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997
3부 115화
– 8 –
내 외손자 요토가 죽고 청 조정이 남정을 포기한 지도 어느덧 30년이 넘었다. 물론 그게 청나라가 전쟁을 포기하고 완전히 문약(文弱)으로 빠져들었다는 뜻은 아니다. 서쪽과 남쪽 국경에서 분쟁이 계속되는 한 그럴 여유는 없다.
“그러고 보니 청나라에서는 최근에 황제가 바뀌지 않았소? 조보에서 본 듯한데.”
한참 사무를 처리하는 중에 청나라 상황이 화제로 나왔다. 내가 질문을 꺼내자 예부 부장 안형운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예, 지난 4월에 선제 나락혼이 신병으로 죽자 태자 파사합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습니다. 파사합은 무신년(1668)에 태어나 올해 스물여덟입니다.”
새로 즉위한 6대 청나라 황제 파사합(巴思哈, 바스하)은 요토의 증손자다. 요토의 장남인 낙명(落明)은 8년 동안 재위한 후 사망했고, 다시 그 4자인 나락혼(羅洛渾)이 23년 동안 재위한 뒤 죽자 파사합이 즉위했다. 항렬을 따지면 파사합은 성친왕의 9촌 조카가 된다.
참고로 청과 후금은 모두 누르하치를 초대 황제이자 대칸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다이샨과 홍타이지는 실질적으로 창업군주지만 형식상으로는 2대 군주다.
요토는 화북을 쥐어짜서 4차례나 남정을 시도했으나 매번 실패했다. 여기서 교훈을 얻은 낙명과 나락혼은 무리한 남정 대신 체제를 정비, 국력을 비축하는 쪽으로 국정을 이끌었다. 요토와 달리 반항하지 않는 한족 농민들을 대량으로 학살하거나 추방하지도 않았다.
향촌을 지배하고 지방 행정을 담당하는 신사층에 대한 대우도 좋아졌다. 이들이 반발하지 않고 따르도록 과거를 통해 권력에 접근할 기회도 주었다. 물론 세금은 여전히 높았고 민족 차별도 여전했다. 하지만 그 과실을 나눌 한패의 수를 늘린 거다.
이런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자 국내 사정이 안정되었다. 반란이 일어나는 빈도도 줄었다. 조선에 청병해야 할 정도의 대규모 반란은 장희재가 산동으로 출정했던 신유년(1681) 이후 일어나지 않았다.
낙명과 나락혼은 외부적으로 안정된 기반을 쌓아올리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낙명은 육촌인 후금국 대칸 석새 ? 호거의 차자다 ? 와 혼인 동맹을 체결, 서로의 딸을 태자비로 들였다. 서로 등을 노리지 않겠다는 약속의 상징인 셈이다.
막 즉위한 젊은 황제는 내부적으로 안정된 나라와 충분히 휴식을 취한 충성스러운 군대를 물려받았다. 등을 맞댄 후금 대칸 와극달은 파사합의 고모부이자 외삼촌이다. 배후를 찔릴 걱정은 전혀 할 필요 없다고 해도 좋다.
청나라도 흉년이 닥쳤다. 후금은 더하다. 과연 새 청나라 황제는 어떤 선택을 할까.
“안 부장, 그대는 최근까지 본국에 있었으니 청나라 사정을 잘 알겠지. 어떻소? 새 황제가 선황의 방침을 계속 따를 것 같소?”
“그다지…확신할 수 없습니다. 주상께서도 태자 시절 입조한 파사합을 친견하신 뒤에 ‘그 증조부인 청태종을 그대로 빼닮았다’라고 평하신 과거가 있는데, 지금 같은 상황에서 아무 일도 벌이지 않을 자는 아닌 듯하옵니다.”
“역시 그러한가.”
중원을 일통하지 못하고 전쟁을 계속한 덕분인지, 청나라 황실에는 아직 북방인으로서의 기질이 살아있다. 필요한 것이 생겼는데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를 얻지 못할 때, 북방인들이 택할 방책은 하나뿐이다.
“30년 만에 청군이 회수를 건너겠구나.”
어쩌면 후금군도 합세할지도 모르겠다. 후금도 냉해로 된서리를 맞은 건 마찬가지니까. 철광이나 탄광이야 딱히 직접적인 피해가 없겠지만, 농사는 망쳤을 거다. 가축도 떼죽음을 당했을 게 뻔하다.
