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960
3부 078화
“이런 풍요로움이 모두 폐하께서 천하를 잘 다스리신 덕분입니다.”
좌승상 강기석이 엄숙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호부대신을 맡고 있을 때는 친왕의 장인에게 백작위를 주는 법도에 따라 귀주백을 별도로 칭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후작으로 승작했다. 참고로 황태자의 장인에게는 곧바로 후작을 주고, 군왕의 장인에게는 작위를 주지 않는다.
“근래 들어 가뭄이 드는 해가 점점 줄고 있습니다. 이 어찌 폐하께서 천하 만민에게 덕을 베푸신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신하들도 연이어 고개를 조아렸다. 태황은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하늘의 뜻을 함부로 일컫지 말라. 내년에 또 가뭄이 들면 그때는 내가 부덕하여 가뭄이 들었다 할 것인가?”
태황이 가시 돋친 한마디를 던지자 신하들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신들은 그저 올해 풍년이 들었으니, 내년에 태자마마의 국혼을 치르기 한결 수월할듯하여 기쁜 마음을 표하고자 했을 뿐이옵니다.”
태자는 병진년(1676)생, 올해 16세다. 몸이 약한 탓에 혼사가 좀 늦어졌다. 공식적으로는 가뭄 때문에 늦어진 것으로 되어있지만, 실제로는 건강 탓임을 모두 알고 있다.
“그보다 다른 일이 중하다. 올라온 상소를 보니 성친왕을 동변관리사로 임명한 건에 대해 조야에서 반발하는 소리가 아직도 크다. 그대들은 이를 어찌 여기는가?”
미주에 있는 성친왕을 동변관리사로 임명한다는 결정에는 조정에서도 찬성하는 이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태황은 이는 성친왕을 위해서도, 황실과 사직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라고 하면서 강권하다시피 지시해서 관철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제껏 종친에게 분봉한 사례가 없습니다. 조야에서 올라온 상소는 혹시 폐하께서 성친왕 전하를 미주에 분봉하시려는 게 아닌가 싶어 이를 우려하는 차원에서 올린 충언으로 보이옵니다.”
내각승상 김주원이 먼저 나섰다. 작년에 새로 승상 자리에 오른 원숙한 신하다. 그 뒤를 이어 예부대신 송시열이 나섰다.
“중원에서는 예로부터 황자들을 각 지방에 분봉하여 봉건제를 시행하다 나라가 갈라지고 내란이 일어나는 사례가 허다했습니다. 과거에 서진에서 8왕의 난이 그러하였고 근래에는 대명에서 정난의 변이 그러하셨습니다. 그러니 어찌 선비들이 경계하지 않겠습니까?”
송시열은 올해 85세나 되었지만, 여전히 노익장을 자랑하며 대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만 정승 자리에는 아직 오르지 못했다.
송시열은 성균관과 집현전을 거치지 않은 산당(山黨) 출신이지만, 받드는 사람이 많다. 학맥이 든든하면서 자신이 쌓은 학식과 실무 능력으로 출세한 사람이라, 그 성취에 경의를 표하는 이들이 많은 탓이다.
송시열은 언제나 만사에 원칙을 강조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태황은 송시열이 하는 발언을 중단시키지 않고 차분히 듣고 있었다.
“성친왕께서 대유주에 견문을 넓히러 가시고, 미주에서 백성들을 위무하시는 데 대해서는 산림(山林)들도 평이 좋습니다. 두루 견문을 익히고 미주 백성들에게도 황실의 은덕을 널리 알리는 기회이니 말입니다. 허나.”
“허나?”
“종친은 그 신분 자체가 지위입니다. 특히 임금의 아들인 친왕, 군왕이라면 더더욱 높은 지위라서 굳이 벼슬을 내리지 않으셔도 백성들을 위무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과거 장조께서 종친사환금지법을 폐지하실 때 황자들은 끝내 예외로 하신 것도 그 연유입니다.”
장조의 지차 아들이었던 영창대군과 혜산군, 진안군 ? 이들 중에서 선조가 칭제할 때까지 살아있다가 왕으로 승작한 사람은 진안군 하나뿐이다 ? 세 사람 모두 사망할 때까지 어떤 직책도 맡지 않았다. 형인 경조와 조카인 선조의 보호를 받으며 유유자적하다가 죽었다.
