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99
1부 09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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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1일, 남대문 바깥 한강변에 기치가 높이 올랐다. 온갖 색깔과 문양으로 채워진 깃발의 숲 속에 규정대로 갑주를 착용한 내금위 및 겸사복 소속 무사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모두 허리에 활을 차고 창을 들었으며, 옆에 끌고 있는 말안장에는 조총집이 얹혀 있었다.
포수군 소속 백정들은 각자 집에서 가져온 가죽옷을 걸치고 말과 함께 서 있었다. 백정이라 차별하느라 갑옷을 안 준 게 아니고, 지갑을 지급받고도 다들 거부했다. 평소 갑옷을 안 입던 이들이니 나름 신경 써서 가벼운 걸로 지급했는데, 그것도 싫다면 어쩌라고?
그밖에 도성 내의 서얼들 2백 명이 추가로 편성되어 경군 병력도 1천 명을 채웠다. 이들도 모두 말을 가져왔고, 무과를 준비하던 이들도 많아 상당한 전력을 발휘하리라 기대가 되었다. 물론 개인적인 무예가 뛰어나다고 해서 훌륭한 군인이 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대에게 이 보검을 내리니, 전력을 다해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라. 자고로 전장에 나선 장수는 제왕의 명이라도 거역할 수 있다고 하였다. 원정을 마치기까지, 거역하는 자가 있으면 서슴없이 이 검으로 목을 베도록 하라.”
사실 처음에는 보검이 아니라 왕권을 상징하는 도끼인 부월(斧鉞)을 내리려고 했다. 도끼가 왠지 뽀대가 나기도 하고, 나름 고대부터 계속된 옛스러운 관습이 멋지기도 해서 말이다. 임금이 출정하는 장수에게 도끼를 내리는 모습, 솔직히 간지나지 않나?
헌데 문제는 시대의 유행이었다. 고려 때 윤관이 여진정벌을 나가면서 부월을 받은 이래 출정하는 장수가 부월을 받은 사례가 없고, 지금은 그저 왕권을 상징하는 관용구로서 사용될 뿐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출정하는 장수들이 대개 지휘권의 상징으로 보검을 받았다.
“삼가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삼군 도체찰사로 임명받은 우의정 이극균이 두 손을 들어 내가 내리는 보검을 받았다. 부월은 내 로망일 뿐이니 그냥 보검으로 타협을 보았다. 드디어 제4차 대마도 원정을 나가는데 까짓 지휘권의 상징이 부월이면 어떻고 보검이면 또 어떠냐.
보검을 받은 이극균이 충성을 다짐하는 예를 올리자 좌우에서 나팔이 울리고 깃발이 좌우로 펄럭였다. 도열해 있던 장졸들이 일제히 두 팔을 들고 함성을 질렀다.
그 우렁찬 함성 소리를 듣자 드디어 실감이 났다. 야, 이제야 가는구나. 여진 토벌 원정과는 급이 다른 ‘전쟁’을 드디어 시작하는구나.
이제야 그 긴 준비 과정이 다 끝났다고 생각하자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아직도 전쟁을 어떻게 끝낼까 하는 문제가 남기는 했지만, 그거야 계획대로 순조롭게 정벌이 마무리된 후에 고민할 이야기다. 물론 가정에 따른 준비는 해 둬야겠지만.
“전하, 이제까지 몇 번 논의는 있었사오나 아직 확정하지 않은 문제를 결정해야 하옵니다.”
투입할 병력 규모를 점검하고, 염출할 수 있는 전비를 확인하고, 작전계획을 확실히 정했다. 그동안 암암리에 물망에 오른 인사들로 지휘부 인선까지 마치고 나자 군사적인 문제는 대부분 마무리가 지어졌다. 남은 건 정치적인 문제, 즉 외부에 전쟁을 설명하고 마무리하는 문제였다.
“이번 출병에 대해서 이제는 명나라에 통보를 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맞는 말이다. 요즘 왜적들이 명나라를 넘보는 일이 별로 없어서 저들이 크게 관심을 가지지는 않겠으나, 우리가 염초를 받아온 명분이 왜적 토벌이 아니었느냐. 왜적을 치겠다고 염초까지 대량으로 받아와서 용처를 제대로 밝히지 않으면 면이 서지 않을 것이다.”
지금이야 조총 조공도 있고 해서 염초 수입에 제약이 없지만, 언제 명나라 조정이 또 방침을 바꿔서 염초 수출을 제한할지 알 수 없다. 그러니 우리 총구가 저들을 향하는 게 아니라고 확실히 알려줄 필요가 있다.
“예전 같았으면 왜국 조정에도 통보를 했겠으나, 할 수 없으니 유감이옵니다.”
영의정 한치형이 조심스레 아쉬움을 표했다. 하긴 그렇다. 명분이야 어쨌건 일단은 명백한 일본 영토에 대한 침공이니, 당사국인 일본 정부에 알리는 게 정상이다. 선전포고든, 작전에 대한 양해든 말이다.
