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96
1부 09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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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산과 들에 새싹이 돋고 꽃이 피는 것이 무척 보기가 좋나이다. 봄농사 준비를 하는 백성들도 다들 활기가 차니, 모두 전하께서 선정을 베푸신 탓이 아닌가 합니다.”
나보다 조금 떨어져 뒤에서 말을 달리던 상희가 조심스럽게 칭송하는 말을 건넸다.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이긴 해도 나 역시 가능한 평온하게 답했다.
“어찌 과인의 덕으로만 햇빛과 비, 바람이 좌우되겠는가. 모두 하늘의 뜻이 담긴 일이로다.”
조금 더 말을 달리니 늘 함께 승마를 즐기는 연무장에 도착했다. 말에서 뛰어내린 겸사복들이 연무장과 그 옆에 딸린 숲에 들어가 안전을 확인했다.
“아무도 없사옵니다. 확실히 비어 있습니다.”
혹시 누가 숨어있지 않은지 확인을 마친 후, 겸사복장이 엄숙하게 보고했다. 만족스런 결과 보고에 고개를 끄덕여 치하했다.
“수고했다. 그러면 과인은 잠시 정 처사와 한담을 할 테니 주변을 에둘러 지키도록 하라.”
배목인 사건 이후로 내가 움직이는 장소는 어디든지 주변 경계를 철저히 하도록 하고 있다. 아무리 옷 안에 쇄자갑을 챙겨 입는다지만 또 저격당하는 일은 가능한 피하고 싶으니까.
“예, 전하.”
겸사복장은 군례를 올린 후 부하들을 배치했다. 겸사복들 중 셋은 말을 지키고, 나머지는 연무장과 숲 안 여기저기에 흩어져 주변을 경계했다. 나는 상희 한 사람만 데리고 연무장을 한 바퀴 돌아 즐겨 찾는 자리를 향했다. 큼지막하게 자라 적당한 그늘을 만든 참나무 밑이다.
“이제 말 편하게 해. 안 들릴 거야.”
말에서 뛰어내리며 봉인을 해제했다. 내가 고삐를 나뭇가지에 걸자 그 옆에 상희가 나란히 말을 멈추며 그제야 한숨을 쉬었다.
“휴우, 여기까지 오는 순간이 가장 힘들어. 저 사람들 듣는 데서 혹시라도 말실수할까봐.”
내 신분은 임금이다. 조선 천하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이고, 모두 내게 존댓말을 써야 한다. 그 사람이 유교에서 지극히 떠받들어야 하는 대상, 부모라고 해도 말이다. 물론 여기서 아버지는 ‘부왕’이 아니라 ‘대원군’일 때 말이지만. 애초에 ‘부왕’은 이미 죽고 없다.
상희는 지금 내게 누구보다 많은 것을 공유한 친구다. 그리고 내가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하지만 이 조선 사회에서는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정말로 엄청난 신분의 벽이 있다. 중인 신분인 일개 의원과 임금이라니, 비교 자체가 성립하지를 않는다.
만약 우리 두 사람이 말을 놓는 모습을 누군가 본다면? 난리가 날 게 확실하다. 그 뒤에 벌어질 사태는 나로서도 도저히 수습이 불가능할 거고, 상희는 절대로 살아남지 못할 거다. 그러니 누구 한 사람이라도 들을 가능성이 있는 한 둘 다 극도로 말을 조심할 수밖에.
“저 사람들은 날 뭐라고 생각해?”
“제갈량쯤 되는 재야의 현인인 줄 알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이렇게 남들 모르게 만나러 다닐 리가 없으니까.”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으니까 겸사복들 중 누구에게도 상희가 누구인지 설명하지 않았다. 내 주변에서 상희가 어디서 온 누구인지 알고 있는 사람은 정 경력과 장 선전관 두 명뿐이다. 그나마 장 선전관은 상희가 여자인 줄도 모른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너희 도우미 아줌마도 네가 나랑 승마하러 나오는 건 모른다고 했지?”