“그대는 성친왕에게 동변관리사 벼슬을 내리는 일을 끝까지 반대하였었지. 그대가 상소를 올리는 자들을 부추긴 것은 아닌가?”
“아니옵니다, 폐하. 신은 오로지 폐하께 옳은 결정을 내리시라고 진언하였을 뿐이고, 다른 이들을 선동하는 것과 같은 행동은 추호도 행한 바 없습니다.”
송시열은 지금 쏟아지는 상소 세례는 자기가 선동하지 않았다고 부정하면서도, 그 취지는 옳다는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유력한 황족에게 벼슬을 주어 원지에 파견함은 장차 내란의 씨앗이 될 수 있다고 말이다.
“폐하. 이 상소들은 폐하의 본뜻을 모르는 참언이니 무시하소서. 성친왕께서 동변관리사 직책을 계속 유지하게 하심이 옳습니다.”
우승상 김세룡은 확실하게 송시열의 반대편에 섰다. 김세룡은 자기가 왜 송시열이 내놓은 주장에 반대하는지 조목조목 설명했다.
“일전에는 소신도 성친왕께 관직을 부여하는 일에 관해서 반대했었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성친왕께서 폐하의 뜻에 따라 미주 전역에 왕화(王化)를 전하려면 관리사로 임명하여 일하게 해야 그 효과를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직책이 없으면 권한도 없다. 변방을 살피러 나간 친왕이 세력을 키워서 반기를 드는 것도 곤란하지만, 아무 권한도 없어서 변방 백성을 위무하는 일조차 원활하게 할 수 없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다.
“미주 현지에서 동원할 수 있는 물자와 인력으로 변방 백성들의 민원을 해결해줄 정도의 권한은 있어야 합니다. 그것도 없으면 순전히 지방관의 협력에 의지해야 하는데, 각 수령이 못된 마음을 먹고 성친왕께 따르지 않는다면 도리어 황실의 위신만 해칠 것입니다.”
성친왕에게 사재를 털어 미주 백성들을 보살피라고 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공적인 일은 공적인 비용을 들여서 해야 하는 법이고, 제대로 된 권한과 지원도 없이 일하라고 내몰기만 하면 반발만 사게 된다.
“미주를 봉지(封地)로 내려 번왕으로 삼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게다가 변방 관리사는 본래 종2품이라는 낮은 직책입니다. 미주대총관이 같은 종2품이니 사소한 권한을 행사하려 해도 미주대총관에게 협력을 꼭 얻어야만 하며, 단독으로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할 겁니다.”
미주를 통치하는 전권을 쥐는 것도 아니고 자손에게 직위를 세습하는 것도 아니다. 오직 행정구역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변방 땅을 다스릴 권한과 지방관에게 협조를 요청할 권한을 잠시 받았을 뿐이다. 그것도 귀국할 때까지 시한부로 말이다.
“이처럼 성친왕께서 반기를 들 위험성이 없는데, 이런 사정도 잘 모르는 자들이 멋대로 떠든다고 하여 그 뜻에 따라 폐하께서 한번 정하신 바를 꺾는다면 이는 종묘사직의 위신과 관련된 문제가 됩니다.”
김세룡은 성격대로 과감하게 내질렀다. 태황은 송시열에게 했던 것처럼, 김세룡이 마음껏 발언하게 놓아두었다.
“신이 판단하기에는, 성친왕께 내리신 직책을 회수하실 게 아니라 그 뜻을 조보에 실어서 널리 알리고 어리석은 선비들을 깨우치심이 옳다고 보옵니다. 그것이 폐하의 권위를 살리는 진정한 길이라 사료되옵니다.”
“우승상의 말이 옳습니다.”
“성친왕께 동변관리사를 제수하심은 폐하께서 많이 자제하신 것인데, 그것도 눈치를 채지 못하고 저리 시끄럽게 떠드는 자들은 폐하의 심기도 알지 못하며 그저 공리공론으로 떠드는 자들이니 무시하소서.”