“저들이 내전을 시작한지 벌써 20여 년이 흘렀다. 국왕도 제대로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니 어찌하겠느냐. 저들의 수도까지 사신이 안전하게 갈 길도 없지 않느냐.”
일본 천황가는 실권이고 뭐고 다 잃은 지 옛날이라 그냥 인지도가 없다. 지금 조선에서는 무로마치 막부를 이끄는 쇼군(장군)이 일본을 다스리는 왕으로 인식되고 있다. 3대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천황을 제치고 명나라로부터 일본국왕으로 책봉을 받은 탓이다.
“왜국 역시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은 국가이니 법도를 지키자면 우리가 무단으로 전쟁을 시작할 수는 없다. 허나 출병을 통보하고 양해를 구하려 한들 보낼 대상이 없지 않으냐? 허니 이대로 치고, 저들이 항의하면 그때 가서 무마하도록 하자. 일단은 명나라에만 통보한다.”
“예, 전하.”
지금 내가 보이는 태도는 현대사회로 따지자면 유엔 가입국들끼리 선전포고 없이 전쟁을 시작한 사례와 비슷하지 않을까? 전통적으로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책봉을 받았다 함은 중국의 주도권을 인정하고 그 ‘지도’를 받겠다는 의미가 되니까 말이다.
실제로 과거 사례를 보면 백제와 신라는 중국을 이용해서 고구려를 억제하려고 책봉 관계를 맺고 중국 측에 고구려를 압박해달라고 여러 차례 요구했었다. 발해와 신라도 당나라에 대한 발언권을 확보하려고 충성경쟁 비슷한 다툼을 했다. 고려와 심양왕도 그렇게 조정을 받았다.
그 뒤로는 조선이 망할 때까지 딱히 중국으로부터 조정이란 걸 받을 일이 없었다. 요동, 만주까지 모두 중국이 직접 다스리는 영토가 되고 일본이 완전히 대륙과 따로 노는 길을 가면서 중국이 나서서 질서를 잡아주어야 할 인접국이라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조선시대에 만주에 중국의 주도권을 인정하는 ‘만주국’ 같은 게 있었고, 일본이 중국의 주도권을 인정하고 중화문화권에 적극적으로 편입했다면 재미있었겠지. 중국 정부가 만-조-일 사이에 벌어지는 수많은 분쟁을 조정하느라 미치도록 바빴을 테니까.
“곧 대국으로 출발할 사신 편으로 총을 보내면서 그 김에 출병 통보도 하도록 하라. 이미 기해동정으로 전례가 있으니, 대국에서도 놀라워하지는 않으리라.”
놀라지만 않을까. 우리 군사력이 요동이 아니라 일본을 향한다고 하면 분명히 기뻐할 거다. 아마도 이 틈을 타서 요동 쪽에 영향력을 더 확대하려고 들지도 모르지. 몽골의 다얀 칸과 치르는 전쟁만 어서 끝낸다면.
“전하, 정벌군에게 어느 정도까지 목표를 부여하실 생각이시옵니까?”
“그야 대마도주를 비롯한 왜인들이 도리를 알고 만행을 멈추게 될 때까지가 아니겠느냐.”
이 원정을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가. 전쟁을 시작하는 근본적인 목적과 얽혀 있는 문제다.
기해동정 때처럼, 대마도주에게 ‘왜구를 후원하지 않고 히젠으로부터 오는 무역선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약속만 받고 군사를 물릴 것인가?
그 약속을 이행하게 만들기 위한 보다 강제적인 조치를 할 것인가?
그 이상, 신하들에게 말하면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준을 제시할 것인가?
잠시 갈등했지만 답은 분명했다. 지금 시점에서 조선 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 조선 조정이 수행할 수 있는 수준으로 목표를 제시해야 한다.
“대마도주가 앞으로 허튼 수작을 부리지 못하도록, 확실한 볼모를 잡아서 돌아온다. 또한 대마도에 그동안 면해 주었던 연공을 이제부터 매년 바치도록 하고, 필요시에는 군사도 내서 돕게 한다. 또한 추후에는 도주 자리를 승계할 때도 필히 승인을 받게 하겠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강화된 조건이다. 기존에 대마도는 명목상으로만 조선의 신하라고 했을 뿐, 실제로 조선 국왕을 군주로 두었다고 할 만한 행위는 하나도 하지 않았다. 지금 내세운 조건만 충족된다고 해도 대마도가 명백한 조선의 속령이 된다고 볼 수 있을 정도이다.
“예, 전하.”
신하들도 수긍했다. 세종대왕 때 맺은 약조 수준으로는 왜구 문제가 근절되지 않음을 다들 알고 있는 까닭이다. 나도 이 정도로 만족해야겠다. 추후에 여건이 더 성숙하면 그 이상으로 진출하도록 하자.
지나간 작전회의들을 회상하면서, 도열해서 함성을 지르는 장졸들을 보고 있으려니 가슴 한쪽이 아련하게 떨려 왔다. 이들은 이제 부산까지 행군해 가서 동래에 집결한 원정군 주력부대와 합류한다. 목표는 5월 20일을 전후해서, 아무리 늦어도 삭망일 전에 바다를 건너는 거다.
