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959
3부 07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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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후전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요즘 늘 기분이 좋은 황태후 이씨가 문안차 찾아온 황후 양씨와 한담을 나누는 중이었다.
“태후마마, 조금 서운합니다. 그렇게나 훌륭한 색싯감은 태자에게 양보해주셨어도 좋았을 것을요. 태자의 국혼 때문에 곧 금혼령이 내릴 것도 알고 계셨으면서 말입니다.”
황후 양씨는 태황보다 2살 연상이다. 올해 35세이니, 올해 17세인 손아랫동서 성친왕비는 사실 황후의 동서보다는 며느리에 더 어울리는 나이다. 시어머니인 태후에게 하는 푸념도 그 때문이다.
“황후에게 아들이 소중한 만큼 내게도 소중한 것을 어쩌겠소. 양해해 주시오.”
“태후께서는 아들이 둘이시지만 저는 하나뿐이지 않습니까?”
두 사람 사이는 무척 좋은 편이다. 내용만 들으면 마치 다투는 것 같은 이 대화도 웃으며 화목하게 나누었다.
“‘민씨 댁 규수를 태자비 선발 간택에 넣도록 태후마마를 설득하여 달라’고 폐하께 부탁을 몇 번이나 드렸었는데 들은 척도 아니하시더군요. 태후마마의 큰 아드님은 참으로 무정하신 분이옵니다.”
“어쩌겠소, 그대의 지아비가 그런 사람인 것을. 황후의 지아비는 어미가 눈물을 쏟으면서 호소해도 눈도 깜짝 안 하는 사람이라오.”
두 사람은 아들이자 남편인 태황이 보이는 무뚝뚝하고 차가운 태도에 관해 비슷한 불만을 토로하곤 했다. 그렇다 보니 다른 사람 없이 둘만 있는 자리에선 고부가 입을 모아 아들과 남편을 흉보는 모습이 자주 연출되곤 했고, 자연스럽게 더 친한 사이가 되었다.
물론 그런 행동은 이들이 황태후이자 황후니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태황은 모친과 아내가 자기를 두고 무슨 말을 하건 상관하지 않았고, 이들 역시 다른 이 앞에서는 절대로 아들이자 남편인 태황의 체면을 깎을 만한 말은 하지 않았다.
“성친왕이 무사했으니 망정이지, 만약에 그 아이가 대유주에서 흉사를 당하기라도 했으면 주상을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했을지도 모르오. 아무리 그 아이가 자초한 결과라고 해도, 애초에 보내지 않았으면 어찌 그런 위험을 겪었겠소? 물론 나도 동의해서 보냈지만….”
성친왕이 전장에 나간다는 소식을 받았을 때 태후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충격을 받았다. 철없는 막내가 멋모르고 전장에 뛰어들었다고 생각하니 그 어린 것을 외국으로 내몬 태황이 원망스러웠다. 이런 위험을 예상하지 못하고 거기 동의한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도 컸다.
하지만 이후 넉 달 만에 성친왕이 싸움에서 죽지 않았으며 막대한 전공까지 거둔 사실을 알았다. 수많은 적을 직접 베면서 자신은 손끝 하나 다치지 않는, 마치 경인년과 을미년에 무민공 황진이 올린 것 같은 위업을 세웠다는 사실을 말이다.
더불어서 약속도 받았다. 조상인 장조가 당한 모욕을 갚기 위해서 모험을 벌이긴 했지만, 이런 일은 이번 딱 한 번뿐이고 다시는 위험한 장소에 스스로 뛰어들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편지가 왔다.
‘어마마마께 허락도 구하지 않고 함부로 싸움에 나선 소자를 용서하소서. 하지만 백 년이 되어가는 한을 갚자면 도리가 없었사옵니다. 허나 이제 이룰 만큼은 이루었으니, 칼과 활을 거두어 집에 넣고 애초 목적대로 견문을 쌓는 일에만 집중하겠습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성친왕은 더 이상 위험한 일을 벌이지 않았다. 유럽을 도는 동안 분쟁을 치르는 나라에 여러 번 들르면서도 그 싸움에 개입하지 않았다. 학문과 교양을 닦는 일에만 집중했다. 황태후는 전쟁을 치른 뒤로 성친왕이 한층 더 성숙한 듯하여 내심 기뻤다.