형황의 성향을 보면 우리도 거기 한몫 끼겠다고 하지는 않을 것 같다. 상식적으로 봐서, 후송에서 약탈할 수 있는 양곡보다 출병 비용이 더 많이 들 게 뻔하지 않은가. 후송 놈들이 순순히 쌀을 내줄지도 알 수 없고 말이다. 나라면 적에게 넘겨주느니 다 태워버릴 거다.
다만 이건 내 추측일 뿐이다. 과연 내 5대손인 파사합이 어떤 결정을 내렸을지 모르겠다. 한 1년 지나면 결과를 알 수 있겠지.
– 9 –
24척에 이르는 선단이 일제히 돛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나가는 배 숫자가 24척인 건, 심사숙고 끝에 1척은 선원 훈련용으로 남겨두기로 했기 때문이다.
동현이 맨 앞에서 선두로 나서고, 그 뒤로 다른 배들이 무리를 지어 따랐다. 동현에 탄 안용복이 전체 함대 지휘를 맡았기에, 동현에는 장자기(長字旗)가 휘날리고 있었다.
장자기는 민간 선단에서 대장선을 나타내는 표시다. 수군 함대는 당연히 대장선에 수자기(帥字旗)를 달고 다닌다.
지선성 북쪽 끝에 서서 보고 있으려니 동쪽, 오른쪽에 있는 지선만에서 머무르던 배들이 차례로 금문(金門)을 지나 넓은 서쪽 바다로 나갔다. 수군 함대가 아니라 상선단이다 보니 질서정연한 대열을 짓지는 않았지만, 위용은 대단했다.
“개구리가 뛰는 모습이나 보며 정겨워해야 할 이날에, 기근을 걱정하며 떠나가는 배들을 배웅해야 한다니….”
오늘은 경칩이다. 의도한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오늘 본국으로 가는 선단을 떠나보내게 되었다. 이거 참, 작년에는 음력 2월 1일이 아니라 1월 21일이 경칩이었는데.
양력으로는 1696년 3월 4일 일요일이다. 이제 겨울도 지났고, 바다를 건너기에는 적절한 시기다. 지금 출발하면 양력 7월경에 본국에 도착할 텐데, 바로 춘궁기가 딱 최고조에 달할 시점이다.
과연 올해 봄농사는 수확이 어떨까? 사실 가을 수확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상세히 파악이 안 되고 있다. 겨울 북태평양은 도저히 항해할만한 바다가 아닌 고로, 아직 본국에서 배가 오지 않았다.
평년이라면 본국과 북도에서 거두는 수확은 약 8천만 석. 가을에 5천만, 봄에 3천만 석을 거둔다. 하지만 요즘은 가뭄으로 수확이 줄어드는 해가 많고, 그 부족분은 적절히 수입해서 충당하고 있다. 그나마 작년, 아니 이제 재작년에 풍년이 들어 좀 쌓아뒀다지만, 과연….
지금 저 선단이 싣고 가는 짐은 곡식 20만 석, 소금 1만 석, 기름 10만 근이다. 굶주림에 지친 사람들에게는 탄수화물 못지않게 지방과 염분도 필요한 법이니, 소금과 기름을 넉넉히 보낼 필요는 충분히 있다.
“도움이 되어야 할 텐데.”
내 옆에 서서 함께 선단이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던 상희가 자그마하게 속삭였다. 상희는 기근 소식을 듣자 바로 우리 살림 규모부터 줄이게 했다. 원남이로 각성해 배고프게 살았던 첫 번째 생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면서 말이다.
사실 돈을 관리하고 살림을 직접 돌보는 건 집사인 박종선 몫이다. 하지만 상희는 능숙한 태도로 나이가 자기보다 3배 가까이 많은 ? 명목상으로 ? 박종선을 능수능란하게 휘둘렀고, 결국 생활비를 줄여서 만든 돈 3천 냥을 내게 내놓게 했다.
“동변관리사 이름으로 보내는 물자가 얼마나 된다고 했지?”
“벼 2만 석, 소금 4천 석, 기름 3만 근. 마련하는데 5만 냥쯤 들었네.”
