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95
1부 095화
“전하, 남북 변경이 모두 잠잠해진 이때 굳이 비변사를 소집하신 이유를 신들은 잘 모르겠사옵니다. 지금처럼 평온한 시기는 백성들의 삶을 살피며 나라의 기력을 다져야 할 때인데, 굳이 변란을 대비하는 비변사가 필요하온지요.”
병조판서 이계동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으음, 그러고 보니 저 양반을 슬슬 쉬게 해줄까 싶다. 작년에도 병 때문에 그만두고 싶다는 걸 억지로 붙들어 뒀었는데, 여전히 별로 안색이 좋지가 않다.
“지금 당장은 전란이 벌어지지 않고 있으나, 조만간 벌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오. 과인이 예전에 읽은 어느 책에서 말하기를, ‘그대가 전란을 찾아가지 않더라도 전란은 그대를 찾아올 것이니라‘고 하였소. 전란이 찾아오기 전에 마땅히 미리 대비하여야 하지 않겠소.”
“신이 읽은 책 중에서는 보지 못한 구절인 듯 하온데 알려주실 수 있으시온지요.”
“읽은 지 오래되어 과인도 기억이 잘 나지 않소. 혹시 생각이 나면 말해주도록 하겠소.”
병조판서 영감 기억에 없을 수밖에. 이건 실은 4백년 뒤 미래에서 나올 말이다. 소련을 이끈 초기 지도자 중 하나, 트로츠키가 한 ‘당신이 전쟁에 관심이 없어도 전쟁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말을 살짝 바꾼 거거든.
“금산적하는 건주위 중심에서 가하는 압력 때문에 좀 조용해졌소. 그렇다 해도 언제 다시 난동을 부릴지 알 수 없으니 늘 지켜보아야 하오. 하지만 과인은 그보다는 남부 변경이 더욱 걱정스럽소.”
신하들이 약간 우려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 이 망할 임금이 여진족을 한번 치고 신나 하더니 이번에는 왜적을 치겠다고 선언할까봐 걱정하는 모양이다. 사실이라 참 미안하다.
“예로부터 왜적은 뱃길이 거칠어지는 겨울을 지나 봄이 되면 본격적으로 도적질을 벌였소. 지나간 겨울이 안정적이었다 해서 올해 내내 저들이 가만히 있으리라 누가 장담할 수 있소?”
“전하. 그 단속 임무는 대마도주와 비전 태수가 일차적으로 맡기로 하였습니다. 기왕 전하께서 저들로 하여금 그 임무를 맡게 하시었으니, 일단 두시고 그 하는 양상을 지켜보심이 어떠하시겠습니까?”
예조판서 이세좌. 외교도 예조 소관이니 이 양반이 이런 말을 하는 게 무리는 아니다. 근데 어째 저번 망언 이래로 이 양반 하는 말이 죄다 삐딱하게 보인다. 서얼금고법 폐지 반대할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거슬리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분명히 날 칭송하려고 한 말인 줄은 알겠다. 그런데 할 말이 따로 있지, ‘너도 너희 엄마가 죄 지은 거 아니까 참은 거 아니냐’정도면 몰라도 굳이 ‘너희 엄마 죽은 거 잘 참다니 정말 대단하다’고 말할 건 또 뭐냐? 물론 알맹이는 같지만 어감이 전혀 다르잖아!
하여튼 두고 보자. 견성군은 죽었지만, 걔네 형제들이 혹시라도 사고 치지 않기만 바라라.
“근래 여섯 달 가량 왜적이 출현하지 않음은 저들이 도적 무리를 잘 다스리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사료되옵니다. 그러한데 굳이 우리가 군사를 일으키려 준비할 필요가 있겠사옵니까.”
뭐, 이런 인식 자체는 대다수 신하들이 하고 있을 테니 굳이 이세좌만 탓하지는 않겠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의를 제기해야 내가 반론하면서 다른 신하들을 설득할 수 있으니까.