“어미로서야 얼른 불러들여 만나고 싶은 마음이 크오. 하지만, 그 아이가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벗어나서 넓은 세상을 구경하며 견문과 경험을 쌓아 돌아온다면 그 어찌 훨씬 가치 있는 일 아니겠소.”
일찍이 세조대왕께서 왕자 시절 북경에 사신으로 다녀온 이래, 종친으로서 나라 바깥을 제대로 보고 온 이가 없었다. 후에 진왕으로 봉해진 진안군이, 소싯적에 양응룡의 반란군을 토벌하러 가는 오성부원군의 종사관으로 잠시 싸움터에 간 사례가 있을 뿐이다.
따지자면 몇 사람 더 있긴 하다. 하지만 역도 이진은 이미 황적(皇籍)에서 지워진 지가 오래고, 하성군은 유배형을 받아 북방에서 죽었으며, 광해군은 임의로 천주교 승적에 올라 황적을 벗어났으니 없는 이나 마찬가지다. 고로 세조 이후 외사(外使)를 맡아 제대로 나라 밖에 나가는 종친은 성친왕이 처음 맞다.
“그동안 성친왕이 써 보낸 편지만 보아도, 나가기 전보다 훨씬 생각이 깊고 차분해졌음을 알 수 있소. 필체도 깔끔해졌고. 명심보감에 이르기를 ‘귀한 자식에게는 매를 들라’ 하였고, 천축 속담에서 ‘귀한 자식은 여행을 보내라’라고 하였다더니 그 말이 실로 옳았소.”
태후는 성친왕이 보내는 격식 따위 없이 쓴 편지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어머니로서 가장 듣고 싶은 소식이 아들의 안부였으니까 말이다. 미사여구 따위 없이 담담하게 적은 아들의 일상이야말로 태후가 제일 읽고 싶은 편지였다.
성친왕은 자신이 대유주에서 겪은 수많은 일에 대해 꼼꼼히 적어 보냈고, 태후는 아들이 보낸 모든 편지를 매일 꺼내서 적어도 한 번은 다시 읽었다. 이제는 어느 날 어디에서 보낸 편지라고 하면 굳이 꺼내 보지 않아도 내용을 외울 정도다.
황후 양씨 역시 태후에게 동감을 표했다.
“소녀도 성친왕께서 대유주에서 몇 번이나 보낸 편지와 패물을 잘 간직하고 있사옵니다. 그것들만 안 받았어도 민씨 규수를 태자에게 양보해달라고 태후마마께 더 끈덕지게 졸랐을 텐데…, 소금 먹은 이가 물 켠다고 하였으니 뭐라고 더 나서기가 어렵더군요.”
황후는 나라 밖으로 쫓겨나기 전에도 성친왕에게 별 유감이 없었다. 천방지축에 철부지인 성친왕이 설마 제위를 노리고 난동을 일으킬 위험 같은 건 걱정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정과 군대는 모두 금상이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대유주에 간 성친왕은 불랑국에서 보낸 비녀를 시작으로 해서 여러 차례에 걸쳐 귀한 패물을 계속 보내왔다. 태후에게 보낸 물건과 비교하면 황후에게 주는 선물은 크기만 약간 작을 뿐, 그 질은 차이가 없었다. 당연히 호감이 쌓일 수밖에 없다.
며느리가 자기 의견에 동조하자 태후가 그것 보라는 듯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황후도 보듯이, 성친왕이 이리 훌륭히 자랐으니 어찌 훌륭한 왕비를 들여주어 새로 삶을 준비하게 해야 하지 않겠소. 주상께서도 개과천선한 아우를 위해 이 어미가 하고 싶은 대로 두어준 것이지, 황후와 태자를 아끼지 않아서 황후의 청을 들어주지 않은 건 아닐 거요.”
황후가 한숨을 쉬었다. 이미 밝혔듯, 황후도 시동생인 성친왕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자기 아들에게 더 좋은 아내를 얻을 기회를 주고 싶었을 뿐이다.
“성친왕비 민씨는 몸이 튼튼한 편이 못 되는 태자에게 정말 잘 어울리는 상대였습니다. 성친왕께서는 그간 큰 병 한 번 앓지 않았을 만큼 몸이 건강하신데 굳이 의술을 아는 비를 맞이할 필요는 없지 않으십니까? 상빈 이씨를 꼭 닮은 외모야 탐이 나셨겠지만요.”