관곡을 싣고 가기만 하면 한 푼도 안 들여도 된다. 내가 그러겠다고만 하면 총관부에서는 내 배를 관곡으로 꽉 채워줬을 거다. 하지만 관곡은 다른 배로 돌렸다. 그리고 내 배들에는 돈 주고 산 곡물만 실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관곡이 무한정한 게 아니니까. 관곡 재고가 떨어지면 다음 구휼곡은 더 비싸진 가격으로 시중에서 사들여야 한다. 그런 이치를 뻔히 알면서 관곡을 덜어내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정신없는 총관부에 조금이라도 부담을 덜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뭐, 소금은 그나마 돈이 적게 들었다. 미주 시장에서 팔겠다고 대염호에서 가져온 소금을 바로 배에 실었으니 말이다. 운반비가 좀 들긴 했지만, 원가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호수 기슭에서 그냥 긁어오면 되니까.
“많이 썼네. 잘했어. 쓰라고 있는 돈이잖아.”
상희도 재물에는 별 집착이 없다. 지난번에는 진안군에게 물려줄 재산을 만드느라 사업에 좀 정신을 쏟았었지만, 이번 생에는 친정이 워낙 든든하니 말이다.
여차하면 친정인 민씨 집안에서 외손자 둘이나 셋 정도는 돌봐줄 것이니, 굳이 내가 돈을 많이 모아야 한다고 다그치거나 하지 않았다. 다그치기는커녕 이번 사태를 맞아 구호금으로 쓰라고 자기 패물을 몽땅 내놓았을 정도다.
적어도 은 만 냥 어치는 되는 상희의 패물도 지금 동현을 타고 지금 본국으로 가고 있다. 상희 이름으로 선혜청에 기부될 거고, 선혜청에서 구호곡을 마련하는 데 쓰게 될 거다. 그 모습을 보고 올렝카도 자기 패물을 내놓으려고 하기에 괜찮으니 넣어두라고 말렸다.
“거기서 반은 부모님이 주신 거고 반은 네가 준 건데 뭘. 난 이 반지 하나만 있으면 돼.”
상희는 어딜 가건 내가 파리에서 사다 준 다이아몬드 반지를 빼놓지 않았다. 그걸 모방한 유행이 퍼져서 미주에서 좀 산다는 여편네치고서 반짝이는 구슬이 박힌 유럽식 반지 하나쯤 안 낀 사람이 없다. 본래 조선에서는 통으로 된 금이나 은, 옥가락지가 대세였는데 말이다.
“여기 계셨습니까, 전하.”
산달이 다 되어가서 몸이 무거운 상희를 마차에 태워 먼저 집에 보냈다. 그리고 수평선 너머로 멀어져가는 배들을 보고 있는데 이종덕이 다가와서 내게 인사를 올렸다. 이종덕은 미주 대총관으로서 부둣가에서 선단을 직접 전송하고 온 참이었다.
“큰 사태를 맞아 대총관께서 고생이 많으셨소.”
“아이고, 아닙니다. 전하께서 살펴 주셨으니 이만큼이라도 한 거지요.”
이종덕은 내가 자기 권한을 분명히 침해하고 있는데도 별 반발을 보이지 않았다. 성격이 본래 온화하기도 하지만 미주에 부임한 지 벌써 6년째가 되다 보니 지친 탓도 있었고, 내가 친왕이라는 권위로 일을 해나가기 더 유리한 점도 있어서였다.
“야인들이나 서반아인들에게는 소관의 이름보다 전하의 이름이 더 잘 통하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하오만.”
조선 백성들에게야 실권 있는 수령이 명목상의 지위밖에 없는 친왕보다 더 권위가 있다. 하지만 인디언들이 보기에는 ‘위대한 아버지의 아들’ 쪽이 ‘위대한 아버지의 부하’보다 훨씬 대단하게 느껴지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물론 인디언들에게 본국에 보낼 구호식량을 받아낼 수는 없었다. 위대한 아버지의 나라가 이제껏 지켜온 체면과 위신이 있을뿐더러, 인디언들이 잉여식량을 대량으로 비축해 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식량을 주면 인디언들이 굶는다.
대신 우리가 받은 건 노동력이었다. 내 부탁을 받은 인디언 부족들은 기꺼이 각지에 있는 창고에서 곡식과 기름을 지선성으로 나르는 일을 도왔다. 배를 만들 목재를 얻느라 벌목을 하고 역청(타르)을 채취했으며, 운반하는 일도 맡았다.
선박 건조에 본국에서는 석탄에서 뽑은 콜타르를 쓰지만, 미주에서는 석유 타르를 쓴다. 채취 지역은 한참 남쪽, 로스앤젤레스 근처 어디다. 그 지역에 ‘추마시’라는 부족이 사는데, 올로내족의 지배를 받고 있다. 역청은 이들이 상전인 올로내족에게 바치는 공물이다.