“대마도주는 그 불손함이 지나치기에 믿을 수가 없소. 작년에 왜구가 자주 출현한 데 있어 예조가 나무라는 서한을 작성하였으나 대마도주는 그에 대해 제대로 사죄하는 서신조차 보내지 않고 있소. 과인이 틀린 말을 하였소?”
“틀리지 않사옵니다.”
대마도가 우리 항의를 ‘아예 씹은’ 것은 아니다. 예물과 함께 답신을 보내오기는 하였으되, ‘우리도 왜구 근절을 위해 애를 쓰고 있다’고 막연히 변명하는 내용이었을 뿐이었다. 내가 서신에서 요구한 확실한 대책이나 범인 추포 같은 요구사항은 빠져 있었다.
이런 부분은 눈 감고 넘어가려면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트집을 잡으려면 너끈히 잡을 수 있다. 자고로 사과란 받는 쪽이 만족할 때까지 해야 완전히 마무리되는 법 아니던가.
“뿐만 아니오. 비전 태수가 서한을 보내 호소하기를, 비전에서 보내는 세견선은 어쩔 수 없이 대마도 포구에 머물러야 하는데 대마도에서 길을 막고 보내주지 않는다 하오. 비싼 통행세를 내야 비로소 보내주는데, 이를 오고가는 길에 모두 내야 한다니 이 어찌 용납하겠소?”
대마도가 히젠과의 통상에 깽판을 칠거라고는 생각했는데, 그게 이런 스마트한(…) 형태로 나타날 줄은 몰랐다. 솔직히, 나는 대마도인들이 해상에서 히젠 세견선을 약탈한 다음 ‘우리는 모르는 일이에요 엣헴’하고 시치미를 뗄 줄 알았거든. 역시 약삭빠른 놈들이다.
해적질이든 통행세 징수든, 대마도가 히젠과의 통상을 방해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조선과의 교역에서 독점권을 유지하려는 욕망도 있고, 소 씨가 규슈 본토에서 연계를 가진 쇼니 씨와 적대적인 다른 다이묘들을 견제하려는 의도도 있을 터이다.
어느 쪽이건 내 입장에서는 대마도를 한 번 쥐어 팰 필요가 있다. 그래야 이놈들이 양순하게 내 말을 듣도록 만들 수 있을뿐더러, 장래 일본으로 진출할 때 원활한 디딤돌이 되게 만들 수 있으니까.
“허나 전하. 저들이 자기 항구에 들르는 이국선에게 세를 걷음을 가지고 본조가 개입하기는 곤란하다 생각하옵니다. 왜국의 각 지방은 국왕에게 충성하되 서로 갈라져 마치 다른 나라와 같이 살아가니, 세를 받음이 당연하지 않겠나이까.”
“그 액수가 타당하다면 모르겠으나 과도하오. 비전에서 보내온 서신에 따르면 배 한 척당 오고가는 길에 양곡 스무 석을 내라 한다 하니, 어찌 합당하다 하겠소?”
대마도 세견선 한 척당 조선 정부에서 지급하는 세사미두가 4석이다. 이건 대마도주가 직접 얻는 수입인데, 지금 알려온 대로라면 대마도주는 히젠 세견선으로부터 그 5배나 되는 수입을 올리고 있는 셈이다.
“대마도주에게 그 문제를 시정하라 명하셨는지요.”
호조판서 유순이 약간 꺼려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호조판서는 전쟁이 일어날 경우 전비를 끌어내야 하는 만큼 전쟁 문제에 심각하게 반응하겠다 싶긴 하다.
“그야 당연히 서신을 보내 비전 세견선에게 과도한 기항세를 받지 말라 하였소.”
“대마도주가 어찌 답하였나이까?”
“자기들은 그런 세 자체를 거두지 않고 있다 답하였소.”
