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958
3부 076화
– 16 –
상희를 만난 순간에는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급히 불러온 마차에다 상희와 시녀 둘부터 먼저 태우고, 나도 말에 오르고 나서야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올렝카 생각이 났다.
올렝카도 언젠가는 내가 새로 왕비를 맞으리라고 예상하고는 있다. 하지만 그 일이 막상 현실로 닥쳤다고 하면, 그것도 아무 예고 없이 일어났다면 얼마나 충격을 받을까.
집에 이 사실을 알리라고 하인부터 먼저 보내 놓고 불안한 마음으로 도착하니, 집에 있던 가솔 전원이 대문 앞에 엎드려서 나와 상희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안주인 노릇을 하던 올렝카만 창백해진 얼굴로 맨 앞에 서 있었다.
마차가 서고 문이 열리자 올렝카가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유유히 마차에서 내린 상희는 올렝카를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고 태연히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대가 지난 10년간 전하를 모신 소씨구려. 반갑네. 앞으로 잘 지낼 수 있기를 바라네.”
장삼(長衫)을 차려입고 몸을 곧추세운 상희는 올렝카만큼 키가 컸다. 두 사람 다 웬만한 남자보다 큰 키다. 그러고 보니 얼굴은 달라도 체형도 비슷하구나.
“본국에서 들었던 것보다 훨씬 미색이 출중하네그려. 역시 전하께서는 아무나 품에 안지 않으시는군. 그대 같은 미인과 함께 지낼 수 있어 참으로 기쁘네.”
올렝카를 본 상희가 대놓고 화를 내지는 않더라도 냉랭하게 대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 시앗을 보면 돌부처도 돌아앉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몇십 년 만에 다시 만났다. 그런데 내 옆에 이미 다른 여자가 있다. 나였으면, 만약 상희 옆에…어떻게 생각해도 저렇게 웃으면서 대하지는 못할 것 같다. 잔뜩 긴장해 있던 가슴이 다시 부드럽게 뛰고, 다소나마 안도하는 감정도 생겼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무척 긴장하고 있었던 것 같은 올렝카의 얼굴에도 약간은 핏기가 돌아왔다. 그런데 지금 상희가 올렝카를 소씨라고 불렀나?
“그대의 부친께서는 ‘소비에스키’라는 성을 쓰신다 들었네. 하지만 조선에서는 그리 길고 부르기 힘든 성을 쓰지 않으니, 조선에서 쓸 성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에 그대를 유주부인으로 봉하는 첩지와 함께 소씨 성을 내리신다는 성지를 내가 받아왔으니, 받도록 하게.”
형황은 그동안 올렝카를 투명인간 취급해왔다. 내가 차마 요구하지도 못했지만, 올렝카를 정식으로 황실에 받아주겠다는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랬는데 지금 상희가 정식으로 측실 자리에 책봉한다는 증서를 가지고 온 거다.
유주부인 소씨(遺洲夫人 蘇氏)라…괜찮은 작호다. 출신지를 붙여서 부인이라고 하는 건 고려 초기에 호족 부인들에게 내리는 작호였다. 높진 않지만, 장차 계기가 생길 때 한 단씩 높일 수 있겠지. 형황이 이름은 내리지 않았으니까 이름은 원래대로 그냥 부르면 되겠고.
“그대가 비록 근본은 대유주 출신의 외인(外人)이라고 하나, 이제는 명실상부하게 대한 황실의 사람이 되었으니 황실 사람으로서 행할 바를 늘 마음에 새기고 지내도록 하게. 나나 그대가 범하는 실수는 곧 전하의 수치가 되니 말일세.”
저 모습을 보고 누가 17세 소녀라고 생각할까. 상희는 저번 생에서도 17세에 후궁으로 입궁, 내가 죽을 때까지 23년 동안 궁궐에서 살았다. 당연히 궁궐에서 지켜야 하는 갖가지 예법에 익숙할 수밖에 없다. 그때 알던 기본에다가 약간 업그레이드만 하면 된다.
