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ake a Bath Together, Duke! RAW novel - Chapter 38
38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기도를 드리기 위해 나온 게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평소라면 고요한 산안개로 가득했을 영역의 입구가 나단의 중앙 시장보다도 북적이고 있던 탓이다.
“아, 좀 비켜봐요! 여기 사람들 다 기다리고 있던 거 안 보여요?”
“나 참! 그쪽만 기다렸나? 우린 어젯밤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었어! 그리고 뭐, 비켜달라고 하면 사람들이 순순히 비켜주겠어? 공작 각하를 가까이에서 뵐 기회가 그렇게 흔한 줄 알아?”
“맞아요. 게다가 이번에는 또 소문이 소문이라… 약혼자와 동행하신다잖아요?”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겨우겨우 인파를 뚫은 그가 쭉 팔을 뻗어 손을 마구 흔들었다.
저 멀리서 눈에 익은 이의 옆모습이 보여서였다. 짧은 머리와 까무잡잡한 피부. 사람들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이곳에서 신을 찾던 타냐였다.
“어이! 이봐! 타냐!”
하필 또 가장 앞줄에 있을 건 뭐람. 큰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던 게일이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까지도 겨우 왔는데 저기는 또 어떻게 간단 말인가.
‘그래도 어떻게든 가 봐야지.’
평소에는 개미 새끼 하나 지나다니지 않는 곳이다. 그런 곳에 이렇게까지 사람이 모일 정도면, 분명 아주 큰 일이 생긴 거겠지. 그것도 카르테인 공작님과 그분의 약혼자와 관련된 일이.
“아이고, 죄송합니다! 잠시만요! 저기 가족이 있어서! 예예~!”
게일은 이를 악물고 사람들의 틈새를 파고들었다. 여기저기에서 욕설들이 튀어나왔지만, 이 정도는 넘길 만했다. 워낙 흉측한 피부 탓에 이보다 더한 욕설도 종종 들어봤기 때문이다.
숨이 막힐 것 같은 공간을 겨우 빠져나와 타냐의 근처에 도착한 그가 목이 졸리는 듯한 소리를 내었다.
“타, 으윽. 타냐!”
“게일?”
“후우! 아, 죽겠네. 아니, 이게 다 무슨 일이람? 평소에는 누구도 얼씬거리지 않는 신의 영역에 왜들 이렇게 몰려온 거야. 뭐 아는 거라도 있어요?”
게일이 바지를 털며 꺼낸 말에, 타냐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대체 어떻게 이런 것도 모르고 있느냐는 듯한 그런 눈빛이었다.
“게일, 기도도 좋지만 가끔은 주위도 좀 살피고 살아요.”
“으응?”
잠시 고개를 내젓던 그녀가 살짝 몸을 붙이고는 작게 입을 열었다.
“얼마 전 카르테인 공작가에서 ‘신의 분노’에 관한 입장을 공표하겠다고 했잖아요. 바로 여기, 신의 영역에서요.”
“아, 그랬습니까?”
“네. 약혼자님도 건강을 되찾으셨다고 해서 기다렸죠. 아무래도 신께서 응답을 주신 그 내용에 대해 말해주실 것 같아서…….”
그래서 제일 앞자리에 나와 있던 거군.
게일은 타냐가 흐린 뒷말을 짐작하며 가빴던 호흡을 다시 가다듬었다. 정신을 차리고 찬찬히 주위를 살펴보니, 왜 이제야 발견했나 싶을 정도로 익숙한 얼굴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타냐가 그랬던 것처럼, 기적의 단서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이들이 꽤 여럿 있었던 모양이다.
‘남들이 보면 나도 그 사람 중 하나겠지만. 뭐, 사실이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하며 게일이 옷 위로 피부를 긁적이던 사이였다.
“어, 어어!”
누군가가 소리치는 것을 시작으로, 저 멀리에서부터 자잘하게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인파에 휩쓸리듯 이리 움직이고 저리 움직이던 게일이 잠시 신경질을 냈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빼꼼히 고개를 내민 곳에는 오늘의 주인공이 걸어오고 있었다. 이제는 너무 자주 봐서, 일방적으로 친밀감까지 느끼는 두 사람이.
“공작님!”
“각하! 여기도 봐주세요!”
카르테인 공작과 그의 약혼자는 여기저기에서 자신들을 찾는 이들을 상대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본 두 사람의 옷차림은 평소처럼 가벼워 보였다. 귀족으로서의 위엄이나 품위, 이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고 오로지 신을 뵙겠다는 듯이 말이다.
처음 봤을 때와 완연히 달라진 점이 하나 있다면, 그건 두 사람의 표정과 안색이었다. 특히 공작의 약혼자 쪽의 안색이.
“…정말로 다 나으셨구나. 이젠 누가 봐도 건강해 보이시네요.”
타냐가 작게 중얼거린 말에 게일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도 처음 그가 봤던 사람과 동일 인물인지 헷갈려서 아주 잠시 눈을 비볐으니까.
장밋빛으로 붉게 물든 뺨과 아침의 햇살 아래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 시원하게 당겨진 분홍색의 입매. 여인의 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생기로 가득 차 있었다.
게일은 두 사람이 그의 앞을 지나가는 내내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한 달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변화한 그녀의 모습이 너무 경이로워서.
‘한 달 전에는 정말 제대로 걷지도 못하셨는데…….’
게일의 눈에는 아직도 공작에게 기대 힘겹게 걷던 그녀의 모습이 선연했다. 그녀는 그야말로 그가, 아니 이 신의 영역에 오랜 기간 머물렀던 이들이 바랐던 기적의 현신이었다.