스페인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왕자가 실권을 쥐고 정치적 활동을 하는 게 당연한 유럽식 정치에 익숙한 스페인인들은 이종덕보다는 나를 협상 상대로 더 선호했다. 내가 미주에 올 때 멕시코시티 ? 지금은 시우다드 데 멕시코라고 해야 하지만 ? 를 지나오면서 부왕인 겔베 백작과 개인적인 친분을 쌓은 덕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중요한 건 외부에서 받는 도움이 아니라 미주 스스로 일을 해내는 거고, 그 책임은 내가 아니라 이 총관께 있소이다. 본왕이 그동안 주제넘게 그대가 하는 일에 손을 댄 데 대해서 부디 용서해주시기를 비오.”
“인제 와서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께서 끌고 가 주시지 않았으면, 소관은 지금까지 갈팡질팡하며 고민만 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과감하게 결단을 내려 기근에 대처할 수 있었던 게 다 전하의 덕입니다.”
‘바로 그게 문제란 말이오.’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사람을 두고 차마 대놓고 그렇게 말하진 못했다. 하지만 이 사태를 처리하면서 내가 저지른 월권행위가 과연 어떤 후폭풍을 불러올지 모르겠다. 의도는 좋았다 해서 그냥 넘어가 줄지, 뭔가 제재가 있을지….
‘형황이 매기는 내 점수가 깎이면 예왕 놈이 좋아하겠지.’
그놈은 기근이 터진 본국에서 뭐 하고 있으려나? 하루 두 끼 죽만 먹고, 거친 베옷 입고, 곡간을 털어 구호곡을 내고, 기우제라도 지내려나?
“이미 지나간 일을 가지고 내게 사의를 표하는 일은 그만두시오, 이 총관. 그보다는 올해 농사를 준비해야 하지 않겠소?”
“올해 농사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아무래도 이번에 본국에 닥친 기근이 겨우 한 해로 끝날 것 같지 않으니, 올해는 갈 수 있는 땅이라면 손 닿는 대로 모두 갈아서 씨앗을 뿌려야 할 듯하오. 폐하께서 그대를 보내신 뜻이 거기 있지 않겠소?”
남미주에서 곡물 수확이 250만 석인 건 그 이상은 필요 없기 때문이었다. 수요만 있다면 그 2배는 생산할 수 있다. 제대로 개간해서 논밭을 만들자면 시간이 걸리지만, 풀과 나무를 대충 처리하고 콩이나 옥수수를 심는 정도라면 후딱 해치울 수 있다.
북미주는 감자, 콩, 밀, 보리 등으로 150만석 정도 수확이 나온다. 그쪽도 긁어모아야지.
“말씀하신 바가 옳습니다. 미주대분지에는 쉬고 있는 땅이 아직 많으니, 각 관아에 명하여 작업을 서두르라 하겠습니다.”
이종덕 역시 경신대기근을 겪은 사람이다. 이번 기근이 몇 년을 갈 수 있다는 내 의견에 적극적으로 찬동했다. 이런 일은 인력을 동원해야 하니, 확실히 정식 권한을 가진 이종덕이 나서서 해야 한다.
그 외에도 몇 가지 논의가 이어졌다. 우리가 힘을 합쳐야 미주의 역량이 제대로 동원될 수 있으니만큼 긴밀한 협력이 필요했다.
1차 구호선단이 출발했다고 해서 우리가 할 일이 없어진 건 아니다. 대공조선에서는 다음 배를 서둘러 건조해야 했고, 배가 오면 바로 적재할 수 있도록 해안에 있는 창고에 물자를 운반해야 했다.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느라 바빴다.
“전하! 신서반아에 갔던 사자가 돌아왔사옵니다.”
“오! 그래, 양곡은 얼마나 싣고 왔는가?”
우리 선단이 본국으로 출발한 지 2달 뒤, 멕시코에 갔던 내 사절이 돌아왔다. 물론 쌀은 없겠지만 옥수수나 콩 천 석 정도는 싣고 왔을 터, 그거라도 가져오면 큰 보탬이 되리라.
“한 톨도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신서반아 부왕이 말하기를, 하나도 도와줄 수 없다고 했다 합니다.”
“뭐라고!”
아니,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