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981
3부 099화
수군은 없다고 해도, 청나라 육군은 여전히 팽팽한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서나라와 후송을 합치면 인구가 청나라의 4배나 된다. 여기에 준가르도 있으니 해이해질 틈이 없다.
청군의 주력은 여전히 팔기다. 만주팔기와 왜군팔기, 한군팔기까지 총 24기 40만 병력이 황제의 명령에 따라서 칼같이 움직인다. 만주팔기는 두정갑으로 무장한 철기고 왜군팔기는 야전을 전문으로 하는 보병들이다. 한군팔기는 공성전에 특화된 포병과 공병이다.
만주팔기는 한인 농민들을 추방하고 조성한 삼림지대를 기반으로 한다. 각 기는 영지라고 할 수 있는 후방 삼림에 있는 병력과 국경에 나가 근무하는 병력을 교대하면서 계속 전력을 유지한다. 역사 속 청나라처럼 특정 지방에 붙박이로 박아 놓지 않는다.
왜군팔기는 대부분 장조 시절에 노예로 끌려와 몇 세대에 걸쳐 대륙에 적응한 왜인 용병 후손들이다. 복색은 청나라식이지만, 무기와 전술은 여전히 일본식이다.
한군팔기 역시 과거 건주가 요동에서부터 거느리고 있던 한인 투항병들의 후예다. 혈통은 분명 한족이나, 백 년 가까이 건주의 신하로 살아오면서 동족과 유리되어 만주족과 동등한 특권을 누리는 특별한 존재들이다. 조정에서 문관으로 재직하는 한족 특권층과 마찬가지다.
청나라는 남진을 포기하고도 전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준가르는 지치지도 않고 변경을 습격했고, 후송 역시 수시로 회수를 건너 북진을 시도했다. 백성들을 쥐어짤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이니 조선과 가까운 후방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청나라 조정이 국경에서 병력을 빼는 대신 조선군을 불러 진압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반란 진압 때문에 병력을 빼돌린 때를 맞춰 준가르나 후송이 쳐들어온다면 심히 곤란해질 테니 말이다.
서나라가 보이는 태도도 청나라와 비슷하다. 서나라도 지금은 외부로 향한 공세를 멈추고 수세로 들어갔다. 그 계기는 태조 장헌충이 병신년(1656)에 친정에 나섰다 죽은 일이었다.
그 자신이 북방 출신인 장헌충은 강남일통과 강남을 기반으로 한 천하통일을 죽을 때까지 추구했다. 당연히 서나라 전체를 쥐어짜서 후송과의 전쟁을 계속했다. 조승복 역시 천하를 노렸으므로 결연히 맞섰으나, 이들은 3면에 적을 두고 있어 힘을 집중할 수 없었다.
병신년, 장헌충은 최정예 친위군을 거느리고 원정을 감행했다. 그런데 동정호에서 결전을 벌여 후송 수군을 대파한 뒤에 동진하려는 참에 장헌충이 덜컥 급사하고 말았다. 그 원인은 급병이라고 하는데, 정확하게는 모른다. 제대로 된 유언도 없었다.
도성인 성도에 태자를 남겨두고 오기는 했다. 하지만 50세밖에 안 된 장헌충은 진지하게 후계 구도를 준비하지 않았고, 태자를 세우는 이외에는 권력을 물려주기 위한 준비를 전혀 해두지 않았다. 이 틈을 치고 들어간 게 원정에 동행하던 15세의 4황자 장형운이었다.
장남인 황태자와 2황자, 3황자는 모두 장헌충과 함께 북방에서 내려온 황후와 후궁 소생 자식들이었다. 하지만 4황자는 사천 출신 모친을 두고 있었고, 그 탓에 북방 출신 노신들이 생각하는 후계 구도에서는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다. 그나마 모친도 일찍 죽었다.
장형운은 완전히 끈 떨어진 황자가 되어 하급 군관이나 병사들과 주로 어울리며 지냈다. 그러던 참에 부황이 급사하자 혼란에 빠진 군중에서 기회를 잡았다.
‘강남이 다 뭐냐? 집에 가자! 집이나 지키자!’