“지난 10년 동안 전하를 모시면서 그대가 정숙하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는 말은 내 듣지 못했네. 앞으로도 잘 해내리라 생각하지만, 노파심에 한마디 했을 뿐이니 너무 서운하게는 생각하지 말아 주게나.”
“예, 왕비 전하.”
올렝카가 머뭇거리면서 고개를 숙였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성친왕저의 안주인으로서 확고한 자리를 누리던 애가 졸지에 그 자리를 빼앗기게 생겼으니, 쾌활한 태도를 보인다면 그게 도리어 이상할 거다. 그나마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으니 저 정도인 거겠지.
안타깝다고 생각하며 올렝카를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상희가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두 손을 내밀어 올렝카의 두 손을 꼭 쥐었다. 나도, 올렝카도 당황했다. 미처 왜 그러느냐고 묻기도 전에 상희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유창한 프랑스어를 구사하기 시작했다.
“자네 심경 다 아네. 많이 힘들었지?”
“네…네?”
올렝카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정실 왕비가 남편의 정부인 자신에게 친근한 태도를 보이는 것만 해도 예상 밖인데, 프랑스어로 살가운 위로를 건네기까지 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상희가 프랑스어는 또 언제 익혔을까?
“그대가 전하를 모신지도 이미 10년이 다 되었다고 들었네. 하지만 그 세월에도 불구하고 정식 신분을 얻지 못하였으니 얼마나 불안하고 심란했는가? 보장받지 못하는 신분, 전하의 마음만 바뀌면 언제 버려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며 보낸 밤이 숱하지 않았는가?”
올렝카의 얼굴이 다시 창백해지더니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프랑스어를 못 알아듣는 다른 가솔들은 멍하니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젠 다시는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네. 폐하께서 그대에게도 정식 신분을 주시어 나와 함께 전하를 지아비로 모시게 하셨으니, 그대는 분명한 성친왕가 사람이 되었네. 이제 어떤 걱정도 할 필요가 없다네.”
상희는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네며 자상하게 올렝카를 포옹했다.
“그대는 나보다 9년 먼저 전하를 뵈었지. 그만큼 전하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을 터이니, 내게 많이 가르쳐주었으면 좋겠네. 사실 아메리카에 오면서 홀로 외로운 처지가 될까 싶어 고민이 컸는데, 그대처럼 좋은 이가 이미 있으니 든든하기 그지없네.”
생각지도 못한 상희의 부드러운 태도에 나도, 올렝카도 할 말을 잃었다. 올렝카는 기어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비록 여기서 처음 만났지만, 앞으로 같은 지아비를 모시며 함께 지낼 처지로서 자매처럼 지냈으면 좋겠네. 앞으로 잘 부탁하네.”
“예…왕비 전하.”
올렝카가 반쯤 울먹이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몸을 뗀 상희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올렝카의 손을 쓰다듬었다.
“빈말이 아닐세. 나는 진정으로 자네와 가깝게 지내고 싶으이. 우리 둘 다 본가를 떠나서 멀리 이국에 왔는데, 서로 의지하며 지내면 오죽 좋겠는가. 전하를 두고 양쪽에 서면 마치 한쪽에는 해가, 한쪽에는 달이 뜬 산과 같을 것이니 그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언젠가 상희를 다시 만날 꿈을 꾸면서도 가장 두려웠던 일이 올렝카 문제였다. 상희에게 올렝카에 관해 어떻게 설명할지, 어떻게 두 사람 사이를 좋게 만들어야 할지 한참을 고민해 보았으나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고민이 이렇게 일거에, 그것도 상희 자신에 의해서 해결되어버렸다. 가솔들이 보고 있지만 않으면 상희한테 엎드려 절이라도 하고 싶은 지경이다.
“그런데, 내 처소는 어디로 가면 되겠는가?”
“안채를…지금 정리하고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소서.”