“태자에게는 태의원에서 일하는 많은 태의가 있으니 굳이 태자비까지 의술을 익힐 필요는 없지 않소? 성친왕은 멀리 객지에 나가 있으니 아내감 정도는 좀 양보하시구려. 그리고 그 아이에게는 상빈의 피가 아니라 의성황태후께서 남기신 피가 흐르고 있소이다.”
성친왕비 민씨는 태후의 칠촌 조카다. 여흥 민씨 집안으로 시집간 태후의 육촌 여동생이 낳은 딸로, 그 부친인 대제학 민성윤은 장조의 차자인 영창대군이 평양군 신립의 딸 신씨와 혼인해 낳은 딸이 민씨 집안에 가서 낳은 손자였다. 세 아들 뒤에 낳은 막내딸이 민씨였다.
굳이 촌수를 따진다면 태자와는 팔촌이자 구촌, 성친왕과는 칠촌이자 팔촌이다. 하지만 민씨 집안은 황실과 아예 본이 다르므로 아무도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예전 무종대왕께서 왕비로 맞으신 성렬왕대비 신씨도 임영대군의 외손녀로 임금과 칠촌 간이 아니셨던가?
일세의 영걸 장조대제와 여장부로 유명한 의성황태후 김씨, 여기에 조선 최고의 명장인 이순신과 최강의 용장인 신립의 피까지 한데 섞인 탓인지, 민씨는 어려서부터 동네 전체에 유명한 말썽꾸러기 소녀였다. 옛날 의성황태후 김씨가 그랬듯이 세 오라비와 어울려 나무도 타고 말도 타고 총을 들고 사냥도 나갔다.
그런데 성장하면서 급격하게 성품이 바뀌었다. 철이 들었는지 말을 타는 대신 집에 앉아 의서를 읽었다. 왜 하필 의서인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놀라운 건 단 한 번만 읽은 의서도 그 내용을 모두 알고 그 내용에 따라 환자를 진료하며 처방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의술만이 아니었다. 산술은 산학원 훈도만큼 능숙하고, 그 외의 학식도 풍부했다. 웬만한 서적은 한 번만 읽으면 그 내용을 다 알았다. 여기에 상빈 이씨의 재림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뛰어난 미색까지 갖추었으니, 사방에서 혼담이 밀려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혼사를 서두르신 이유가 무엇이신지요? 태후께서 일전에 말씀하시기를, ‘전 왕비 강씨 같은 생과부를 또 만들 수는 없고, 대유주까지 보내기는 뱃길이 너무 험하니 성친왕이 귀국하면 혼사를 치르겠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미주도 우리 대한의 강역이오. 게다가 성친왕이 오래전부터 양첩에 깊게 빠져 있었음을 비로소 알았으니 어찌 제대로 된 규수를 맞아들이는 일을 서두르지 않겠소?”
태후는 폴희, 올렝카의 존재에 대해 1년 전에야 확실하게 알았다. 그동안 받은 편지에서 성친왕이 올렝카에 대해 언급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성친왕이 양첩을 거느리고 있다는 풍문이 꽤 오래전부터 돌기는 했지만,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던 참에 성친왕이 미주에 ? 태후는 성친왕이 바로 본국으로 귀국하기를 더 바랐지만, 기왕 해외에 나간 김에 경험과 업적을 더 쌓고 돌아오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해서 맹렬하게 반대하지는 않았다 ? 왔고, 슬슬 새 혼사를 생각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들의 의향을 물으려고 보낸 편지에 뜻밖에도 10년 가까이나 함께한 첩이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주상께서는 다 알면서도 내버려 두셨더구려. 참으로 무심한 형이라 하겠소.”
“소녀는 생각이 다르옵니다. 만약 마음에 들지 않았으면 성친왕께서 어찌 자식도 생기지 않았는데 10여 년을 함께 해로했겠습니까? 게다가 폴희를 만난 뒤부터 성친왕께서 마음을 바로잡았다 하니, 양인이라 해도 실로 덕이 많고 어진 현모양처일 수도 있지 않사옵니까.”
황후는 처음부터 올렝카에게 호의적이었다. 애초에 철부지에다 망나니가 다 된 성친왕이 올렝카의 내조 덕분에 마음을 잡고 성실한 사내가 되었다니, 마치 평강공주가 바보 온달을 가르쳐 제대로 장수로 키웠다는 로망스를 생각나게 하지 않는가?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는 문필가가 된 진왕이 《온달전》이라고 하여 새로이 엮은 판본이 가장 흔하다. 황후도 사가에 있을 때 그 책을 읽고서 장차 자기 힘으로 못난 남편을 성장시켜보고 싶다는 꿈을 가졌었다. 막상 현실에서는 그럴 기회가 없었지만.
