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976
3부 094화
– 1 –
현대 사회에서는 유통에 필요한 시간 때문에 과일이나 채소가 완전히 익기 전에 수확하는 경우가 많다. 아직 시퍼럴 때 수확해서 운송 및 보관 도중에 익게 하는 토마토나 바나나가 대표적인 사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덜 익어서 시퍼런 물건을 억지로 익힌 것보다 자연스럽게 익은 뒤에 수확한 과일이 훨씬 더 맛있다. 나무에 달린 채 노랗게 익은 바나나는 정말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그런 맛있는 걸 너 혼자 먹었단 말이지.”
“어쩔 수 없잖아. 다 익은 바나나는 오다가 썩어버리는걸.”
상희가 정말로 화가 난 건 아니었다. 싱글거리며 날 놀리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네 덕분에 정말 오랜만에 바나나 맛을 봤어. 피자야 전생에서도 내가 만들었으니 그렇게 놀랍지는 않았지만, 바나나는 정말 놀랐네. 생각도 안 하고 있었거든.”
맞다. 피자는 나보다 상희가 먼저 만들었다. 지난번 생에서, 반촌주점에서 안주로 내놓은 메뉴 중에 피자가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때 아예 맛을 못 봤으면 이번 생에서 굳이 피자를 굽고 싶은 생각이 안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앞으로도 바나나 자주 가져올 거야?”
“두고 온 수비대한테 물자 보급하고 선원들 원거리 항해 훈련을 겸해서 1년에 두 번 정도 정기운항할 거니까, 그때마다 좀 가져오지 뭐.”
하와이에 남겨놓고 온 20명은 우리 거점을 유지하는 중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 행정권은 본국에 맡긴다고 해도, 그와 별개로 미주와 하와이 사이에 계속 교류를 유지할 필요는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하와이에 파인애플이나 바나나, 사탕수수 농장도 만들 거야. 싱싱한 파인애플은 냉장선이 나오기 전까지는 못 가져오겠지만, 설탕이랑 바나나는 미주에 가져올 수 있어.”
왕복하며 보니, 범선으로 1달 정도 생각하면 넉넉히 오갈 수 있을 듯하다. 그만한 거리면 바나나가 썩기 전에 도착할 수 있다. 설탕도 지금은 본국에서 가져오는 비싼 기호품이지만, 하와이산 설탕은 더 싸게 공급할 수 있을 거다. 파인애플도 말려서 가져오면 되고.
“대남도 설탕이랑 경쟁해야겠네? 아, 유구도 있고.”
“경쟁은 좋은 거지. 전생의 내가 쌓아놓은 것들과 경쟁하는 건 좀 웃기지만.”
나도 모르게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흘렀다.
“경쟁하는 만큼 가격은 싸질 거고, 시장은 더 넓어질 거야. 우리가 기억하듯이, 조선에서 설탕을 약으로나 쓰던 시대는 정말 전설이 되고 사람들이 음식이나 음료에 넣고 싶은 만큼 설탕을 실컷 넣을 수 있는 시대가 오겠지.”
산업혁명 시대 영국에서는 노동자들도 문자 그대로 설탕을 퍼먹다시피 했다. 하지만 그건 단맛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은 설탕물로라도 열량을 채워야 했기 때문에 값싼 설탕을 퍼넣은 홍차를 마셨던 거다.
우리 조선에서는 그런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다. 값싼 에너지원으로서가 아니라, 순전한 기호품으로서 백성들이 설탕을 마음껏 즐기게 하고 싶다. 물론 국내외 시장에 팔아서 돈도 잔뜩 벌어야지.
“일단은 미주 시장에 먼저 공급하고, 생산이 더 늘어나면 본국에서도 각축이 벌어질 수 있겠지. 일본에도 팔고, 인디언들한테도 팔고…그런데 스페인 식민지에는 못 팔겠네. 그쪽은 설탕을 자기들이 직접 생산하니까.”
카리브해 일대는 이미 세계적인 설탕 생산지다. 미주로 건너오는 길에 그 모습의 일단을 보았고, 견학도 했다. 중간에 들른 자메이카에는 이미 광대한 설탕 농장이 있었다. 프랑스, 영국, 스페인 등은 이미 흑인들을 노예로 부리는 설탕 플랜테이션을 가동하고 있다.