미안한 마음이 또 울컥 솟았다. 안채는 그동안 올렝카가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 지선성에서 생활한 지 1년하고도 10개월, 그동안 올렝카는 성친왕저의 명실상부한 안주인이었다. 당연히 안채도 올렝카가 쓰고 있었다. 하지만 본국에서 정식 왕비인 상희가 왔으니 비워줄 수밖에 없다. 올렝카도 조선의 규방 법도에 관해 알 만큼은 알고 있다.
“정말로 미안하네. 유주부인 자네가 지내던 거처를 빼앗고 싶지는 않으나, 집안에서는 꼭 지켜야 하는 질서가 있으니 어쩔 수가 없네그려.”
“아닙니다. 왕비 전하께서 별당에 거처하실 수는 없지 않습니까. 도리가 아니지요.”
이제껏 안채를 누가 쓰고 있었는지 정도는 상희도 바로 짐작한 모양인지 위로를 건넸다. 하지만 올렝카도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처음 상희를 맞이할 때와 비교하면 훨씬 마음이 풀어진 태도다. 고개를 돌린 상희가 내게 말을 건넸다. 이번에는 한국어다.
“전하, 유주부인은 실로 현숙한 지어미인 듯합니다. 소첩이 앞으로 쭉 유주부인과 가까이 지내도 괜찮으시겠지요?”
“물론이오. 왕비의 마음 씀씀이가 이토록 넓으니 실로 고맙다는 말밖에 할 수 없소.”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안쪽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니 정말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인현왕후와 장희빈이 벌이던 것 같은 치정 싸움에 내가 말려들 일은 없을 듯하니, 정말 다행이다.
“성친왕에게 동변관리사를 제수하니, 미주 인근 지방을 다스려 평안케 하라.”
“황명을 받들어 충실히 따르겠습니다.”
상희가 안으로 들어간 뒤, 사랑채에서는 칙서를 받는 의식이 있었다. 성시균이 또 내게 칙서를 전달했다. 3년 전에 이어 2번째다.
동변관리사는 이제까지 없던 벼슬이다. 명칭만 보면 시베리아를 담당하는 북변관리사와 같은 직책인 셈이다. 북변관리사는 병마절도사와 같은 종2품이지만, 친왕은 무품이니 내가 앉은 자리는 당연히 품계가 별 의미가 없다.
“혼인하여 책임을 한층 더 막중하게 느끼게 되었으니, 특례로 벼슬을 내리시어 변방에서 백성들을 돌보게 하신다는 게 폐하의 뜻입니다. 폐하께서는 분명히 전하를 신뢰하고 계시니 그 뜻을 신실히 받드소서.”
“알겠소이다, 성 칙사.”
성시균은 칙서 전달 외에, ‘동변감리사’라는 직책을 받아 왔다. 이름만 보면 빤히 알 수 있듯이, ‘동변관리사’를 감시하고 관리하는 직책인 셈이다. 이거, 내 동변관리사는 결혼선물 삼아 준 허울뿐인 직책이고 실제 일은 성시균이 다 하는 게 아닐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어디까지나 전하를 도우러 왔을 뿐, 전하를 통제하러 바다를 건너온 게 아닙니다.”
아무리 종친사환금지법이 폐지된 지 오래라고 하지만, 속오군 복무 대상도 아닌 친왕이나 군왕이 실직을 받은 사례는 없다. 종2품 무관직이라지만 나한테 실직을 준 건 정말 엄청난 특례라고 성시균은 역설했다.
“전하께서 대유주에서 보이신 활약, 대미주에서 보이신 성실함, 전하께서 주선해 보내신 불랑국 고문단의 효용 등이 모두 받아들여진 결과입니다. 더구나 그 양인 고문들이 폐하께 전하의 칭찬을 얼마나 했는지 모릅니다.”
다소 멋쩍었다. 그래서 적당히 둘러댔다.