“몇 번을 말해? 네 경호원들만 입 다물면 아무도 몰라.”
상희가 조심스레 무릎을 꿇고 앉으며 속삭였다. 마음 같아서야 다리 펴고 편하게 앉으라고 하고 싶지만, 적어도 십여 명이 항상 내 쪽을 주시하고 있으니 그것까지는 좀 힘들다.
“빨리 용건으로 들어가기나 해. 어떤 이야기가 듣고 싶어?”
“백성들이 걱정하는 문제가 가장 먼저지, 늘.”
상희를 만날 때 가장 주요한 대화는 시정 청취다. 조정에서 계통을 밟아 올라오는 것보다 한층 더 솔직하고 정확한 시중 민심을 들을 수 있었다. 돈이 없어 의원을 찾지 못하고 혜민서에 오는 백성들에게 듣는 거니까, 정말 밑바닥 민심이다.
“일단 걱정들 하는 건 기근이야. 올해 비가 안 오니까, 가뭄 걱정들이 많더라고. 또 흉년이 들면 어떡하나 걱정들을 해. 아무래도 가난한 백성들은 흉년이 들면 살기 힘드니까.”
“올해 비가 좀 안 오긴 했지만 이제 4월인데 벌써 가뭄 걱정을? 그건 그래도 괜찮네. 가뭄이라면 웬만한 게 오더라도 큰 피해는 없으니까.”
지난 몇 년 동안, 흉년이 올 때마다 삼남에서는 공공근로 겸 사회기반사업 겸 해서 죽어라 저수지를 만들었다. 물을 잔뜩 채워두었으니 웬만한 가뭄에는 평년작 정도 수확은 나올 게다.
“도성 백성들이야 삼남 지방에서 어떤 대비를 해 놨는지 모를 테니 걱정할 만도 하지. 매년 만든 저수지가 수천 개야. 걱정하는 사람들 있으면 그런 얘기 해주면서 안심 좀 시켜 줘.”
“알겠어.”
상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내가 물었다.
“요즘은 전염병 같은 게 돌 조짐이 보이진 않아? 혹시 천연두 같은 거라도 돌면 큰일인데.”
“작년에 풍년이 들어서인지 그런 조짐은 없어. 아무래도 사람들이 잘 먹고 영양상태가 좋으면 건강도 지키기 쉽거든. 흉년이 들면 아무래도 병도 잘 도니까.”
“그건 맞는 말이야. 잘 먹고 깨끗하게 살아야 병이 안 걸리지.”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인구가 늘어야 한다. 인구가 많아지려면 기본적으로 식량 공급이 늘어야 하지만, 위생 관리도 필수적이다. 그래야 건강하게 인구가 늘어난다. 개인위생을 관리하는 습관이 보급되고 공중위생 관리가 제대로 안 되면, 인구가 늘어도 전염병만 폭증할 뿐이다.
“깨끗하게 살려면 아무래도 비누가 필요해. 전에 비누 만든다고 그러더니 어떻게 됐어? 그거, 개인위생 관리에 정말 도움이 돼. 기름이 워낙 비싸니까 많이 보급하지는 못하겠지만.”
고래기름으로 비누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는 한참 전에 상희에게 했었다. 다만 성과가 만족할 만큼은 아니라서 말할까 말까 했었는데, 먼저 물으니 답할 수밖에,
“저번에 말한 대로 고래기름만 넣고 만들었더니 비린내가 좀 심하게 나더라고. 그래서 몇 가지 향료를 섞어봤는데, 이번에는 냄새는 덜 나는데 향료 값이 너무 드는 거야. 그래서 고래기름으로 비누 만들기는 그만 뒀어.”
“그럼 어쩌려고?”
