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982
3부 100화
– 11 –
조영균은 원군이 올 때까지 태호성에 틀어박혀서 눈발이나 세며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다. 더구나 그렇게 기다린다고 해서 공적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겨울까지 이렇게 죽치고 있다가 본국 놈들 뒤치다꺼리나 하라는 것 아니냐!”
그 자신이 본국에서 온 정규 무관 출신이다. 시골구석에 있는 토관(土官)들이 경관(京官)들에게 공을 빼앗기는 꼴을 한두 번 본 게 아니다.
“이대로 있으면, 우리는 노역꾼 신세가 되어 치중을 나르고 땅이나 파는 신세가 되리라.”
본국에서 원군이, 그것도 야인 토벌에 도가 튼 북방군이 2천이나 건너왔다. 그럼 경험이 부족한 속오군이 맡게 될 역할은 빤했다. 지리에 밝다는 명분을 내세워서 정찰, 경계, 노역 등등 태는 안 나고 고생만 많은 일거리만 죄다 떠맡게 되리라.
“그리고 적과 싸워 수급을 거두며 뽐내는 역할은 본국에서 온 놈들이 다 맡겠지.”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어쩔 수 없기는 뭐가 어쩔 수 없나!”
어차피 지금 성친왕에게는 남미주 군사들에게 명령을 내릴 권한이 없다. 조영균은 남미주 지사 최병선에게 직접 명령을 받고 있었다. 최병선은 태호성에 도착한 뒤에 어떻게 하라는 명령은 내리지 않았다.
“성친왕 전하께 칙서가 내려와 병권이라도 주어졌으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다. 고로 지금 내가 군사를 이끌고 나가도 문제가 될 건 없다.”
“나리, 지금 지선성에 온 원군이 그 칙서를 가지고 왔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 칙서가 여기 도착하기 전에 우리 공을 세워야 한단 말이다!”
조영균은 어떻게든 공을 세워 귀국할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 있었다. 그게 되려면 아직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동안에 수급 몇 개라도 거둬올 필요가 있었다.
“파이우투족을 족쳐서 길 안내를 시켜라! 겨울이 오기 전에 아파치를 치러 나간다!”
겨울이 되면 아파치도 휴식기에 들어간다. 아직은 가을이니 분명히 나돌아다니는 놈들이 있을 터였다. 조영균은 여차하면 협조를 거부했다는 명목으로 파이우트족을 쳐도 괜찮다는 심산으로 출동 명령을 내렸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 걸까….”
옛날 아주 먼 옛날에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유행했던 대중가요 가사 구절이 절로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버지 서재에 있는 레코드판에서 들었던 노래다.
사실, 내가 지난 7월에 하와이에 보낸 1차 보급선도 10월 초에 지선성에 돌아와 있기에 이들의 보고를 받아서 하와이 정책도 연구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런 비극이 생겨버렸으니 하와이에 관한 조치는 당분간 미뤄두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5백 기를 끌고 나갔다고?”
내가 데려간 미억족 1백은 내년 봄에 다시 오라고 마을로 돌려보냈다. 남은 속오군 1백은 김종건이 이끌고 태호성을 지키고 있다. 조영균은 자기가 데려온 5백 명만 끌고 나간 거다.
“예, 전하. 겨울이 닥치기 전에 아파치 수급 열 개 정도는 얻어오겠다면서 기세등등하게 싸움에 나섰사온데….”
죽인 적의 수급을 잘라 공적의 척도로 삼는 관습은 본국에서는 장조 시절에 폐지되었다. 잔혹한 점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전쟁 자체가 개인의 무용(武勇)이 문제가 아니라 대규모 집단전으로 완전히 탈바꿈한 영향이 컸다.