“폐하께서 양인들의 허풍 섞인 칭찬을 진실로 받아들이셨다니 부끄럽구려.”
프랑스 고문단이 조선에 도착한 건 양력으로 1687년 3월, 4년 반 전이었다. 3년 좀 넘게 조선에서 머무르며 활동하다가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받고 작년에 철수했다고 했다. 다만 돌아간 건 함대뿐이고, 기술자나 학자들은 남았다.
“조보에는 싣지 않아 소식을 듣지 못하셨겠지만, 폐하께서는 그들을 모아 서학당(西學堂)을 만들고 똑똑한 이들을 모아 이것저것 배우도록 하고 계십니다. 전하께서 만들어 보내신 교범들도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잘 쓴다니 다행이오.”
프랑스에서, 영국에서 아카데미나 왕립학회를 참관하면서 정리한 노트에는 연구에 필요한 갖가지 용어를 번역한 용어집도 포함되어 있었다. 귀국하는 길에 직접 들고 가려고 했지만, 미주로 가게 되는 바람에 포기하고 그 자료만 따로 본국으로 보냈었다.
“그런데 나는 내가 백두(白頭)인 줄만 알고 조선소나 광산 같은 사업 여러 가지를 새로이 준비하던 참이었소. 헌데 동변관리사가 된다면 모두 그만두어야 하지는 않겠소?”
“괜찮습니다. 사익 때문에 공무를 게을리하실 정도만 아니라면야 문제 될 게 없지요. 그걸 살피는 것도 제 일입니다.”
하기야 감독관이 하는 일이 그거겠지. 그럼 나는 성시균에게 경고를 당하지 않을 만큼만 돈 버는 데 집중하면 된다는 이야기로구먼. 내가 머릿속으로 주판을 튕기는 사이 성시균은 간곡한 목소리로 형황을 옹호했다.
“폐하께서는 겉으로는 냉정해 보이실지 몰라도 속정이 있으신 분입니다. 전하께서 폐하를 좀 더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보다 성시균은 말이 좀 더 많아졌다. 아무래도 조선 내 사정에 무언가 변화가 있는 모양이다. 이건 좀 남들이 없는 자리에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봐야겠다.
– 17 –
동현이 도착한 이레 뒤, 광대한 내 저택 안팎은 손님으로 가득했다. 박종선은 지선성에서 음식 솜씨가 좋다고 평이 난 숙수들을 샅샅이 불러모으고 우리 집 창고에다 비축해 둔 술과 식량을 몽땅 긁어냈다. 모자라는 건 시장에 가서 점포를 통째로 사들였다.
이종덕부터 시작해서 총관부와 지사부 관아에서 일하는 주요 관리들은 물론이고, 지선성 안팎에서 행세깨나 하는 사람들은 죄다 불렀다. 올로내 대추장, 큰 금빛 소나무를 포함해서 가까운 곳에 사는 인디언 추장들도 모두 초대했다.
이런 성대한 잔치를 여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건 사실상 내 혼례 축하연이다.
정식 혼인식 자체는 이미 조선에서 치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 없는 자리에서, 상희 혼자 치른 거긴 하지만 말이다. 태후가 자기 임의로 며느릿감을 간택하고, 신랑이 부재중인 채로 날짜를 정해 혼인을 치르고, 그리고 신부를 배에 태워 보냈다는 게 현재 결과다.
고로 우리는 지금 혼인식을 새로 치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내 혼인을 알리기 위한 행사로서 잔치를 여는 건 지극히 타당하고 또 필요한 행사다.
적어도 천 명은 될 것 같은 손님들 앞에는 푸짐한 술과 요리가 놓였다. 미주에는 기름과 고기가 풍부하다 보니 밥도 그냥 솥에다 지은 보통 밥이 아니라 채소와 고기가 듬뿍 들어간 볶음밥이고, 굽고 삶고 찌고 볶은 갖가지 고기와 생선이 산처럼 쌓였다.
