안 하는데 나를 불러들이자는 여론이 참 잘도 우세할 수 있겠다. 성시균은 최대한 좋게 이야기했지만, 사실상 미주 파견, 아니 ‘유배’ 결정은 형황이 내린 셈이다.
“알겠소. 내 품행을 올바르게 하여 어서 폐하께서 불러주시길 기다려야겠구려.”
미주에 보내면서 아무 직함도 안 주는 이유도 알 만하다. 무기한 해외 추방이 ‘감형’되어 사실상 유배로 바뀐 셈이니, 친왕의 지위에 어울릴 만한 직위를 주는 건 법도 상으로 말이 안 되겠지.
“그런데 떠날 준비에 몇 달이나 걸리신다니, 그러셔도 상관은 없으나 그동안 모은 물화가 무척 많으신 모양입니다?”
“그동안 모은 책과 서화(書?)가 좀 있소. 그거야 금방 준비할 수 있는데…사람이 문제요. 우리 대한에 도움이 될 만한 재주를 가진 인재와 장인 몇 명에게 함께 가자고 약조를 받아 놓았는데,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소. 그들에게 사자를 보내 불러모을 시간이 필요하오.”
다토스와 드 포르토만 부르면 다가 아니다. 스웨덴에서 친해진 광산 기사, 네덜란드에서 알게 된 회계사, 프랑스에서 예약해 놓았던 조선공 같은 사람들도 있다. 잉글랜드에서 보고 단박에 채용하기로 한 크리스털 유리 제작 기술자도 있다.
개중에는 약속대로 얼굴을 내밀지 않을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일단 연락해보지 않으면 그 여부도 알 수 없다.
다만 삼총사 두 사람 외에는 군인들은 데려가지 말아야겠다. 아직 형황이 완전하게 나를 용서한 상황도 아닌데, 내가 미주에서 사병을 양성해 반기를 들려고 획책한다는 의심이라도 받으면 끝장일 테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서두르실 필요는 없으니, 차분하게 준비하십시오.”
성시균은 선선히 내 계획을 받아들였다. 임무에 관련해서는 깐깐할지 몰라도, 인간적으로 어울리기에는 나쁘지 않은 사람인 듯했다.
17.
내가 미주로 이사할 준비를 서두르는 동안에 런던의 정치적 분위기는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왕당파인 토리당도, 반왕당파인 휘그당도 모두 왕자 탄생을 기뻐하지 않았다. 런던 시가지를 흐르는 공기는 흉흉했다.
고별인사를 한다는 명분으로 그동안 얼굴을 익힌 국회의원들에게 찾아가 정세를 파악하려 시도해 보았다. 하지만 다들 위험한 문제에 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그 문제는…지금은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 다음에 논의를…. 그나저나 이제 아메리카로 떠나신다고요? 부디 행운이 함께 하시기를 빌겠습니다.”
내가 방문한 이들 모두 지금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내가 제임스 2세와 가까운 외국 왕족인 데다, 가톨릭에 우호적이기까지 하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으니 그렇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내가 잉글랜드에 따로 첩보망을 구축한 것도 아니다 보니, 그나마 얼굴을 익힌 양반들이 저런 식으로 나오면 도리가 없다. 쐐 친하게 지내던 존 처칠 남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공 전하께서도 아시겠지만, 저는 국왕 폐하의 충실한 신하입니다. 그 외에 무슨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존 처칠은 올해 38세, 아버지 때부터 왕당파였던 집안이다. 제임스 2세가 요크 공작이던 때부터 그 휘하에서 종군했고, 프랑스군 복무 경력도 있다. 튀렌이나 빌라르 등 프랑스군의 여러 명장을 따르며 경험을 쌓았다. 제임스 2세의 측근 중 가장 유능한 군인인 셈이다.
‘하지만 이 양반도 제임스를 버렸지….’
대세가 완전히 뒤집힌 상황에서 충성을 유지하기는 어렵지. 게다가 제임스는 가톨릭이고 이 양반은 결국 신교도니까 말이다. 메리와 빌럼 쪽에 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미 전쟁은 피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네덜란드에서는 벌써 함대가 출동 준비를 마쳤고 육군이 소집됐다. 제임스 2세는 빌럼이 왕위를 노려 영국을 침략하려 한다고 주장하면서 해군에 동원령을 내렸고, 빌럼은 자기는 잉글랜드에서 개신교와 자유로운 의회 운영의 권리를 지키고자 할 뿐이라고 맞받았다. 성명의 공방이 도버 해협을 오갔다.
“네덜란드에 계시는 메리 공주께 거병을 요청하는 연락이 가지 않았소?”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정말 존 처칠이 그 일에 관해서 모르는지, 아니면 알고 있으면서 잡아떼는 건지는 알 수 없다. 하기야 후자라고 해도 내게 사실대로 말하지 않을 이유는 많고도 많지만.
“잉글랜드 국민의 뜻을 막아설 자격은 내게 없소이다. 다만 귀공에게 드리고 싶은 말은, 그대가 국왕 폐하께 충성을 맹세한 신하였음을 잊지 말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오.”
“그야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전에도 생각했지만, 곧 일어날 명예혁명을 내가 저지할 방법은 없다. 저지할 이유도 없고.
여기서 내가 바라는 건, 제임스 2세가 직접적인 위해는 당하지 않고 역사에서처럼 무사히 프랑스로 탈출하는 정도다. 인간적으로 참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으니까.
존 처칠과 만난 이후에는 일어날 일들에 대한 탐색을 포기하고 내 일에만 집중했다. 배를 물색하고 카리브로 떠날 준비를 하느라 바쁜 참에 갑자기 급보가 런던 시내에 쫙 퍼졌다.
“네덜란드 함대가 쳐들어왔다! 어제 데본셔에 네덜란드군이 상륙했다!”
그날은 1688년 11월 16일이었다. 마침내 명예혁명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