“커피는 안 심을 거야?”
“커피? 하와이에서도 커피가 나나?”
나야 원래 생에서는 커피에 별 관심이 없었으니까 모를 수밖에 없다. 오후 커피를 마시던 상희가 살짝 웃으면서 설명했다.
“세계 3대 커피라고 부르는 3가지 커피 중 하나가 하와이 코나 커피야. 아라비아산 모카, 자메이카산 블루마운틴이 나머지 둘이고.”
상희의 설명에 따르면 하와이에서 커피 재배가 시작된 건 1825년부터란다. 브라질에서 묘목을 구해다 심었고, 그게 하와이 풍토에 적응하면서 유명한 존재가 되었다나.
“어떻게 그런 걸 다 알아?”
“나 부리던 교수들 있잖아. 그놈들 중에 커피 취향이 무지하게 까다로운 인간이 있었거든. 수십 가지 원두를 두고 자기 취향대로 조합해서 주문하는데, 각각의 원두 특성에 역사까지 다 꿰고 있어야 했어. 그걸 다 외울 시간에 공부나 좀 더 했으면 오죽 좋아.”
그래도 옛일을 이야기하는 상희 태도가 부드러워지긴 했다. 지난번 생만 같았어도 어쩌다 그놈의 교수들 이야기가 화제에 오르기만 하면 눈에 핏발이 서고 이를 악물었는데, 이젠 그 사람들을 자기가 언급하면서도 딱히 화를 내지 않았다.
“기억은 선명하지만, 예전 일 계속 마음에 담아 둬서 뭐 하게? 어차피 이제 완전히 다른 세상인걸. 그 인간들, 이쪽 세상에서는 아예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을 공산도 크잖아.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인간들한테 증오심 품을 필요 없어. 내가 지금 행복한 게 더 중요한걸.”
마침 방문이 활짝 열리면서 우리의 행복을 드러내는 상징이 방으로 들어왔다. 유모차에 누워 꿈틀거리는 우리 아이, 태어난 지 이제 4개월 된 은이였다. ‘기뻐할 은(?)’을 쓴다.
“왕비 전하, 왕자께서 잠이 깨었어요. 유모가 바로 젖을 물려 배는 부른데, 엄마를 찾으려 하는 모습이라 데려왔습니다.”
유모차를 직접 밀고 온 올렝카가 부드럽게 웃으면서 아이를 안아 올려 상희에게 건넸다. 이 목제 유모차는 지선성 귀환 후 상희의 출산을 기다리는 동안 내가 만들게 한 물건이다. 정식 이름은 그냥 간단히 ‘아동거(兒動車)’라고 붙였다.
지난번 생까지는 아기를 안을 궁녀와 상궁들이 사방에 널려있으니 굳이 이런 물건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 생에는 주변에 그때만큼 사람이 많지 않다. 아니, 그때 사람이 너무 많았던 거다. 궁궐 안 법도 때문에.
이번 생에서는 시중드는 사람을 정말 꼭 필요한 만큼만 두었다. 그리고 나나 상희도 예법 같은 데 훨씬 덜 구애를 받으니까 지난번 생에서보다 자주 아이를 직접 돌보았다. 그러니 유모차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집안이나 정원에서 밀고 다니는 정도기는 하지만 말이다.
“자, ‘아빠’ 해 보거라, ‘아빠’.”
“전하, 너무 성급하세요.”
상희에 이어 올렝카가 입을 가리면서 부드럽게 웃었다.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흔히 나오는 못된 첩들은 본처 소생 적자를 미워하며 괴롭히는 경우가 많지만, 올렝카는 그러지 않았다. 자기가 낳은 아이가 아니면서도 은이를 마치 자기 아이처럼 예뻐했다.
“그러고 보니 올렝카 이야기…태후마마한테 처음 들었다고 했던가?”
“응. 배 타기 전에 마마께서 알고 계시는 만큼은 전부 들려주셨어. 네가 양첩에 푹 빠져 있으니 건너가서 좀 괴로울 수도 있다고, 힘들더라도 참고 견뎌달라고 그러시더라. 그래서 잔뜩 걱정하면서 건너왔는데 와서 보니 생각보다 착하고 좋은 아가씨였지.”