맛을 내기 위한 향료도 아낌없이 썼다. 싸게 구할 수 있는 중남미산 향신료는 물론이고 비싸게 사들인 조선산 참기름과 고춧가루도 잔뜩 사용했다. 사방에서 향내가 코를 찔렀다.
“전하, 이리 아름다운 왕비 전하를 맞이하심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여기 제 축하주를 한잔 받아주시옵소서.”
“고맙소.”
몇 잔째인지 모르겠다. 주는 대로 받아 마시다 보니 눈앞이 뱅뱅 돈다. 그래도 옆에 있는 상희의 얼굴은 선명하게 보였다.
비록 정식으로 치르는 혼인식 자리는 아니어도, 상희는 화려한 혼인 예복을 입고 머리를 손질한 채 내 옆에 앉아 있다. 나를 보고 웃는 그 모습을 보자 처음 재회한 이레 전 그날 생각이 났다.
“이대로, 이대로 조금 더 있자.”
올렝카와 대화를 마치고 온 상희에게 사랑채로 들어오라고 했다. 상희가 본국에서 가져온 온갖 짐이 안채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 동안 어딘가에 있어야 하지 않느냐면서 말이다.
상희가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그대로 방문을 닫고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두 팔이 저려올 때까지 팔을 풀지 않았다. 상희도 아무 말 않고 내 품에 폭 안겨 있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동시에 입에서 나온 질문이었다. 다음 순간에는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우리 두 사람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확인했으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너 먼저 말해 봐. 내가 먼저 죽고, 네가 더 오래 살았으니까.”
두 사람만 있는 자리라고 생각하니까 자연스럽게 반말이 나온다. 상희가 잠시 소리 없이 웃더니 입을 열었다.
“네가 죽은 뒤에 18년 더 살았어. 국상 끝나자마자 출궁해서 욱이네 집에 가서 소박맞은 거나 마찬가지인 며느리랑 같이 지냈지. 욱이 녀석은 일 년에 석 달쯤만 본가에서 지내고, 나머지 아홉 달은 첩실들이랑 같이 지방으로 떠돌았으니까.”
진안군은 좋은 남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망할 녀석 같으니.
“고아와 소박맞은 여자들을 돌보는 보육원도 세웠다며?”
“들었구나? 뭐, 내가 여유가 있으면 여유 없는 사람들 도와주는 건 당연한 거잖아.”
상희는 자혜원에 운영비만 대는 게 아니고 직접 가서 의료봉사까지 했다고 했다. 체통을 지켜야 한다는 소리도 들었지만, 원래 의녀 출신인지라 그리 큰 반발은 없었고 말이다.
“이젠 치과의사 노릇도 능숙해. 치아 상태가 안 좋은 사람들이 워낙 많았거든. 충치 하나 빼는데 5분이면 충분할걸.”
상희가 웃었다. 옛날 연산군 시절, 내 충치를 빼고 의치를 맞춰 주던 그 일이 생각났다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지내다가 병인년(1626)에 죽었지. 세자가 승하하고 세손이 즉위하는 것까지 보고 그해 가을에 죽었어. 증세를 보면 아마 나도 너처럼 폐렴이었지 싶어.”
상희가 말하는 세자는 성이, 세손은 연이를 뜻한다.
“그럼 깨어난 건 언제야?”
“7년 전, 갑자년 봄. 이번에도 10살이었어. 이번엔 열병 앓다가 혼절한 아이는 아니었고, 나무 타다가 가지가 부러져서 추락하는 바람에 혼수상태에 빠진 아이였대.”
“꽤 활달한 계집애였나보다…?”
“그러게 말이야.”
상희가 웃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재미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또 생각도 못 한 명문가여서 정말 깜짝 놀랐어. 나, 여흥 민씨잖아.”
“여흥 민씨? 인현왕후 집안이잖아?”