수백, 수천 단위 싸움이라면야 머리를 자를 여유도 있다. 하지만 만 단위 대군이 며칠씩 뒤엉켜 싸웠는데, 수급이나 거두고 있을 틈이 어디 있었겠는가? 그 뒤로 공적을 평가할 때 수급을 세는 제도는 완전히 사라졌다. 수사적인 표현, 또는 일부 관습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하지만 미주에서는 수급 거두기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전투가 벌어졌을 때 그 규모가 작고, 땅이 원체 넓다 보니 보고하러 갈 때 시간도 오래 걸린다. 그러다 보니 목을 잘라서 간단히 머리만 들고 오는 게 보통이다. 탈주한 죄인을 잡아 올 때처럼 말이다.
“그렇게 서두르다가 도리어 함정에 빠졌단 말이지.”
조영균은 파이우트족에게 통역을 맡을 안내인 외에 군량과 숙소도 제공하라고 고압적으로 요구했다. 게다가 일부 속오군이 부녀자 폭행이나 약탈 등 일탈행위를 저질렀는데도 잘못을 범한 군사들을 군율로 다스리지 않았다.
“그따위 짓을 했으니….”
보고를 듣고 혀를 차면서도 차마 ‘죽어도 싸지’라고 대놓고 말하진 못했다. 파이우트족이 조영균을 함정에 빠트려서 목을 자르고, 조영균이 지휘하던 부대원 5백 명 중에 3백 명이나 죽거나 실종된 건 절대로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될 적대행위였기 때문이다.
‘차라리 조영균 한 놈만 몰래 죽일 것이지….’
그랬으면 개인적인 범죄로 간주해서 ‘범인’을 인도받고 파이우트족 추장에게 사죄를 받는 정도로 사태를 마무리할 수 있다. 우리 쪽에서도 대민피해에 대해 보상하고 유감을 표하면 완벽하게 봉합된다. 하지만 우리 인명 피해가 3백 명이라고?
곧바로 무력으로 보복해야 한다. 지금 적당히 쓴맛을 보여주지 않으면, 그놈들이 대놓고 아파치 편에 붙을 수도 있다. 그러기 전에 태호성으로 출병한다.
“파이우투부터 토벌한다! 겨울이라고 해도 할 수 없다. 민 정령, 괜찮겠는가?”
지원군 지휘권이 내가 아니라 장희재에게 있는 점도 출전을 미룬 이유 중 하나다. 그러니 장희재가 아직 오지 않은 지금은 민지상에게 동의를 구해야 출병할 수 있다.
오늘은 음력으로 10월 23일, 양력으로는 벌써 11월 20일이다. 겨울이 되면서 고지대에는 이미 눈이 쌓이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군대를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물론입니다. 소관도 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 군사들은 북병입니다. 그까짓 눈 조금이 두려워 출정을 미룬다고 하면, 북도의 승냥이가 비웃을 겁니다.”
민지상도 지적했듯, 본국에서 온 원군은 허리까지 쌓이는 눈과 만주의 칼바람을 맞으면서 숲과 벌판을 누비던 북방 출신 병사들이다. 이까짓 미주 눈 정도야 장애물도 안 된다.
“겨울이라 유리한 점도 있지. 저들이 나다니지 않고 부락에 틀어박혀 있을 게 아닌가?”
“옳으신 말씀입니다.”
예로부터 야인 토벌은 언제나 겨울에 했었다. 장조 때 북방대전도 대부분 겨울에 결전을 치렀다. 아직 지원군 본대가 안 온 데다가, 진격로가 제한된 낯선 땅에서 대군을 움직이는 어려움 때문에 내년 봄이 올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 12 –
2천에 달하는 대군이 늘어선 모습은 지선성 주민들은 물론이고 인근에서 몰려온 인디언 남녀에게도 엄청난 구경거리였다. 여태 미주에 이만한 규모로 관군이 건너온 사례가 없다. 조선에 다녀온 경험이 있는 몇몇 사람 이외에 이런 장관을 본 인디언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입이 떡 벌어지는군요.”
철갑을 걸친 내 옆에서 말을 타고 있는 이종덕이 감개가 무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도성에 있을 때야 오군영이나 금군 군사들을 늘 보고 살았고, 폐하께서 강무를 하실 때 살곶이 벌판에서 보기도 하지만 미주에서는 저런 구경거리를 볼 일이 없으니 말입니다.”