이렇게 되면 둘 중 하나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이 분명해진다. 다만 대마도가 그동안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쌓아올린 줄타기 스킬을 생각하면, 절대 히젠 배가 자기네 섬을 지나서 조선에 무역하러 가는데 그 꼴을 아무 짓도 안 하고 보고만 있을 리가 없다.
“대마도는 생각과 행동이 너무 간교하오. 비전이 우리를 경모하여 통상을 하고자 하는데 중로에서 멋대로 교통을 막고 있으니, 마땅히 군사를 보내 징벌함이 옳다 생각하오.”
히젠에 본격적인 통상을 트자고 제대로 제안한 건 나긴 하지. 물론 그 전에도 저쪽에서 선물도 보내고 하면서 관계 트자고 하긴 했었지만, 조선은 늘 무시로 일관했다. 굳이 거래를 틀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에 대한 묵은 불신감도 한 몫 했고 말이다.
말해 놓고 보니 이게 한무제의 고조선 원정 핑계와 완전히 동일하다. 한무제가 고조선을 칠 때 명분 중에 하나도 고조선이 진국(당시 한반도 남부 국가들을 부르던 통칭)에서 한나라에 보내는 사절을 중도에 막아선다는 거였으니까. 물론 고조선도 중계무역 때문에 그렇게 했다.
“하지만 전하. 일단은 말로 다스림이 먼저가 아니겠습니까. 군사를 낸다 함은 우리로서도 많은 비용을 각오해야 합니다. 대마도를 힘으로 다스려 비전 세견선을 무료로 통과시키게 한다 한들, 우리가 얻는 실익은 전혀 없지 않사옵니까?”
이세좌가 다시 나섰다. 일단 틀린 말은 아니기에 계속 발언하게 두었다.
“세종대왕께서 감행하신 기해동정 때는 왜구가 정말 극렬하게 설쳤기에, 왜구를 다스린다는 면에서 분명 원정을 감행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왜구도 거의 잦아들었는데, 비전이 내는 통행세를 감해주려고 군사를 낸다면 과연 백성들이 그 뜻을 이해하겠습니까.”
이세좌의 지적이 정곡을 찌르긴 했다. 조선의 정치적 여론을 아무리 양반사대부들이 주도한다고 해도 군사들은 다 백성들이니까. 군사로 동원되는 백성들 스스로가 왜 싸우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면 제대로 싸우기를 바라기 힘든 건 사실이다.
아예 용병이라면 ‘돈 때문에’ 싸우겠지만, 조선군은 대부분 징집병이다. 징집병은 자기 집과 재산을 지키는 방어전에 투입하기는 쉬워도 공격전에서는 전투의지가 생기지 않기 마련이다. 자, 어떻게 군사들에게 일본을 공격하고 싶게 만들 것인가? 이세좌는 그 답을 묻는 셈이다.
“대마도는 고래로 도적의 소굴이었소. 대마도주가 세종대왕께 신종(臣從)하며 왜구를 단속하겠다고 서약한 이래, 지금은 약간 잦아들었지만 완전히 근절되지는 않았소. 좀 조용해졌나 싶으면 도적들이 또 설치는 것을 보아 언제 전조 말과 같이 설치게 될지 모르오.”
한 50년 정도 남았나? 2차 대왜구 시대가 1550년대로 기억하는데 맞나 모르겠다. 내가 지금까지 한 것만 가지고는 조선사는 몰라도 세계사는 그리 바뀐 게 없을 거다. 분명 그때가 되면 왜구가 또 동아시아를 휩쓸 게 분명하니 내 예측이 빗나가지는 않을 게다.
“지금 왜국에서는 국왕과 막부가 모두 힘을 잃어 각 지역 태수들이 내전을 벌이는 중이오. 그러니만큼 우리가 대마도를 공격해도 다른 영주들이 대마도를 원조할 가능성이 낮고, 고로 우리가 대마도를 확실히 장악하여 우리 뜻에 따르게 만들기가 용이하오.”