사실 아까 성시균이 상희의 배경을 열심히 소개하긴 했는데 상희 얼굴만 보느라 하나도 못 들었다. 내 눈이 놀라서 동그래지자 상희가 이름 두 개를 추가로 댔다.
“원경왕후, 명성황후도 여흥 민씨지. 아주 왕비 집안이야.”
“올렝카가 장씨가 아니라서 다행이네.”
원경왕후는 태종의 왕비, 인현왕후는 숙종의 왕비, 명성황후는 고종의 왕비다. 세 사람 다 조선에 한바탕 파란을 몰고 다녔던 태풍의 눈이었다. 상희가 그런 집안 딸이란 말이지….
“태후마마가 덕수 이씨잖아? 우리 외가가 덕수 이씨 태후마마네 계통이야. 그 인연으로 날 간택하신 모양이더라. 물론 나한테는 선택의 여지 같은 건 전혀 없었어. 내 신랑이 될 성친왕이라는 이가 부디 너이기를 빌고 또 빌면서 혼자 혼인식을 치르고 바다를 건넜지.”
이제 내 이야기를 할 차례다. 나도 웃으면서 사정 이야기를 했다.
“난 1682년 봄에 베르사유에서 깨어났어. 저번 생에는 네가 4년 먼저 각성했는데, 이번엔 내가 2년 빨랐네. 내가 어떤 여정으로 돌아다녔는지는 대충 알지? 정말 너랑 같이 여행하고 싶었는데, 나 혼자라서 아쉬웠어.”
베르사유부터 크렘린까지, 그리고 다시 런던에 이르기까지 보았던 수많은 명승지와 내가 만났던 위인들 이야기를 들은 상희가 눈을 빛냈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정말 편한 마음으로 여행할 수 있었겠다. 같이 갔으면 좋았을걸.”
“좋기만 하지도 않았어. 언제 목이 떨어질지 몰라 불안한 나날의 연속이었다고.”
“그런 말 하는 것 치고는 지나치게 즐겁게 지낸 것 같은데? 올랭카도 있었잖아?”
드디어 추궁이 시작되는 건가. 등에 소름이 돋았다.
“각성했는데 올렝카가 침대에 있지 뭐야. 그래서….”
“아냐, 별말 안 해도 돼.”
상희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를 비꼬려는 것도 아니고, 정말로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나 올렝카 있어도 괜찮아. 너, 나 만날 때까지 9년이나 걸렸잖아. 그동안 기댈 데도 없이 혼자 지내기 어려웠던 거 이해하고, 일단 인연 맺은 애 버릴 수 없었던 것도 이해해. 만약 네가 저 애 적당히 데리고 놀다가 버리고 왔다고 하면 그걸 더 경멸했을 거야.”
상희는 조용히 내 손을 잡고, 내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두 눈이 마치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어차피 내가 네 두 팔을 모두 차지할 수도 없잖아? 내가 팔짱을 끼고 있는 쪽 말고 다른 팔은 얼마든지 내줄 수 있어. 다 내 손이고 내 팔이지만 빌려주는 건 괜찮아.”
“네 거라고?”
“그럼, 내 거지. 이 높은 코도, 굵은 팔도, 단단한 허리도 전부 내 거야. 그러니까 다치지 않게 주의해.”
상희가 웃으면서 두 손으로 내 뺨을 싸쥐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반지 고마워. 정말 생각도 못 한 이벤트였어.”
“9년 동안 가지고 다닌 반지야. 파리 최고 보석상에서 맞춘 거라고.”
나도 마주 웃었다. 상희가 웃더니 살며시 내 귓가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오늘…우리 세 번째 첫날밤이네?”
“전하, 축하드립니다. 부디 제 술도 받으십시오.”
“오, 고맙소.”
이레 전 상희와 함께 보낸 밤을 떠올릴 틈도 없이 술잔이 계속 내 앞으로 밀려들었다. 와, 이건 표트르랑 대작할 때보다 더 심하구나. 오늘 하루는 죽었다고 복창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