“아무리 현모양처라 해도 안 되오. 양인인 거야 눈을 감더라도, 그 출생도 확실하지 않은 얼녀잖소? 게다가 성친왕에게 10년 가까이 총애를 받았으면서도 후사도 전혀 없다니, 우리 내명부와 외명부의 질서를 위해서라도 그런 여인을 정실 왕비로 받아들일 수는 없소.”
그 존재를 알면서도 놓아둔다면, 성친왕은 태후가 올렝카를 인정했다고 생각하고 그녀를 정식으로 계비(繼妃)로 들이겠다고 나설지도 몰랐다. 행여 그런 짓을 벌이기 전에 황실에서 인정할 만한 명문가 출신의 규수를 골라 짝을 맺어줄 필요가 있었다.
“태후께서 이미 말씀하셨으니, 저로서도 뜻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왜 그 상대가 하필이면 민씨 댁 규수였나 하는 것이지요. 다른 좋은 처녀들도 많은 데 말이옵니다. 소녀는 진실로 야속하옵니다, 태후마마.”
황후가 짐짓 한숨을 쉬었다. 태후가 웃으면서 다독였다.
“그거야 이 늙은이의 욕심이라고 이미 말하지 않았소이까, 중전. 태자비를 구하는 문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중전의 말씀대로 세상에 좋은 처녀가 민씨만 있는 것이 아닐진대, 우리 금상께서 어련히 알아서 좋은 처녀를 구해주실까요.”
“이제 금혼령을 발포하고 간택단자를 거두었지만, 끝까지 읽어보아도 그중 성친왕비만한 처녀가 없습니다. 앞으로 성친왕비를 만날 때마다 아쉬운 마음이 샘솟을 듯합니다.”
“미안하오이다. 다만 언제쯤 중전이 성친왕비를 만나게 될지 모르겠소이다. 주상께서 언제 귀국령을 발하실지 모르겠으니 말이에요. 그래도 지금쯤은 정기선이 미주에 도착했을 테니, 두 부부가 만나서 서로를 알아가고 있을 겁니다. 귀국할 때까지 잘 지내겠지요.”
병인년(1686) 초부터 아우를 대하는 금상의 태도에 미묘한 차이가 보이긴 했다. 미주에 건너간 뒤로는 더 달라졌다. 태후는 늦어도 태자가 성년이 될 때까지는 금상이 성친왕에게 귀국령을 내려주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 2 –
올해 신미년(1691)에는 또 본국에 풍년이 들었다. 2년 동안 가뭄이 들다가 올해는 비가 넉넉히 내려 준 덕분에 맞이한 풍년이다.
“본국에서 경작하는 논밭에만 풍년이 든 게 아닙니다. 북방에서도, 남방에서도 풍요로운 결실을 얻어 올해 수확은 대풍이 될 듯합니다.”
대한 조정에서 거두는 세금 수입 상당량이 대남도에서 재배하는 온갖 특산물에서 나온다. 대남도에서 경작한 설탕, 차, 커피 같은 기호품은 배에 실려 조선에서 유럽까지 공급됐고, 그 대가로 들어온 금과 은이 호부 창고에 쌓였다.
북방에서는 그만큼 돈이 되는 작물은 없다. 하지만 수수와 옥수수, 콩과 담저가 대량으로 수확되어 가축을 키우는 사료가 되고 또 술이 되었다. 북방에서 양조한 독한 술은 국내에서 주로 소비하지만, 일부는 일본이나 아모국?미주로 운송되어 나름 괜찮은 수입이 된다.
농사가 순조롭다는 건 이에 기반하는 상공업도 원활하게 성장한다는 이야기다. 특히 면포 생산이 날씨가 좋은 덕을 톡톡히 보았다.
면포의 원료인 목화는 본국에서 거두는 양으로는 모자라서 유구와 일본에서도 조달한다. 부안과 목포 일대에 주로 들어선 면직공장들은 화순에서 공급하는 석탄으로 열심히 기계를 돌려서 면포를 쏟아냈다. 목화를 싣고 온 배들은 귀로에 면포를 싣고 돌아간다.
풍년으로 식량 사정이 안정되니 비단도, 도자기도, 철재도 모두 생산이 순조로웠다. 부디 내년도 올해만 같기를 바라는 기도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