사천 출신 병사들에게, 같은 사천 출신 황자의 선동은 기가 막히게 먹혀들었다. 따르기를 거부하던 부황의 측근 장수들 ? 부황처럼 북방 출신인 ? 은 순식간에 난자당한 고깃덩이가 되었고, 원정군 전체가 장형운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반정군이 된 원정군은 곧바로 방향을 돌려 성도로 진군했다. 대패한 군대를 수습하느라고 여념이 없던 후송군은 퇴각하는 적을 추격할 엄두도 내지 못했고, 장형운은 배후를 걱정할 필요 없이 순조롭게 수도로 돌아갈 수 있었다.
장헌충이 고르고 고른 최정예 군단이었던 원정군이 창끝을 돌리자 누구도 막지 못했다. 도성에 남아있던 금군도 대세가 넘어갔음을 깨닫고 깃발을 바꿔 들었다. 장형운은 간단하게 이복형 둘 ? 하나는 이미 병사했다 ? 을 모두 붙잡아 해치웠고, 당당히 옥좌에 올랐다.
황제가 된 장형운은 제일 먼저 조정에서 북방 출신 중신들을 모조리 쓸어냈다. 15세라고 하나 자기 힘으로 황위를 얻은 이상, 하고 싶은 일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사천, 운남 등 서나라 출신 신하들로 조정을 채운 장형운은 대놓고 서나라와 중국 사이의 연관성을 부정했다. 말과 풍속이 전혀 다르다는 점을 들어서 ‘파촉과 운남은 중원이 아니라 전혀 다른 나라이므로 중원의 땅을 원할 이유도 없다’라는 선언이었다.
천하통일을 포기하지 못한 장헌충의 아집 때문에 병력과 물자를 대느라 시달리던 관민은 당연히 환호했다. 이후로 서나라는 후송을 상대로 결전을 벌이기보다 바다를 향해 남진하는 쪽으로 전환했고, 청나라에 화해를 청하는 의사를 보였다. 조선 쪽에도 교류를 제안했다.
“자기들은 중원과 상관없는 나라니, 옛 전통을 되살려 우리 대한과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 하는데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옳은 말이오, 부사.”
이형준은 이 대목에서 과거 고려 때 고려와 대리국 사이의 교류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를 정당화했다. 나로서도 환영할 일이기에 맞장구를 치면서 들었다. 나야 중국이 갈라지기만 한다면야 무슨 일이 벌어지건 상관없으니까.
워낙 어려서 등극한 덕분에, 장형운은 지금도 제위에 앉아 수천만 백성을 다스리고 있다. 국정은 그럭저럭 선방하면서 정지룡을 매개로 한 조선과의 교류도 이어나가고 있다. 조선도 별 싸움거리가 없는 서나라와의 관계는 원만하다.
“그러니 해적 두목이라 하여 정가 놈을 토벌해버리기가 더욱 난감한 것입니다.”
“알겠소.”
대남에 있는 정씨 일족들도 문제지만, 조선이 정지룡을 친다면 서나라 관군을 공격하는 셈이 된다. 그러니 놈이 조선 배를 공격한다는 ‘확증’이 없는 이상 방관하는 수밖에. 게다가 광동을 통해 이루어지는 교역에서 우리 역시 이익을 얻고 있으니 전쟁보다는 평화가 낫다.
허나 후송과의 관계는 서나라처럼 순조롭지 못하다. 이미 몇 번이나 언급했듯, 후송 측이 자기들이야말로 명나라를 이어 중원을 다스리는 정통 천자라고 주장하고 있는 탓이다.
후송 태조 조승복, 이 태조라는 호칭도 생각해 보면 애매하다. 후송은 스스로 자부하기를, 자기들이 옛날 몽골에게 망한 송나라를 재건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태조라는 묘호를 올리면 안 되지 않는가? 엄연히 송태조 조광윤이라는 존재가 있는데?
“못 배워먹은 천한 것들이라 그렇습니다.”
이형준은 신랄하게 후송 황실과 조정과 학자들까지 뭉뚱그려 한방에 깠다.