“고래기름은 불 밝히기 좋으니까 그냥 등불용으로 쓰기로 하고, 비누는 참기름이랑 다시마 재로 만들었어. 만들면서 향료를 아무것도 안 넣어도 냄새가 고소한 게 쓰기 참 괜찮더라.”
비누 만들 때 좋은 재가 어떤 재인지 알 수가 없어서 갖가지 재를 다 써봤었다. 여러 가지 재를 써 보니, 비누 만들 때 가장 좋은 재는 다시마 태운 재였다. 다시마 재로 만든 비누는 만든 뒤에 씻을 때도 느낌이 좋았다.
그때서야 다시마에 칼륨이 많다는 게 생각났다. 그래서 염초 구울 때 쓰는 잿물로도 모두 다시마 태운 재를 쓰도록 했다. 그랬더니 보통 잿물을 사용해서 만들 때보다 확실히 수율이 올라갔다. 비누 덕에 화약 제조도 더 효율이 좋아진 셈이다.
“참기름? 그 비싼 걸로? 그렇게 비싼 비누를 어떻게 백성들한테 보급하려고?”
상희가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나는 눈을 깜박이며 양 어깨를 으쓱거렸다.
“난 왕인데 뭘. 치킨 좀 덜 먹고 그 기름으로 비누 만들라고 하면 돼. 궁궐에서 쓰는 기름으로 비누를 만들면 내가 쓰고 중전이랑 후궁들 쓸 만큼은 무리 없이 만들 수 있겠더라.”
“그래, 넌 이 식용유도 없는 조선에서 치킨을 마음대로 먹는 금수저였지.”
조선은 돼지도 별로 키우지 않고 기름을 채취할 작물도 적어서 기름이 귀한 사회다. 당연히 튀김을 만들기 힘들다. 하지만 난 왕이고, 당연히 튀김요리 정도는 먹고 싶으면 언제든 먹을 수 있었다. 물론 궁에서 쓰는 튀김기름은 최고로 질 좋은 참기름이다.
“너만 깨끗하고 배부르게 산다고 나라가 발전하는 건 아니잖아. 백성들이 조금이라도 깨끗하고 위생적으로 살게 하고 싶으면 그 냄새나는 고래기름 비누라도 시중에 뿌려. 그게 돈 들어서 곤란하면 하다못해 잿물로라도 손 씻게 하고.”
“잿물로 뭐가 씻겨? 그건 빨래할 때나 쓰는 거 아냐?”
내가 눈을 휘둥그레 뜨자 상희가 무릎을 꿇고 엄숙한 표정을 지은 채 핀잔을 주었다.
“빨래가 깨끗해지는데 손은 안 깨끗해질 것 같아? 잿물은 알칼리 성분이 강해서 기름때랑 단백질을 잘 씻어내지만 소독 효과도 있어. 거기 들어있는 성분 중에 탄산칼륨이 많거든.”
“아, 그래? 한의대에서는 그런 것도 배워?”
나는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세제의 원리 따위 그동안 내가 알게 뭐였겠는가.
“우리도 의학사나 과학사는 배워. 현대 한의학은 동의보감만 붙들고 외우는 게 아니야. 공중위생이나 보건 관련해서도 신경을 쓴다고. 상수도랑 하수도를 제대로 설치하면 더 좋지만 그건 돈이 너무 드니까 못 하겠지. 사실 그날 밤 그 계집애랑 싸웠던 이유도 그건데….”
뭔가 험악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이건 뭔가 다른 의미로 위험하군. 설마 하고 긴장하는데 상희가 스스로 기분을 풀었다.
“하여간, 백성들이 좀 더 청결하게 살게 하고 싶으면 적어도 애 낳을 때 돌보는 산파들만이라도 잿물로 손 씻고, 산모 환부도 잿물로 씻어주게 해. 제대로 된 소독약만큼은 못할지 몰라도 확실히 출산 과정에서 산모가 감염될 확률을 줄여줄 거야.”
“여자들 평균 수명이 늘어나겠네.”