기해동정은 6월 말에 원정을 실행해서 13일간 전투를 벌였다. 우리는 그보다 먼저 가니까, 적어도 6월부터 7월까지 두 달 정도는 원정을 지속할 수 있다.
아직 함성을 지르는 군사들을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뭔가 다른 일을 하나 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현대였다면 마이크를 잡고 연설을 했겠지만, 그런 게 없으니 직접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단상에서 내려서자 옆에 서 있던 신하들이 기겁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네 얼굴이 기억에 남는다. 왜적을 쓰러트려 공훈을 세우고 돌아오너라.”
겸사복은 전원, 내금위 군사들도 태반은 내가 얼굴을 안다. 늘 궁궐 내외에서 나를 경호하는 늘 보는 얼굴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전장으로 보내는 내 기분도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유능한 무사들인 건 아니 공을 세우기를 바라지만, 아는 이가 죽고 다치기는 바라지 않았다.
“전하의 신하이자 이 나라의 무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하고 오겠사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내가 어깨를 두드리고 손을 어루만져주자 무사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감격했다. 내가 이런 식으로 선동당하는 건 싫지만 시켜먹는 입장에선 이렇게 값싼 방법이 없다. 국가에 대한, 군주에 대한 충성심이란 위에서 보면 그런 거다.
물론 내가 이들을 그저 값싼 바둑돌로 여긴다는 건 아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들은 모두 내가 아는 이들이다. 내가 이들의 손을 잡아 주는 건 지금 당장 해줄 수 있는 게 이 정도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코 이들에게 값싼 충성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호오, 다지 네가 여기 있었구나.”
“안녕하셨습니까.”
포수군 대열 쪽으로 들어서자 일전에 열었던 백정 사냥대회에서 두각을 드러낸 여자 백정 스나이퍼(길다! 백정 여자니까 백녀로 부를까?)가 말고삐를 쥐고 한쪽에 서 있었다. 동래까지 가는 행군 일정을 줄이려고 포수군 보병들에게 말을 빌려주기로 했는데, 얘도 받은 모양이다.
“네가 말도 탈 줄 아느냐?”
“저희 동리 여자들이 다들 타는 만큼은 탑니다.”
“그날 대회에서는 걸어 다니지 않았느냐?”
“산속에서 짐승을 쫓을 때는 당연히 두 발로 걷습니다. 평지에서 하는 사냥이라면 말을 타고도 합니다.”
내가 또 바보 같은 질문을 한 셈이군. 그나저나 얘 말 참 짧구나. 존칭이란 걸 아예 쓰지를 않네.
사냥터에 나온 게 아니라서 그렇겠지만, 어쨌든 오늘 다지는 얼굴에 기름도 바르지 않았고 옷도 그날 입었던 것보다 말끔한 가죽옷으로 입고 나왔다. 털이 그대로 붙은 사슴가죽으로 만든 저고리인데 꽤 튼튼해 보였다. 바지와 신발은 같은 가죽을 뒤집어 만든 듯 했다.
“총은 솜씨가 많이 늘었느냐?”
“쇠뇌를 쏠 때에 비하면 많이 부족합니다. 오십 보 정도 밖에서 뛰어가는 노루 머리는 맞힐 수 있는데 눈은 아직 맞히지 못합니다.”
사냥 때는 전쟁이 끝나고 총을 가르칠 계획이었지만 그 직후에 생각이 바뀌었다. 백정들이 총을 쏠 줄 알면 더 뛰어난 전사가 될 텐데 그걸 굳이 미룰 필요가 있나? 바로 포수군 전원에게 조총을 지급했다. 그 정도 비축분은 있었으니까 말이다.
헌데 다지가 하는 말을 들으니 나도 모르게 입이 딱 벌어졌다. 겨우 20일 남짓 연습해 놓고 60m 떨어진 노루 머리를 맞힌다고? 그것도 뛰어가는 걸? 그럼 사람이라면 얼마나 먼 곳에서 맞힌다는 거야?
“이백 보 떨어진 거리에서 사람 몸통을 맞힐 수 있겠느냐?”
“그 정도는 어렵지 않습니다.”
무심한 대답이 돌아왔다. 얘 정말 타고난 스나이퍼인가 보다. 좋다, 나가서 공만 세워 와라. 다지 너뿐만 아니라 포수군 전원 신분을 양인으로 올리고 개중에 뛰어난 재주를 부린 자들은 벼슬도 내릴 테니까 말이다.
이번 전쟁이 과연 동북아시아를 어떻게 뒤흔들기 시작할지 기대가 된다. 새삼 생각하는 바인데, 내가 이제까지 한 일 정도는 모두 조선이라는 한 나라를 약간 바꾸는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전쟁은 그 이상으로 세계를 바꿔 놓게 되리라.
자, 이제 이 일은 내 손을 떠났으니 조용히 기다려 보자. 괜히 김칫국부터 마시지는 말자. 그럴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혹시 원정군이 실패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