“아니, 그래도 예부대신의 말도 옳습니다. 지금이라도 미주대총관에게 사자를 보내 성친왕 전하께서 내리는 분부를 잘 받들어 모시라고 명하시면 굳이 성친왕께 벼슬을 내리지 않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태황은 당장 어느 쪽이 옳다는 반응을 보이지 않고 양쪽이 내놓는 주장을 듣기만 했다. 다만 송시열보다 김세룡 쪽에 붙은 신하가 여전히 많다는 점은 눈여겨보았다.
3년 전만 해도 이런 분위기는 찾아보기 힘들였다. 성친왕을 유럽으로, 미주로 내돌리는 태황의 모습을 보고 지레짐작한 신하 대다수는 성친왕을 폄하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이들은 성친왕이 영원히 추방 상태로 있을 줄 알고 안심하고 태황 앞에서 성친왕을 깎아내렸다.
하지만 돌궐군을 대파하고 그 전리품을 본국에 실어 보내면서부터 성친왕에 대한 태황의 취급이 달라지는 티가 났다. 여기에다 프랑스 고문단이 도착하고, 동현까지 건너오자 이제 예전처럼 철부지이자 망나니로 취급하는 언사는 완전히 사라졌다.
“성친왕은 지난 1년 동안 미주에서 많은 백성을 훌륭히 위무하였다.”
선정전 안에 임금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크지는 않지만, 확연한 의지를 담아서 흘리는 목소리다.
“짐은 그동안 훌륭히 책무를 수행한 성친왕에게 그만한 지위가 필요하다고 여겼기에 변경 관리사 벼슬을 내렸다. 헌데 조야에서 반대가 크다니 안타깝도다. 하지만 이미 내린 벼슬을 떼는 중대사를 회의 한 번으로 결정할 수는 없으니, 이 문제는 추후에 더 논의하겠다.”
태황이 ‘나중에 결정하겠다’라고 하면 그건 ‘바꾸지 않겠다’라는 의미다. 한번 결정한 일은 마치 바위와 같다고 할 만큼 쉽게 바꾸지 않는 태황의 성격은 모두 알고 있었다. 보기에는 갈대처럼 약해 보일지 몰라도, 내면은 세 치 굵기 쇠사슬 같은 사람이 지금 태황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신하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조회가 시작될 때는 발언을 했으나 성친왕이 거론되면서 바로 입을 다물고 회의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던 좌승상 강기석도 정중한 인사말을 남기며 임금 앞에서 허리를 조아렸다.
이 문제에서는 송시열이 졌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도 태황에게 주청할 사안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태자의 국혼과 관련되는 중요한 문제였다.
“폐하, 신이 폐하께 진언할 사안이 아직 더 있사옵니다. 내달인들이 우리 대한에 들어와서 산 지 벌써 백여 년이 되었는데, 이제는 내달인들에게도 법도에 따라 간택 단자를 바치라고 하심이 옳지 않겠습니까? 어찌 우리 땅에서 저들의 풍습만 지키며 살게 하시겠습니까?”
천주교를 믿는 내달인들도 다른 의무는 모두 수행한다. 법에 따라 세금을 바치고, 군역의 의무를 지느라 속오군 복무도 한다. 하지만 태자비 간택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관청에 처녀 단자를 제출할 필요도 없으며, 금혼령도 적용받지 않는다. 송시열은 그 점을 짚고 나왔다.
“대한의 백성이라 하면, 금혼령이 내렸을 때는 그 고하를 막론하고 혼인을 멈추고 황실에 처녀 단자를 제출해야 합니다. 하지만 내달인들은 전혀 이에 응하지 않으니, 너무나 잘못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혼을 맞아 금혼령이 내린다고 해서 딸을 키우는 모든 백성이 처녀 단자를 제출하는 건 당연히 아니다. 태자비를 배출할 만한 가문은 몇 개 없고, 개중에서 혼기에 딱 도달한 딸이 있는 집만 따지면 그 수는 더 줄어든다.
간택 후보에 오르는 규수의 수는 아무리 많아도 30명 내외인 게 보통이다. 게다가 이들도 모두 도성 인근에 거주하는 사대부 가문 출신이었다. 중인 이하 집안이거나 도성 외 지방에 거주하는 자, 유럽에서 온 도래인(渡來人) 출신 가문 등이 간택된 사례는 한 번도 없다.