“하지만 전하. 신은 다른 점에서 우려를 거둘 수가 없사옵니다. 본조에서 대마도를 정벌해 대마도를 너무 약화시킨다면, 왜국 본토에 있는 다른 영주들이 대마도를 공격하여 병탄하고 한층 강하게 도적질을 벌일지도 모르지 않겠사옵니까?”
충분히 개연성 있는 걱정이다. 그리고 난 그걸 못 하게 만들기 위해서 규슈까지 무력시위를 할 생각이지만, 지금 그 이야기까지 하면 난리가 나겠지.
“대마도는 지세가 험하여 쉽사리 정복할 수는 없소. 왜국 본토에 있는 영주들도 자기들끼리 견제가 치열하니, 스스로의 본거지가 위험에 처할 가능성을 무시하고 대마도 원정을 시도하기는 힘들 거요. 예판이 하는 걱정이 실제 일어날 일은 없을 거라고 보오.”
“알겠나이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는지, 이세좌가 드디어 입을 다물었다. 의문점이 될 만한 사항들을 이세좌가 다 파고든 뒤라 그런지 다른 신하들도 별로 입을 열지 않았다. 사실 오늘은 비변사 첫 회의고, 세부적으로 원정 계획을 세울 단계는 아니니 다들 조용해도 괜찮긴 하다.
“5월 전에 대마도주가 왜구 근절 및 비젠과의 통상 방해에 대해 진실하게 해결 방안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5월 말을 기해 군사를 내도록 하겠소. 경상도 절도사와 경상좌우수사에게 명을 내려 군사 동원을 준비하라 이르시오. 또한 경기, 강원 일대 백정과 산척들도 동원하겠소.”
조선에 오기 전에는 백정은 그저 소 잡고 돼지 잡는 도축업자인 줄로만 알았었다. 그런데 웬걸, 말 타고 활 쏘며 마적질하는 백정이 부지기수였다. 성종 때까지 수시로 때려잡고 억눌러서 좀 잦아들었는데 지금도 백정 하면 사람들이 도살꾼이 아니라 도적놈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산척(山尺)은 곧 산을 다니며 사냥하는 이들인데, 커다란 목궁이나 작은 쇠뇌를 사용해 짐승을 잡는 이들이 많았다. 그중에는 정말 대단한 이들도 있었다. 성종시대에 활동했던 어떤 능력자는 쇠뇌 하나로 무려 호랑이를 40마리나 잡았더라! 이게 인간이냐?!
구한말에도 호랑이 잡는 포수들이 강화도에서 프랑스군이나 미군을 상대로 대전과를 올렸다더니 그 피가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닌 모양이다. 이런 명사수들은 써먹어 줘야 예의다. 짐승 잡던 솜씨로 왜적을 잡아 주면 된다.
“평안도에서 야인을 토벌할 때는 평안도 토병들이 워낙 군무에 숙달되어 있어 굳이 백정과 산척을 동원할 필요가 없었으나, 경상도 육군은 그만큼 숙달되지 못하니 이들을 쓸 필요가 있다. 저들은 산을 타고 짐승을 잡는데 능하니, 산이 많은 대마도에서 유용하리라.”
더구나 신분상 천민이라 동원하기에 반발도 적다. 나중에 포상만 적당히 챙겨주면 되고. 특히 백정들은 싸우는 거 자체를 즐기니 약탈만 적당히 허용해줘도 잘 싸우지 싶다. 아마 정말로 얘네 조상이 북방 유목민족이라 그런 걸 즐기는 피가 남아 있을지도….
“예, 전하. 뜻을 받들겠나이다.”
둘러앉은 중신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병조판서 이계동의 어깨가 축 늘어진 게 가장 힘겨워 보였다. 음, 이번 원정만 끝나면 군무에서 해방해서 쉬게 해드릴 테니 힘내세요, 어르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