“자칭 천자라는 자는 근본도 없는 도적이었고, 그 밑에 있는 신하라는 것들도 죄다 그에 걸맞은 패들이니 어찌 군주에게 충심으로 간하여 제대로 된 묘호를 올리겠습니까? 윗전에서 원하는 묘호를 그저 바친 뒤 이를 정당화하려는 근거나 어거지로 찾아내는 것이지요.”
후송 조정이 내세운 명분은 같은 묘호를 두 번 쓴 전례가 과거 북위(386~534) 때 이미 있다는 거였다. 북위는 5호 16국 시대를 끝내고 남북조시대를 연 선비족 왕조인데, 이들은 5호 16국 시대 대나라(代, 315~376)를 계승했다. 황통도 그대로 이어진다.
그런데 대나라에서 묘호를 받은 군주가 딱 둘인데, 4대 황제가 태조(太祖)고 8대 황제가 고조(高祖)였다. 그리고 북위는 초대 황제를 열조로 칭했다가 태조로 바꾸었고, 7대 황제는 대놓고 고조로 칭했다. 2명뿐인 대나라 묘호가 전부 북위에서 재사용된 거다.
“대나라가 망한 뒤 도무제가 북위를 다시 세울 때까지 고작 10년이었는데도 태조라 칭한 사례가 있으니, 350년 만에 나라를 다시 세웠다면 충분히 태조를 칭하고도 남는다는 것이 후송의 주장입니다. 하지만 북위는 북적(北狄)인 선비의 나라이니, 그것을 어찌 제대로 된 전례라고 하겠습니까?”
“확실히 그러하오.”
왕망 때문에 잠깐 망했다가 후한으로 다시 일어선 한나라의 경우, 전한에서 묘호가 붙은 황제가 7명이고 후한에서도 7명이다. 여기서 중복되는 묘호는 하나도 없다. 그 외에는 망한 나라가 부활한 적절한 사례가 없다.
하여간 조승복은 남경에 있는 종묘에 태조로 모셔졌다. 저들이 하고 싶다니 뭘 어쩌겠나.
사실 조승복은 경쟁자였던 다이샨이나 장헌충과 비교해도 뭣같이 오래 살았다. 미칠 듯한 능력으로 강남을 제패하고 건주군의 남진을 막아내더니, 회수 이북으로 청군을 몰아내고도 80세까지 살다가 무신년(1668)에야 자연사했다. 청나라에서는 요토까지 죽은 뒤다.
이렇게 오래 살았으니 자기 권좌를 말 그대로 반석처럼 다져 놓았고, 자기 묘호를 원하는 대로 태조로 정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황권도 휘둘렀다. 조승복의 자리를 이은 후계자들도 그 본을 따라서 옛날 송나라에서 이미 쓴 묘호를 거리낌 없이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후송 놈들이 진짜 대송의 후예가 아니라 족보를 도둑질한 도적놈들임을 증명하는 증거로 그것만큼 큰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들이 진정으로 송태조(조광윤)의 후손이라면, 어찌 감히 스스로 선대의 묘호를 참칭하겠습니까?”
“옳은 말이오. 부사 영감의 말이 옳소.”
이런 식이니 조선에서 후송을 제대로 된 외교 상대로 취급해줄 리가 없다. 후송 측에서도 자기가 정통 천자라고 주장하는 이상, 각자 황제를 칭하는 주변국들과 동등하게 정치적으로 교류하려고 나서기는 어렵다.
후송이 조선, 청, 서를 중원과 상관없는 이방으로 인정하고 자기와 동격으로 대우한다면 교섭의 여지가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런 사례는 중국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다.
누구나 아는 이야기지만, 과거 사례를 보면 중국 왕조들은 세폐를 퍼주면서라도 어떻게든 형식상으로는 자기가 이민족들의 위에 서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 후송을 둘러싼 세 나라 중 그런 조건을 받아들인 나라는 없다. 훗날에야 어찌 될지 모르겠다만.
상황이 그런 데다가 조승복이 장수한 영향도 있어서, 가장 최근까지 공격적으로 주변국을 대한 나라도 후송이다. 수세로 돌아선 청과 서를 계속 공격하고, 주산진 공략을 몇 차례나 시도하다가 매번 우리 수군에 패하여 타다 남은 나뭇조각과 시체로 바다를 덮었다.