“서반아나 불랑국 출신 외관들은 간택이 안 될 줄을 알지언정 형식적인 절차는 수행하나, 내달인들은 형식적인 처녀 단자 제출조차 하지 않습니다. 아예 금혼령과 상관없이 제멋대로 혼인하니, 이는 상을 능멸하는 행위라 볼 수밖에 없습니다. 아직 태자비를 간택하는 절차가 다 끝나지 않았으니, 이제라도 내달인 중 주요 가문을 골라 단자를 내게 하소서.”
송시열의 주장은 정론이기는 했다. 하지만 태황의 표정은 별로 밝지 않았다.
“내달인들은 대개 장사꾼이고, 관직에 나서는 이는 거의 없다. 그나마 무과나 잡과를 치러 급제한 이는 간혹 있으나 대과를 보아 문관으로 출세하는 이가 없으니 문벌이 없다. 그러니 국모의 자리에 어울리는 가문이 아예 없다. 그런데 단자를 내라고 한들 무슨 소용인가?”
태황의 반론에도 불구하고 송시열은 태도를 꺾지 않았다.
“폐하, 이는 원칙의 문제입니다. 이 대한 땅에서 사는 만백성은 그 출신이 어디에 있든지 태자비를 뽑을 때 단자를 낼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처녀 단자를 내지 않으며 자기들끼리 자유롭게 혼인하는 행동은 역모로 보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조금 전, 성친왕을 동변 관리사에 임명하는 문제로 송시열과 부딪혔던 김세룡이 자리에서 다시 일어섰다.
“폐하, 지금 예부대신이 한 말은 실로 불경하며 도리에 어긋나는 마땅치 못한 발언입니다. 예부대신 대감, 내달인들에게 자기들 풍속대로 살도록 허락하신 이가 바로 장조 폐하시라는 사실을 잊으신 거요?”
“잊지 않았소이다. 하지만….”
“잊지 않으셨다니 다행이구려. 하지만 예부대신께서는 중요한 점을 잊고 계시는 듯하오. 내달인들이 우리 본국인과 잘 혼인하지 않는 건, 종교 문제가 근본이요. 천주교는 축첩을 허용치 않는데, 황실에 들어오면 많은 후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니 어찌 감당하겠소?”
네덜란드인들은 대개 자기들끼리 혼인하고, 어쩌다 조선인과 혼인하는 사례가 있어도 그 상대는 백이면 아흔아홉은 천주교 신자다. 비신자와는 절대 결혼하지 않는다. 비신자하고도 잘만 혼인하는 서반아인이나 불랑국인 등 다른 도래인들과도 다르다.
하지만 황실은, 다른 종친이라면 몰라도 황태자는 절대 천주교를 신봉할 수 없다. 고작 내달인들을 형식적으로 무릎을 꿇게 하려는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이유만으로 받아들이기엔 뒷감당해야 할 충격이 너무 크다.
건원제 시절에 후궁으로 들였던 원빈의 전례가 있지만, 원빈은 후궁이었고 또 그 사건은 사실상 내달 상단에서 건원제에게 미인을 뇌물로 상납한 사례였으니 경우가 다르다.
“게다가 대한이라는 나라가 세상 만방에 약속한 바를 어기게 되는 겁니다. 고작 간택에서 뽑지도 않을 내달인 처녀 한두 명 집어넣자고 나라 이름을 걸고서 백 년이나 지켜온 약속을 파기하자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장조 폐하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이란 말입니다.”
아까보다 더 많은 신하가 김세룡 편으로 붙었다. 송시열은 자기에게는 그런 뜻은 없었고 오직 원칙적인 문제를 거론했을 뿐이라고 항변했으나, 중신들의 의견은 김세룡을 지지하는 쪽으로 확연하게 기울었다.
“예부대신의 말은 잘 알겠다. 허나 장조께서 하신 약속을 깨고 내달인들까지 간택에 들게 하여 얻을 수 있는 실익이 별로 없는 이상, 그대가 말한 것처럼 억지로 내달인들에게 처녀 단자를 내라고 명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태황이 조용한 목소리로 결론을 냈다. 송시열도 태황이 확정한 결론에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서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