“태황은 올렝카 두고 뭐라고 한 적 없고?”
“태황폐하 얼굴도 본 적 없어. 내 혼사는 전적으로 태후마마가 주관했거든. 폐하 성격이 너무 나쁘다고 오빠들이 투덜거리는 광경은 본 적이 있지만. 내가 늦둥이 고명딸이라, 다들 일찌감치 출사한 지 오래거든.”
부친이 만 34살에 낳았다 하니, 현대 기준으로는 상희가 딱히 늦둥이도 아니다. 오빠들을 낳은 나이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라 그렇지. 막내 오빠도 상희보다 11살이나 많다.
그 중간에도 형제자매가 두어 명 있기는 했다고 했다. 다만 자라기 전에 죽었기에 상희는 본 적이 없을 뿐.
하여튼 상희가 괜히 미주에 도착하자마자 올렝카를 호의적으로 대한 게 아니었다. 태후가 올렝카를 좋게 평가해준 덕분에 상희와 올렝카 사이가 처음부터 좋게 시작할 수가 있었다. 태후에게 감사하고 효도해야 할 이유가 또 늘었다.
덕분에 지금 유모차를 둘러싼 세 사람이 함께 웃으며 정겹게 지낼 수 있다.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웃는 소리를 듣자 은이도 기분이 좋은 듯 눈을 크게 뜨고 자기를 품에 안은 엄마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그런데 이 녀석이 내가 손을 내미니까 휙 고개를 돌렸다.
“이런 녀석 같으니. 너도 어미가 더 좋은 게냐.”
내가 투덜거리자 상희와 올렝카가 둘이서 함께 웃었다. 그리고 내게 한 마디 핀잔을 주려 하는데 갑자기 은이가 얼굴을 찡그리더니 뿌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구린내가 퍼졌다.
“어머, 응가를 하네. 기저귀를 갈아야겠습니다.”
“음, 내가 하지. 모두 비키시오.”
은이를 유모차에 내려놓은 상희와 옆에서 다가선 올렝카를 모두 밀어내고, 유모차 아래에 매달아둔 바구니에서 내가 직접 새 기저귀를 꺼냈다. 그리고 은이가 입은 두렁이를 들췄다. 두렁이는 아직 어린 젖먹이에게 입히는 치마처럼 생긴 옷이다.
“이 녀석, 많이도 쌌네.”
아기 돌보기는 현대에서는 자주 해봤다. 사촌 동생들이랑 나이 차이가 크게 나서, 업어서 달래거나 기저귀 갈아주고 우유 타서 먹이고 하는 등등 웬만한 건 다 했다. 지금이 한 가지 불편한 점이라면 기저귀를 끈으로 고정…악!
“저…전하! 이런, 수건 여기 있습니다.”
“고맙소, 왕비.”
얼굴 가득 튄 오줌을 닦으면서 흘깃 보니, 어쩔 줄 몰라 하는 올렝카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웃음을 가까스로 참고 있는 상희가 보인다. 하아, 하긴 기저귀를 갈려다가 오줌을 뒤집어쓴 아기 아빠라는 건 확실히 재미있는 구경거리이긴 하지.
“전하, 서장관이 보고를 드리러 왔습니다만 어찌 답하면 좋을지요?”
마침 나타난 시종은 시선을 제대로 두지 못하고 쩔쩔맸다. 유모차 밑 빨래통에다 수건을 집어넣고 퉁명스럽게 답했다.
“사랑채에서 기다리라 하게. 지금 바로 가볼 테니.”
뒷일은 상희와 올렝카에게 부탁하고 사랑채로 향했다. 자, 이제 가족을 위한 얼굴은 잠시 내려놓고 다른 얼굴을 장착할 시간이로구나.
– 2 –
“전하, 역시 아비 노릇이 쉽지 않으시지요?”
“경은 이미 여러 번 해보았다, 이건가?”