“살수들이 왔으면 아마 더 위풍당당했을 거요.”
보병들은 7백 명은 조총수, 3백 명은 궁수다. 미주에서 인디언을 상대로 하는 싸움이라서 살수, 즉 장창병은 오지 않았다. 철제 투구와 흉갑을 착용하고서 15자(4.5m)짜리 장창으로 무장한 장창병들이 수백 명이나 늘어서 있었다면 실로 장관이었으리라.
하지만 조총수와 궁수들만으로도 그 위용은 충분했다. 병사들은 전립에다 꿩깃을 꽂았고 군관들은 공작 꼬리털과 화려한 붉은 술을 달았다. 옷은 푸른색으로 통일한 납의(누비옷)를 입었는데 군관들은 소매가 붉다. 무거워서 인기가 없는 철제 투구는 수송선에 실어 두었다.
군복 소매는 양복 수준으로 좁다. 옷고름은 완전히 없어졌고 단추를 사용하는데 병사들은 놋쇠, 군관들은 은으로 만든 단추를 달았다. 참장 이상 장군들은 금단추를 단다는데, 지금은 민지상이 가장 선임이라 금단추를 단 이는 없었다. 허리띠 띠쇠(버클) 재질도 단추와 같다.
신발과 허리띠, 탄입대 등 장구류는 모두 튼튼한 가죽제다. 허리에는 짧은 환도를 찼으며 등에는 활집에 든 활이나 총을 메었다. 총은 미주에서 보기 힘든 수석총이다.
“민 정령, 부싯돌은 충분히 가져왔겠지?”
나와 함께 말을 타고 병사들을 사열하던 민지상이 기운차게 답했다.
“염려 마시옵소서, 전하. 사수 1인당 100개씩 나눠줄 수 있을 만큼 넉넉히 가져왔습니다.”
수석총에 넣는 부싯돌은 20발 정도 쏘면 바꿔줘야 한다. 심지로 불을 붙이는 화승총보다 불리하다. 그러면서 불발률도 더 높다. 하지만 안전성과 휴대성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하니까 비싼 생산비와 유지비를 감수하고 수석총을 쓰는 거다.
“그건 그렇고, 용케 겨울옷을 챙겨왔군.”
“폐하의 엄명이 있었습니다. 현지에서 어떻게 필요해질지 모르니, 따뜻한 동복을 꼭 챙겨 가도록 하라고 명하셨지요.”
“감사한 일이로세.”
물론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지선성에 있는 각 상단의 창고를 털어 털가죽으로 된 조끼와 팔토시, 장갑을 재고가 있는 대로 긁어모아 사들였다. 그 물건들은 투구와 함께 배에 실려 있고, 수로로 대금강(새크라멘토강) 상류에 보낼 예정이다. 그쪽에서 보급한다.
“배를 빌리고 모피를 사느라 아직 관아도 없는 동변 감영에 빚만 쌓이는구먼.”
동변관리사로서 필요한 비용은 내가 알아서 조달해야 한다. 일단 자리가 잡힐 때까지는 총관부 재정에서 지원을 받고, 그 뒤에는 둔전이나 광산 운영, 동변 인디언들과의 교역이나 소금 판매 등으로 수익을 올릴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돈 쓸 곳부터 생겨버렸다.
“이 빚은 톡톡히 받아낼 걸세. 빌어먹을 토인 놈들.”
“그렇게 될 것이옵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보병을 지나 기병들이 늘어선 앞에 도착했다. 최정예인 오도리, 아니 강철군 1백 기는 허벅지까지 덮는 판금갑옷을 입었고 수석식 마상총 2자루와 환도로 무장했다. 주변을 둘러싼 구경꾼들이 이들을 보며 탄성을 올렸다. 씁쓸한 미소가 흘렀다.
“역시 위용을 드러내는 데는 번쩍이는 물건이 최고로군.”
창병대가 없는 게 새삼 유감스럽다. 하지만 이제 군복에서 갑옷이 사라질 시기가 됐다. 단병접전을 전담하는 살수는 이제 조선군 전군의 2할에 불과하고, 주변국 군대들도 총으로 무장한 비율이 최소 5할을 넘었다. 갑옷이 비실용적인 존재가 되어가는 거다.