최근에는 주산진에 대한 직접 공격은 그만두었다. 대신 우리 몰래 불러들인 서양인 기술자들을 시켜 화포를 주조하고 전선을 건조하게 한다고 했다. 해안에서 그 짓을 하면 당연히 우리한테 박살이 나니, 조선소는 한참 거슬러 올라간 장강 내부에 있고 말이다.
다만 이 신예함들은 장강 안에 처박혀 있을 뿐, 바다로는 잘 나오지 않는다. 아마 숙련된 선원이 모자라서 해전을 벌이기를 꺼리거나, 현존함대 전략이라도 펼치며 남경을 지키는데 집중하는 모양이다. 뭐, 우리 수군은 어차피 장강에 안 들어간다만.
하지만 후송이 새로 증강한 함대도 그 규모가 그렇게까지 크진 않다. 세 방향에서 포위된 후송의 형편상 어느 일방으로 비용과 전력을 집중하기가 무척 어려운 탓이다.
이 삼면 포위가 그저 위협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위력을 발휘한 사례도 두어 번쯤 있기는 있었다고 했다. 사전에 모의하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상황이 가다 보니 정말 3면에서 일제히 공격을 퍼부었는데, 조승복은 그걸 다 버텨내면서 반격까지 했다고 한다.
그때 조선이 전력을 다하지 않았기는 했다. ‘절대 중원을 넘보아서는 안 된다’라는 장조의 유훈이 국시처럼 내려오고 있고, 후송이 존속하는 편이 장기적으로 유리하다는 사실 정도는 모두 아는 데다 기근도 심해서 수군만 좀 나갔다. 어쨌든 조승복은 그 다구리를 버텨냈다.
물론 기반은 있다. 동아시아 최대규모를 자랑하는 인구가 있고, 강남의 막대한 생산력과 수십 년에 걸친 전란으로 단련된 군대와 노련한 장수들이 있다. 이민족에게 무릎을 꿇을 수 없다는 자존심도 있다. 여기에다 중요한 전략물자인 구리와 염초를 자급하고 있다.
그렇다 해도 3대 1로 처맞으면서도 역전을 이루어내다니, 정말 대륙의 기상이다. 조승복, 진짜 무서운 놈이었다. 설마 그놈도 나처럼 빙의한 미래인이었던 건 아니겠지? 이미 죽어서 나랑 직접 만날 일이 없는 게 정말 다행일 뿐이다.
하여간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요즘은 후송이 세 적국 중 하나와 전쟁을 벌일 때도 나머지 둘은 편안하게 구경이나 하는 게 보통이다. 셋 다 후송을 쓰러트리기는 어렵다고 인정하고 한동안 휴식기에 들어간 상태니까 말이다. 체력을 좀 비축하고 나면 또 모르겠지만.
그리고 구경이 곧 봉쇄는 아니다. 우리만이 아니라 청이나 서도 자기가 후송과 싸울 때만 아니면 후송과 활발하게 밀무역을 하고 있다. 아니, 전쟁이 한참 진행되는 도중에도 기나긴 후송 국경 어딘가에서는 상품과 돈이 교환되고 있다.
후송 역시 교역이 필요한 입장이다 보니 공식적인 외교는 없어도 잠상들의 밀거래는 반쯤 묵인하고 있다. 우리가 함부로 손댈 수 없는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 잉글랜드 상선들도 이 밀거래에 아주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을 정도다.
“후송 조정에서 가장 효과 좋은 뇌물이 우리 인삼입니다. 그러면 말 다 했지요.”
수출만 하는 게 아니다. 서해안 일대 면포공장들이 사용하는 면화 중 상당량이 주산에서 밀수된다. 그리고 공장에서 면포로 바뀌어 주변국으로 팔려나간다. 외수사가 수출하는 차도, 주산에서 싸게 사들여 포장만 새로 해서 보내기도 할 정도다. 곡물은 말할 것도 없다.
이처럼 조선에 곡식과 면화, 견사(絹絲)를 수출하는 건 후송 지주들에게는 절대 놓칠 수 없는 수입원이다. 그래서 근래 들어서는 밀수선이 백주에 공공연히 상해와 주산을 왕래할 정도다. 물론 주산진에 통행세를 내고 말이다.