정호찬은 오줌 벼락을 덮어써서 젖은 채 나타난 나를 보고 잠시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곧 상황을 알아채고 폭소를 터트렸다. 덕분에 업무용 얼굴 탑재는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자식을 키우려면 똥오줌을 한 말은 먹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전하. 제 첫째 녀석은 두 살배기 때, 낮잠을 자는 소인의 입에 제 놈이 싼 똥을 바르기도 했었지요.”
“우리 왕자는 안 그러기를 바라네.”
당연하지만, 은이는 아직 정식 작위를 받지 못했다. 일단 종친부에다 출생신고도 못 했고, 출생신고를 한다고 바로 작위가 나오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 법도로 작위를 받으려면 10세는 넘겨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 그때까지는 그냥 왕자라고 부르면 된다.
“저희 집 세 아들놈이 자라며 애비를 놓고 벌인 장난을 늘어놓으면 책 두 권은 족히 채울 겁니다. 전하께서도 단단히 각오하시는 게 좋으리라 사료됩니다.”
내가 워낙 편하게 대해서 그렇지, 정호찬은 사실 따지고 보면 성친왕에게 아버지뻘이다. 경인년(1650)에 태어났으니 나보다 15세나 위다. 2살 때 아빠 입에 똥을 발랐다는 장남은 나보다 1살밖에 안 어리다. 그러니 이제 처음 아비가 된 ‘나’를 얕본다고 해도 할 수 없다.
“몇 번이나 얘기했지만, 본국에 가서 가족을 만나고 오게나. 휴가는 줄 테니.”
옷을 갈아입고 나와 의자에 앉으며 정호찬에게 제발 휴가를 다녀오라고 제안했다. 그래야 본국에 있는 정호찬의 가족들에게 덜 미안할 것 같았다.
내가 동변관리사가 되면서 8차 견서사는 정식으로 해산했다. 고로 내 수하들은 언제든지 귀국할 수 있게 되었다. 형황의 허락을 따로 받지 않아도 된다.
물론 나는 아직 못 간다. 상희를 나한테 보내줬다는 것부터가 아직은 미주에서 돌아오지 말라는 무언의 명령 아니겠는가. 뭐, 이젠 안 가도 상관없지만.
수하 중 예부에서 파견한 두 하인과 역관 이홍석은 ‘할 만큼 했으니 그만 귀국하고 싶다’라고 청했고, 관선을 타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다른 6명 ? 이형준, 정호찬, 김종건, 홍상훈, 이진원, 박종선 ? 은 돌아가지 않았다.
“작년에 홍 군관이 드린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전하를 모시고 금의환향하고야 말겠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소관이 집에 다녀오려면 1년은 걸립니다. 그리고 제가 가면 다른 이들도 가려고 할 텐데, 그동안 누구를 저희처럼 쓰려고 그러십니까?”
“어떻게든 꾸려볼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미주 총관부 관리들도 있고, 요즘 사람들을 계속 새로 뽑고 있으니 어떻게든 메울 수 있을 걸세.”
“누구를 기용하셔도 경신년(1680)부터 14년째 전하를 모시고 있는 저희보다 낫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만. 그리고 어차피 저희 녹봉은 호부에서 계속 가족에게 지급하고 있으니, 딱히 처자의 생계가 어렵지도 않습니다.”
“부정하기가 어렵군.”
맥 풀린 웃음을 짓자 정호찬이 짐짓 점잔을 빼며 가져온 문서를 내밀었다.
“자, 그러니 어서 일하십시오, 전하. 홍 군관이 광산에서 최근에 입은 피해에 관하여 최종 보고서를 작성해서 보냈습니다. 권학사 영감과 감리사 영감이 곧 도착할 테니, 그전에 미리 봐두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알겠네. 읽도록 하지.”
손을 내밀어 문서를 받았다. 그리고 펼쳐 보니 가관이었다.
“광산 시설 반파에 사망자 22명, 부상자 52명…참담하구나.”
“예, 전하. 시급하게 토벌에 나서야 할 것 같습니다.”
누가 감히 내 은광을 건드렸느냐고? 누가 저질렀겠나, 당연히 아파치지. 아파치 토벌은 이제 나한테도 직접적인 과제가 되었다. 이 자식들, 조금만 기다려라. 모을 수 있는 병력을 최대한 모아 제대로 본때를 보여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