오도리 옆에는 남은 기병 7백 기가 중대별로 늘어서 있다. 여기에서 2백 기는 왜인여진, 5백 기는 골응군이다. 왜인여진들은 예전부터 그랬듯이 각자 취향대로 잡다하게 무장했고, 갑옷도 제각각이다. 골응군은 통피갑 위에 철제 흉갑을 껴입고 활과 편곤, 환도를 갖췄다.
왜인여진 중에도 총으로 무장한 이들이 있었다. 오도리처럼 깔끔한 마상총이 아니라 그냥 기다란 보통 화승식 장총이다. 그걸 보니 문득 의문이 생겨 민지상을 돌아보았다.
“혹시 우리 총기병들이 마상에서 탄환을 잴 수 있는가?”
“물론입니다. 다만 달리면서는 어렵고, 잠시 말을 세워야 하긴 합니다만.”
기름종이로 된 탄포를 찢지 않은 채 총구에 밀어 넣고 꽂을대로 쑤시는 건 쉽다, 하지만 빈 화약접시에다 점화약을 붓는 게 어렵다고 했다. 역시, 말 위에서 자유롭게 장전까지 할 수 있는 완전한 마상총은 뇌관을 개발한 뒤에나 생산할 수 있겠구나.
참, 무종 때 나왔다가 화재 문제 때문에 죽관으로 대체된 종이 탄포는 수석총이 보급되어 화재 위험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면서 다시 나왔다. 근 150년 만에 부활한 셈이다.
“비호군이 없어서 아쉽네.”
보병 밀집대열을 돌파하거나 기병과 싸울 때 무척 유용한 비호군은 이번에 한 기도 오지 않았다. 내가 아쉬움을 표하자 민지상이 얼른 답했다.
“후속하는 본대에는 좀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1백 기나 2백 기 정도는 왔으면 좋겠군.”
인디언과의 전투에서야 비호군이 별 쓸모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호군은 조선에서 위용으로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병종이다. 전신을 가리는 판금갑옷에, 등 뒤에 독수리의 깃을 꽂은 날개를 달고 몸에는 호표피를 걸쳤다. 그런 기병이 무리를 지어 쇄도하면?
이는 전례를 통해 확인된 사실이다. 장조 때, 내게 충성맹세를 하러 바다를 건너온 5부족 대표들도 비호군을 보고서 눈이 휘둥그레졌었다. 돌진하는 비호군은 간단하게 적의 무릎을 꿇게 만들 수 있다.
“이제 포병입니다, 전하.”
“전장에 벼락을 내리는 존재들이지.”
포병 2백 명이 보유한 장비는 말이 끄는 야포 12문에 탄약 운반용 수레 20량이다. 포는 내가 옛날에 만들었던 무종야포를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포 자체는 옛날 물건 그대로지만, 포를 얹는 포가는 상당히 개량되어 가벼우면서도 견고하고 발사 각도도 조절할 수 있다.
포탄은 아직 옛날과 큰 차이가 없다. 철환, 척탄(작렬탄), 산탄 세 가지다. 구경이 그다지 크지 않다 보니 포탄 성능 개량에 한계가 있다고 했다.
“그래도 훌륭하군. 설사 아파치가 우리보다 몇 배나 많은 병력으로 밀려온다 해도, 이만한 준비를 했으니 우리가 너끈히 이길 수 있을 걸세.”
지금 파이우트족 전체 인구가 몇 명인지는 모르겠지만, 전사 2천 명이 집결하지 못할 건 분명하다. 일단 기병으로 치고 들어가서 기습하고, 보병과 포병은 보급로 확보에 투입한다. 군량을 비롯한 필수물자는 가는 도중에 있는 각 고을에서 조달한다.