지금 동아시아 상황은 이렇다. 조선이 따로 전쟁을 치르지 않으니, 현재 조선군에서 겪을 수 있는 최고의 육상전 전투 경험이 청나라 내에서 일어난 한족 반란군 토벌전인 셈이다. 장희재가 청나라에 다녀왔다면 적어도 책상물림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헌데 내 처남 민지상이 약간 당혹스러운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장 부장께 이 일을 맡기신 건 나름 주상께서 균형을 맞추려고 하신 의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장의 누이가 전하의 처이듯, 장 부장의 누이도 예왕 전하의 첩이거든요.”
“뭣? 장 부장의 누이라면…혹시 이름이 장옥정인가?”
나도 모르게 눈동자가 커졌다. 민지상이 내 얼굴을 보고 씩 웃었다.
“역시, 전하께서 알고 계실 줄 알았습니다. 바다 건너라고 하나 경국지색의 이름은 모르는 이가 없는 게 당연하지요.”
숙종의 후궁, 장희빈이 된 장옥정은 이쪽 세계…에서도 있었다. 그리고 이쪽 세계에서도 도성 전체를 술렁이게 할 정도의 미인이었다. 남매를 낳은 모친이 서반아계 무관 가문 출신 여식인데, 그 외모를 빼다 박았다고 한다.
다만 역사와는 달라서, 여색에 크게 관심이 없는 형황의 후궁이 되지는 않았다. 장옥정이 예왕의 첩이 되었다니, 정말 뜻밖이다.
“그 점잖은 예왕 전하도 장씨녀를 한번 보고는 혼이 나가셨지요. 경국지색을 보고 원하여 얻고자 하시는 걸 보면 예왕 전하께서도 역시 사내셨습니다.”
세간에서는 예왕을 가리켜서 ‘군자의 표상 같다’라고 할 정도란다. 그런 사람이 온갖 노력 끝에 장옥정을 자기 첩으로 들이는 모습에서 인간미를 보게 된 모양이다. 민지상이 말하길, 부러워하는 이들은 많지만 미워하는 이는 없다나.
“예왕 전하는 품행이 곧고 발라서 칭송하지 않는 이가 없는 분입니다. 그런 분이 첩 하나 더 들인다고 해서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옳은 말일세. 예왕 형님은 참 바른 분이지.”
예왕은 종친부에서건 노상에서건 내 험담을 하는 이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엄히 꾸짖으며 조정에서 내 옹호도 종종 한다고 들었다. 참 가소로운 일이지만 나도 예왕이 날 죽이려 할 거라는 물증 같은 게 있는 게 아니니 뭐라고 할 말도 없다. 그래서 얼른 화제를 돌렸다.
“후속하는 원군 순서는 어떻게 되는가?”
“장 부장 영감이 2천을 거느리고 올 거고, 그 뒤에 마무리로 1천이 더 올 겁니다. 순서가 좀 바뀔 수도 있긴 합니다.”
원정군에 포함된 병사 대부분은 미주에 정착하기를 희망하는 퇴역 대상자들이라고 했다. 나이는 많지만 그만큼 노련하고 실수를 범하지 않는다.
잔여 병력은 내년 봄까지는 다 도착할 거라고 했다. 그때까지 기본적인 작전을 세워두고 있다가 실행에 옮기면 되겠다. 곧바로 내 사랑채에 ? 동변관리사 관아가 없으니까 ? 휘하에 둔 장수들을 모으고 회의에 들어갔다.
본국에서 온 5천 대군, 여기에다 미주 현지에서 동원할 예정인 속오군 4천과 인디언 2천 명을 보탠다. 그리고 이 대군을 세 갈래로 나누고 각지의 요새에다 주둔군을 배치해 가면서 아파치가 출몰하는 경로를 틀어막는다.
며칠 동안 회의를 반복하며 열심히 계획을 세워 가는데 태호성에서 급보가 왔다. 나를 한 번 더 빡치게 만드는 흉보였다.
“뭐? 정령 조영균이 멋대로 휘하 군사를 끌고 나갔다가 적의 매복에 걸려 참패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