두 사람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던 그때, 타냐가 그의 팔을 툭툭 건드렸다. 그러고는 어딘가 잔뜩 상기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게일, 정말로 두 분이 신의 응답과 기회에 대해 말해주실 건가 봐요!”
“뭐?”
“지금 우리 앞에 지나가시는 분, 신전에서 나오신 신관님이시잖아요!”
정말이다. 흰 사제복 위로 수놓은 금박의 장식과 붉은 허리띠는 그가 적어도 대신관급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지간한 문제에는 침묵하는 신전이 움직였다는 건, 신이 이번 일을 주시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게일은 묘한 기대감으로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 천천히 공작과 그의 약혼자의 발자취를 눈으로 좇았다.
“오늘도 은혜를 주심에 감사합니다.”
“발걸음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숨 쉬는 소리마저도 들릴 정도로 조용해진 주위의 상황 속에서도 두 사람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행동했다. 영역의 입구에서 짧게 건네는 기도와 가볍게 나누는 시선.
오늘 달라진 것은 두 사람이 자신들을 뒤따라온 대신관에게 고개를 숙이며 영역으로 인도를 청한 점이다.
저벅, 저벅―
두 사람과 신전의 관계인들, 그리고 귀족으로 보이는 이들이 영역으로 사라진 것과 동시에 주위가 어수선해졌다.
사람들이 입에 담는 내용은 대체로 엇비슷했다. 저 사람이 전쟁 영웅이라는 공작 각하가 맞느냐, 그 옆의 분은 누구인지 아느냐 같은 그런 내용들.
세간의 소문보다 눈앞의 기적이 더 중요했던 게일과 타냐는 아직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뒤로한 채 처음으로 신의 영역을 밟았다. 아니, 밟으려고 했다.
“아니, 근데 정말 이게 신의 축복이라고? 신의 분노가 아니라? 손바닥 뒤집듯이 이래도 되나 모르겠네?”
“이 사람아! 목소리 좀 낮춰! 공작 각하와 대신관님까지 엮인 일이지 않나. 게다가 방금 눈으로 봤잖아. 건강한 모습 말이야.”
“나 참, 그러니까 그 건강한 모습이 진짜 신이 내린 축복이 맞는지 의심스럽다고. 건강한 척 꾸몄을 수도 있고! 악마가 신을 속이려고 작정하면 뭘 못 하겠어?”
무리 속에 있던 한 남자의 목소리가 걸음을 잡아채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목구멍 어디선가 욱하는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간절함의 ‘간’ 자도 모를 것 같은 사람이 입만 나불거리는 모습이 같잖아서 차마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었다.
게일이 소매를 걷으며 막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억눌린 분노와 짜증이 담긴 높은 목소리 하나가 쨍하니 공간을 얼렸다. 타냐였다.
“그쪽이 뭘 알아요?”
“그러는 댁은 뭐요!”
“신의 영역에 죽치고 앉아서 만날 기도 올린 사람이다, 왜!”
날카로운 눈으로 남자를 바라본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신이 내린 축복이 맞는지 의심스러워? 건강한 척 꾸몄다고요? 그쪽이 봤어요? 매일같이 들러서 기도를 드리고 목숨을 걸고 신의 영역을 밟고, 그러면서 은혜에 감사하던 모습을?”
“아니…….”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그분이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 못 봤죠? 난 봤어. 나는 봤다고! 그분이 나아지는 모습이 빌어먹을 다리 통증 때문에 죽고 싶었던 나한테 얼마나 큰 위로가 됐는지, 그쪽은 모르겠지!”
긁히는 듯한 타냐의 절규에 게일이 꾹 입을 다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그녀의 마음에 동화해 주책맞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느새 정적이 흐르는 공간 속에서 타냐가 손등으로 거칠게 자신의 눈을 비볐다. 그러고는 이를 악물곤 신의 영역을 검지로 가리켰다.
“난 내가 본 기적을 믿어. 그분이 내게 기적의 조각을 나눠줄 것도 믿어. 마침 대신관님도 와 계시잖아요. 그쪽 눈으로 똑똑히 봐요. 그 두 사람이 악마인지, 아닌지. 가요, 게일!”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게일은 자신을 끄는 타냐를 따라 신의 영역으로 발을 옮겼다. 언제 웅성거렸냐는 듯, 두 사람의 뒤로 사람들의 무리가 와르르 뒤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 밟은 신의 영역에 겁을 먹기도 전, 게일의 눈에 놀랍도록 경건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기괴하게 생긴 지형 곳곳에서도 피어난 푸르른 초목, 맑고 깊어 보이는 깊은 호수, 드높은 하늘.
신의 손길이 가득 담긴 듯한 공간 속에서, 공작과 그의 약혼자는 신의 대리인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세상의 지위가 아닌,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서겠다는 듯이.
“형제님, 신의 앞에서 무엇을 고하고자 하십니까.”
“기적을 다시 내려주신 신께 감사를 드리고자 합니다.”
“자매님도 그러하십니까?”
“예. 두 번이나 보여주신 축복에 감사를 드리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두 형제자매님. 무엇을 신께 감사하고자 하십니까.”
대신관의 자애로운 목소리가 두 사람에게,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내려앉았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던 공작이 느릿하게 대신관과 시선을 맞췄다.
“저는 이번 물기둥이 신의 분노가 아닌 그분의 응답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일전에도 이 물기둥을 겪은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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