지선성에 도착하고서 18일, 그동안 주둔지는 몇 번 둘러봤다. 하지만 전군에 전투태세를 완비하게 하고 사열하는 건 나도 처음이다. 내년 봄에 정식 출전할 때나 할 생각이던 일을 조영균 때문에 이렇게 당겨서 하게 되고 말았다.
또 출정해야겠다고 하자 실망하던 상희와 올렝카의 얼굴도 떠오른다. 그나마 상희는 내가 전장에 가는 일을 많이 겪어서 크게 걱정하진 않았지만, 올렝카는 빈 해방 때를 생각했는지 내가 전쟁에서 죽거나 다칠까 봐 무척이나 불안해했다. 달래고 안심시키느라 애먹었다.
직접 돌아다니며 살피기를 마치고 임시로 만든 사열대 위에 오르니, 예전에 장조 때 수만 병력을 눈앞에 두고 하던 출정식 생각이 났다. 약간 아쉬운 생각이 들었지만, 얼른 고개를 흔들어 유혹을 떨쳐냈다. 이번 생에는 편하게 살자고 마음먹지 않았는가.
“폐하의 명을 받들어 폐하의 백성을 지키기 위하여 광대한 바다를 건너온 그대들에게 큰 감사를 표하며, 앞으로 다가올 싸움을 잘 치러 주기를 바라노라.”
목숨을 걸고 출정하는 군사들에게 격려 연설은 필수다. 아무리 상대방보다 우리가 전력이 강하다고 해도 우리 편에서도 전사자가 얼마는 나오게 마련이고, 과거 경험으로 미루어보면 동상자도 상당할 게 분명하다. 북병 대다수가 동상 따위는 부상으로 치지도 않을 뿐이지.
“무도한 도적들을 무찌르고 나면 너희에게도 충분한 포상이 있으리라. 폐하께서 약속하신 토지와 명예가 그대들에게 주어질 것이고, 그대들의 이름은 청사(靑史)에 남을 것이다.”
이 병사들은 풍요로운 삶을 살고 싶어서 자원해서 바다를 건너왔다. 이들에게는 동변에서 개척할 수 있는 토지를 골라서 줄 예정이다. 만약 땅이 부족하면 후방인 남북 미주에 있는 토지를 줄 수도 있다. 만약 받는 자들이 원한다면 토지가 아니라 현금을 줄 수도 있고.
토벌이 끝나면 가족도 데려오게 할 거고, 가족이 없는 자는 처를 얻는 일도 도와줄 거다. 그러니 사실상 군호(軍戶) 5천 호를 동변에 이주시키는 셈이다.
이 군사들이 동변에서 제대로 된 무력집단으로 기능하면, 말 그대로 관군이 된다. 다만 이 미주 최강군의 지휘권은 내가 아니고 장희재에게 있다는 게 유감이다만.
“아파치 토벌이 끝나면 폐하께서 조치가 있으실 겁니다. 본래 변방 관리사에게는 군권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연설을 마치고 내려오자 성시균이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한 말을 건넸다. 흑룡강 이북 영토를 관리하는 북변 관리사도 휘하에 병사 6천 명을 두고 있다. 정규군은 거의 없고 죄다 북변 토인들을 동원해서 편성한 속오군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렇기는 하지. 하지만 북변 관리사는 친왕이 아니잖은가.”
문제는 내가 종친이라는 거다. 과연 조정에서 종친에게 군권을 주자고 할까?
뭐, 나중 일이다. 지금은 닥친 일부터 처리해야지.
“출진이다!”
군사들이 백성들의 환송을 받으며 항구를 향했다. 상희가 오라비인 민지상의 손을 잡으며 환송하는 모습을 보니, 새삼 나도 형제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종 때, 편하게 같이 사냥도 하고 놀이도 하던 진성대군과 임숭재 생각이 난다. 그땐 참 즐거웠는데.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아무래도 형황은 골골거리면서도 안 죽고 장수할 것 같은데, 예왕도 체념하고 그냥 형제로 지내 주지 않으려나? 그동안 직접적으로 내가 예왕한테 해를 당한 것도 없으니, 지금이라도 예왕이 포기하면 같이 인생을 즐기면서 살 수 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