“그래, 그리고 평생 출산하는 아이 숫자도 늘어. 그만큼 네가 장래에 일으키는 전쟁에 나갈 병사도 더 늘겠지.”
당연하겠지만 상희는 장래 중국, 일본을 치겠다는 내 계획에 비판적이었다. 역사를 아느니만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막겠다는 내 대전제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실행 측면에서 꼭 선제공격에 나설 필요는 없지 않느냐, 방어 준비만 잘 하면 되지 않느냐는 쪽이었다.
그런 상희니만큼 백성들 사이에서 전쟁 이야기가 돌고 있다면 분명히 말했으리라. 하지만 상희는 전쟁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아마 조정 내에서 기밀이 잘 유지되고 있는 모양이다.
그 뒤에도 다른 이야기를 몇 가지 더 나누다 보니 어느새 돌아갈 시간이 되고 있었다. 그만 자리에서 일어날까 하다가 한참 전부터 벼르던 질문을 하나 더 던졌다.
“전부터 말하려던 건데, 책 하나 쓰지 그래? 지금 네가 알고 있는 한의학 지식이랑 양방 쪽 지식, 공중위생이랑 개인위생에 대한 지식 같은 거 책으로 써서 후세에 남겨. 지금 세상에서는 너만 알고 있는 것들인데, 혼자 알고 있다가 사라지는 건 너무 아깝지 않아?”
잠시 쉬었다가 한 마디 더 했다.
“그리고 네 이름도 후세에 남길 수 있을 텐데. 허준이나 이제마를 능가하는 의성으로 역사에 남을 거야. 네가 기왕 의원으로 한 인생을 살기로 했다면, 나쁘지 않은 선택 아냐?”
나로서는 정말 상희를 위하는 생각으로 한 제안이었다. 그런데 상희는 뜻밖에도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내가 아는 것들 중에서 정말로 내가 알아낸 건 하나도 없어. 내가 아는 모든 지식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지만 내 앞에 살았던 선학들이 고생 끝에 모으고 알아낸 거야. 그런 모든 지식을 내가 내 이름으로 가로챈다는 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야.”
이건 참 뭐라고 말하기 힘든 도덕심이군. 활용은 하지만, 자기 이름으로 세상에 남길 순 없다니. 바로 최근에 트로츠키가 한 말을 가로채 인용한 나로서는 양심이 좀 찔리는 말이었다.
출처를 명시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는 건 우리 둘 다 마찬가지다. 그럴 바에야 아예 남기지 않겠다는 심리가 이해는 간다. 본인이 안 해도 누군가 옆에서 보고 기록할 수 있다는 문제는 어떻게 할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알았어. 이만 돌아가자. 좀 일찍 들어간다 싶지만, 요즘 일이 좀 많아서 말이야.”
“그래.”
천천히 몸을 일으켜 옆에 세워두었던 말에 올랐다. 먼저 안장에 오른 뒤, 등자에 발을 거는 상희를 향해 농담처럼 말을 건넸다.
“오늘도 조언 고마워. 가능하면 매일 들으면 좋겠어. 치킨도 같이 뜯으면서.”
돌려 말하기는 했지만 무슨 의미인지는 굳이 부연할 필요 없겠지. 돌아온 대답을 보면 내 숨은 뜻을 상희가 오해한 것 같지는 않았다.
“이쪽 세상에서 내가 처음부터 남자 행세를 할 필요가 없었다면 그렇게 되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은 어려워.”
“알았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 말머리를 돌렸다. 어렵다고는 했지만 싫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럼 됐지 뭘. 괜히 서둘러 독촉할 생각은 없다. 이런 일이야말로 시간을 두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하는 거니까.
내가 말에 올라 연무장 쪽을 향하는 모습을 본 겸사복들이 여기저기서 모여들었다. 이제 그만 환궁할 때가 되었다는 신호를 보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제 궁궐로 돌아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